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브 밀러의 책 "하나님과의 연결"(Connecting with God)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마을에 교회가 있었는데 교인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성경공부와 기도와 전도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나이트클럽이 문을 열면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교인들은 그 동네가 타락해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매일 밤에 모여 기도하면서 그 나이트클럽에 불이 나서 그 마을을 죄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신기하게도 벼락이 그 나이트클럽에 내려쳐서 화재가 나 건물이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그 나이트클럽 사장은 교회에서 기도해서 불이 났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고소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것은 억측이라고 하면서 화재의 책임을 부인했습니다.
이 사건을 맡은 재판장은 양측의 의견을 청취한 뒤, "이번 화재의 책임이 과연 교회에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상한 것은 나이트클럽 사장은 기도의 능력을 믿는데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오히려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으려고 하고 기도의 능력을 부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소감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니까 술집 주인은 자신의 가게에 벼락이 내린 것이 매일 같이 불이 나서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교인들의 기도 때문이었다고 확신했는데 정작 교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기도의 응답이라고 믿지 않고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여기서 불신자들이 아닌 "신자들의 불신앙"을 꼬집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과 어버이주일로 함께 지키고 있습니다. 부모로서 나는 불신앙의 신자인지, 믿음의 사람인지 한 번 돌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같이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믿지 않고 세상의 부모와 똑 같은 방법으로 가르치고 훈계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부모들은 아닌가요? 이제 막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도 계신데 정말 기도하는 모습, 신앙생활하는 모습들이 믿음과 행함이 함께 하는 부모로서의 모습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세례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두 가지 사건이 하나로 만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두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들을 각기 살펴보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여인은 60세~70세 정도의 아주 늙은 여인이었고, 마리아는 12살~13살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였습니다. 한 여자의 남편은 제사장이라는 사회적 지위가 있었고, 다른 여자 아이의 남편은 지극히 평범한 목수였습니다. 한 여인은 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다른 한 여인은 가난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한 여인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다른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다른 여인들에게 공통점들도 있었습니다. 그 공통점은 바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이 두 여인은 둘 다 가브리엘이라는 천사를 만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이야기와 그 아들들의 이름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얻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 아이의 출생 이후의 삶이 남다릅니다. 15-17절을 보시면 일단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아야 하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어찌 보면 특별한 아이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을 보시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네가 낳을 아들 요한은 주인공이 아니다. 조연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같으시면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기분일 것 같습니까? “아무튼 하나님께 쓰임받는 다는 거잖아 감사한 일이지.“라고 생각되십니까? 아니면 ”아니 뭐 이렇게 기분이 찝찝하지 이왕이면 주인공이 되게 하시지. 다른 사람을 위해 길을 열어주는 조연 인생으로 끝나는 게 뭐람!” 이런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이 때”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때”는 마리아가 천사의 계시를 받았을 때를 말합니다. 천사가 와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마리아는 자신이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천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불가능해보이고 참 믿기 어렵고 두려운 일이겠지만 정말 사실인 것은 네 친척 엘리사벳이 임신했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36절에서 37절을 보면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리아에게 내려진 징표였습니다. 엘리사벳의 잉태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확인시켜 주는 징표와 같은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엘리사벳 자신도 철저하게 조연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사가랴의 집에 찾아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고 엘리사벳은 그녀의 문안을 들었습니다. 아마 마리아는 자신이 들었던 천사의 말과 여러 가지 징표들과 자신이 고백했던 모든 것들을 이야기했을 것이며 그들이 가진 공통점들에 서로 기뻐하면서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성령님께서 엘리사벳을 충만하게 하시고 감동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는 세례 요한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41절에서 45절까지의 말씀에 보면 세례 요한이 어머니 뱃속에서 뛰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아이가 뱃속에서 뛰는 것은 자연스럽고 평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아기의 행동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엘리사벳이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다”(44절).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엘리사벳의 믿음이 보였습니다. 자신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마리아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보면 기뻐뛰는 모습을 그대로 전하기가 쉬웠을까요? 뭔가 다른 아이에 비해 좀 작아 보이는 듯한 이 행동에 대해 엘리사벳은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 믿음으로 사실 그대로를 전하며 겸손히 자신과 아이를 낮추고 있습니다.
‘막시무스’라는 사람이 4세기 때 이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몸이지만 어머니 뱃속에서 기쁘게 뛰노는 것으로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합니다’.
다음에 성령님께서는 엘리사벳을 감동시켜 그녀의 입술을 통하여 <네 가지>로 복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첫째, 어머니 마리아를 복되다고 말하고 둘째, 어머니 뱃속에 있던 예수님을 복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셋째, 그 앞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복되다고 하며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복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이란 마치 요한을 주 앞에서 큰 자라고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역할을 담당했는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주님 앞에서 크다는 칭호를 받았던 것은 그 전에 하나님 앞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그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크다는 표현이 쓰였던 것입니다. 또한 ‘마리아가 여자 중에 복되다’고 한 표현이 쓰인 이유는 마리아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가 맡은 역할이 가장 컸기 때문에 그녀가 그런 칭송을 받은 것입니다. 마리아가 여자 중에 가장 복되다는 소리를 들은 이유는 마리아가 낳은 아기가 이 세상을 재패하고 전부 통일한 사람보다, 혹은 가장 큰 권력이나 돈을 가진 자보다 예수님이 가장 크신 분이기 때문에 마리아가 가장 복된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부모가 가장 복된 부모일까요? 자식을 성공시켜서 남부럽지 않게 호강하는 부모일까요? 대통령 만들고, 유명 정치인, 유명 스포츠인, 연예인, 이른바 스타 부모가 되는 것이 가장 보람이고 복된 인생입니까?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가장 복된 부모는 자녀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쓰임을 받느냐에 의해 결정되어 진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세례 요한이 자신을 주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어머니 엘리사벳의 믿음의 영향력이 깊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은 15장의 유명한 “탕자의 비유”를 렘브란트는 자신의 아름다운 유화 “탕자의 귀환”에서 그리면서 어두컴컴한 문간 배경에 한 여인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이를 본 어떤 미술 평론가는 렘브란트가 그 여인을 그 탕자의 어머니로 그린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셨지만 철저하게 숨겨져 있고 가려져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렘브란트는 담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의해 가려진 믿음의 어머니와 같습니다. 엘리사벳은 흔히 말하는 주목받고 성공하는 길을 찾아 주고 그런 꿈을 키워주며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자리 -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인생 - 를 지켜가도록 아들을 이끈 믿음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린이주일과 어버이주일을 함께 지키면서 저는 믿음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모습을 마음에 깊이 새겨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복된 부모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부끄럼 없이 세우는 복된 부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어머니의 기도와 양육으로 성장하여 하나님 앞에 큰 자로서든 작은 자로서든 쓰임 받는 복된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자리에 지금도 살아가고 있음을 가장 큰 복으로 여기며 사는 부모님, 그 복을 자랑스러워하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