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주변에는 국가정체성 위기론부터 시작하여 안보위기, 경제위기, 교육위기 등 위기의식이 누적되어 총체적 위기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부(富)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환경이 되어 외국으로 빠져 나간다는 외신보도와 같이, 집권세력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제 위기의식이 행동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국민이 재산을 해외로 몰래 도피시키는 풍경은 소설 1984의 주인공 윈스톤 스미드가 골방에 숨어서 몰래 일기장을 써 내려가는 음산한 사회분위기를 연상시킵니다. 정부 눈을 속여가며 재산을 해외로 빼돌릴 만큼 커지고 있는 위기의식을 자세히 살피면 그 속에 소설 1984를 구성하는 음습한 사회주의 지배원리가 발견됩니다. 한국 언론뿐 아니라 AWSJ(월스트리트저널 아시아판) 같은 외국 언론까지 2004 한국현실을 소설 1984의 가공할 풍경과 비교한다는 것은 우리를 짓누르는 위기의식이 일과성 현상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그러면 노무현정부 밑에서 국민이 느끼는 위기감은 어디서 나오고 있는 것일까요?
2. 이데올로기조작 증후군
현재 한국사회는 진보와 보수, 친북과 반북, 반미와 친미, 적과 동지로 양분되어 이념적 내전상태에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시민을 지배하는 소설 1984 사회분위기를 닮은 것입니다. ‘대형이 지켜보고 있다 (Big Brother is watching you.)’는 위협적 감시포스터와 함께 이데올로기를 조작하는 정치슬로건들이 공포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전쟁이 평화다!
자유가 노예다!
무지가 힘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오웰의 소설 `1394' 중)
노무현정부는 이데올로기조작을 위하여 공개적으로 슬로건을 내걸지 않았지만 집권 이후 조성되고 있는 정치풍경에서 정치구호와 같은 이미지가 감지됩니다. 화합을 원하는 국민을 향하여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행태가 계속되고, 미래의 희망을 갈구하는 여론을 등지고 과거사규명을 역사적 사명이라고 응답하며, 개혁만 팔아도 10년은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등장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치구호 이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분열이 화합이다!
과거가 미래다!
코드가 힘이다!
(1) 분열이 화합이다 : 화합을 외면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집권세력의 정치행태에서 우리는 ‘분열이 화합’이라는 암묵적 정치슬로건을 읽을 수 있습니다. 노무현정부 출범 이후 소위 코드인사로 대표되는 이분법적 사고는 국민을 적과 동지로 양분시킨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입으로는 상생정치를 말하지만 항상 새로운 고리를 개발하여 국민을 적과 동지로 분열시켜 왔습니다. 어차피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 세상이므로 반대세력을 굳이 포용할 생각이 없다는 대통령의 발언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설 1984 영국은 외부의 적을 향해 국민의 적개심을 자극하여 통치하기 편한 전시동원체제를 만들었으나, 2004 한국은 국민을 진보개혁세력과 보수기득권세력으로 양분하여 대립을 보편화시킴으로서 통합하는 리더십이 필요 없는 정치구도를 만들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지세력만 생각하는 대통령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택시기사들이 점심시간에 의견을 나누다 소득양극화 속의 분배방법을 놓고 주먹다짐을 했다는 실화에서 우리는 분열사회의 실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도가 통합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당사자가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분열사회, 정치집단이 반대세력을 힘으로 누르는 본을 보이면 노동은 기업을 힘으로 누르고 더 받아 낼 것이며, 택시기사도 반대의견에 직면하면 주먹으로 굴복시키려 할 것입니다.
소설 속의 영국정부는 적군의 침략과 가상 지하조직의 반란위협을 빙자하여 일년 내내 국민을 전쟁위협 속에 묶어 두어 ‘전쟁이 평화’ 라는 정치 슬로건이 현실생활에서 정당화됩니다. 한국에서 분열과 대립이 국민생활 속에서 평범한 일상이 되면, 소설 1984에서 전쟁이 평화로 도착된 것처럼 분열이 화합이라는 착각 속에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2) 과거가 미래다 : 내일에 희망을 걸려는 소시민을 향해 과거청산의 기치를 드는 행보에서 ‘과거가 미래’라는 역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김대중정부에서 시작된 역사고치기 작업을 노무현대통령은 국가적 중요과제로 발전시켰습니다. 여당은 역사규명 입법안을 만들었고, 국가정보처를 비롯하여 국방부와 경찰청 등 핵심 권력기관에 역사점검팀이 구성되었으며, 청와대와 정부기관에는 보수언론 담당공무원이 배치되어 언론과 진실전쟁을 수행중입니다.
소설 속에서 영국을 지배하는 사회당은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한다.’는 슬로건 밑에 철저하게 역사를 관리합니다. 소설 속 주인공 윈스톤 스미드는 진실성 기록국(Ministry of Truth, Records Department)에서 대형(BB)의 행적에 맞추어 역사기록을 수정관리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대형이 옛날에 말한 사실이 현실과 다를 경우 차이 나는 모든 기록물을 현실과 일치시켜 재생산하고 틀린 기록을 소각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당과 대형은 완전무결하고 진리이며 역사이기 때문이지요. 한국정부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노무현정부가 역사규명을 국가적 과업으로 추진하는 모습이 역사를 조작하는 1984 소설풍경과 유사하게 비치는 것은 필자만의 착시현상일까요 ? 역사가 학자의 손을 떠나 정치적 다수결로 결정되면 조작에 불과하며 조선조 사화(史禍)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 노무현정부 밑에서 불고 있는 탈한국 기류; 지식인과 청장년층 이민, 기업인의 국내투자 기피, 재산 해외도피, 조기유학 증가 등은 과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미래를 상실한 국민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코드가 힘이다 : 정상적 조직생활과 납세의 무게를 경험하지 않고도, 마흔 안팎의 젊은나이에 금배지를 달고 정부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이 노무현정부에서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을 출세시킨 힘이 바로 코드입니다. G. 오웰은 지성이 죽은 사회에서 ‘무지가 힘’이 되는 소설을 썼지만 노무현정부는 코드가 힘이 되는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코드가 맞는 신문사를 방문하여 격려인사를 하고 코드가 맞는 인터넷신문에 기고를 했으며, 청와대 언론팀은 코드가 맞는 인터넷매체 대표를 접대했습니다. 정부기관과 공기업은 코드가 맞는 매체에 광고를 몰아주고, 청와대와 코드가 같다는 인터넷 매체 대표는 실족 후 오히려 힘이 노출되어 돈을 더 벌었다는 호언을 하면서 개혁만 팔아도 10년은 먹고 산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학벌과 지연, 혈연을 차단하겠다며 집권한 개혁세력이 집권한 다음부터 코드만 맞으면 승차시키는 새로운 특권열차가 등장하였습니다. 농장주를 몰아낸 민주화 투사돼지가 사람이 떠난 농장에서 농장주를 닮아 가는 소설 동물농장을 연상시키는 풍경이지요.
2. 심리조작 증후군
(1) 사고(思考)조작 :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전통적인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정상과 이상이 혼미상태에 있습니다.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관습을 흐리게 만드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지요.
* 헌법 준수를 서약하고 헌법을 훼손하는 이율배반성,
* 입으로는 화합을 말하면서 분열을 조장하는 도착(倒錯)성,
* 미래를 약속하면서 과거사문제로 정쟁을 일으키는 퇴행성,
* 언론자유를 말한 다음 정부비판 신문을 역사반역이라고 공격하는 모순성,
* 미군 장갑차 사고로 죽은 여학생을 추모하는 촛불시위에는 몸을 던지면서 북한해군의 기습공격으로 희생된 해군장병 추도를 냉소하는 편협성,
* 탄핵방송 편파성 판단을 언론학회에 의뢰한 다음 불리한 결론이 나오자 평가자체를 거부하고 도망치는 무책임성,
* 성공한 한국의 공업화는 어두운 면을 강조하면서 실패한 북한 사회주의는 천리마운동을 구실로 장점을 부각시키는 이중성,
* 산업화주역을 독재정권에 부역한 기득권세력이라고 청산하자면서 그들이 만든 풍요에 무임승차하는 부도덕성,
* 김정일은 아버지가 일으킨 6.25전쟁에 책임이 없고 박근혜는 아버지의 군사독재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무원칙성,
* 유리한 판정을 하면 헌법재판소를 칭송하고 불리한 판정을 하면 수구기득권 앞잡이라고 매도하는 자가당착성,
이 신비를 푸는 실마리는 소설 1984 속의 심리조작 기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런던시민은 상반되는 사실을 동시에 수용하는 사고기술에 길들여졌습니다. 눈앞에 존재하는 사실이 진실을 누르고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정부가 금년 중에는 초코렛 배급이 줄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실제는 1인당 30 그램에서 20 그램으로 줄었다면, 모든 기록에서 ‘초코렛 배급은 앞으로 조정될 수 있다’로 정정되고 줄지 않을 것이라는 발표는 어떤 기록에도 남지 않습니다. 의식 속에는 배급을 줄이지 않겠다던 정부약속이 남아 있지만 눈앞의 현실이 지배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의식 속에 남아 있는 진실한 기억력을 죽여야 살아남습니다. 이것이 두 개의 모순되는 신념을 동시에 수용하는 이중사고(double think)이며 그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 알면서 모르는 척
* 양심은 진실을 알지만 말은 거짓을 교묘히 둘러대고
* 둘이 서로 모순임을 알면서 둘 다 믿고
* 논리에 대항하여 논리를 만들고
* 도덕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도덕적이라고 자칭하고
* 자유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당이 그것을 지킨다고 믿고
* 필요하면 무엇이든 망각하지만 필요한 때가 되면 다시 생각해 냈다 곧 잊고
* 무엇보다도 동일한 방법을 반복해서 적용하는--말하자면 최고의 교활함입니다.
반동에 기우는 합리적 사고방식 틀을 깨고 정부가 원하는 생각과 행동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1984 독재정부는 이중사고를 생활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 하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고흐름을 왜곡시킨 심리조작기술이지요.
노무현정부는 보수적 전통사고 틀을 깨기 위하여 이중사고를 국민에 강요한 일은 없지만 스스로 그렇게 행동하여 국민이 논리적 사고의 혼미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 정부는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며 내달리고 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사실이 국민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진실과 다르다면 1984 이중사고를 닮은 것입니다.
(2) 언어조작 : 노무현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특유한 언어를 구사하여 세간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처음에는 일과성 해프닝으로 해석하여 입방아를 찧었지만 독특한 언어선택이 계속되자 의도적 선택임을 눈치 채기 시작했습니다.
취임 초 평검사와의 대화에서 사용한 ‘막가자는 말이냐’가 한 때 경박한 표현이라며 회자되었지만, 단순하고 명쾌한 표현이 부차적 이의제기를 막고 계속되던 항변을 일거에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직’을 건다는 표현이 이어져 헌법상 지위를 함부로 도박에 건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지지집단을 향해 급박한 상황임을 알려 충성심을 촉구하고, 정치적 반대세력을 향한 임전무퇴 의지를 간결하게 전달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는 표현 속에는, 피를 상징하는 말을 선택하여 지지집단 전의를 불태우고 타협이 없는 일도양단적 대결정치 결의를 알리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노무현대통령이 문제의 ‘말’을 하고 나면 정부 내 해당부처는 물론 여당과 의회 심지어 친여시민단체까지 총동원되어 ‘말’에 함축된 정치적 의도를 받드는 충성심 경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결국 상식을 뛰어넘는 노무현대통령의 언어선택은 지지집단과 반대세력을 향해 정치적 의도를 간결하게 압축하여 전달하면서 부차적 해석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특유한 어법이 정치적 효과와 연결되는 과정은 소설 1984 속에서 언어를 조작하여 이데올로기를 통제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소설 속에서 독재정부는 신어(newspeak)를 개발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단어를 배제하고 정통성이 없는 단어를 무력화시켜, 이단적 사고는 언어상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 오직 당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만을 정확하고 민감하게 전달하고
* 이단(異端)에 속하는 뜻이 끼어들지 못하게 만들며
* 열성당원의 세계관과 정신관습을 표현하는 수단에 적합한 신어 개발
이와 같은 원칙에서 창조된 신어는 사고영역을 좁히기 위한 것이며, 사상이 언어에 의존하는 한 용어가 없으면 이단적 사고는 불가능하게 됩니다. 신어가 등장하면서 낡은 용어(oldspeak)는 개념상 없어졌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언어선택의 정확성은 오히려 위험하기 때문에 한 가지만 알고 모르는 것, 신어만 알고 낡은 말을 모르는 것이 곧 당을 향한 충성심을 보증하는 길이 됩니다. 정의? 도덕? 국제화?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용어는 범죄사고(crimethink)로 분류되어 없어졌고, 객관성? 합리주의와 같은 용어는 낡은 사고(oldthink)에 포괄되어 기피되었습니다.
노무현대통령 집권 이후 유행하는 신어들이 많습니다. 정부와 여당 그리고 진보세력이 정치적 반대세력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수구꼴통ㆍ보수기득권세력ㆍ냉전세력ㆍ 역사발전 걸림돌ㆍ 친미반북ㆍ 색깔론 등 표현은 청산대상을 고립시키는 신어에 해당되며, 소설 속의 낡은 사고(oldthink) 또는 범죄사고(crimethink) 집단을 상징합니다.
청산대상을 고립시키는 신어와 함께 동지를 결속시키는 신어도 있습니다. 소위 코드인사, 코드정치와 같은 형태로 표현되는 코드 아이덴티티가 진보세력을 규합하고 결속시킵니다. 대통령을 포함하는 집권여당 지도부의 경력특성을 종합하면, 반군사독재 투쟁 경력ㆍ 보안법 위반 전과 경력ㆍ 노동정치투쟁 경력ㆍ 친북 통일사회운동 경력ㆍ반미친북 교육투쟁 경력 등이 코드아이덴티티 요소로 떠오릅니다.
소설 속 신어는 이중사고(doublethink)의 수단이므로 신어에 익숙하면 주관적 판단에서 해방되어 자동적으로 벽돌장 같이 토막난 신어를 총알처럼 내뱉게 됩니다. 신어는 선택할 언어범위가 적고 INGSOC (English Socialism를 뜻하는 신어) 이념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뇌에서 선택하지 않고 후두만 이용하여 오리처럼 꽥꽥거리기에 편리합니다. 실제로 신어를 구사하며 속사포처럼 열변을 토하는 것을 신어로 오리말(duckspeak)이라고 합니다.
2004 한국에도 보수기득권세력의 입을 막을 때 또는 스스로가 진보세력 정통임을 과시할 때 사용하는 오리말이 있습니다. 뇌를 사용하지 않고 후두를 이용하여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표현; 색깔논쟁을 하자는 거냐, 낡은 냉전논리, 아직도 이념논쟁이냐, 기득권에 젖은 수구꼴통 등은 상대방을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는 청산대상으로 낙인찍고, 자기자신은 민주화 정통임을 과시할 때 사용되는 오리말에 해당됩니다.
노무현정부는 소설내용과 같이 이데올로기 실천수단으로 신어를 창제하여 강제로 통용시키지는 않았지만, 정권수립과 함께 국민을 동지세력과 적대세력으로 갈라 세우는 새로운 개념의 용어들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사고관습까지 지배할 만큼 위력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 1984의 언어조작과 유사한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3. 전쟁위협 증후군
국민이 위기감을 느끼는 오늘날의 시국을 언론에서는 심리적 내전상태 ㆍ 이념적 내전 ㆍ 정치적 내전 등 전쟁으로 표현하고, 국가원로들은 비상시국임을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노무현대통령 취임 이후 전쟁을 연상시키는 긴장과 불안한 대결분위기가 계속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은 취임초부터 총성없는 대언론전쟁을 진행중이며, 대중집회에서 시민혁명 계속을 호소하고, 정치적 결투에 해당되는 대통령 신임투표를 제안했습니다. 선거법 위반에 항의하는 야당과는 정치적 전쟁인 탄핵정국을 만들었고, 수도이전정책에 반대하는 여론을 대통령직과 결부시켜 대여론전쟁을 이끌었습니다. 우호적 관계형성을 거부하고 대결상황을 만드는 2004 한국사회기풍이 소설 1984 전쟁위협 사회기풍과 유사한 점은 여러 면에서 나타납니다.
소설 1984의 일당독재 수단 중에는 전쟁공포와 가상 지하조직 위협 속에 국민을 몰아넣어 이단이 나올 공간을 주지 않는 기술이 있습니다. 거리 도처에는 ‘전쟁이 평화’라는 현수막이 나붙고, 직장에서는 매일 한 차례 전직원을 강당에 집합시켜 ‘2분증오’ 이벤트를 만듭니다. 공분(公憤)을 자극하는 영상을 보여주고 시민을 적개심으로 무장시키는 것이지요. 적군이 병원선을 공격하여 환자들이 바다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잔인한 장면을 텔레스크린에 투사하거나, 증오하는 지하조직 두목을 등장시키면 군중은 흥분하여 광적으로 고함치며 발을 구르고 심지어 스크린을 향해 물건을 던지기도 합니다.
* 노무현대통령 어록에 등장하는 표적: 좋은 대학 나오고 크게 성공하신 분, 서울시내에 거대 빌딩 가진 신문사, 서울 강남사람들, 친일 3대가 떵떵거린다, 과거에 잘 해먹고 잘살았던 사람들, 독재정권 아래 등 뜯뜯하게 살았던 분들, 재벌과 유착해 부정부패한 경제 관료, 과거사를 그대로 두고 살아서는 3만달러면 뭘하겠나, 보안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야 등은 소설 속 ‘2분증오’ 행사에 등장하는 공분대상을 연상시킵니다.
탓하고 망신주며 상처를 헤집는 증오와 적대, 편견과 불신에 찬 특유어법은 실제로 군기잡기, 교시정치, 교시의 통치술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우군을 결집시키고 공격목표를 공시하는 논리구조를 지녔습니다.
4. 시민감시 증후군
지금 한국에서는 판사가 판결문을 쓸 때 감시자를 의식하고, 연구기관 전문가들이 정부정책과 연관되는 말을 기피하고 있으며, 일간지에 글을 올린 사람이 협박전화에 곤욕을 치렀다는 경험담이 나옵니다. 김수환추기경의 시국관이 마음에 안 들면 민족의 앞날에 심각한 ‘걸림돌’이라며 공격하고, 교수가 쓴 글이 걸려들면 학생을 보내 집단압력을 가합니다. 여당인사가 보수언론에 글을 실으면 벌떼같은 반격이 쏟아지고, 이들의 공격 대상에 오른 한 의원보좌관은 자살까지 생각하는 극한상황을 체험했습니다. 정보기관의 공식적인 감청회수가 갑자기 불어나고 정부는 언론전담반을 운영합니다.
G. 오웰은 소설 1984 사회를 병영(兵營)과 같이 설계했습니다. 대화를 감청하고 행동을 감시하는 전자감시장치 텔레스크린을 가정과 사무실은 물론 행인이 북적이는 길거리에 설치하여 사회전체가 군인막사와 같이 통제됩니다. 텔레스크린에 감지되거나 밀고자에 걸리면 사상경찰에 끌려가 실종되거나 치도곤을 당하기 때??시민의 표정은 항상 굳어 있고 당을 향한 충성심이 증명되는 말만 골라 합니다. 광장에 나 붙은 초대형 정치선전포스터 ‘대형이 지켜보고 있다’가 24 시간 감시체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노무현정부는 소설 1984 속의 텔레스크린과 같은 시설물도 설치하지 않았고 시민행동을 감시하는 공식기구가 없지만,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보수언론과의 투쟁 촉구, 폭주하는 정부기관의 반론청구권 행사와 손해배상 청구소송, 진보지식인과 시민단체의 무차별 보수꼴통 공격, 공무원사회의 코드인사ㆍ혁신신호등ㆍ혁신마일리지ㆍ혁신계좌ㆍ혁신동아리, 정부 고위층의 정책비평방향 제약, 국가정보기관의 통화추적과 감청기록 폭주, 여기에 시민단체를 자칭하는 사람장막이 사회 구석구석을 감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형이 지켜보고 있다’와 유사한 병영 기풍이 감지됩니다. 말하자면 시민활동을 감시하는 공식적인 장치는 없지만 감시하는 눈과 귀가 느껴지고, 사상경찰은 없지만 벌떼같이 덤벼드는 얼굴없는 집단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누가 사람장막을 치고 무엇을 감시하는가 에 집중됩니다.
국가 최고권력자가 시민단체 대표를 초청하여 환대하고 정부는 시민단체에 예산을 주어 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등식에서 보면 노무현정부와 친여시민단체는 뿌리를 공유하고 있음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부지(無所不至)하며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시민단체가 곧 정부의 눈과 귀에 해당됩니다. 판사가 판결문을 쓰면서 의식하는 감시자, 지식인이 말문을 열기 전에 살펴야 할 눈치, 글쓴이를 향해 겁을 주는 세력이 이들 사람장막입니다. 친여 NGO 사이로 연결된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가 시민감시 기풍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감시하는 대상은 무엇인가요? 보수적 판결을 하면 시민단체가 몰려가 항의시위를 벌이지만 진보적 판결을 한 판사는 중용되고, 보수적 시국관을 말한 추기경이 걸림돌로 청산대상에 올랐지만 ‘민족반역세력이 기득권을 지키고자 분단을 선택했기 때문에 동족상쟁이 일어났다’고 친북사관을 선전한 언론인은 독립기념관장에 천거되었습니다. 정부행적을 비판하는 글이 반론청구 대상이 되고 부총리가 연구기관의 연구테마를 제한하고 나섰습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정부여당의 정책에 반동하는 보수세력이 감시대상으로 떠오릅니다.
소설 1984는 순진하게 전자감시장치를 고정장소에 설치하여 표정을 관리할 수 있는 기회라도 있었지만, 사람의 장막은 함께 걷고 함께 말하고 함께 밥 먹기 때문에 표정을 꾸며도 얼굴을 돌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비판세력 머리 위에 반개혁ㆍ 반민족ㆍ 반통일ㆍ 반역사ㆍ 반인권ㆍ 수구반동ㆍ 냉전세력ㆍ 기득권층이라는 모자를 씌우고 무차별 공격하는 홍위병수법 앞에서 지식인은 위기감을 느끼고 공포심에 사로잡힙니다.
5. 역사는 반복되어야 하는가?
노무현정부에서 조성된 국론분열 현상을 조선조 말기의 개화파와 수구세력 대결이나, 미군정기의 좌우 대결현상과 비교하면서 역사반복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노무현정부 행정실적을 평가한 2004 국감에서는 청산대상 기득권세력의 전철을 벗어나지 못 한 사례가 넘쳐났습니다.
힘없는 기상청은 낡은 장비를 개선하지 못하고 고군분투하지만 수도이전에 반대하는 여론과 싸우기 위해 수십억원대의 예산이 투입되고, 한 옆에서는 수조원대의 예산낭비가 지적되었습니다.
걱정되는 것은 이념대립이 도를 넘어 역사왜곡으로 진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학생들이 박정희정부의 어두운 면만 배우고, 김일성시대 천리마운동의 공적만 찬양하는 환경이 된다면 사회주의 실패역사가 한국에서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옵니다. 이것이 2004 한국사회 위기의식의 참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할 일을 열린우리당이 대신하고, 북한이 할 지저분한 일을 한국정부가 기꺼이 떠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소설 1984 풍경을 언급한 외신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소설 1984 풍경을 연상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위기의식은 공포심으로 증폭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