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숙(柳淑)의 자(字)는 순부(純夫)이고 서주(瑞州) 사람이다. 충혜왕(忠惠王) 후원년(後元年, 1340)에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사록(安東司錄)에 임명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이 왕의 동생으로 원(元) 조정에 입시(入侍)하니 유숙이 따라가서 4년을 지냈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공민왕을 보좌한 자들이 많이 절개를 지키지 않았으나 유숙만은 홀로 변하지 않았다. 춘추수찬(春秋修撰)에 뽑혀 보임되었다가 삼사도사(三司都事)로 전임되자 벼슬을 버리고 원으로 갔다. 충목왕이 죽자 기로(耆老)와 백관(百官)들이 〈원〉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공민왕의 즉위를 청하였다. 〈황제의〉 명령이 장차 내려지려고 하는데 유숙이 어머니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날로 귀국을 청하였다. 어떤 이가 이를 만류하자 유숙이 말하기를, “충신(忠臣)과 효자(孝子)는 이름은 달라도 실상은 같고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本末]에는 순서가 있다. 하물며 임금을 섬기는 날은 길지만 어버이를 섬기는 날은 짧으니, 만일 〈어버이를〉 지키지 못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마침내 귀국하였는데, 어머니가 유숙을 보고 기뻐하여 병이 바로 낫게 되자 곧이어 다시 원(元)으로 갔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귀국하는 길에 요양(遼陽)에 이르러 유숙을 좌부대언(左副代言)에 임명하였다. 이후 우대언 좌사의대부(右代言 左司議大夫)로 승진시켜 국가의 기밀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으나 〈왕이〉 부르지 않으면 일찍이 내전에 가지 않았다. 조일신(趙日新)의 참소를 받고 파직되어 전장(田莊)에서 은거하고 있었는데, 왕이 연경(燕京)에서 시종한 공로를 기려 1등 공신으로 삼았다. 조일신이 처형되자 유숙이 마침 어머니의 상을 당했지만 다시 대관(代官)으로 기용되었다가 곧이어 판전교(判典校)에 임명되었다. 왕이 일마다 모두 자문하였으나 유숙은 측근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 자주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하루는 환관을 시켜 두 번이나 불렀는데도 오지 않자 왕이 노하여 순군(巡軍)에 하옥하게 하였다. 판도판서(版圖判書), 전리판서(典理判書),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역임하였고 여러 번 승진하여 지원사(知院事)가 되었다. 기철(奇轍)을 처형한 공로를 기려 안사공신철권(安社功臣鐵券)을 하사받으니 유숙이 여러 공신들에게 말하기를, “공신의 녹권(錄券)은 곧 죄인의 국안(鞫案)이니 원컨대 서로 힘써 몸조심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당여(黨與)를 만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나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당여를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여러분들도 마음을 같이하여 왕실을 받들고 사사로이 당여를 만들지 않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이 황주(黃州)를 침입하여 형세가 매우 급박해지니 유숙이 말하기를, “나라에서 믿는 것은 성곽과 군량입니다. 지금 성곽이 완전하지 못하고 창고에 저장된 것도 없으니 장차 무엇으로 지키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남쪽으로 행차하는 방책을 결정하니 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 동수국사(樞密院使 翰林學士承旨 同修國史)로 승진하였다. 홍건적을 평정하고 장졸들에게 내릴 상을 논의하는데 판사(判事) 김귀(金貴)가 유숙에게 항의하여 말하기를, “황상(黃裳)과 김림(金琳)은 높은 벼슬을 무리하게 받았지만 저만 홀로 어떤 사람이기에 공은 큰데 상은 작습니까?”라고 하였다. 유숙이 부드럽게 말하기를, “공(公)은 서두르지 마시오.”라고 하면서 속담을[俚語] 인용하여 위로하기를, “어찌 앞의 부러움만을 알고 나중의 부러움은 생각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안우(安祐) 등이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을 죽이고 말하기를, “이제 이미 총병관을 죽였는데, 유숙이 대궐에 있으면서 매번 기이한 모책을 내니 두려워할 만하다. 어찌 그를 죽이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유숙이 이를 알아차리고 왕에게 알리기를,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면 무시하기 어려운데, 지금 여러 장수들이 신(臣)을 꺼리는 것은 단지 전하의 측근에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을 내쫓으시면 신은 한낱 평민일 뿐이니 누가 다시 말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삼아 나가게 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지도첨의(知都僉議)로 불러들였으며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 칭호를 하사하고 평리(評理)로 옮겨주었다.
왕이 손수 교서(敎書)를 써서 폐인(嬖人)에게 공주(公州) 창고의 쌀을 하사하니 안렴(按廉) 이지태(李之泰)가 말하기를, “임금의 명령은 반드시 양부(兩府)를 거쳐서 내리는 것이며, 또 병량(兵糧)은 함부로 사람들에게 줄 수 없다.”라고 하면서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왕에게 호소하니 왕이 노하여 죄를 또한 예측할 수 없었다. 유숙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자 임금이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일은 모두 경(卿)이 한 짓인가?”라고 하면서 유숙을 보고 나가라고 하니 유숙이 달려 나갔다. 왕이 다시 그를 부르자 유숙이 이지태의 말을 모두 왕에게 아뢰고 또 말하기를, “전하가 노여움을 풀지 않으시면 신은 후세의 구설에 오를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화가 풀려서 불문에 붙였다. 후일에 유숙이 사죄하여 말하기를, “신이 은혜를 받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나 티끌만큼의 보답도 없이 도리어 입을 놀려서 함부로 임금의 위엄을 거슬렸으니 죄를 용서받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황금(黃金)을 하사하면서 위로하고 또 말하기를, “경의 말에 상을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숙이 과분하다고 하여 퇴직을 청하니 서령군(瑞寧君)으로 봉하였다. 흥왕사(興王寺)의 변란 때 왕이 밀실에 피해 있다가 적들이 서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늦게 왔느냐?”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홍언박(洪彦博)과 유숙을 죽이느라 늦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잠시 후에 여러 장수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토벌하는데 유숙이 그들을 따라서 들어오니 왕이 말하기를, “경이 이미 죽었다고 말하기에 다시 못 볼 줄 알았소. 경의 얼굴을 보고서도 사실인지 의심하다가 경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의심이 풀렸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政堂文學 兼監察大夫)에 임명하고 1등 공신으로 책봉하였다. 또 신축년(辛丑年, 1361)에 호종한 공로를 기려 역시 1등 〈공신〉으로 책봉하였고, 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僉議贊成事 商議會議都監事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로 승진시켰다. 신돈(辛旽)에게 거슬려 파직되었다가 다시 서령군(瑞寧君)으로 봉하였다. 유숙은 왕이 시기가 많아 공신들 가운데 온전히 살아있는 자가 적은 것을 보고 여러 번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유숙이 병을 핑계로 조회하지 않고 손님들과 만나지 않은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처음에 신돈(辛旽)이 대궐에 출입하자 유숙(柳淑)이 이를 얼마 동안 막았는데, 〈신돈이〉 기용되어 권세를 휘두르고 대신(大臣)들에게 누명을 씌우니 기세가 두려울 정도였다. 매번 유숙을 불러도 유숙이 가지 않으니 신돈이 이를 마음에 깊이 담아두고 또 유숙의 충직(忠直)함을 미워하여 온갖 방법으로 참소하고 헐뜯었다. 왕은 점차 이를 믿어서 유숙을 불러 손을 잡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경을 의지하여 영원히 측근[股肱]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어찌 이리도 기력이 약해졌는가? 경이 숨기지 않고 뜻을 말하면 오로지 경이 바라는 대로 하겠소.”라고 하였다. 유숙이 시골[田里]로 물러나기를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장상(將相)·대신(大臣)·문생(門生)·고리(故吏)들이 함께 교외(郊外)에서 전별하니 수레와 말이 길에 가득 차서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유숙이 시(詩)를 지었는데 그 마지막 연에 이르기를, “충성이 약해지고 성의가 엷어진 것이 아니라, 큰 명성 아래 오래 있기가 어렵도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명철함을 가상히 여겼다. 유숙이 떠나자 신돈의 세력이 날로 번성하여 거리낄 것이 없었다. 나중에 왕이 오히려 유숙을 잊지 못하고 그에 대한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신돈은 유숙이 다시 기용될까 두려워하여 반드시 해를 입히려고 몰래 유숙의 죄를 찾았다. 어떤 사람이 신돈을 위하여 유숙의 시를 읊어주자 신돈이 왕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유숙이 물러나기를 청한 것에는 깊은 뜻이 있는데 주상께서는 아십니까?”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무슨 뜻이냐?”라고 하였다. 신돈이 말하기를, “유숙이 구천(句踐)을 주상에 비유하고 범려(范蠡)를 자신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물러나기를 매우 간절하게 청하였던 것입니다. 범려는 구천의 장수가 되어 오(吳)를 쳐서 이기고 오왕(吳王)의 비(妃)인 서시(西施)를 빼앗아 배에 싣고 가면서 말하기를, ‘까마귀 부리와 고기 아가미로 사람을 잡아먹는 형상이다. 큰 명성 아래 오래 있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유숙이 주상을 구천에 비유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여 그것을 들었는가?”라고 하니 신돈이 말하기를, “유숙이 떠나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한 연에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지금 유숙이 서주(瑞州)의 바닷가에 있으니 만약 범려를 본받아 배를 타고 가면 반드시 연도(燕都)로 향하여 덕흥군(德興君)을 세우기를 도모할 것입니다. 일찍 제거하셔서 후환을 끊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여러 측근들에게 묻기를, “유숙이 갈 때 시를 짓지 않았는가?”라고 하자 마지막 연을 들어서 대답하는 자가 있으니 왕이 그를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신돈이 유숙을 죽이려고 하자 왕이 신돈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이에 명령하여 매를 치고 〈관리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하여 가산을 적몰(籍沒)하게 하였는데, 신돈은 마침내 〈유숙을〉 영광(靈光)에서 목을 졸라 죽였다.
유숙은 은거하면서도 나라 일이 평소와 다르다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화를 당하게 되자 집안사람들은 유숙이 평소 하던 말대로 용뇌(龍腦)를 보내고, 또 달아나는 것이 낫다고 하여 좋은 말을 보냈다. 유숙이 말하기를, “임금과 아버지는 하늘이니 하늘로부터 어찌 도망칠 수 있겠는가? 또 죽고 사는 것은 운명으로 마땅히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니, 장차 어디로 도망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죽을 때에도 얼굴빛이 평소와 같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아들 유실(柳實)과 유후(柳厚) 역시 모두 유배되었으므로 집안사람들이 뼈를 거두어 거적에 싸서 장사를 지냈다. 신돈이 처형된 뒤에 왕이 비로소 그 사연을 알고 매우 슬퍼하여 조서를 내려 원통함을 풀어주었으며 시호를 문희(文禧)라고 하였다. 〈그리고〉 유실과 유후를 불러들였으며 또 명령하여 예(禮)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신우(辛禑) 2년(1376)에 공민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