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군에 입대한 아들놈의 옷가지를 훈련소에서 부친것이 막 도착했댄다. 태준이 아들
결혼식날에 삼주는 휴대폰으로 "LST타고 입대했었다"고 재미있어 했었지. 내가 군대얘기를
하는게 아들놈 훈련받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여러 인연을 만났던 것이 새삼 생각
나서 마담의 매출도 올려줄겸 몇자 적어 봅니다.
가만히 두어두어도 시간이 지나면 입대를 하지않아도 될 것은 같았지만, 당시에는 군에 갔다
오지를 않으면 취직도 못하고, 사회생활에 제약을 많이 받았던 때라 군대입대를 결정한게
74년 봄. 내 나이 28살때이다. 늦게 입대하는게 부끄러워 아는 이들의 눈을 피해볼 요량으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광주 31사단 신병훈련소를 향하여 줄을 맞추어 걷고 있는데, 제주병력이
왔다고 구경하러 나온듯이 보이는 군인들이 더러 보인다. 저만치 삼주의 동생 종식이가 보인
다.모자를 더욱 푹 눌러쓰고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데 종식이는 아주 사람들 하나 하나 찾아
확인하러 나온듯이 한사람 한사람 훑더니만 "희철이형" 하고 부르며 나중에 연락하겠댄다.
종식이와의 만남이 내 군대생활의 근본을 바꾸어 놓을 줄은 당시에 그리고 첫 휴가를 갈 때
까지도 전혀 몰랐었다. 다만 종식이가 같은 31사단 탱크부대에 근무하고 있고, 곧 제대말년
휴가를 간다는 것과, 내가 속한 훈련중대 중대장이 우리와 같은 농고동기인 김승훈이라는
것을 들었다. 승훈이가 훈련중에 노골적으로 도와준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겠지만.
훈련소에서 생활한지 며칠만에 훈련병중에는 내가 최고령이란게 금새 알려졌다.다음은 26살.
그러나 나이도 2등은 소용이 없다고 그놈은 하소연이다. 다른 소대 선임하사들도 훈련중에
애로사항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나에게는 말로 친철을 배푼다.그래도 선착순을 하여 내가 2등
을 하면 3등부터 한바퀴 더 돌리고, 3등을 하면 4등부터 한바퀴 더 돌리는게 항상 내 다음
부터 짜르는게 보인다.
수일후에 학훈단출신의 소대장들이 막 배치를 받고 왔다. 내가 속한 5소대 소대장이 오더니
"형! 나 모르겠어요? 저 상재 친구에요. 형, 훈련만 잘 받으세요. 제가 뒷바라지는 다
할께요" 라고 하길래 다음부터는 소대장에게 부탁하여 담배는 모자라지않고 지냈다.
며칠후에는 부대 인사계(상사)가 나를 찾는다. 찾아갔더니 "너가 중대 훈병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다며? 우리중대에서는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데 잘 봐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면서
"큰 주전자들고 따라오라"고 하더니 식당에 가서 주전자에 안주거리를 가득 넣어달라고 하여
나를 데리고 공사판에 가더니 막걸리와같이 안주를 실컷 먹으랜다. 우리보다 일주일 빠른
옆중대에는 호남전지(로켓표) 사장 아들이 훈련을 받고 있어서, 호남전지에서 풀장을 기증
하여 수영장공사가 마침 한창 진행중이었다.나중에 호남전지 아들은 그 공로로 사단장표창
을 받고 훈병생활을 마쳤고.
훈병신분에 술을 못 하겠다는 나의 사양에도 인사계는 "내 얘기를 하면 괜찮을 거야. 몇잔
마셔라"하며 강권하다 싶이하여 몇잔 마시고 벌건 얼굴로 소대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선임하사는 인상한번 쓰는 것으로 넘어갔고.
수일후에 선임하사가 부르더니만 "너 중대장과 어떤사이야?"라고 묻는다. 전에 꼭같은 질문
을 받았던 두명이 대답후에 묵사발나게 얻어터지는 것을 보았던 터라 "이크 이번은 내 차례
구나"라고 겁이 덜컥났다. "예 친구의 친구 됩니다"라는 나의 답에 한창을 생각하더니
"그래 앞으로는 봐줄께"라고 답한다. 그리고난 다음부터 "자기는 제대후에 원예를 할 예정
인데 공부 좀 도와달라"고 하며 시간이 날 때는 책을 들고와 가르쳐 달랜다. 아는 범위내에
서 알려드리기는 하였지만 훈련소 생활은 아주 잘 풀렸다. 그리고 난 후부터 소대내에는
선임하사가 나를 봐준다고 소문이 났는지, 화장실에 가려고 "신고합니다" 라고 하면 순식간
에 내뒤로 5~6명 7~8명이 달라붙고, 내가 신고를 할 때는 틀려도 "다시"라는 구령이 없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훈련소 생활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마쳤다. 선착순은 성적이 좋아 보통
1~2등으로 끝나니 항상 내 다음부터 "한바퀴 더" 였었고, 가끔은 훈련대신 바둑사역을
나갔었다.
자대배치 발표가 있는 날 6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발표가 없다. 소대장이 오더니 "형! 좋은
데야"하며 Katusa로 배치되었다고 알려준다.우리기에는 katusa가 없다고 하더니 우리중대에
6명, 전국적으로 우리기에서 50명이 Katusa로 배치되었고, 앞기 katusa요원 200명중 50명을
밀어내고 우리가 들어가게 된 것을 안것은 평택 katusa교육대에 가고난 다음의 일이다. 나도
내가 운이 좋아 katusa가 된 줄만 알았고.
이제 삼주의 동생 종식이의 얘기를 할 차례이다.훈련소 입소하는 날 그렇게 만나고 혜여진
후 훈련소에서 종식이를 다시 만나지는 못 했던 것 같다. 훈련병은 면회가 안 되니까.
첫 휴가를 받고 제주에 가서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katusa로 가게된 것에 대해 궁금중을
풀어 놨더니, 종식이가 마지막 휴가 때 아버지를 찾아와서 "꼭 31사단에 면회가라고 해서
한번 너를 찾아 면회갔었다"고 한다. "너를 면회하지는 못했지만 종식이가 중대장을 소개
하고, 중대장은 사단 인사담당을 소개하고..."등등의 순서로 사람들을 만나 청탁을 하여
강원도의 포병대에서 katusa로 가도록 힘쓴 사연이다.
당시 종식이는 대한극장가는 곳 근처에서 Record가게를 하고 있었나? 설탕 2포를 사고가서
감사의 표시를 한게 전부였는데, 우리보다 먼저 고인이 되었으니, 이제는 고마움을 표시할
방법도 없다. 다만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고 대신 삼주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시러미성님 아들 군대보낸 이신 서름 어신서름 햄수 잠시내려놓으세요 견딜 수 없는 고된 훈련병에서 병과부대배치 받고 병역의무 마치고 , 대학졸업 ,취직 결혼믜 문을 열어야 진짜사나이지요.기다려보면 잘 이겨낼 것입니다 희형에게 의정부 카츄사부대 면회 간 것 . 삼주집 큰 마당 구석 꽃 밭에 제비 묻어놓고 종이에 '제비왕창잠자다 새기던 종식이 함께 여리고 철들던시절 지나가기 마련이지만 좋은 추억입니다. 시러미성님 늘 행복으로 똘똘 뭉친 그런 날들이시기를 빌며, 잔잔한 군대이야기 잘 읽고갑니다.내일 처서. 가을이 문턱에 선선하니 기쁨을 많이많이 멩글소서
첫댓글 워메~~ 군대생활이. 밤새멍고라도 끝이어실거라.... 희철아 느네아덜도 잘해 낼거여.요샌엣날보다는 팬안허댄허난
이거 군대이야기 시작하면 소설책 한권인데. 난 지원병 출신이라 훈련소에서 경덕이하고 고생한 기억 밖에없다. 희철인 막내 아들 때문에 신경 많이 쓰는 모양이네. 몽생이 말 마따나 요센 쫄병이 더 편안하다고 하드라.
군대이야기 5부작(?) 시작입니다. 모다 기대하시고 바톤 받을 준비도 하고.. 좋아좋아
희철이가 우리 동생과 그런 사연이 있었는지 몰랐었네. 나도 동생 신참 때 비슷한 일로 면회 간 적이 있는데 당시 광주 문화방송 아나운서였던 박승기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지. 이 난을 빌어 나도 박승기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시러미성님 아들 군대보낸 이신 서름 어신서름 햄수 잠시내려놓으세요 견딜 수 없는 고된 훈련병에서 병과부대배치 받고 병역의무 마치고 , 대학졸업 ,취직 결혼믜 문을 열어야 진짜사나이지요.기다려보면 잘 이겨낼 것입니다 희형에게 의정부 카츄사부대 면회 간 것 . 삼주집 큰 마당 구석 꽃 밭에 제비 묻어놓고 종이에 '제비왕창잠자다 새기던 종식이 함께 여리고 철들던시절 지나가기 마련이지만 좋은 추억입니다. 시러미성님 늘 행복으로 똘똘 뭉친 그런 날들이시기를 빌며, 잔잔한 군대이야기 잘 읽고갑니다.내일 처서. 가을이 문턱에 선선하니 기쁨을 많이많이 멩글소서
군대이야기 기대가 큽니다. 난 32세에 장교로 가 놓으니 훈련병시절 별다른 추억거리는 없고요.
소설같은 실화일 듯. 글이 맛있다.
종식이는 참 좋은 친구 였구나 ...나도 지점장 하면서 종식이 신세를 진 적이 있었는데.. 세삼 고인에 대한 아쉬움이 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