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천에 서린 고구려의 아련한 흔적 ~ 포천 반월성터(半月城址) - 사적 403호
▲ 반월성 서쪽 성벽
▲ 반월성 북쪽 성벽 |
포천시내 동쪽 청성산 정상부에 터를 닦은 반월성은 고구려 때 축성된 산성(山城)이다. 원래는 철원(鐵原)에 태봉국(泰封國)을 세운 궁예(弓裔)가 쌓았다고 막연히 전해져 왔으나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진행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의 성곽 임이 드러났다. 특히 '마홀수해공 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고구려 때 포천의 지명이 '마홀(馬忽) '임을 알려준다.
반월성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대동지지(大東地志), 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 견성지(堅城 誌) 등의 옛 기록에는 고성(古城), 산성(山城), 반월산성(半月山城), 청성(靑城) 등으로 나와있 는데, 둘레가 1,930~1,937척에 이른다고 한다. 현재 성의 길이는 1,080m로 지형은 북쪽과 서쪽 이 높고, 남쪽과 동쪽이 낮으며, 성문터 2곳(남문과 북문), 치성(雉城) 4개, 건물터 6개, 우물 터, 수구(水口)터, 장대(將臺)터, 망대(望臺)터 2곳이 있다.
포천이 고구려의 영역에 들어온 것은 4세기 후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때이다. 아리수(阿利 水, 한강)를 장악한 고구려는 포천 지역을 다스리고 혹시 모를 백제의 북진을 막고자 이 성을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신라가 이 지역을 점거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 북쪽으로 향하는 요새로 사용했을 것이며, 고구려의 부흥을 내세운 태봉의 궁예는 국도(國都)인 철원의 남쪽을 방비하고자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주둔시켰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광해군(光海君) 10년(1618년)에 영평(永平)에 감영(監營)을 두면서 이 성을 개축했는데, 그때 오래된 구리 숟가락과 쇠솥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그 빛깔이 전혀 변하지 않 았다고 한다. 이곳을 주진(主鎭)으로 삼고 중군(中軍)을 설치했으나 1623년(광해군 15년)에 서 인(西人) 패거리의 반란으로 광해군이 떨려나면서 반월성은 버려지고 만다. 그 이후 세월의 장 대한 흐름과 자연의 심술궂은 장난 앞에 제대로 방치되면서 산성의 위용(威容)과 모든 것은 먼 지처럼 흐트러졌다. 간신히 성곽 일부를 외부에 드러내며 수풀에 묻혀 살아오다가 근래에 고구 려 성으로 밝혀지면서 팔자가 180도 확 달라졌다. 300m 남짓의 성벽만 간신히 살아 숨쉬던 반월성은 1998년 사적으로 승진되어 국가지정문화재의 큰 지위를 누리게 되었으며, 2000년 이후 꾸준히 복원사업을 벌여 지금에 이른다.
이 땅(북한 제외)에 흔치 않은 고구려 유적으로 가슴이 떨리는 현장이지만 정작 마음과 피부에 와닿지는 않는다. 그냥 오래된 산성을 거니는 기분에 호기심이 +알파로 첨가된 정도랄까. 아무 리 고구려 성이라고 해도 중원고구려비나 아차산성처럼 상세한 정보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인 지도 또한 아직은 빈약하니 그런 듯 싶다. |
▲ 반월성의 제일 서쪽 성벽 ~ 마치 봉수대(烽燧臺)처럼 보인다.
▲ 반월성 서쪽 성곽에서 굽어본 포천시내 시내 건너편의 높다란 산은 왕방산(73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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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城郭)에는 오랜 세월의 떼가 거침없이 서린 옛 성돌과 어여쁘게 깎고 다듬은 하얀 피부의 반질반질한 새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며 성벽을 이룬다. 성곽 복원에 옛 성돌이 넉넉치 못 하여 새 성돌을 가득 채워 넣었다. 오랜 성돌과 성곽 위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는 옛 성의 중후 함을 느끼게 만드나 새 성돌 위주의 성곽은 근래에 만들어진 방어시설처럼 그다지 정감이 가질 않는다.
청성산 정상부에 자리한 탓에 조망(眺望) 또한 천하 일품이다. 성 서쪽에서는 포천시내와 왕방 산(旺方山, 737m)이, 북쪽에서는 신북면과 영중면, 남쪽에서는 군내면과 가산면, 소흘읍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게다가 산성 주변의 지세도 가파른 편이라 적군이 공격하기가 쉽지 않다. 왜 이 곳에 힘들여가며 성을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속세에서 반월성으로 가는 길은 2가지가 있다. 포천시내에서 청성공원을 거쳐 가는 길과 군내면 사무소에서 오르는 길이 있는데, 군내면 코스는 성 남쪽까지 수레 접근이 가능하다. 청성공원에 서 오르는 길은 시내와 가깝고 솔내음이 가득한 조촐한 산길이 주류를 이룬다. 답사코스는 청성 공원에서 산성을 돌아 군내면사무소로 내려가거나 그 반대로 군내면사무소에서 올라 청성공원으 로 내려가면 되며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산성의 동남쪽 성곽은 나무가 우거져 출입이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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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쪽 치성 |
▲ 장대가 있던 곳으로 여겨지는 자리 |
▲ 칼로 다듬은 듯 정연하게 늘어선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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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은 대체로 하나의 돌을 6개의 돌이 에워싸 는 6방식(六方式)으로 되어있다. 이는 고구려 성의 특징으로 우리나라와 중국, 왜국(倭國)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성벽의 기울기가 거의 80도로 이는 6방식과 더불어 고구려 축성의 특 징인 들여쌓기 방식이다. 칼로 싹둑 다듬은 듯 한 정교한 성벽은 비록 무거운 세월의 떼와 자 연의 태클에 많이 망가지긴 했지만 여전히 옛 모습과 위용을 자랑한다. 성벽의 높이는 4~6m로 성을 방어하는 여장이나 추락에 대비한 안전장치가 없으므로 성곽을 거 닐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호젓한 산행과 함께 옛성 답사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성곽을 따라 거닐면서 성을 뒤덮은 자연 의 향기에 마음이 시원해지며, 그 옛날 이곳을 지키던 군사와 군사시설들, 그리고 성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을 그 당시를 상상하며 성을 거닐 어 보는 것도 나름 쏠쏠할 것이다. |
▲ 수풀 사이로 비좁게 놓인 반월성 탐방로
▲ 반월성의 서쪽 부분 ~ 가운데 두툼하게 나온 곳은 장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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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성곽으로 들어서면 들꽃과 잡초가 무성한 들판 사이로 두툼하게 솟은 부분이 있는데, 장대 가 있던 자리로 여겨진다. 군사들과 군사시설로 가득했을 그곳에 이렇게 잡초만 무성하니 그야 말로 세월 무상이로다. 잡초에 단단히 억눌리며 오랜 시간을 숨죽여 지냈던 성벽은 애처롭기까 지 하다. 인간이 만든 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견고하다 한들 자연 앞에서는 언제든지 날라갈 수 있는 일개 먼지에 불과하다. |
▲ 힘차게 뻗은 반월성 북서쪽 성곽 산성 복원 이전에도 성곽의 모습을 그런데로 유지하던 구간으로 반월성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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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 성벽에서 바라본 천하 포천 신북면과 영중면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저 높은 산 너머로 태봉국의 중심지인 철원이 있어 궁예가 국도(國都)의 남쪽을 수비하기 위해 특별히 옆구리에 끼던 성이었을 것이다.
▲ 수풀로 무성한 북쪽 성곽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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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가 가득하여 반바지 차림으로 가기에는 조금은 꺼림칙하지만 그리 위험하진 않다. 서쪽 성 곽에서 동쪽으로 넘어가는 길은 오로지 이 길 하나 뿐이다. 잡초가 다리를 슬금슬금 간지럽히는 저 길을 넘으면 수풀길 대신 복원된 성곽길이 펼쳐진다. |
▲ 북쪽 성곽에서 동쪽 성곽으로 넘어가는 북동쪽 성곽길
▲ 차곡차곡 잘 다듬어진 북동쪽 성곽길
▲ 유연한 곡선으로 힘차게 뻗은 반월성 동쪽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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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간은 새 성돌의 비중이 매우 커서 고성(古城)의 분위기를 무척이나 떨어트린다. 하지만 그 러고 싶어서 그랬으랴?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산성은 무너지고 성돌은 하나, 둘 깨지고 사라진 상태에서 복원하기 위해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반월성의 운명인 것을... |
▲ 반월성 동쪽 성곽의 성문터로 여겨지는 곳
▲ 바깥으로 다소 튀어나온 동쪽 치성 치성 역시 고구려 성곽의 특성으로 효율적인 수성전(守城戰)을 위해 성벽 곳곳에 바깥으로 나온 치를 두었다.
▲ 자연에 묻히거나 자연의 일부가 되버린 반월성 남동쪽 성벽 인간이 아무리 잘나도 그들이 만든 것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한줌의 재로 사라지거나 자연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에게 늘 겸손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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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쪽 성곽은 위의 사진처럼 수풀이 무성하여 도저히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안쪽으로 나 있는 넓은 길을 이용해야 한다. 3분 정도 가면 발굴조사단 사무실로 쓰이는 컨테이너 건물이 있으며, 곧 삼거리가 나타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군내면사무소이며, 오른쪽 길은 가보진 않았 지만 막다른 길로 여겨진다. 한 치의 끊김도 없이 이어진 반월성은 남쪽에 해당하는 이 부분에 서는 붕괴하여 끊겨 있다. 아마도 3거리에 성문이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없어진 남쪽도 성문 과 더불어 어여 복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3거리에서는 군내면과 소흘읍이 두 눈에 바라보며 조망이 좋으며, 오래된 느티나무 1그루가 푸른 옷을 걸치며 자리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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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월성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1) 군내면과 가산면, 소흘읍 일대
▲ 반월성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2) 군내면, 가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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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월성의 말년을 말없이 지켜본 오래된 느 티나무 (경기-포천-28-1-5호) 수령(樹齡)이 거의 400년에 이르는 느티나무로 나무가 심어지던 때는 반월성이 군사기지로 한 참 쓰이고 있던 막바지 시절이다. 흐르는 세월 을 가지런히 양분으로 삼으며 무럭무럭 자라나 높이가 25m에 이른다. |
▲ 반월성에서 군내면사무소로 가는 숲길 느티나무에서 산내음을 마음껏 누리며 10분 정도 내려가면 군내면사무소가 있는 군내면의 중심지 구읍리(舊邑里)에 이른다. 구읍리는 옛 읍이란 뜻으로 포천고을의 옛 중심지였다.
▲ 속세에 오염된 안구가 싹 정화되는 푸른 하늘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청명한 그야말로 하늘빛 물결이다. 아무리 천재 화가가 그린다고 해도 결코 나오기 힘든 하늘의 푸른 빛깔~~ 사람이 만든 색깔이 어찌 대자연이 만든 천연의 물감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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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월성터 찾아가기 (2011년 10월 기준) * 서울 수유역(4호선)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2번 시내버스를 타고 신읍7통(기업은행)에서 하차 * 도봉산역(1,7호선)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2, 72-3번 시내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포천, 철원 방면 직행버스(15~20분 간격)를 타고 포천터미널 하차 * 의정부역(1번 출구를 나와서 왼쪽으로 4분 정도 가면 서울, 포천행 버스정류장이 있음)에서 포천 방면으로 가는 138번 계열 좌석버스를 타거나 길 건너편(동두천 방면) 정류장에서 72, 72-3번 시내버스 이용 * 포천터미널에서 운천 방면으로 2분 정도, 신읍7통 정류장에서 내린 방향 기준 오른쪽으로 가 면 구한내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포천천 위에 걸린 한내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10분 정도 직진하면 청성공원이 나오고 공원으로 들어서 충혼탑 좌측 산길로 15분 정도 오르면 반월성 서쪽 성곽에 이른다. 공원에서 반월성이 보이므로 성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 다면 찾기는 무지 쉽다. * 군내면사무소에서 오르고자 할 경우 포천시청 정류장(신읍7통 전 정류장)에서 20, 66번 시내 버스를 타고 군내면사무소(구읍리)에서 내리면 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울 → 포천 방면 43번 국도 → 포천3거리에서 우회도로로 직진 → 한내4거리에서 우회전 → 청성공원 주차장 ② 서울 → 포천 방면 43번 국도 → 포천3거리에서 우회도로로 직진 → 군내4거리에서 우회전 → 용정4거리에서 직진 → 군내면사무소입구에서 면사무소로 좌회전하여 길 끝까지 직진 → 반월성터
★ 반월성터 관람정보 * 청성공원에서 반월성을 거쳐 군내면사무소까지 1시간 정도 걸린다. (반대 코스도 마찬가지) *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산 5-1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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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포천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잘 보고 갑니다.
포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셨군요.
반월성과 향교,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충주문답 경기북부지역 답사를 하신다면 인근의 부부송인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 이항복묘와 함께 꼭 들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