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평화에 의한 평화: 이상(理想)? 현실? / 이사야 11:1-10
‘평화’에 대한 이해와 개념은 저마다 각기 다릅니다. 혹자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떠올리고, 혹자는 물리적인 위협과 폭력이 없는 상태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혹자는 사회 구조적으로 차별이 없는 상태를 떠올리거나 종교나 문화가 다르다고 해서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상태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전자들의 평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힘’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나 혹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위협과 폭력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힘을 갖추고 있으면, 누구도 도발이나 침략 따위는 엄두도 못 낼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후자들의 개념으로 평화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내려놓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입니다. 구조적인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현재 상대적으로 더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동의와 협조 없이는 어려운데, 그것은 대부분 지금의 안정된 삶에서 변화를-손해를 동반하며 불편하고 번거로운-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문화와 종교가 다르다고 서로 차별하지 않으려면, 내 것만이 옳다는 입장을 내려놓아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어떤 평화를 말하고 있을까요?
성서에 나타난 평화를 알아볼 때 이사야서는 빼놓을 수 없는 책입니다. 평화에 대한 이미지가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장면을 간추려도 2, 9, 11, 42, 57, 61, 65장이나 됩니다. 이 가운데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그리는 평화도 있고, 물리적인 위협이 없는 상태를 그리는 평화도 있습니다. 또한 구조적, 문화적 폭력이 없는 평화를 그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상태의 평화를 말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평화는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한결같이 말한다는 점입니다. 평화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짐을 줄기차게 말합니다.
본문 역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평화를 이야기합니다.(6-9절) 사람과 맹수와 초식동물이 함께 어울리며 공존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평화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서로를 신뢰하며 상생하는 모습입니다. 이상적(理想的)이지요.
그런데 이리와 어린양이, 표범과 새끼 염소가, 곰과 암소가, 독사와 갓난아기가 공존이 가능할까요? 어째서 이사야는 이런 평화를 말하는 것이며, 어떻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두 관계는 주로 먹고 먹히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말합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7절)
맹수들이 풀을 먹는다는 것은, 상대방을 먹이로 삼고 살아가던 방식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곧 더 이상 약자의 피흘림이 없도록 자신의 방식과 힘을 스스로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이런 평화를 이야기한 까닭은, 이사야는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배우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9절)
하나님은 해치시거나 파괴하시는 분이 아니라 창조하시고 회복하시는 생명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알고 관계한다면, 이 평화는 더 이상 불가능한 의미의 이상(理想)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현실이 됩니다.
이 평화를 이야기하면 비록 누군가는 이상주의자 혹은 몽상가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평화는 이상(理想))이 아니라 일상과 삶에 존재하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러한 평화를 누림과 동시에 주위에 퍼뜨리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024년 8월 18일 김소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