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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WAR, Yes Pea~ce
광화문에 비가 내렸다. 오후 3시 경만 해도 오늘 행사를 밝게 전망했는데, 일기예보는 어긋나지 않고 비를 뿌렸다. 4시 정각, 비가 그을 새 없이 ‘정전(停戰) 70년 한반도 평화행동’의 행진은 어김없이 출발하였다. 세 시간 남짓한 행사 중에도 비는 오다 가다를 반복했지만 맨 앞자리에 앉은 외국인 손님들부터 대부분 참가자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NO WAR, Yes Pea~ce.” 평화는 이렇게 불편한 자리를 지키며 찾아오려니 싶다.
종전(終戰)선언 1억 명 서명을 목표로 시작할 때만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물론 목표는 가당치 않게 느껴진다. 그래도 한국교회보다 해외교회가, 국내보다 해외동포들이 더욱 열심을 낸 것은 고무적이다. 가장 어려운 벽은 교회 내부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교단 차원에서는 합의를 해도 교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가까스로 목표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었다. 부끄러운 것은 평화를 훼방하는 이들은 길목마다 ‘그들의 예수’를 앞세우며 요란한 가짜 뉴스를 틀어댔다. 어쩌다 이 지경인지, 수치스럽다.
어느새 분단의 세월이 78년 흘렀다. 3년 동안 형제간에 피를 흘린 끝에 고지전(高地戰)을 멈추고 잠시 휴전한 것도 70년이다. 정전협정 후 2-3년 내에 가능할 것으로 전망한 종전은 잉크도 마르기 전에 휴지 조각이 되었고, 서로 군비경쟁으로 긴 냉전(冷戰)기를 맞았다. 세계 전쟁사에서 70년 동안 휴전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우리 땅에서 전쟁을 벌인 미국과 중국은 1953년 정전협정을 맺은 지 20년도 채 못되어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국교를 맺었다. 미국과 베트남 사이 8년 전쟁도 1973년 종전 이후 22년만인 1995년에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적에서 동반자 관계’가 된 것이다. 그런데 갓난 아기가 고희가 되도록 아직 종전하지 못한 남과 북은 매우 비정상적이다.
베트남 출신 미국 소설가, 비엣 타인 응우옌의 말이 가슴에 닿는다.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고 두 번째는 기억에서 싸워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열전이든 냉전이든 군인들만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갈라진 사람마다 마음마다 냉전을 치루는 중이다. 전쟁은 할아버지 세대만의 일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역사의 무덤에 묻혔지만, 손주들의 세대까지 고통은 이어지고 있다.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여전히 분단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가 배어 있다.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의 기억을 바꾸어 낼 수 있을까?
6.25의 비극은 남과 북의 내전을 넘어서서 미국과 소련을 대리한 국제전으로 치달았다. 전쟁의 더 큰 비극은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마을로 내려온 전쟁’이란 점이다. 지역과 동네마다 편을 갈랐고, 증오하였다. 그 와중에서 민간인 학살이 전개되었다. 모두 쉬쉬하는 일이지만, 쌍방 간에 일어난 복수와 재복수, 복수의 악순환은 지울 수 없는 증오심을 남겼다.
전쟁이 끝나 70년이 지났지만, 남북 갈등은 여전하고, 남남갈등도 해결이 무망해 보인다. 우리 사회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 심지어 우리 사회 보수와 진보의 갈등도 모두 분단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민족적 히스테리를 최종수 목사는 ‘분단 마귀’라고 불렀다. 우리 민족 마음속 분노의 뿌리는 분단 현상에 대한 이해없이 해석될 수 없다. 민족의 운명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그래서 불쌍한 민족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세계교회가 협력하고 기도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WCC 중앙위원회는 지난 6월 26일에 ‘정전 70년, 한반도 화해와 평화를 위한 성명’을 발표하여 “한국전쟁에 공식적인 종전을 선언하고 1953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조치를 시급히 취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우리는, WCC의 모든 회원교회와 에큐메니칼 협력 파트너, 특히 1950년-53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의 교회공동체가 각 해당국 정부와 함께 한반도 화해와 평화협정을 공동으로 지지할 것을 요청한다”고 구체적인 복안을 밝히고 있다.
그들은 1984년 도잔소회의 이후 일관되게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개입해 왔다. 2022년 11차 칼스루에 총회에서는 한반도 평화의정서를 채택하였고, 위기에 처한 한반도를 ‘평화의 빛’ 프로젝트에 반영하는 등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런 반면에 우리 한국교회가 행여 훼방꾼 노릇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은 전쟁을 완전히 그치고 평화의 로드맵을 만들어 나가야 할 때이다. 결코 전쟁무기로 평화를 지킬 수 없으며, 평화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소설 <전쟁의 슬픔>의 작가 바오닌의 말이다. “가장 나쁜 평화라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 그렇다.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어떤 전쟁보다는 낫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전쟁 무기가 가져온 평화는 다만 죽임과 폐허 위에서 뿐이다.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새번역/ 시 3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