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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문학
김윤선
나의 삶 나의 문학이란 지난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 왔으며 문학으로 성화시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 국제 시장 영화를 보았습니다. 1962년 11월 11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저가 처음 발을 디딘 곳이 국제 시장이었습니다. 그날은 진눈개비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습니다. 남포동에서 국제시장을 가는 길에 미국 케네디 대통령 암살하며 소년들이 호외를 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하던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국제 시장 영화를 보면서 그 날의 생각들에 만감이 교차되었습니다.
시골 촌닭이 처음 국제 시장에서 신비의 세상을 보며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또래의 친구들은 부모님 슬하에서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닐 때 나는 어른들 틈에 끼어 세파를 이겨 내어야 했습니다. 삶의 밑바닥에서 공부 대신 장사를 어떻게 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처음 점원이란 명칭을 얻었을 때 젖비린내 난다는 어른들의 말에 남몰래 아픔을 삼키며 언젠가는 나도 돈을 벌어 어머니께 효녀가 되고 싶었습니다.
처음 가게 주인 아버지께서 열 개 암호를 가르쳐 주시는데 십분 만 에 다 외우는 모습을 보며 크게 기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아이들 옷 가격을 금방 다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영 손님이 오면 얼굴이 빨게 지고 떨려서 말을 할 수 가 없었습니다. 손님에게 말을 못하면 집으로 가야 하는데 밤마다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나며 “엄마 나 어떻게 해” 잠을 자면서도 손님에게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생각뿐이었습니다. 내 또래 주인집 딸이 부산 여중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갈 때 나도 다시 태어나 교복 입고 학교를 다녀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사를 배워 돈을 벌어야 된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벙어리가 시장에서 삼년이면 변호사가 된다는 말처럼 몇 달이 되지 않아 장사를 잘 한다며 주인에게 많은 칭찬을 들었습니다.
국제시장 건물은 당시 양철 지붕이라 겨울이면 바람이 바깥처럼 불어와 영하 12.13 도가 보통이었습니다. 저녁이면 발이 동상에 걸려 너무 가려워 밤마다 바늘로 찔러 피를 짜곤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한문 공부를 하며 고향 친구들에게 편지 쓰는 것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편지에는 너희들처럼 공부하는 것이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였습니다. 그 후 4년 만에 시골에서 어머니와 동생들 모두 부산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나는 소녀 가장이 되어 4년 만에 정든 집을 떠나 월급이 많은 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백화점에 처음 갔을 때 외제 물건을 아이처럼 업고 여관이나 별장 같은 집으로 옮기며 살얼음을 디뎌야 했습니다. 또 국산을 외제로 상표만 바꾸어 달고 엄청난 돈을 받곤 하는 모습에서 손님에게 갖은 수단으로 속임수를 잘 쓰는 사람이 큰돈을 벌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눈을 뻔히 뜨게 해 놓고 교묘한 술수로 속이는 행위가 오늘의 우리 사회로 그 뿌리가 깊이 내려져 있습니다.
외래품 소탕 철저한 단속 하며 대서특필의 신문 보도는 피라미를 잡은 형식이고 고래들은 형사들과 짜고 마치 신문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거액의 돈 뭉치만 던지면 유유히 사라지는 금수 같은 모습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내가 이런 술수를 배워야 잘 살 수 있는 방법이란 말인가 남을 짓밟고 속이고 어떤 수단으로 돈을 벌이야 된다는 것인가, 회의를 느끼며 일 년 만에 돈은 적지만 당장 도매시장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습니다.
약속은 제 2 생명이다. 내가 한 말은 죽는 한이 있어도 지키야 한다. 내 입에서 한 말을 지키지 않고 거짓을 하는 사람은 금수보다 못하다고 하신 어머니의 말씀을 평생 교훈으로 삼고 살고 있습니다.
문학이란 무지갯빛으로 반사되는 물줄기며 우주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문학은 그와 정 반대로 비포장도로의 울퉁불퉁한 돌맹이들과 화학 먼지가 펄펄 날아다니는 시장바닥의 땀 냄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름이면 시장 안은 3십도가 넘고 하루 열 두 시간 선풍기 바람에 염색 가루가 매케하게 코를 찔러댔습니다.
나의 꿈은 좋은 남편 만나 결혼 하여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꿈은 산산 조각나고 실의에 빠졌습니다. 시고모님의 중매로 부잣집 둘째 아들에 대기업 전기 기사라고 하며 십분 선을 보고 납치 되듯 시집을 갔지요, 설레는 희망을 품고 시집을 가보니 할머니를 비롯하여 층층시하에 열 네 명의 가족이 한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가족은 모두 무직에다 장남의 비뚤어진 행위에 늘 집안은 크고 작은 분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남편도 약을 세 가지나 먹고 직장을 가지 않았으며 정신적인 병으로 종합 진찰을 받으며 3년 되면 죽는다고 술을 마시고 울먹이며 한 말이었어요. 어떻게 살아갈까, 친정어머니는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며 내가 못 살면 어머니는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갓 시집간 새댁은 시댁 식구들에게 주눅이 들고 불같은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고함소리에 경기가 들어 늘 가슴이 두근 거렸습니다.
아들을 둘 낳고 둘을 유산 시켰는데 난데없이 4년 만에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 때 남편은 삼년동안 친척 회사에서 직장을 다녔기에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3년 만에 유류 파동으로 회사가 문을 닫게 되고 당장 우리는 살길이 막연했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을 하다가 쌍둥이를 업고 머리에 옷 봇짐을 이고 골목골목을 다니며 행상을 하였습니다. 옷은 외상으로 얻어 팔아서 갚아주는 위탁 장사를 약 일 년을 했습니다. 그 때 이웃에 사는 대령 집 은희 어머니께서 싼 이자를 줄 테니 국제시장에 점포를 얻어 장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부터 국제 시장에서 3년을 장사하다가 진시장 자유시장을 옮겨 다니며 사십년간 장사를 해 왔습니다. 자유시장은 그 때 불이 나서 다시지어 개장 할 때였습니다. 처음 자유시장에 가보니 장 바닥에 물건을 깔아놓고 자루에다 장수를 세어 팔고 있었습니다. 나는 진 시장에서 아이들 옷 한 보따리를 리어커에 실고 온 것이 전부였습니다. 모두가 태산 같은 물건을 쌓아놓고 파는데 너무 비싼 물건은 도무지 자유시장과 맞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몇 장도 안 되는 우리 물건을 보며 며칠이나 장사를 할까하는 서글픈 눈으로 나를 보았습니다. 참담한 시장의 현실을 보며 그래도 작은 물건을 예쁘게 벽에 디피를 하고 걸며 매일 털어서 정리를 했습니다. 처음 며칠간 장사를 못하니 남편은 벌판 같은 곳에 이사를 갔다며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고 사람의 피를 말리는 고문이 시작 되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가는 길에 때로는 정신을 잃고 차를 잘못 탈 때도 있었고 정류장을 지나칠 때도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도 사람으로서의 표현 할 수 없는 행위에 참다못해 밤중에 감천 바닷가를 달려갔습니다. 희망도 꿈도 사라진 가장의 행동에서 차라리 모든 것을 접고 죽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파도 소리와 함께 갈매기 울음 소기가 들려오는 바위 끝에 앉아 치마를 뒤집어쓰고 몇 시간을 있었는지 비몽사몽 어머니 목소 소리가 들려오고 아이들이 엄마하고 달려 왔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바위 끝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안 돼, 벌떡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죽는 힘으로 기도를 해보자 다짐을 하며 내 가정과 내 자식을 지키기 위해 서른다섯 살 부터 부처님께 매달렸습니다. 나를 쓰러지지 않게 이 가정을 지키게 해 주시고 남편의 건강과 웃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나를 죽지 않게 살려주세요. 빌며, 처음에는 한 달에 초하루 보름 두 번 양산 통도사 자장암에서 철야 기도로 천 번씩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집에서 새벽3시에서 5까지 3 백번의 절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유 시장에서 며칠이 지나니 이웃 사람들이 옷이 좋다며 자기 아이들 입힐 옷을 사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발부 양재부 젊은 엄마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차차 장사가 잘되니 물건이 쌓이기 시작 하였고 일 년이 되니 가게도 한 칸에서 두 칸으로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부터 본격적인 도매 장사로 공판장이 생기고 3년 동안 많은 단골을 잡았습니다. 장사를 2년 하여 아파트를 사고 그 다음 2년 후에 가게를 샀습니다.
장사 하며 아이들 넷 여섯 개 도시락을 싸며 눈코 뜰 사이도 없었는데 가장은 휴일은 산악회 회장직을 맡아 등산을 다니며 동네 통장과 시장일 동네일 봉사만 하고 있었습니다. 겨우 오후 되면 돈만 가지고 은행에 가는 일밖에 가정이 있는지 없는지 양복만 입고 철없이 밖으로만 다녔습니다. 나는 아들 넷 양가 부모님 셋 그리고 불우한 형제 조카 약 2십 여 명의 대 가족을 짊어지고 일인 오역으로 살기위해 기도하며 공부를 했습니다. 내가 없으면 친정이며 시댁이 모두 뿌리 채 무너지는데 내 자리를 지키며 어떻게 살아갈까, 혼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치며 절을 하고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내 부모님과 혈육들을 위해서 쓰러지지 않게만 해 주세요. 하며 천 번에서 삼 천 번 절을 하며 간절한 소망을 빌었습니다.
기도 후 일기도 쓰며 간간히 월간지에 투고 했던 글이 실려 곳곳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어느 날 배내골 이천 분교 어린이 들이 자유시장을 견학 차 왔을 때 그 아이들이 꼭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들 열세 명에게 일일이 바지를 한 나 씩 입혀 보내고 일주일 후에 아는 사람 차를 빌려 이천 분교로 찾아 갔습니다. 길도 없는 산골을 찾아, 라면 몇 박스 옷 두 벌씩 학용품 과자 등 새벽에 김밥 준비를 하여 찾아 갔습니다. 아이들 열 세 명은 부모도 없는 결손 가정어린이 들이 많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힘든 속에서도 계절마다 이천 분교 어린이들을 찾아 옷을 입히고 철따라 소포로 물건을 부치며 고사리 같은 아이들의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조병화 박사님 정채봉 선생님 미국에 계시는 윤취선 장노님 등 지금은 다 고인이 되신 어르신들의 격려 속에 열심히 글을 쓸 수가 있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불교 자비원 회원이 되어 연꽃마을 평화마을 등 계절마다 찾아 아이들 옷을 보내고 서울 거래처 여러 곳에 결연을 맺어 옷과 후원금을 보내도록 연결을 시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가게를 가기위해 준비를 하다가 잠시 아침마당에서 “반짇고리” 문학회원님들을 보았습니다. 마침 내가 늘 생각하던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순간 머뭇거릴 시간도 없이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이지나 회장님을 만나고 회원이 되었습니다. 반짇고리 문학은 자신의 글을 발표와 평을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달에 한번 가게를 비워놓고 설렘으로 달려가면 회원들은 눈살을 찌푸리는데 눈치도 모르고 나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행복한 시간 이었습니다. 약 3년 간 글을 쓰면서 선배님이 교정도 보아주시고 격려도 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눈치 없었던 푼수 같은 나의 행동이 부끄럽게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3집을 내고 새 회장님이 전 이지나 회장님이 마음대로 회원을 가입 시켰다고 심하게 말다툼을 했습니다. 나 때문에 일어난 두 분의 다툼을 보며 전 회장님께 죄송스러움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후부터 글을 쓰려면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검정고시를 시작했습니다. 장사를 마치고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일주일에 세 번씩 학원을 다니며 중학교부터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남들이 퇴근을 할 때 나는 학원으로 뛰어 다녔습니다. 어둠속에 차를 세 번씩 갈아타고 육교를 오르내리며 범일동에서 덕포 까지 지하철 공사로 길이 막히고 지각도 하며 뛰어다녔습니다. 일 년이 가고 십년이 가는 동안 수능을 거쳐 부산 외국어 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장사를 하다가 자투리 시간 마다 틈틈이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2005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수필집『일과배움의 길목에서』1집을 내었습니다, 동시에 불교 경전반에 입학을 하여 5년동안 경전 공부를 마치고, 외대 한국어 양성과정 다문화 한국어 강사자격도 취득했습니다. (2007)년 수필시대 등단과 (2011)년 수필집2집『그릇』을 발표했습니다. 그 해 사계 김장생 문학 전국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 하였습니다. (2012)년 제 3집 『잔잔한 기쁨』을 발표하고, 대학 졸업 8년 만에 현재는 부산 외국어 대학원 “외한 교육학과” 입학을 하여 (2015)년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저는 4십대부터 계획을 세워 오늘에 있기까지 내 가정을 지키고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기위해 절을 하며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오늘에 오기까지 50년을 기다려 왔습니다. ..
인생은 60부터 행복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우고 남은 삶을 이 사회를 위해 봉사 를 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갈수록 늘어나는 다문화 여성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우리 말 우리글을 가르쳐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이 의사소통을 잘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제 다문화 여성 한국어 강사로 3년째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정년을 하는 시간 나는 새 신을 신고 마음껏 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힘이 닿는데 까지 어둠에서 헤매는 자들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봉사하며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 할 것을 약속 합니다. 감사 합니다.
* 이 글은 2014년에 쓴 작품입니다. 제 4집 "제 3의 꿈길에서" 에 수록 된 작품입니다.
첫댓글 한 많은 인생. 파란이 만장한 인생살이 그것이 그 때는 죽을만큼 힘들고 싫었지만 그것이 이제는 바탕이 되어 작가도 되고 삶의 체험이 녹아 있는 진솔한 내용을 글을 쓰게 되었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또 댓가 없는 고생도 없는가 봅니다.
예! 선생님 신입 회원으로 오신 것을 축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