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앞에서
창밖을 본다. 봄을 기다리는 계절, 2월 중순이다.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 추위가 웅크리고 있다. 창은 액자 속 그림처럼 계절의 변화를 전해준다. 창의 오염도에 따라서 바깥 경치도 맑거나 흐리게 보인다. 고층아파트의 창은 안에서 열심히 닦아도 바깥쪽은 손이 닿지 않으니 타인이나 자연의 손길에 의존해야 한다. 황사로 얼룩진 창이 밤새 내린 비로 인해 말끔히 씻길 때도 있다.
‘마음의 창’도 마찬가지다. 수시로 내면을 갈고 닦으려 해도 변화무쌍한 상황에 따라서 어두워졌다 밝아진다. 그동안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열흘 정도를 집안에 갇혀 지냈다. 감기 증세가 지속되더니, 오미크론 검사에서 ‘양성’이란 판정을 받아서다. 결과를 기다리며 불안했던 마음이 편해진 건,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체념일 것이다. 처음엔 견딜 만 했는데 격리 해제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집안에서만 지내니 거실 창문 앞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길어졌다. 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은 한결 따뜻하고 온화해 보인다. 평소에 무심히 바라보던 창밖 풍경이 새롭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그토록 소중할 줄이야. 빛과 계절이 머무는 창은 희망을 전해준다.
창문의 의미를 전해준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를 감상했다. 사십 년을 세상 밖과 담을 쌓은 채, 고서가 가득한 집안에서 칩거하는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윌리엄 포레스터’ 이야기다. ‘창가의 남자’인 그는 창을 통해서만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관찰한다. 우연히 가난한 흑인 소년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를 문학의 길로 이끌고 싶은 희망을 갖게 되면서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된다는 내용이다. 두 사람은 세대를 초월한 우정을 나눈다. 그는 인생의 겨울자락에서 자신의 마지막 작품도 남겼다.
전혀 통할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공통점은 외로움이었다. 문학과 지성의 교류를 통해 쌓인 두 사람의 우정은 깊은 감동을 준다. 포레스터는 소년에게 ‘글쓰기는 마음에서 떠오르는 대로 써내려가고, 다음에 머리로 다시 쓰라’는 가르침을 준다. 창은 세상의 안과 밖을 분리하는 경계선이다. 주인공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을 암시하는, 고층 창밖에 몸을 내밀어 바깥 창문을 닦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격리해제 날이 되자 차를 타고 남편과 동해 바다로 향했다. 그동안 집안에만 갇혀 지냈으니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서다. 차창을 통해서 본 산과 들, 나무들은 봄맞이를 위해 부산할 것이다. 김상용님의 시『남으로 창을 내겠소』란 시가 떠오른다. 소박하고 따사로운 분위기의 풍경을 그리며. 시의 마지막 구절인 ‘왜 사냐 건 웃지요’는 정점을 이루며 관조의 경지를 보여준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던 차 안과 달리 바깥은 꽃샘추위로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불빛 따라서 우연히 다른 집 풍경을 볼 때가 있다. 창을 통해서 본 실내 풍경은 따뜻하고 아늑해 보인다. 따스한 분위기를 동경하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서면 다른 세상일 수 있다. ‘쇼 윈도우 부부’란 말이 있다. 남들 앞에선 다정한 부부인 척, 하면서 실상은 남남처럼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는 부부를 일컫는 말이다. 나름의 사연들이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상처가 쌓여 얼음장 위를 걷는 기분으로 지낼 것이다.
아집으로 얼룩진 자신의 창을 닦아낸다면 얼어붙은 마음을 봄물처럼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창에 비친 느낌 그대로 안과 밖이 일치한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부부만이 아니다. 지인들과 잘 지내다가도 상대를 향한 마음을 닫고 서둘러 커튼을 칠 때가 있다. ‘창을 열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을 열면 행복이 들어온다.’고 한다. 차창을 통해 들어온 바람을 맞으며 마음도 열고 싶어진다.
바닷가 숙소에 들어서자 넓은 창을 통해 송림과 바다가 한 눈에 펼쳐진다. 시공을 초월한 풍경, 바이러스로 시달렸던 몸과 마음이 단숨에 씻기는 느낌이다. 회복기여서 찬바람을 피해 창문을 통해서만 바다를 보게 된다. 갇힌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창밖 풍경이다. 바다에 청록의 띠들이 밀려오다 하얀 포말을 이루며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간간히 갈매기들이 날아오르는 하늘을 보며 ‘리처드 바크’의<갈매기의 꿈>이 생각난다. 조나단처럼 높이 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자 찬바람과 우레와 같은 굉음이 쏟아져 들어온다. 성난 파도소리를 감상하다 다시 창문을 닫으니 ‘음 소거’를 한 것처럼 고요한 바다만을 전해준다. 극사실주의 화가 ‘엘리스 달튼 브라운’의 작품이 떠오른다. 투명한 커튼이 드리워진 창, 열린 창문 사이로 펼쳐진 바다 그림이 눈앞의 풍경과 오버랩 되면서. 파도의 울부짖음조차 고요히 품고 지내는 수평선을 ‘마음의 창’에 담고 지낼 것이다.
계절 중에서 봄은 ‘기다림’이란 단어가 잘 어울린다. 웅크렸던 몸과 마음이 깨어나 생동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귀가 후, 거실의 창문 앞에 서니 어느새 봄이 성큼 곁에 왔음을 알린다. 겨울바람에 시달린 창의 먼지를 말끔히 닦고 싶다. 잘 닦인 창은 새봄의 정경을 고스란히 전해줄 것이다. 어린 시절, 입김을 호호 불며 유리창을 닦던 그때의 맑은 눈으로 경이로운 계절을 맞이하리라.
첫댓글 일요일 카페 글 당번이 없으니 지송님이 등장하셨군요. 고맙습니다. 천천히 걸으면 자세히 보면 못 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지요. 오랜만에 적료의 시간을 보내면서 창가에서 보고 느꼈던 내용이 신선한 감동을 줍니다. 특히 마음의 창을 닦아야 함을 느끼면서 또 한번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좋은 시간를 가지시며 잔잔한 얘기를 전해주시네요. 저도 오랜만에 비온 모습을 보려 창문 밖을 내다봅니다.
우리 세대는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유리창을 보았지요. 대부분 한옥은 유리 대신에 창호지로 문을 만들었기에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요. 내 유년 시절의 집은 그나마 유리창이 있는 일본식집이어서 유리창을 통해 밖을 관찰할 수 있었지요. 거울이 귀했던 시절이라 나의 집 앞을 지나가는 여성분들은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곤 했답니다. 어떤 숙녀는 한참 서서 자신의 용모를 고치기도 하였는데 그 제스츄어가 마치 모델 같았답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일찍 기상하셔서 하는 일이 창문 닦기였지요. 창문이 더러우면 서글퍼 보인다고 하시면서.
그래요ᆞ유리창 먼지를 볼때마다
내 마음의 창에는 먼지가 없는지
를 생각하게 됩니다.
수개월 전에는 아들ᆞ며느리가 이사
를 간후 청소업체에 의뢰하여 아파트
대청소를 하여 유리창 밖까지 닦으니
내 마음의 창 먼지까지 없어진 기분
이었습니다.
불교에서는 탐내고ᆞ성내고ᆞ어리
석음을 탐진치 삼독이라고 합니다.
탐진치 삼독을 닦아내는것이 수행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무렵 직접 체험하셨군요. 그리고 평소에는 결코 대수롭지 않았던 창밖의 풍경을 동경하신 것 같기도 하구요. 내 주위의 아주 가까운 분들이 직접 코로나를 겪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는데, 이를 겪고난 분들의 말씀이 한결같이 자유로운 일상의 소중함을 더욱 새롭게 느꼈다고 하시더군요.
어떤분은 코로나를 겪으며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코로나와 아주 잘 어울리는 책이라고 하더라구요. 무고하게 갇혀 수용소에서 지낸 수년의 시간 속에서의 하루, 그런 고통과 아픔의 하루도 이반 데니소비치처럼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행복법을 배웠다고 하더군요.
세상만사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 보이네요. 모두가 우리 삶의 한 부분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