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12월달에 서울로 올라왔다.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 330번지에서 서울로 향한다. 완행버스에 온 가족이 몸을 싣고...
이불보따리하며, 양식등 필요한 가재도구를 완행버스에 싣고서, 아마도 8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내가 앉은 자리는 운전기사 아저씨 옆에 톡 솟아오른 엔진부분이다. 엉덩이가 따뜻하니 잠이 온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 까? 드디어 버스가 서울에 도착했다. 도착한 곳은 노량진역 앞이다. 창밖으로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님이 보인다. 버스에서 짐을 다 내리자, 그 부근에 있던 리어카꾼이 다가온다.
아버님이 흥정하신다. 1968년도 일이니, 정말로 시간도 많이 흘렀다. 이 모양이 베트남의 몇년전의 모습과 비슷하리라고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수단이 Cyclo라는 것이고 이것은 뒤에서 페달을 밟아 움직이는 것이고, 한국의 Rearcar는 앞에서 사람이 몸으로 끌고 가는 형태의 차이 일 뿐...
리어카에 올라타라고 하여서 형, 나, 둘째 여동생, 막내 여동생이 리어카에 올라타서, 지나치는 서울의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노량진에서 영등포 사거리로 들어간다. 그 사이에 언덕이 있다. 아버지가 뒤에서 미시고, 아저씨는 힘도 좋으신지 씩씩거리시면서 잘도 올라가신다.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아저씨가 뒤를 쳐다보면서 "재미있냐?" 하시면서 씩 웃으신다. 마치 당신의 자식들을 태우고 가시는 그런 정겨운 표정이다.
언덕길을 넘어서 영등포 사거리에 도착한다. 그런데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이야? 머리털 나고 처음보는 신호등이라는 것이 있는 데, 빨간불일때는 멈추고, 파란불일때는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지나간다. 너무나 오래된 사실이라, 정확한 날짜는 잘모르는 데, 아마도 겨울인데, 크리스마스철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지나치는 곳에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양남극장이라는 현판이 오른쪽으로 커다랗게 보이고, 조금 지나가니 구수한 냄새가 나면서 "진로"라는 회사 간판이 보인다. "아버지, 저기가 뭐하는 곳이야?" "저는 두꺼비를 만드는 곳이야" "두꺼비를 어떻게 만드는 거야 이곳에서..." "두꺼비는 술이름이고, 이곳이 유명한 소주 만드는 진로공장이란다" 그런데 술 만드는 공장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 것일까? 나중에 알고보니, 술을 고구마로 만들어서 냄새가 좋다고 한다.
양남동사거리, 그때는 몰랐지, 그곳이 깡패들의 소굴이라는 것을... 그냥 동네 형님들이었지, 내겐 피해가 없었으니 말이다.
양남동사거리에서 왼쪽으로 조금 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지더니, 드디어 우리의 서울 첫보금 자리에 도착하였다. 지붕은 회색빛의 스레트로 덮혀있고, 조그마한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들어가자마자 부엌이 있고, 오른쪽으로 방이 하나 달랑있는 그런 형태의... 지금으로 치면 쪽방인 것이다. 이곳에서 2년 동안 살았다. 그런데 화장실이 없다. 화장실은 몇 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이다. 저녁때는 괜찮은 데, 아침이 문제다. 우리집 식구 7명, 옆집 할머니 1분, 그 옆집 식구들 9명, 총 17명이 한개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동네 주변이 더러워질 수 없었던 것이다. 밤에는 보는 사람들이 없으니... 베트남의 몇년전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날 저녁때 머리털나고 처음으로 삼양라면을 끓여서 먹었는 데, 얼마나 맛있는 지... 이건 정말로 맛있는 국수다. 정말로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 아마도 내가 3인분은 먹어치운 것 같다. 그 때 나는 먹성이 좋아서, 다른 형제들한테 눈총도 많이 받았지만... 그렇다고 안먹을 내가 아니고...
그다음날, 동이 터오르자, 밖으로 나갔다. 다른 애들로 방학이라서 그런지, 아침부터 나와서 논다. 그때 옆집 옆집에 사는 나랑 동일한 학년이라고 하는 명재라는 애가 있었는 데, 이 자식이 나를 보자마자 "촌놈"이라고 하면서, 그리고 뭐라고 욕을 하는 데,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심한 것 같았다. 아침 해장에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처음이라 어떻게 하면 친구를 만들 수 있을 까 하고 그리고 주변에 대한 호기심도 있고 해서, 나갔는 데, 보자마자 촌놈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지랄이야...
쫒아간다. 내가 점점 가까이 달려가니... 뒤를 돌아보더니 갑자기 자빠진다. 이자식이 달리기도 못 하는 놈이...배 위에 올라타서 너 나한테 까불면 죽어하고 주먹을 내밀었다. 그러자 알았다고 해서 풀어주었다.
그런데 조금있다가 자기 형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온다. "형, 얘가 나를 때렸어" 울면서 말한다. 그때 그 형의 나이가 20살이나 되었을 까? 그러자 그 형이라는 사람이 자기 동생의 귀싸대기를 때리면서, "이 새끼야, 겨우 친구하고 싸운 것을 가지고 말 해!" 하면서 더 때린다. 내 참... 할 말이 없다. "형,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싸우지 않을 께요" 내가 먼저 말을 했다. 그러자 자기 동생 때리는 것을 멈춘다. 그러면서, "다시는 싸우지 마라, 친구들끼리 잘 지내라. 그런데 너는 언제 왔냐?" "녜, 어제 저집으로 이사왔는 데요. 충남 부여에서..." 그러자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친구 끼리 잘 지내라" "예"... 그 명재의 형이 알고보니 영등포의 깡패 행동대장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다음년도에 알게 되었는 데... 그런 형의 동생을 울렸으니 거 참... 그런데 이 명재라는 애도 싸움도 잘하는 애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런 상황을 아무것도 몰랐으니 그렇지, 만일 알았다면, 감히 덤비질 못했을 것이다.
그일로 인하여 명재와 둘도 없는 친구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어디를 가나, 건드리는 사람이 없다. 그냥 가기만 하면 된다. 알고 보니 명재뒤에 형이 있다는 것이, 커다란 방패였던 것이다. 아무도...
어머니는, 동아염직공장에 취직을 하셨고, 아버지는 (주)금강에서 근무를 하신다. 한때 아버지는 부여의 중앙병원에서 면허 의사가 아니시고, 무면허의사로서 근무를 하셨는 데, 그 경력이 나를 살리신 의술이 되었던 것이다. 나를 낳아주신 분도 아버지이시고, 죽을 뻔 했던 나를 다시 살리신 분도 나의 아버님이시다.
어머니는 동아염직을 다니신지, 얼마나 되었을 까? 폐병이 걸리신 것이다. 지금은 정말로 별 것 아닌 병인데, 10년 동안 고생하시다가 연세가 49에 돌아가셨다. 지금도 어머니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얼마나 억울하실 까? 아니야 지금 천국에서 하나님 곁에서 잘 계시리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어머님은 살아 생전에 믿음이 좋으셨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봉사를 하셨으니 말이다.
어머님의 가르침은 다음 편으로 넘기고...
그 명재라는 친구와 같이 하루 죈종일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니 어느새, 3월달이 되었다. 남들은 학교에 가는 데, 나는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이유는 이전의 학교에서 학적부가 도착을 해야 하는 데, 아직 이곳의 학교에 도착하지 않아서 아직은 안된다고 한다. 놀기만 하니... 전화가 있어야 전화를 해보지, 이것은 사람이 직접가서 확인해보는 수 밖에... 아버님이 시간을 내서 시골에 갔는 데, 학적부는 등기로 보냈는 데, 왜 아직 도착이 안되었는 지 모르겠다는 말만 듣고 오신 것이다.
드디어, 학적부가 왔다. 5월 1일날, 영등포국민학교에 갔다. 그런데 학교가 온통 만국기가 달려 있고 "날아라 새들아 높은 하늘을..." 노래가 쉴새 없이 확성기를 통해서 들려온다.
어머님이 한복을 곱게 입으시고, 나와 형을 데리고 학교에 갔다. 교장선생님이 나의 학적부를 살펴보시더니 "공부 잘했네, 그런데 서울은 시골과는 틀려, 공부 열심히 해야 돼" "예"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자식들 공부 잘해봐야, 얼마나 잘하겠어, 이것들 완전히 눌러놔 버려야겠어' 다짐 하면서,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걱정하지마, 내가 1등 할테니" "그래 우리아들을 그렇게 할 수 있지 누구 아들인 데"
다음날부터, 학교에 가야 한다. 그런데 서울에 마침 이모님이 오셔서 "교호야 내일 학교에 가서 인사말을 해야 하는 데, 내가 이것을 써줄테니 외워서 말해라" 지금 생각해보니, A4용지의 반 페이지는 된 것 같다. 물론 잽싸게 외웠다.
다음날 선생님이 나를 소개하면서 인사하라고 한다. 나는 장황한 인삿말을 했다. 참 당당하게도...
매월 말에 월말고사를 본다고 한다. 여기서는 왜 매월 시험을 보는 것이야. 그래 한번 시험보자.
5월말 시험 결과가 나왔다. 성적표를 주는 선생이 나를 부르더니 어머님 모시고 오라고 하신다. 어머님 모시고 오라는 소리는 모시고 오기 전에 엄마한테 죽도록 터지라는 말이다. 그날 집에 가서 성적표를 보여주자 마자 엄청 맞았다. 빗자루로... 내가 어머님한테 빗자루로 맞은 것은 국민학교때 그때 한 번, 중학교 1학년때 엄청 터진 것 두번이다. 아니 더 많이 맞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두번만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그것이 엄청난 나의 반전이 된 계기이기 때문이다.
왜 내 인생은, 극과 극일까? 내 인생을 가만히 돌아보면, 줄로 이어지는 삶이 아니고, 고리와 고리와 연결된 것 같은 삶인 것 같다.
다음 달에 어떻게 되었을 까요?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
|
첫댓글 이런 감질나는 방법도 다 하시다니... 너무 하십니다. 아마도 서울 상경기 이신듯... 좀더 풀어주시기를...
이제 점점 단장님의 기술이 들어오는것 같습니다. 궁금증 유발을 확실하게 시키시다못하여 폭발직전까지 끌고가시는군요. 어느정도 맥은 집히도록 풀어주시길.... 그리고 늘 감사하며 오늘도 주님안에서 건강하시고 축복된 하루되시길....
이야기가 너무 왔다갔디 하셔서...헷갈립니다....암튼 기대 하겠습니다... 재미 있슴다.
그것을 인생의 반추라고 하나요? 감사합니다.
단장님의 인생여정 1막1장이 시작되는것같습니다. 그옛날 드라마를 보는듯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리얼한 스토리가 전개되리라 믿습니다. 항상 궁금증을 유발시키시는 단장님 그뒤에 무엇이 있을지 늘 기대됩니다. 단장님 사랑합니다....
한편의 소설을 읽고있습니다.이글 다모아서 책으로 내야 하는것 아닐까요!
한꺼번에 읽을 수 있도록 편집하시겠지요. 단장님 너무 재미있습니다. 기억력이 이렇게 좋으신 단장님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