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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阿毘達磨, 산스크리트어 Abhidharma)란>
1.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라는 개념
‘아비달마(Abhidharma)’란 불교학의 역사에 있어서
한 시대에 국한해서 부르는 말이다.
즉, 부파불교시대에 불교를 연구한 학문을 아비달마라 하고,
부파불교시대의 불교를 아비달마불교라 한다.
‘달마(dharma-다르마)’라는 말은 진리란 말로
불교가 생기기 이전부터 인도사회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불교에서 사용할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 혹은 법(法), 진리란 말로 사용된다.
아비달마(Abhidharma)라는 말은 불교 독자적인 용어인데,
문자적으로 보면, ‘법(法)’으로 번역되는 dharma에다가
‘~에 대해’를 뜻하는 접두어 ‘abhi-’가 첨가돼 만들어진 단어이다.
따라서 아비달마의 뜻은, 「abhi + dharma = 대(對) + 법(法)」으로서 대법(對法)이라 하겠는데,
‘교법(dharma)에 대한(abhi-) 연구’라는 의미이다. -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학습⋅연구’라는 의미이다.
정리하면,
불교 진리[법(法)]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해석을 아비달마라 했다.
현장(玄奘) 법사는 아비달마를 ‘대법(對法)’이라 번역했다.
실제에 있어서는 경전 중에 난해한 문구를 주석하기도 하고,
간단한 경전을 상세하게 해석 설명하기도 하며,
여러 경전에 흩어져 있는 단편적인 교설들을 한데 모아
교리 체계를 조직하기도 한 것이 아비달마이다.
아비달마를 한 마디로 말하면,
부처님 가르침(법)의 표준화 작업이라 할 수도 있다.
아비달마들로 이루어진 책을 논서(論書)라 하는데,
이런 논서들은 B.C. 2세기 무렵 아소카왕(Asoka, B.C. 304~232)
시대부터 작성되기 시작했고,
점차 많은 논서가 작성되고, 기원 전후에는 그것들을 모은
논장(論藏)이 성립돼,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이라는 삼장이 구비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삼장(三藏)이 불교문헌의 총칭이 됐다.
말하자면 삼장이 곧 대장경이다.
부처님 교법에 대한 정리 해석은 이미 초기경전 안에서도
일부 이루어지고 있었다.
빠알리어 경장 중 소부(小部, Khuddhaka nikaya)에 속하는 <닛데사(Niddesa, 義釋)>는
사리자(舍利子, 사리풋타/Sāriputta)의
작품으로 여겨지며, 매우 아비달마적인 초기 논장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빠띠삼비다막가(Patisambhidamagga, 無碍解道)>는
역시 소부에 속하는 사리자의 작품인데, 이는 여러 교리적 개념들에 대해 분석하고,
실천수행 덕목을 해설한 것으로서,
이것도 상당히 아비달마적인 내용이어서 실제로 논장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될 경우가 있을 정도이다.
부파불교시대에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져 마침내 경전 속에
도저히 포함시킬 수 없을 만큼 확장됐을 때,
경전으로부터 독립해 '아비달마 논장'이라고 하는
불교성전의 새로운 장르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여러 부파의 경장(經藏)은 어쨌든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는 유사하지만,
논장의 경우 그 내용을 완전히 달리하며,
이로 인해 이 시기의 불교를 바로 아비달마불교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비달마란 경ㆍ율ㆍ논 삼장(三藏) 가운데 논장(論藏)을 일컫고,
협의의 아비달마는 부파불교의 여러 논(論, sastra)과 논서(論書)를 말한다.
교단분열에 의한 부파불교는 ‘계율’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에서 시작됐지만
교단이 분열되자 ‘경’에 대한 해석에도 부파마다 다른 견해를 갖게 됐다.
그 결과 각 부파는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에 따라 아비달마라 불리는
독자적인 교리해설서, 즉 논(論) 및 논서(論書)를 편찬했다.
그리하여 아비달마의 일차적 의미는 부처님 법(가르침)에 관한
체계적인 해석, 주석, 연구, 정리, 요약한 것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아비달마가 성립된 것은, 원칙적으로 북방 <아함경(阿含經)>이나
남방 <니까야(Nikaya)>가 부처님의 뜻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고 봐서,
일종의 부족분을 메우고, 나아가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한다는 입장서 출발했다.
결국 아비달마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학승들의 연구, 주석, 설명,
조직에 의해 하나의 지적체계로 정리한 결과”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 출현한 갖가지 논, 논서, 논장도 마찬가지로 아비달마로 부른다.
「스리랑카 섬에서의 남방 상좌부불교는 2-3개의 유력한 사원세력으로
분열돼 있었다.
이들은 각자 고유하고 다양한 논서들을 바탕으로 아비담마(pali. Abhidhamma) 전통을 전개했다.
그 중 가장 큰 세력이었던 마하위하라(大寺, Mahavihara)는
정법(正法)의 순수성이 자신들에게만 전해졌음을 강조하며,
그들의 아비담마를 최고의 가르침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를 철학적으로 변호하고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논리와 근거를 도입했다.
그들에게 아비담마는 자신의 정체성이었으며,
이후 이것은 스리랑카 섬의 종교정체성으로까지 확장됐다.」 - 김경래
따라서 남방 상좌부불교에서는 경장보다도 오히려 논장이 그들의 정체성을 발휘하고
입증하는 교의로 생각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한 특징이 있었다.
2.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의 특징
아비달마가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부처님 생전에 이루어지기 시작해서 아비달마가 점차 형성돼 갔다.
상당부분은 부처님 입멸 후에 세월이 지나고 불교 전파지역의 확대에 따라
교설 속 어떤 어구에 대해 주석하고 설명할 필요가 더욱 많아짐에 따라
승단 내부에서 점차로 발전한 아비달마적 연구내용을 제자들이 부가했다.
그리하여 각 부파마다 앞 다투어 부처님 교리와 계율을 연구하고,
정리해서 방대한 논서(論書)를 작성했다.
그래서 아비달마불교는 풍부한 논서의 발달을 이룬 것이다.
그만큼 부파불교시대에 교리에 대한 연구가 심도 있게 이루어졌고,
전문가적 이론중심 불교가 됐다.
• 자기네 부파에 유리하도록 아비달마가 형성되다가보니,
교리 상의 해석에 있어서 부처님 원래 정신에 어긋나는 경향도 있었고,
지나친 이론중심 불교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이런 이론중심 현상 때문에 이에 반발해서
뒷날 대승불교가 나타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초기경전 안에서 갖가지 교설을 정리하고 배열 ‧ 조직한 경우가 있다.
초기경전에서 논사들이 교설을 정리하고, 조직한 일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숫자와 관계있는 교설을 그 숫자대로 정리해
일법(一法), 이법(二法), 삼법(三法)과 같은 순서로 배열하는 방법이 있었고,
교설을 내용에 따라 분류, 구별해서 동일한 주제를 가진 것들을 모아
한 곳에 정리 배열하는 방법이 있었다.
전자를 ‘법수(法數)’에 의한 정리라 하고,
후자를 ‘상응(相應)’에 의한 정리라고 했다.
다수 경전들을 모아 동일한 방법으로 전체를 정리한 것이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이다.
상응(相應)에 의해 정리하는 방법은 단경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경군(經群) 상에서 그것을 적용시킨 예는 많은데, 다수의 경군을
그 같은 방법으로 정리한 것이 <상응부아함(相應部阿含)-상윳따니까야>,
즉 <잡아함경(雜阿含經)>이다.
• 그리고 부처님 설법은 대기설법(對機說法-방편설법)이어서
단편적 삽화적 비체계적으로 설해진 경우가 많았다.
이런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불교의 기초적인 관념을 추출해,
이를 장대한 사상으로 조직화하고 체계화한 것은 확실히
아비달마 논사(論師;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의 공적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업적이 없었다면 후의 중관학파(中觀學派)와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와 같이 학문적으로 성숙한
대승불교철학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 불멸 후 직제자들은 부처님 법을 잘 보존하고
널리 전해 큰 공덕을 쌓고자 했다.
그들 각자는 부처님 가르침을 전한다는 사명감으로 충만해서
인도 전역으로 흩어져 부파를 형성하고 법을 전했다.
하지만 그들은 부처님과 같이 완전한 법안(法眼)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 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각자의 기억과 이해수준에 따라
불법을 받아들이고 전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 부파불교시대에 아비달마가 지나치게 번성한 데에 대해
과거 곱지 않은 시각으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구사론俱舍論)>을 비롯한 아비달마 논서(論書, Abhidharma-sastra)의 경우,
지나치게 형식적이며, 너무 사소한 문제에 관한 논의가 많다.
그 무수한 술어의 나열을 접하게 되면, 그들의 사상적 노작이 오늘에 있어서
전혀 무의미하고, 비현실적이며, 한가한 희론(戱論)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아가마(Agama) 경전의 어구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으며,
전통적 보수적이거나 분석적 형식적인 해석에 치우친
사변철학(思辨哲學)으로 흘러, 청신함과 새로움, 발랄함을 잃어버린
번쇄한 철학으로 평가 받는 점이 있다.
그래서 아비달마의 작업이 번뇌를 끊고 행복을 추구한다는
부처님 본뜻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부파불교 교리는 부처님의 생생한
깨달음의 원음이 아니라 부파논사들이 철학적 사유로
정리 보완하고 취사선택한 이론체계였다.
초기경전을 <아함경>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아함(아가마/Agama)이란 말은 ‘전승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 말처럼 각부파가 조성한 경전은 구전으로 전해진 불설을
부파논사들이 정리하고 체계화시킨 것이지 부처님 친설(親說)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각 부파별로 자신들이 전승해온 경전과 논리를 기초로
경전을 만든 것이어서 각 부파마다 정립한 경전들이 부파에 따라
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함이 원인이 돼 부파들 사이에 다툼도 있었다.
3.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불교의 전개 - 논서의 발전단계
초기경전인 <아함경(阿含經)>의 내용은,
즉흥적 우연적인 요소가 많았던 부처님 교설을 불멸 후
정리해 전승한 것이기 때문에 본래 짧고도 단편적인 제경(諸經)의 집성이었다.
그러한 비체계적인 아함의 경설(經說)이 점차 정리되고 조직화돼
질서정연한 교의체계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과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즉, 아비달마는 크게 네 단계를 거쳐 발전했다.
1) 첫 단계는 부처님 원음을 있는 그대로 정리하는 단계였다.
제1차 불전결집에 의해 조성된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특징인데,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비달마는 아니며 경장(經藏) 가운데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할 만한 것들이다.
예컨대 전술한 바와 같이 부처님 자신이
그러한 주석과 설명을 하는 경우도 있고,
설법을 마친 후 제자 가운데 그것을 해설하는 경우도 있으며,
두 사람의 유력한 제자가 서로 대론(對論)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인데,
<숫타니파타(경집/經集)>나 <이띠붓따까(Itivuttaka, 여시어경/如是語經)>와 같은
초기경전들이 그러한 성격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전들은 부처님 일상의 삷 속에서 제자들과 자연스런
문답을 하는 과정을 그대로 기술했기 때문에 문구가 자연스럽고
순수하며, 사실을 놓고 그 인과법을 설하는 형식이었다.
이것이 깨달은 분이 법을 설하는 기본 형태이다.
왜냐하면 깨달은 분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사량(思量)으로
논리를 만들지 않고 맑은 반야심(般若心)에 비치는 대로
자연의 실상과 이치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단계는 아비달마적인 경향을 띠는 경장이라 할 수 있다.
초기 부처님 말씀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인연에 따라
자연스레 이루어졌기 때문에 비체계적으로 설해져 있거나
그 의미가 불명료한 개념들이 더러 있었다.
초기에는 주로 이러한 말씀을 정리하고 조직하며 해석하고 설명해
완벽한 체계를 갖추려고 했다.
이를테면 <증일아함경>이나 <중집경(衆集經, Sangiti suttanta)>과
<십상경(十上經, Dasuttara suttanta)> 같은 단경(單經)에서는
부처님 법을 법수(法數)에 따라 분류해 1법에서 10법,
혹은 11법으로 분류했다.
즉, 삼법인, 사제, 육근, 육경, 팔정도 12연기라는 분류들도
원 가르침에는 평범한 언어로 상황에 따라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밖에 없었으나
부파불교의 논사들에 의해 숫자적인 개념으로
알아보기 좋게 새로 정의했던 것이다.
그리고 <상응부아함(相應部阿含)=잡아함경>처럼 주제가 분명한 경들을
주제나 내용의 유형에 따라 정리했고,
여러 가지 개념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자세한 분석적 고찰이나
개개의 문제에 대한 전문적 연구 등이 두드러지게 발달했다.
예컨대 빠알리어 경장 중 굿따까 니까야(小部)에 속하는
<닛데사(Niddesa, 義釋)>와 <빠띠삼비다막가(Patisambhidamagga, 無碍解道)>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렇게 불교를 체계화하고 자신들의 언어로 열반, 무루, 무상, 무아, 중도,
공, 삼법인, 사성제, 육근, 육경, 팔정도, 12연기 등과 같은
개념과 이론들을 구축해나가면서 이러한 단편적인 정의들이
부처님의 전체적인 말씀과 모순되는 현상을 가져오는 면도 있었다.
부처님 살아계실 때는 모든 것이 하나의 삶의 이치로 조화됐으나
중생들이 자신들 생각으로 이론화하자 서로 모순되는 현상이라는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했다.
3) 세 번째 단계는 두 번째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장을 더욱 세밀하게 정리하고 체계화해 그 주제에 따라 정리하는 단계이다.
예컨대 설일체유부의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이나
<법온족론(法蘊足論)>의 경우,
전자는 앞의 <중집경(衆集經)>의 내용을 부연 설명한 것이며,
후자는 아함경전 중에서 21가지 중요한 교설을 선정해
이에 대해 상세히 해석하는 형태의 논서이다.
이 단계의 논서는 아비달마로 성립했지만 아직 경(經)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이 아니며, 말 그대로 다만 부처님 교법에 대한
해석⋅정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경전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논(論)’ 정도의 수준이었다.
4) 네 번째 단계에 있어서 아비달마는 단순한 아함경설의 해석이나
조직에 머물지 않고 그러한 기초 위에서 장대한 교의체계를 구축했다.
부파불교에 있어서 각 부파는 저마다 구전의 가르침[아가마(Agama, 아함/阿含)]을
불경으로 고정시킨 뒤에, 정리하고 해석해 명료해진 개념들을 가지고
교의를 조직화 내지 체계화했고,
여러 논사들이 독립적인 해석을 가해 거대한 불교학의 체계를 성립시킨 단계이다.
이렇게 종합적으로 해설된 교설들은 점차 부파에 따라
더 복잡한 체계로 해석되고,
각 술어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도 극단적일 정도로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져
방대한 분량의 논서가 만들어지게 됐다.
이때는 아비달마는 독자적인 연구논문 형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논장은 BC 3세기 목갈리푸타 팃사(Moggaliputta tissa,
목건련자제수/目犍連子帝須)에 의해 편찬된 <논사(論事, Kathayatthu)>로 알려져 있다.
이는 기원전 3세기경 아소카왕 치세의 제3차 불전결집 때 편찬됐는데,
이로써 그릇된 견해를 논박했다고 한다.
B.C. 2세기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에서는
이전의 개별적인 논의를 근거로 해 설일체유부의 학설 전반을
주요범주에 따라 8장으로 나누어 정리 조직해 논술하고 있으며,
A.D. 2세기에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과 같은
백과사전식 주석서가 작성되기도 했다.
A.D. 5세기 초에는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Abhidharmakosa-sastra)>이
등장함으로써 아비달마교학이 완성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아비달마 논사들의 노력에 의한 불교교리의 발전이 최종적으로
경⋅율⋅논 삼장으로 정립돼 오늘날과 같은 불교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방대하고도 체계적인 초기교리의 성립은 바로 이러한
아비달마 논사들의 피땀 어린 정성과 노력의 결과였다.
[출처] 블러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