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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보면 그 시대에도 어린이들의 위치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9:13-15, 마가복음 10:13-16, 누가복음 18:15-17을 살펴보면 예수의 공동체가 어린이를 어떻게 대했는지 발견할 수 있지요.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 중에는 당연히 어린이도 있었고, 양육자들은 어린이에게 예수의 축복을 받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어린이와 양육자를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말리며 어린이들을 환대하셨지요.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봅시다. 이 이야기에서 어린이의 목소리를 발견하셨나요? ‘어린이를 배제하지 말고 환대해야 한다’가 이 이야기의 메시지라는 점은 확실하지만, 어린이의 반응·마음·생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소수자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도와야 한다지만 주체는 ‘그’가 아닌 ‘나’가 되는 도움들처럼, 우리가 현실에서 자주 발견하는 한계이지요.
성서 기자는 어린이가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어린이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이 오기를 꿈꿨을 것입니다. 사람으로 대우조차 받지 못했던 어린이를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표현했지요. 이는 시대적 상황에서 매우 파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서 기자도 그 시대 사람이었고 어른이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어린이가 주인공인 성서 이야기는 어린이를 위하는 어른들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어른들의 바람이 담긴 어린이주일 발표회
오늘날 예수 공동체의 모습은 어떤가요? 성서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저출생 현상으로 다음 세대가 사라지고 있음을 심각하게 인지하면서도, 현재 교회에 있는 어린이들은 돌봐야 할 대상으로 제한합니다. 교육부서는 평소 교회에서 고립된 섬처럼 따로 떨어져 있다가 어린이주일이 되거나 저출생, 고령화 이슈가 등장할 때만 반짝 관심받는 곳이 되기 십상이지요. 교육전도사들에게 어린이주일, 부활절, 성탄절은 고민이 깊어지는 때입니다. 어린이들의 발표회를 진행하는 교회들이 다수인데, 어린이들보다 어른들의 바람이기에 어린이들을 설득하는 데 꽤 애를 먹기도 합니다.
한 번은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가 어린이주일 발표회를 하자는 이야기에 “어린이주일인데 어른들이 우리를 위해 발표회를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동안 발표회가 어린이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고스란히 담은 말이라 얼굴이 화끈거리고 미안한 마음이 가득해졌지요. 그동안의 어린이주일을 돌아보았습니다. 어린이들이 주인공이 된,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주일을 준비한 적이 있었나?
안타깝게도 어린이들의 잘 자란 모습을 어른들에게 선보이는 행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지요. 어린이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기는커녕, 어린이주일이 어른들의 관심과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목회실에 이번 어린이주일은 발표회를 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많은 분이 예상하시겠지만, 어린이들은 발표회를 해야 했습니다. 단, 어린이들에게 선택권을 주었고,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았습니다. 발표회를 하지 않았던 어린이는 준비 과정, 발표회, 어른들 반응으로부터 소외되었지요. 발표회를 하고 싶지 않은 어린이를 위한 활동을 따로 준비하기에는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겨우 옆에서 혼자 할 수 있는 놀잇감을 준비해주는 정도였지요. 발표회를 하지 않은 어린이는 이 과정 내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어른들은 아무도 이 아이들 마음이 어떤지 살피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들이 발표회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노력만 이어졌지요.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가요? 어린이들이 주인공인 예배와 활동을 진행하고 있으신가요?
어린이를 위한 전 세대 예배는 가능한가?
저는 현재 섬돌향린교회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10년 정도 다른 교회에서 어린이, 청소년를 중심으로 사역하다가 만난 이곳은 사뭇 다른 분위기였지요. 섬돌은 주일에 단 하나의 예배를 드리는데, 어린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께 참여합니다. 예배 공간 맨 앞에는 어린이들이 바닥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놀면서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매트를 깔아놓습니다. 시끄럽지 않냐고요? 물론 여러 소리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섬돌 교우들은 그 소리들을 예배에 방해되는 소리나 소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섬돌의 예배는 ‘부름-노래(응답)-함께 드리는 기도-성찬-어린이 하늘뜻’으로 이어집니다. 여기까지 어린이와 청소년은 전 교우 예배를 함께 드리고 어른들의 하늘뜻(설교)이 시작하기 전에 교육활동 장소로 이동합니다. 예배 전체를 전 교우가 함께 드리도록 기획하기에는 여러 물리적·정서적 상황이 맞지 않아 더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한 미국 교회의 성공 신화가 한국교회에 퍼지며 ‘전 세대 예배’ 붐이 일어난 시기가 있었지요. 예배 후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며 오늘 예배 가운데 받았던 은혜와 느낌을 나누면서 서로의 영적 성장에 이바지하게 되는 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 곳곳에서 전 세대 예배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긍정적 기여도 있었겠지만, 어떤 교회들은 어른들 예배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어린이들이 함께 예배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그 예배는 어떠한 경험이었을까요? 전 세대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일지라도, 어린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앉혀만 놓은 예배의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부활절, 성탄절, 새해가 되면 어린이들은 어른들과 예배를 함께 드리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은 몸이 뒤틀리고 친구들과 다투고 울고, 청소년들은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어 눈 한번 쳐다보기 힘든 시간이었지요.
섬돌에서 전 세대 예배를 드린다고 했을 때, 지난 경험이 반복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섬돌은 예배의 소란스러움에 주목하기보다 어린이들도 어른과 동등한 교우로 인정하기 위한 노력에 주목했습니다. 그 노력 중 하나가 교회 등록 교우(정회원)에 어린이·청소년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어린이·청소년도 공동의회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아직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회의 안건을 설명해야 하는 난제가 있어, 이를 풀고자 노력 중입니다. 그래서 공동의회 참여 및 의결권은 어린이와 양육자의 선택에 맡기고 있지요. 청소년만 해도 충분히 회의 참여와 발언, 의결권 행사를 성인 못지않게, 때로는 성인보다 훨씬 잘한다는 사실을 섬돌 어른들은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쌓여 우리가 사회로부터 학습된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들을 발견하고 차별의 구조를 바꿔나가야 할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지요.
어린이 언어로 예배하면 메시지가 단순해지지 않을까?
어린이를 포함한 모두에게 열려있는 예배를 만들 때, 염려되는 사안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를 사용하면 예배 메시지가 단순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지요. 어린이가 예배 언어를 이해하려면 쉬운 말과 그림, 몸짓, 음악 등 비언어적 요소들을 함께 사용하거나, 활동을 통해 이해를 돕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하니까요. 쉬운 언어는 예배의 격을 떨어뜨릴까 봐, 비언어적 요소는 어른들에게 낯설다는 이유로 잘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매주 어린이 하늘뜻을 듣는 섬돌 교우들은 오히려 어른들에게 더 감동이 된다고 반응했습니다.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섬돌은 어린이 하늘뜻 시간에 그림책을 많이 활용합니다. 그림책은 어른들에게 효과적인데, 그동안 개념적으로만 접근하던 내용이 더 깊이 있게 때로는 가슴 뭉클하게 다가옵니다. 현대적 예배는 비언어적 요소 중 음악 정도를 사용하지만, 기독교 옛 전통을 살펴보면 음악뿐 아니라 이콘(성서나 교리를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한 도구)과 같은 미술적 요소도 사용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비유를 모두에게 눈높이를 맞춘 쉬운 전달법으로 주목하면서, 예배는 여전히 어려운 언어로 가득 채우고 있는 현실을 성찰해봅니다. 누군가에게만 익숙한 언어, 방법이 전통이란 이름으로 허락되는 문화에서 전 세대와 잘 소통하는 데 주목하는 문화로 나아가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실, 이것은 제가 가장 못하는 일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표현 방법 중 주로 언어를 사용하고 비언어적 요소는 낯설어하는 제가 가장 어려워하는 대상은 유아, 유치부, 1-2학년 어린이였습니다. 제가 준비한 예배에서 1-2학년은 소외되었지요. 그랬기 때문에 언어 발달이 빠른 어린이는 많은 칭찬을 받곤 했습니다. 제가 준비한 어린이 예배는 언어를 좋아하는 어린이가 기준이 된 예배였지요.
어느 날, 미술치료사인 교육부서 선생님이 제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린이들은 언어는 추상적으로 느껴 이해하기 어려우니 명료한 시각 자료가 필요해요. PPT 그림을 사용하고 있으신데, 한계가 있어요. 그림을 프린트해서 인형극처럼 해보시면 어떠세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지점이었습니다. 함께 동역하던 유아·유치부 전도사는 어떻게 설교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바벨탑 본문을 설명하면서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온 벽돌을 하나하나 쌓으며 이야기를 풀어 나갔습니다. “바벨탑이 와르르 무너졌어요!”라는 대목에서 벽돌들을 와르르 무너뜨리는데 어른인 제게도 그 장면이 잊히지 않습니다. 적잖이 충격받은 저는 지난날의 어린이 설교가 부끄러워졌지요. 어린이들에게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나 혼자 중요한 걸 가르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안전하고 편안한 교회를 위한 노력들
그때부터 예배의 전 요소를 단순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여러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으면 어린이들은 기억하기 쉽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됐지요. 한 가지 주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예배를 기획했습니다. 한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 음악, 미술, 신체 활동, 과학적 요소를 활용하여 어린이들이 그날 그 주제만큼은 다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앉혀져 있던 예배가 어린이들이 신나게 참여할 수 있는 예배로 바뀌기 시작했지요.
또 하나의 아이디어는, 어른들 언어로만 만들어진 사순절 묵상집을 쉬운 언어와 활동으로 풀어보고자 한 것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함께 볼 수 있는 교재라고 주제가 가벼워지지 않으려 했지요. 지구에는 사람뿐 아니라 생태이웃들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모두 함께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내용으로 채워졌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 행동이 의도하지 않아도 차별과 혐오로 연결될 수 있다고 알려주고 나의 불안, 불편을 건강한 방식으로 다루는 방법들도 제시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들은 지식이 아닌 경험으로 배워야, 그리고 일방적인 방법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낼 때, 어른도 어린이도 풍성하게 배우고 느낄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이도 편안하고 안전한 경험을 충분히 하고, 낯선 경험도 함께 머물러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런 경험은 어른에게도 필요하지요. 교육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낯선 경험을 어린이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쥐여주고 있지는 않나요? 어른이 기준인 경험을 잠시 내려놓고 어린이들이 기준인 낯선 걸음을 걸어볼 때 모두에게 감동이 되는 경험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가장 소수자에게 맞춰진 교회는 모두에게 안전하고 편안한 교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을 시작하며 다루었던 성서 이야기에서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던’ 어린이의 목소리를 찾아 재구성해 보면서 이만 줄이려 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모여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니! 어떤 사람일까? 두근두근.’
예수님이 궁금해진 어린이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막 뛰어갔어요. 그런데 키가 작은 어린이들은 예수님 앞으로 갈 수가 없었어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거리는 어린이도 있었고, 울음을 터뜨린 어린이도 있었어요. 이때 한 사람이 어린이들이 예수님과 만날 수 있게 앞으로 데리고 가주었어요. 어린이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알아차리기를 바라며 반짝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았어요. 앗,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아요.
“‘예수님 여기 좀 봐주세요!’ 하고 크게 소리 질러볼까?” 한 어린이가 이야기했어요. “어? 사람들이 다 쳐다보면 어떡해. 그건 너무 부끄러운데….” “시끄럽다고 어른들한테 혼나면 어떡해.” 어린이들은 예수님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어요.
한 사람이 어린이들을 대신해 예수님을 불러줬어요.
“예수님, 여기 어린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어요. 축복해주세요.”
어린이들은 신이 나서 예수님에게 다가갔어요. 그때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 곁에 갈 수 없도록 막았어요. 어린이들은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웠어요. 혼이 나는 것 같아 다리가 덜덜 떨리고 오줌이 마려워지는 것 같았어요. 그때 예수님이 어린이들에게 말씀하셨어요.
“놀랐지요. 미안해요.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에요. 언제든 나를 만나러 와도 좋아요. 주저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야기하셨어요. “어린이들을 여러분과 다르게 여기지 마십시오. 어린이들도 여러분과 똑같은 귀한 존재입니다.”
어린이들은 어깨가 으쓱해졌어요. 어른이 아니어도 지금 그대로 멋진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첫댓글 어린이들이 주인공이 된,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주일..
어른이 기준인 경험을 잠시 내려놓고 어린이들이 기준인 교회..
이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생각해보니 딱 맞는...앞으로 더 많은 지혜를 모아 아이들 앞에 서야겠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나 중심의 사고방식을 아이들 중심으로 바꾸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