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5.18 백야 김좌진 장군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 1945 조선건국청년회 창립위원 1946 반탁투쟁위원회 동원부장 1947 전국학생연맹 고문 1948 미군정시
포고령 위반으로 사형선고, 오키나와에서 복역중 정부수립되자 석방 1949 대한청년단 중앙본부 건설국장 1950 대한학도의용군 참장
1952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 대한민주청년연맹
부위원장 1954 제3대 민의원(종로을 무소속) 1963 제6대 국회의원(용산보궐선거 한국독립당) 1966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 폭발물사용음모 등 혐의로 일시구속 1966 국회 오물투척사건으로 의원직사퇴 1972.11.21 향년 55세 고혈압으로
사망
조선의 대표협객
김두한(1918년 5월 18일 ~ 1972년 11월 21일)은 안동김씨로 서울
교동초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고아나 다름없는 부랑아생활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왜정 말기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주먹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장군’의 아들임을 긍지로 삼아 일제의 무기고를 폭파하거나 조선인 상인을 보호하는
등의 협객으로도 행동하였다. 광복 이후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신익희(申翼熙) 등이 주도하는 대한청년단의 감찰부장을 맡아 반공대열의
최선봉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반공투쟁과정에서 살상행위를 서슴지 않아 미군정청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오키나와 미군부대에 수감되었다. 사형집행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맞아 그 집행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 대한학도의용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면서 반공·노동운동을 계속하였다. 1954년 서울 종로을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5년에도 제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등 정치사에도 행적을
남겼다.
용산구의 보궐선거로 제6대 국회에
등단하자마자 한독당 내란음모사건과 관련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으나 야당은 물론 여당인 민주공화당 소속의 국회의원들까지 석방결의안에 106표의
찬성표를 던져 석방되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사카린밀수사건을 논란중일 때
국무위원에게 똥물을 뒤집어 씌운, 이른바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의정사상 전대미문의 오점을 남기고 다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는 기이한 행적을
남겼다. 결국 1966년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그의 독특한 정치생활은 막을
내렸다. 정계은퇴 후 고혈압으로 1972년 11월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별세.
묘지는 서울 수유리에 있다. 그는 '주먹황제'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자기의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았으며, 독립운동과 철저한 반공사상으로 평생을
살았다.
김좌진 장군은 1889년(고종 26년)에 태어난 일제감정기시절 탁월한
군사지도자였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북로군정서 군대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으니, 곧
청산리대첩이다.
그는 1930년 1월 24일, 42살의 젊은 나이에 피살되었는데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공사주의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고 하지만, 중외일보에서는 연변에서 김동식(가명)이 암살했다는 설도
나왔다.
경성부 종로에서 김좌진 장군의 서자로 태어난 김두한은 경기도 개성에서 살았다. 초기 야인시대 드라마에서 나온것처럼
외삼촌은 매일 도박을 하고 매일 술을 마시다가 집과 땅을 팔고 심지어 조카 김두한까지 노예로 팔아먹고 도망갔었다. 김두한은 1930년,13세 때
혼자 경성부에 도망왔으나 외삼촌 때문에 일본 경찰들에게 쫓기다가 수표교 거지들에게 잡혀 정진영과 친형제처럼 지냈다.
그러다가 원씨 노인 원영기라는 사람이 데려가 공부는 시키지 않고 운동만 시켰다는 설이 있다. 이후 원씨 노인이 죽자 1935년 나이 18세에 1:1 대결에서 신마적과 구마적을 이기고 서울에서 가장 큰 우미관을 제패 하게 된다.
하야시와의 대립? 하야시의 본명은 선우영빈이다. 조직폭력배이자 사업가였다.
하야시는1909년 부산에서 태어나 일본에 가서 도오쿄의 주오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우익의 겐요샤 결사단체에 들어가
사무라이가 되었고 1920년대경 일본의 주먹세계를 손에 넣었다. 이후 조선으로 건너와 명동에서 야쿠자로 활동하다가 1930년대 김두한과 대립하게 되지만 어쩌다가 친분을
맺고 서로 도움을 주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일본이 패망하자 하야시는 혼자 일본으로 들어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고향 평양으로 올라가지만 남북분단이 되어 월남하였다. 그리고
6.25사변이 발발하였고 부산으로 내려가 한 회사에 고위직으로 임명되어 일한
후, 서울에 올라가 기업인으로 활동하다가 1978년 사망했다.
1946년,김구, 이승만, 김규식, 유진산으로 조직된 대한민청이
만들어졌고 김두한은 별동대 총대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 결과 산정호수 김일성 별장습격, 박헌영 납치미수, 국군준비대 습격, 심영과 신불출 슴격, 친일파의 돈 압수, 조선공산당의 총파업을 막았다.
그러나 1947년 대한민청에서 조선공산당 전위대장인 정진영을 살해하자 미군정은 김두한을 살인죄로 체포하게 된다. 사형 선고를 받은 김두한을 구하고자 지청천, 이범석 등은 구명운동을 벌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어 김두한 사건은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검찰로 이관되어 석방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6.25전쟁이 발발했다, 김두한은 학도병을 이끌고 나가 낙동강 전투에 크게 활약을 했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이 김두한에게 내무부장관과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제의했으나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1954년 5월 20일, 김두한은 무소속으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어쩌다가 자유당에
입당하게 되었지만 이승만과 이기붕과는 정치노선을 달리했다.
1954년 7월 16일, 자유당은
사사오입개헌을 일으켰고 개헌 반대투표를 던진 의원은 자유당에서 제명 조치되었다. 이후 김두한은 무소속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 정부에 대해
비판하였고 장견근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여기서 이정재에게 총으로 협박당했으나 되려 큰소리로 호통쳤다고 한다. 1966년 9월 22일
말년에 김두한은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해 못 마땅했던 국회에 오물 투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심하게 구타를 당한 후, 석방된 김두한은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게 된다. 이후 1972년 11월 19일, 후계자 조일환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중 길가에
쓰러진 김두한을 발견하게 된다 1972년 11월 21일,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향년 54세 나이로 오랜
지병이였던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두한의 가족(가운데가 따님 김을동) - 송일국은
외손자
김두한의 결혼식 사진
우리들의 영원한 큰 형님 김두한
장충단공원에서 연설하는 김두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함께
그 당시 우미관 식구들
한때나마 김두한으로 불리었던 세 사람
졸린 눈에 팔자걸음? 이 사람이 바로 전설의 싸움꾼
시라소니로 177Cm 키의 다부진 체격에 박치기와 발길질이 주특기로 워낙 빨라 상대방이 쓰러지는 것만 보였을 뿐 그의 차는 모습은 번개처럼 빨라
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