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문화를 초월해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진력하는 국제창가학회(SGI).
“SGI야말로 지구시민 사회의 미래”라고 식자들은 말한다.
각국에서 자신의 조국을 위해 평화·문화·교육 운동을 펼치는 SGI 청년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남아프리카공화국SGI 여자부장으로서 전국을 달리는 로빈 린 씨.
사람들은 린 씨를 ‘제목으로 도전하는 사람’이라 말한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하며,
꾸밈없는 성격과 멋진 미소로 사람들을 매료하는 린 씨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스승의 기대에 어떤 행동으로 어떻게 결과를 남길 것인가!
항상 그 일점을 사색하며 행동합니다"라고 말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SGI 로빈 린 여자부장. 21세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여주인공은 오늘도 생기발랄하게 전진한다.
타이완에서 태어난 린 씨는 어린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아버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린 씨는 어머니의 부모님이 계시는 일본으로 향했다.
이주 후, 린 씨 가족은 타이완에서 들었던
불법(佛法) 이야기를 다시 일본에서 듣게 돼 바로 입회한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그러나 순수하게 신심(信心)에 면려하자
어머니의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등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다.
어느 날,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린 씨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미루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또다시 새로운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런 린 씨에게 선배의 격려는 큰 힘이 됐다.
처음으로 백만번 창제에 도전한 린 씨는 얼마 후,
아버지에게 “비용을 마련했다”라는 연락을 받았다.
1992년, 일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린 씨 가족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린 씨는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신심만 있다면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다!”라며 의연했다.
어머니의 그런 강한 모습을 보며 린 씨도 신심으로 도전했다.
어느 날, 창제를 하던 린 씨는 예전에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보험을 들어 놨으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제 안심이다!”
‘그렇다! 아버지가 보험을 들어 놓은 것이 있지 않은가.’
보험계약서에는 아버지가 사망할 경우, 가족의 생활비 일체를 지불하겠다고 쓰여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심의 공덕인가 하고 정말 놀랐습니다.”
린 씨는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런 린 씨의 인생을 크게 바꾼 것이 바로 2000년 9월에 있었던 SGI청년연수회였다.
그 때 린 씨는 이케다(池田) SGI회장을 처음 만났다.
“그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생명의 전류’를 온몸 가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제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린 씨는 홀로 일어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발전을 위해!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 싸우자! 그것이 내 사명이다!”
이후 부여자부장을 거쳐 2003년 1월, 여자부장의 사명을 받았다.
현재 케이프타운과 더반에 거주하는 여자부의
가정방문을 위해 비행기를 갈아타며 활동에 진력하고 있다.
사명을 자각한 린 씨는 여자부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기원으로서 이뤄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본존님을 믿고 이케다 선생님과 함께 전진합시다!”
() | 화광신문 : 04/10/29 61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