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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자료
◼ 현종 4년 1663년 6월 16일
가미생맥산(加味生脈散)에 황저밀수초(黃茋蜜水炒) 1전(錢)을 추가한 약재를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6월 22일
보중승독병(補中勝毒餠) 1제(劑)를 환(丸)으로 만들고, 평혈음(平血飮) 5첩(貼)을 먼저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6월 26일
저번에 지어서 들인 평혈음(平血飮)을 꾸준히 복용하도록 권하는 약방(藥房)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7월 3일
이경석(李景奭),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진(入診)함
◼ 현종 4년 1663년 7월 9일
내일 입진(入診)하기를 청하는 약방(藥房)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4년 1663년 7월 11일
희정당(熙政堂)에서 약방(藥房)가 입진(入診)할 때 이경석(李景奭),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하여 질환과 탕약에 대하여 논의함
◼ 현종 4년 1663년 7월 13일
탕약 등에 대하여 아뢰는 약방(藥房)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7월 13일
촉농고(促濃膏)를 우선 조제(調劑)하기를 청하는 약방(藥房)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의 세 번째 계
◼ 현종 4년 1663년 7월 13일
대조전(大造殿)에서 수구(受灸, 뜸) 때 입시한 관원의 명단 –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
◼ 현종 4년 1663년 7월 24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수구(受灸, 뜸)할 때 입시한 관원의 명단 -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
◼ 현종 4년 1663년 8월 5일
삼제조(三提調),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하여 수침(受鍼)함
◼ 현종 4년 1663년 8월 7일 10일 17일 24일
약을 지어 들이는 데 대한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9월 5일
약방(藥房) 三提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 등이 입시함
◼ 현종 4년 1663년 9월 5일
수침(受鍼)할 날짜 등에 대한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9월 6일
약방(藥房) 삼제조(三提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현종 4년 1663년 9월 6일 9일 13일 16일 18일 20일
약을 지어 들이는데 대한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9월 28일
입진(入診) 시 약방(藥房) 三提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현종 4년 1663년 9월 28일
약을 지어 들이는데 대한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0월 5일 7일 8일 9일 11일 12일
안질에 대한 수침(受鍼)을 모레 할 것을 청하는 이경석(李景奭),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0월 13일
이경석(李景奭)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현종 4년 1663년 10월 15일
수침(受鍼)할 날짜를 의논해서 보고하는 이경석(李景奭),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0월 16일
희정당(熙政堂)에 이경석(李景奭),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하여 안부를 묻고 수침(受鍼)함
◼ 현종 4년 1663년 10월 17일
수침(受鍼)할 때에 이경석(李景奭),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현종 4년 1663년 10월 19일
수침(受鍼)할 때에 세 제조(提調)와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현종 1663년 4년 10월 20일
청상견통탕(淸上蠲痛湯) 3첩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0월 20일
희정당(熙政堂)에 이경석(李景奭),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하여 진찰함
◼ 현종 4년 1663년 10월 22일
소시호탕(小柴胡湯) 3첩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세 제조(提調)와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0월 30일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 3첩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1월 3일
청상견통탕(淸上蠲痛湯) 3첩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이경석(李景奭),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1월 12일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을 조제(調劑)하기를 청하는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1월 13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 三첩(貼)을 조제(調劑)하기를 청하는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1월 14일
침과 약을 함께 시험할 것을 청하는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4년 1663년 11월 15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번갈증(煩渴症)에 상지화매화작차(桑枝和梅花作茶)를 조제(調劑)하기를 청하는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1월 15일
청격산(淸膈散) 三첩(貼)을 전입(煎入)하기를 청하는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1월 16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증세를 물으며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을 조제(調劑)하기를 청하는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1월 17일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을 올리고 대내(大內)로 환어(還御)하기를 청하는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1월 25일
왕의 안부를 묻고, 가미이진탕(加味二陳湯) 三첩(貼)을 올릴 것을 청하는 정만화(鄭萬和),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2월 6일
이경석(李景奭)의 집에 정후계(鄭後啓)를 보내 간병하라는 전교
◼ 현종 4년 1663년 12월 8일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의 조제(調劑)을 청하는 약방(藥房)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4년 1663년 12월 10일
가감량격산(加減涼膈散) 2첩(貼)을 올리고,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 3첩(貼)을 조제(調劑)할 것을 청하는 약방(藥房)의 계 – 정후계(鄭後啓) 등 의관 상의,
◼ 현종 4년 1663년 12월 12일 14일 15일
소시호탕(小柴胡湯)을 3첩(貼)을 조제(調劑)하고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 행기향소산(行氣香蘇散) 3첩(貼)을 조제(調劑)할 것을 청하는 홍명하(洪命夏) 등의 두 번째 계 – 정후계(鄭後啓) 등 어의 상의
◼ 현종 4년 1663년 12월 16일
이완(李浣)의 상소에 대한 비답 - 지사 정후계(鄭後啓)을 보내 간병하라,
◼ 현종 4년 1663년 12월 18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는 약을 정지하고, 왕의 환후에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 三첩(貼)을 조제(調劑)할 것을 청하는 약방(藥房)의 계 – 정후계(鄭後啓) 등 어의 상의
◼ 현종 4년 1663년 12월 20일 22일
소시호탕(小柴胡湯) 三첩(貼)을 조제(調劑)하고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는 오늘 내일 증세를 살펴 다시 의약(議藥)할 것을 청하는 이일상(李一相) 등의 계 – 정후계(鄭後啓) 諸 御醫 등 商議
◼ 현종 4년 1663년 12월 27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 익기탕(益氣湯)을 첨가하여 처방하겠으며 안부를 묻는 약방(藥房)의 계 - 정후계(鄭後啓) 어의 등 상의
◼ 현종 5년 1664년 1월 3일
추운 날씨에 안부를 물으며, 임금의 질병에 차도가 있으나 頭部에 微疼이 있으니 加味四物湯 등을 처방하겠다는 홍명하(洪命夏) 등의 계 – 정후계(鄭後啓) 어의 등 상의
◼ 현종 5년1664년 1월 9일
정후계(鄭後啓)가 제수받은 남양부(南陽府)는 영장이 겸하는 곳으로 적임자로 바꾸어야 한다는 정청이방승지(吏房承旨)의 계
◼ 현종 5년 1664년 1월 11일
오시수(吳始壽) 파주목사(坡州牧使) 정후계(鄭後啓) 등이 사은(謝恩)하다.
◼ 현종 5년 1664년 1월 12일
수령(守令)은 책임이 중하므로 이익달(李益達)을 파직하고, 의관으로 수령(守令)이 된 정후계(鄭後啓)는 자급(資級)에 맞지 않으니 개차(改差)하자는 사간원의 계
◼ 현종 5년 1664년 1월 12일
어깨와 등이 땅기고 두질이 멈추지 않는게 염려되어, 정후계(鄭後啓)과 의관들이 의논하여 구미강활탕(九味羌活湯) 3첩(貼)을 들인다는 약방(藥房)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1월 15일
두동(頭疼)의 치료를 위해 가감량격산(加減涼膈散) 2첩을 처방하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1월 16일
이익달(李益達)은 파직하고, 정후계(鄭後啓)는 개차(改差)할 것을 청한 것
◼ 현종 5년 1664년 1월 17일
번열두동(煩熱頭疼)의 가감(加減)이 없어서 정후계(鄭後啓) 등이 의논하여 감량격산(減涼膈散)으로 상한을 치료한 뒤 가미사물탕(加味四物湯)으로 발열을 고치겠다는 약방(藥房)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1월 17일
정후계(鄭後啓)가 종일품 자격으로 주부(州府)의 직임을 맡을 수 없으니 논의한대로 개차하시기를 청하는 사간원의 계
◼ 현종 5년 1664년 1월 18일
정후계(鄭後啓)의 개차(改差)하라는 사간원의 계
◼ 현종 5년 1664년 1월 19일
정후계(鄭後啓)의 개차의 일을 의계(依啓)했다는 사간원의 계
◼ 현종 5년 1664년 1월 20일
신제수(新除授) 파주목사(坡州牧使) 정후계(鄭後啓)의 개차를 청하는 사간원의 계
◼ 현종 5년 1664년 1월 21일
새로 제수된 정후계(鄭後啓)의 개차에 관한 문서의 오자문제로 이합(李柙) 등을 출사시키고, 역로를 쇠잔시킨 정호익(鄭虎翼)을 파직시키며, 오두인(吳斗寅)을 속히 올라오라고 하유하자는 사간원의 계
◼ 현종 5년 1664년 1월 22일
정후계(鄭後啓)의 개차를 청하는 사간원의 계
◼ 현종 5년 1664년 1월 23일
두동(頭疼)이 완치되지 않아서 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을 올리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1월 23일 24일
정후계(鄭後啓)의 개차에 관련되어 조세환(趙世煥) 등의 출사를 청하는 사간원의 계
◼ 현종 5년 1664년 1월 25일
열통(熱痛)의 차도(差度)가 없어서 정후계(鄭後啓) 등이 의논하여 가감량격산(加減涼膈散)을 올리겠다는 약방(藥房)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1664년 1월 25일 26일 27일 28일 29일
정후계(鄭後啓)의 개차를 청하는 사간원의 계
◼ 현종 5년 1664년 2월 3일
왕의 안부를 묻고, 창름산(倉廩散) 3첩(貼)을 지어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의관 정후계(鄭後啓)의 계
◼ 현종 5년 1664년 2월 5일 6일 11일
정후계(鄭後啓)를 개차하고, 남몽재(南夢齎) 등을 파직할 것 등을 청하는 司諫院의 계
◼ 현종 5년 1664년 2월 7일 10일
정후계(鄭後啓)을 체차(遞差)하는 일은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 현종 5년 1664년 2월 12일 13일 14일 15일 18일 20일 21일 22일
정후계(鄭後啓)를 체차하고 후임을 보낼 것을 청하는 사간원의 계
◼ 현종 5년 1664년 2월 26일
호조참의(戶曹參議) 이태연(李泰淵), 지사 정후계(鄭後啓)가 사은(謝恩)하다.
◼ 현종 5년 1664년 3월 4일
오늘 수침(受鍼)에 대해 묻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5년 1664년 3월 5일
사물용담탕(四物龍膽湯) 3첩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3월 18일
당귀용담탕(當歸龍膽湯) 3첩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3월 25일
수구(受灸, 뜸)할 혈을 의논하여 보고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3월 28일
왕의 안부를 묻고 구미강활탕(九味羌活湯) 2첩(貼)의 조제(調劑)과 수구(受灸, 뜸) 吉日의 택일을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5년 1664년 4월 15일
왕의 안부를 묻고 입진(入診)을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5년 1664년 4월 18일
희정당(熙政堂)에서 침을 맞음 - 제조(提調) 정치화(鄭致和), 부제조(副提調) 남용익(南龍翼),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 입시
◼ 현종 5년 1664년 4월 20일
희정당(熙政堂)에서 정후계(鄭後啓)이 수침(受鍼)한 뒤에 정태화(鄭太和) 등이 논의함
◼ 현종 5년 1664년 4월 21일
안질(眼疾) 살핀 뒤 처방에 대해 의논하겠다는 약방(藥房),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 의 계
◼ 현종 5년 1664년 4월 21일
정후계(鄭後啓)와 어의 등이 의논하여 사물용담탕(四物龍膽湯)을 지어 올리겠다는 약방(藥房)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4월 21일
정태화(鄭太和) 등이 입시하여 수침(受鍼)함 -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
◼ 현종 5년 1664년 4월 23일
수침(受鍼)후의 차도에 대한 정태화(鄭太和) 정후계(鄭後啓) 등의 진단이 있었다.
◼ 현종 5년 1664년 4월 25일
鄭太和 등이 입시한 뒤 수침(受鍼) 함 - 집침(執鍼)은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
◼ 현종 5년 1664년 5월 1일
사물용담탕(四物龍膽湯) 10첩(貼)을 다 올렸으니 환약과 수침(受鍼)을 어떻게 할지 묻는 정태화(鄭太和),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5년 1664년 6월 22일
자신명목탕(滋腎明目湯) 20여 첩(貼)을 더 복용하고 양간원(養肝元)을 같이 복용할 것을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5년 1664년 6월 26일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 2첩(貼)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윤6월 10일
세안탕(洗眼湯)으로 자주 훈세(燻洗)하는 것이 좋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윤6월 13일
그 동안 복용했던 자신명목탕(滋腎明目湯)을 잠시 정지했다가 날이 서늘해진 뒤에 더 복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5년 1664년 윤6월 18일
평혈음(平血飮) 5첩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윤6월 23일
입진(入診)을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7월 10일
아침 서늘할 때 뜸 뜰 것을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7월 11일
감기와 설사의 치료를 위해 창름산(倉廩散)을 조제(調劑)할 것을 묻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7월 13일 15일
미열이 남아 있으니 감량격산(減涼膈散)을 처방하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7월 19일
문안에 대한 비답을 보고 어의들이 입진(入診)한 뒤 처방하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7월 19일
삼소음(蔘蘇飮) 2첩으로 감모해수(感冒咳嗽)를 치유하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세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7월 19일
좌안(左眼)의 적휘(赤暈)의 치료를 위해 수침(受鍼)을 하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네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8월 1일
감기 증세가 보여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을 2첩 올리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8월 2일
탕제를 올린후에도 여열이 있고 쾌차(快差)하지 않아 소시호탕(小柴胡湯) 3첩(貼)을 올리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8월 4일 7일
안질이 재발하여 의관들이 의논후 수침(受鍼)의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8월 9일
안질의 차도가 있으니 중익기탕(中益氣湯) 10첩을 올리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8월 13일
내일과 17일 중에 어느 날에 수침(受鍼)할 지를 묻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8월 14일
수침(受鍼)할 때 입시한 인원 - 정후계(鄭後啓) 등
◼ 현종 5년 1664년 9월 9일
추위에 상할까 염려되므로 陵幸 일자를 다시 미룰 것을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9월 9일
량격산(涼膈散)에 약재를 가감하여 3첩(貼)을 지어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세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10월 3일
수침(受鍼)할 때에 허적(許積)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 현종 5년 1664년 10월 16일
가감량격산(加減涼膈散) 3첩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허적(許積)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11월 15일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에 약재를 더해서 3첩 지어 들일 것을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11월 18일
가감량격산(加減涼膈散) 3첩을 지어들이겠다는 허적(許積)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5년 1664년 12월 3일
안부를 묻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5년 1664년 12월 4일
가감양격산(加減凉膈散) 2첩의 조제(調劑)을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5년 1664년 12월 18일
수침(受鍼)을 정지하고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 3첩을 조제하기를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1월 25일
희정당(熙政堂)에서 수침(受針)할 때 이일상(李一相)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현종 6년 1665년 1월 26일
희정당(熙政堂)에서 수침(受針)할 때 박장원(朴長遠)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현종 6년 1665년 1월 30일
이경석(李景奭) 등에게 관작과 물품을 내린 비망기 – 정후계(鄭後啓)는 가자(加資)하라
◼ 현종 6년 1665년 2월 10일
희정당(熙政堂)에서 사시에 수침(受針)할 때 박장원(朴長遠)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현종 6년 1665년 2월 17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수구(受灸, 뜸)할 때 박장원(朴長遠) 정후계(鄭後啓) 등이 入侍함
◼ 현종 6년 1665년 2월 18일
방풍통성산(防風通聖散)에 약재를 더해서 5첩을 지어 들인다는 박장원(朴長遠)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6년 1665년 2월 21일
수침(受鍼) 시각을 알리고, 구미강활탕(九味羌活湯)에 약재를 더하여 2첩을 지어 들이겠다는 박장원(朴長遠) 정후계(鄭後啓) 등등의 계
◼ 현종 6년 1665년 2월 24일
양격산(凉膈散)에 약재를 더해서 2첩을 지어 들이겠다는 이일상(李一相)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6년 1665년 3월 14일
안질과 열통(熱痛)이 낫지 않았으므로 건강에 힘쓰기를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4월 10일
시호사물탕(柴胡四物湯) 6첩(貼)을 조제하고 수침(受鍼)은 내일 할 것을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6월 29일
자전(慈殿, 大妃)의 증후에 소시호탕(小柴胡湯)에 약재를 가감하여 5첩을 지어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7월 23일
구미강활탕(九味羗活湯)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7월 26일
가감량격산(加減涼膈散) 2첩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7월 28일
오늘부터 약방(藥房) 조제의 숙직(宿直)을 파출(罷出)하고 정후계(鄭後啓)와 이동형(李東馨)이 돌아가며 숙직(宿直)하라는 전교
◼ 현종 6년 1665년 8월 2일
柳赫然(柳赫然)의 침구 정사(呈辭)에 대한 전교 - 정후계(鄭後啓) 간병(看病)
◼ 현종 6년 1665년 8월 20일
소경활혈탕(疏經活血湯) 5첩(貼)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8월 23일
희정당(熙政堂)에서 입진(入診)할 때 허적(許積)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하여 자전(慈殿, 大妃)의 숙환 등에 대해 논의함
◼ 현종 6년 1665년 9월 2일
강활승습탕(羌活勝濕湯) 3첩을 조제할 것을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10월 1일
김만기(金萬基) 등이 입시하여 수가(隨駕) 약방(藥房) 외 제신(諸臣)에 대한 상전(賞典)의 회수 등에 대해 논의함 - 정후계(鄭後啓) 자제(子弟)를 제직(除職)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 현종 6년 1665년 10월 2일
여러 신료에 대한 가자(加資) 및 6품(六品) 천전(遷轉)의 명을 환수하고 정후계(鄭後啓)의 자제에 대한 제직(除職)의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는 사간원(司諫院)의 계
◼ 현종 6년 1665년 10월 2일
가미사물탕(加味四物湯) 2첩(貼)을 조제할 것을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10월 2일
사간원(司諫院)에 대한 비답 - 임금이 정후계(鄭後啓)의 일은 논하지 말라.
◼ 현종 6년 1665년 10월 11일
정태화(鄭太和), 정후계(鄭後啓) 등에게 숙마(熟馬) 1필 등을 내려 주라 – 비망기
◼ 현종 6년 1665년 11월 10일
자전(慈殿, 大妃)의 병에 대한 진단과 이모청순탕(二母淸順湯)을 처방하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11월 12일 15일
자전(慈殿, 大妃)의 안부와 청심화담탕(淸心化痰湯)을 처방하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11월 16일
두동(頭疼)의 치료를 위해 구미강활탕(九味羌活湯)을 처방하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11월 18일
자전(慈殿, 大妃)의 해수에 이모청순탕(二母淸順湯)을 처방하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11월 19일
자전(慈殿, 大妃)의 두동(頭疼), 열후(熱候)의 차도(差度)와 사물탕원방숙지황(四物湯元方熟地黃)을 보완해서 올리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12월 10일
청화화담탕(淸火化痰湯) 2첩(貼)을 더 올리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12월 11일
상한(傷寒), 두동(頭疼)에 소시호탕(小柴胡湯)을 처방하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6년 1665년 12월 21일
청위사화탕(淸胃瀉火湯)의 처방과 함께 우황의 봉입(封入)을 묻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세 번째 계
◼ 현종 7년 1666년 1월 23일
자전(慈殿, 大妃)을 간호한 정태화(鄭太和) 등에게 상급을 내리라는 비망기 – 정후계(鄭後啓)에 熟馬(熟馬) 1필(匹)을 주어라
◼ 현종 7년 1666년 2월 9일
기침에 잘 듣는 이모청순탕(二母淸順湯)에 약재를 더하여 3첩(貼) 지어 들이겠다는 홍중보(洪重普)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7년 1666년 2월 18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수구(受灸, 뜸)할 때 허적(許積),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현종 7년 1666년 3월 3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수침(受鍼)할 때 홍중보(洪重普),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현종 7년 1666년 3월 4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수침(受鍼)할 때 홍중보(洪重普),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현종 7년 1666년 3월 6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수침(受鍼)할 때 홍중보(洪重普),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539. 현종 7년 1666년 3월 7일 8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수침(受鍼)할 때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현종 7년 1666년 3월 25일
희정당(熙政堂)에서 대신과 비국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할 때 이경석(李景奭)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하여 왕세자인(王世子印)의 개서(改書) 등에 대해 논의함
◼ 현종 7년 1666년 7월 6일
내일 까지 증세를 살펴본 뒤에 수침(受鍼)에 대해 의논할 것을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7년 1666년 7월 25일
정세와 병세를 이유로 체차(遞差)를 청하는 허적(許積)의 차자 - 어의 정후계(鄭後啓)는 간병하라,
◼ 현종 7년 1666년 10월 12일
허적(許積)과 정후계(鄭後啓)에게 표피(豹皮) 1령(一領)을 주어라.
◼ 현종 7년 1666년 11월 17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수침(受鍼)한 부위와 입시한 신하의 명단 – 정후계(鄭後啓) 등
◼ 현종 7년 1666년 11월 18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수침(受鍼)할 때의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함
◼ 현종 7년 1666년 12월 17일
인삼패독산(人參敗毒散)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세 번째 계
◼ 현종 8년 1667년 1월 11일
안부를 묻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8년 1667년 2월 7일
九味羌活湯 3첩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8년 1667년 2월 28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수침(受鍼)할 때 오정위(吳挺緯) 등이 入伏하고 정후계(鄭後啓) 등이 入侍함
◼ 현종 8년 1667년 3월 7일 8일 10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수침(受鍼)할 때 김수항(金壽恒) 醫官 정후계(鄭後啓) 등이 入侍함
◼ 현종 8년 1667년 1667년 3월 11일 19일 20일 21일 22일 24일
희정당(熙政堂)에서 수침(受鍼)할 때 김수항(金壽恒) 등이 입시함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
◼ 현종 8년 1667년 5월 28일
황련향유음(黃連香薷飮)과 소시호탕(小柴胡湯)을 합방한 약제 2첩을 지어서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 두 번째 계
◼ 현종 8년 1667년 9월 3일
임금의 수침(受鍼) 때 - 도제조 정치화(鄭致和),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入侍)
◼ 현종 8년 1667년 10월 14일 18일 19일 20일 22일 23일
양심각(養心閣)에서 면부(面部)의 찬죽(攢竹) 혈 등에 수침(受鍼)함 – 입시자 정후계(鄭後啓) 등 ...
◼ 현종 9년 1668년 6월 15일
영의정(領議政)의 상소에 대한 전교 - 어의 정후계(鄭後啓)가 간병하라.
◼ 현종 9년 1668년 6월 16일
사직하지 말라는 정태화(鄭太和)의 상소에 대한 비답 - 어의 정후계(鄭後啓)가 간병하라.
◼ 현종 9년 1668년 7월 2일
병을 핑계로 입시하지 않은 의관의 추고(推考)를 청하는 내의원 정후계(鄭後啓)의 계
◼ 현종 9년 1668년 7월 3일 4일 5일 6일 12일 14일 15일 16일 17일 19일 21일 22일
문안할 때 입시하지 않은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을 잡아서 죄를 정하라는 사헌부의 계
◼ 현종 9년 1668년 7월 25일
의관 정후계(鄭後啓) 처리 조치하십시오,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 현종 9년 1668년 8월 12일
서울의 궐내에 머무른 정후계(鄭後啓)에게 군직(軍職)을 부여할 것을 청하는 내의원의 계
◼ 현종 9년 1668년 9월 25일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을 서용(敍用)하라는 비망기
◼ 현종 9년 1668년 11월 10일
왕의 감기 두통에 발산제(發散劑)를 지어 바칠 것을 청하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9년 1668년 11월 16일
정치화(鄭致和), 정후계(鄭後啓)에게 숙마(熟馬) 1필(匹), 표피(豹皮) 1령(一領) 지급하라.
◼ 현종 10년 1669년 1월 23일
수침(受鍼)할 때 의관만 입시함 -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 입시
◼ 현종 10년 1669년 1월 24일
청화화담탕(淸火化痰湯) 3첩을 지어 들이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10년 1669년 5월 27일
어의 등과 상의하여 탕제를 제입한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계
◼ 현종 10년 1669년 7월 9일
두동(頭疼)으로 인한 현기증에 약제를 들인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10년 1669년 7월 20일
입진(入診) 후 산동궤견탕(散朣潰堅湯) 10첩(貼)을 환약으로 올리겠다는 약방(藥房) 정후계(鄭後啓) 등의 두 번째 계
◼ 현종 10년 1669년 7월 20일
약방(藥房) 입진(入診)에 허적(許積)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하여 안부를 묻다.
◼ 현종 10년 1669년 10월 9일
허적(許積)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하여 왕의 증후 및 약에 대해 의논하다.
◼ 현종 10년 1669년 11월 9일 16일 17일 19일 25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입진(入診)할 때 허적(許積)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하다.
◼ 현종 10년 1669년 12월 12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수구(受灸, 뜸)함 - 의관 정후계(鄭後啓)이 執鍼하다.
◼ 현종 11년 1670년 윤2월 8일
집상전(集祥殿)의 입진(入診)에 허적(許積)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이 입시하여 안부를 묻다..
◼ 현종 11년 1670년 3월 15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입진(入診)할 때 허적(許積),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이 入侍하다.
◼ 현종 11년 1670년 8월 16일
사망한 입시 의관 정후계(鄭後啓)에게 제수(祭需)를 넉넉히 마련하여 지급하라는 전교
◼ 현종 11년 1670년 8월 24일
정후계(鄭後啓)에 대한 공적을 원단자(原單子)에 부표(付標)하여 들인다는 호조의 계
◼ 숙종 1년 1675년 2월 26일
허적(許積)이 말하기를 정후계(鄭後啓)이 살았을 때 나와 상의(相議)하여 자하거(紫河車)를 들여와 임금에게 바치어 변조증과 소변의 불편을 증세가 나았습니다.
◼ 숙종 2년 1676년 1월 2일 3일 4일 5일 8일 12일
전왕(前王) 때 정후계(鄭後啓)가 여러 번 주군(州郡)을 맡는 은전(恩典)이 있었으니 일품(一品)으로 승급(陞級)함은 법례(法例)에 어긋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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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 #405번의 9세 정대휴공의 선세사적 내용중 "출전유서"의 본문 인용내용을 #450번에서 수정하였으니 고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477번의 14세 정선의 선세사적에 인용된 하단의 사진이, 정선의 묘소가 아니고 --->" 정선의 부 증호조참판 정시익, 조부 증좌승지 정윤 및 후손의 납골묘" 이니 수정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두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