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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구약에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오리라고 약속한 선지자임을 말씀하시면서 모든 율법과 예언은 세례요한까지라는 것을 가르치시고 세례요한 이후는 천국이 침노당한다고 하였습니다(마11:11,12절). 침노당한다는 것은 공격을 받는다는 말인데, 그럼 우리가 천국을 공격하고 계십니까? 만약 천국이 공격받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허락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은 공격받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공격하여 더 차지하길 원하십니다. 천국을 향해 진격하시길 바랍니다.
천국을 차지하라고 하는데도 달려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차지한 만큼 나눠주겠다는 분의 약속을 믿지 못함이거나 천국보다 내 손에 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집을 분양받을 때도 전망 좋은 곳을 차지하려고 애쓰는 만큼 천국도 소유하려고 달려가시길 바랍니다. 천국은 힘으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모함으로, 헌신으로 차지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달려가는 자에게 그 나라의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침노해야 하는데 실상은 그러하지 못함을 예수님은 아시고 이 세대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며 탄식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먼저 이 세대를 일컬어 무감각한 세대, 감각 없는 세대라고 하셨습니다(16,17절). 한 아이가 장터에서 동무들을 불러놓고 재미있는 놀이를 합니다. 아이가 결혼식 놀이를 하자면서 흥겹게 피리를 붑니다. 피리소리를 들으면 다른 아이들은 결혼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처럼 흥이 나서 춤추는 흉내를 내야 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합니다. 이에 그 아이가 이번에는 장례식 놀이를 하자면서 곡하는 흉내를 내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곡을 하면 나머지 아이들은 가슴을 치면서 흐느끼거나 슬픈 표정을 짓고 후렴구를 따라해야 하는데 역시 반응이 없습니다.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고 소 닭 보듯 무심합니다. 마음이 돌처럼 굳어 감각을 상실한 세대, 무감각한 세대입니다.
요즘 세대는 어떠합니까. 타인의 아픔이 내게 아픔이지 않고 타인의 슬픔이 내게 슬픔이지 않습니다. 부모가 아파서 신음하고 있는데 자녀는 게임에 빠져 있습니다. 자녀가 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 있는데 부모는 도박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철면피라고 했지만 요즘은 무뇌아라는 말이 나옵니다. 실제로 뇌가 없어 태어나는 아이가 있어서 생긴 단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무 생각도, 감각도, 감정도, 판단도, 분별도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흉악한 죄를 범하고도 도리어 큰 소리치고 떳떳해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무뇌아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잘못을 저지르다 잡히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는데 요즘은 얼굴 붉히지도 않고 당당합니다. 무감각한 세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비단 이것만이 아닙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렸지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나눠주신 떡에는 관심을 보였지만, 정작 예수님이 전하신 생명의 말씀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요5:40).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몰려든 무리들에게 이 떡이 너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자(요6:63) 예수님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문제, 육신의 강건함이나 축복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자기 영혼을 사랑하여 영생을 얻기 위해 나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하는 일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러한 세대였습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2. 그리고 조롱과 비방이 난무하는 세대라고 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귀신들렸다고 비방하던 저들이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조롱합니다(18,19절).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전한 복음에는 무관심하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는 데는 무감각하면서 도리어 타인에 대하여는 책잡으려 합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외면한 채 비본질적인 것에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남이 잘 하고 잘 되면 축하해주고 칭찬해주어야 하는데 도리어 비방하고 조롱하는 세대입니다. 또한 남의 쓴 소리도 귀담아 듣고 자신을 돌아보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바뀌고 성숙해져야 하는데 도리어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자기가 하는 것은 맞고 남이 하는 방식은 틀리다는 식입니다. 터무니없이 비교하고 비방하고 비난하기를 즐깁니다. 잘 하다가도 한 번 실수하면 악플이 수도 없이 달립니다. 운동선수들도 가장 힘든 경우는 무분별한 악플, 비방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스포츠기사에는 댓글 다는 것 자체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정말 잘못했거나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문제를 제기하고 냉정한 평가를 하고 비판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준이 되어 나와 다르고 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방을 매도하고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됩니다. 건전한 비판은 필요한 것이지만, 비난과 조롱은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이 세대가 그러합니다.
3. 또한 회개하지 않는 세대임을 지적합니다.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마을인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자,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이 고을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십니다. 저들에게 베푼 권능을 두로와 시돈과 소돔에 베풀었다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 권능을 베풀고 말씀을 들었으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큰 표적과 기사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전한 복음을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여 거절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들을 책망하며 회개하라는 말씀에 분을 삭이질 못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할 때도 큰 기사와 표적이 있으면 회개하고 돌아올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표적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표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마음이 죄의 유혹에 넘어져 둔해지고 더 나아가 강팍하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둔해지고 강팍하게 되면 회개는커녕 도리어 하나님과 말씀을 대적하고 자기들만 아니라 강팍한 자를 옳다 하여 하나님의 심판 날에 임할 진노를 쌓아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롬2:5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12:41,42절에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강팍하여 회개하지 않는 세대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4.마지막으로 더 높아지길 원하는 세대임을 지적했습니다. 23절입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사시다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주로 활동한 곳입니다. 마4:12에 보면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라고 합니다. 당시에 가버나움은 매우 부유한 도시로, 세관과 큰 회당도 있었던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많은 이적을 행함으로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고치셨으며, 중풍으로 누운 종을 낫게 하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셨을 뿐 아니라 회당장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또한 혈루증 앓는 여인을 낫게 하셨으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가버나움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오히려 예수님을 대적합니다. 자신들이 더 높임받기를 원합니다. 자신들의 명예와 부와 권세가 더 높아지고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버나움을 향해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사소한 일에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거나 무시당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높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멸망받기에 합당한 죄인이었고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용서해주셨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바로 깨닫고 간직하고 있는 자라면 내가 사람 앞에서 조금 무시당하면 어떻습니까? 나를 조금 알아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내려가시고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당해 음부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겸손이고 순종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닮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기꺼이 낮아지겠다는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마구간에까지 낮아져 오셨습니다. 랍비의 상징인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른 종의 자세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발 앞에 쭈그리고 앉으셨습니다. 물 대야를 가져 오시고 손으로 친히 발을 만지고 씻겨 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인도에서 사역할 때 하루는 한 어린이의 상처를 닦고 있는데 한 사람이 다가와 질문을 했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높은 자리에서 편안히 사는 사람들을 볼 때 부러운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삶에 만족하십니까?" 질문을 받은 테레사 수녀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네가 음부까지 낮아지리라”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고 하는 자는 주님이 도리어 낮추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앞에서 자기를 지극히 낮추는 자를 주님께서는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높여 주리라고 약속합니다. 주님은 섬김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까지도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자기 피알 시대라 해서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높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하거나 거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능한 채로, 연약한 채로, 부족한 채로 있으라는 것, 또한 아닙니다. 자신을 더 업그레이드시키고 자기에게 있는 달란트를 계발해서 더 많이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자기를 높이고 자기만족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높여드리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주님은 높아지게 되고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릴 통해 주님이 높임 받게 되길 축복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대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감각이 무뎌져서는 안 됩니다. 변화를 받아 새로워져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같은 장 15절에서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라고 합니다. 무감각하고 비방하길 좋아하고 회개하지 않고 높아지길 좋아하던 우리의 옛 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버리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접붙임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함께 울어주고 함께 가슴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머리와 발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맞추는 것입니다. 마음을 나누는 자가 진정한 동행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동행하는 자과 아니라 세상과는 역행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의 대세나 유행이나 풍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자입니다. 세상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 편에 서는 자입니다. 그리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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