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는 박수(clap)는 없다>
[1] 좁은 오피스텔을 전전하며 살다 보니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할 때마다 불편할 때가 많다. 밤늦게 들어올 때면 어김없이 주차장이 다 차버려 밖으로 다시 나가서 한참 떨어진 골목에 주차를 하고 올 때가 종종 있다. 그랜드 카니발 차량이다 보니 빈자리가 있어도 주차 공간이 너무 좁아서 파킹하기가 어려울 때가 부지기수로 많다. 좁은 지하 주차장에서 주차할 때마다 고생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 사정 잘 모른다.
[2] 그런데 빈 공간 한 자리에 주차하기도 어려운 비좁은 주차장에서, 한 대의 차가 주차 공간 2칸을 떡 하니 홀로 정중앙에 걸쳐서 차지하고 있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주차하러 드나드는 사람마다 손가락질 하며 욕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다른 주차맨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있는 차주가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할 만하다. 그런데 사연을 알아보면 정말 박수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3] 최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자리 2칸 차지하는 슈퍼카 오너 인성”이라는 제목으로 2장의 사진이 공개됐다. 공개된 사진을 보면, 람보르기니 우라칸으로 추정되는 빨간색 스포츠카가 주차돼 있는 모습(아래 사진1)이다.
람보르기니 우라칸은 우리나라에서 약 3억 원에 판매되는 세계적인 스포츠카이자 슈퍼카다. 그런데 해당 차량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주차 자리 2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4] 자리를 조금 벗어난 것도 아니고, 당당히 정중앙에 걸쳐 2칸을 차지해버렸다. 이를 보고 “무개념 차주다”라며 욕할 수도 있지만, 모두가 그를 칭찬했다. 이유가 뭘까? 우선 그가 2칸에 걸쳐서 주차를 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을 배려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슈퍼카 옆자리는 사실 죽은 공간이다. 만일 누군가가 슈퍼카 옆에 주차하다가 조금이라도 실수해서 흠집을 내는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5] 자칫 잘못하면 자기 차를 팔아서도 배상해주기 어려울 수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해당 차량에는 이런 문구가 부착되어 있다. “이 차는 주차 공간 두 대의 이용료를 지불했습니다.”(아래 사진2) 남을 배려한답시고 자기의 권리만 생각하며 당당히 한 대의 주차비용만 지불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별로 없을 게다. 타인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불가피하게 취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라 양해를 기대하며 그냥 있을 수도 있었다.
[6] 하지만 이 차주는 자신이 지불해야 할 이용료인 남들의 두 배에 해당되는 주차비를 지불함에 인색함이 없었다. 이런 모습에 누리꾼들도 “이건 인정”, “슈퍼카 차주 멋지다”, “오히려 감사할 뿐” 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가 봐도 참 잘나고 멋진 사람 같아 기분이 좋다. 사실 돈이 많은 부자일수록 더 짜고 인색한 경우를 자주 본다. 금수저랍시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마구 갑질해대는 눈살 찌푸려지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7] 매일 매스컴을 통해 전달되는 비극적 뉴스들은 다 배려의 부족으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들이다. 조금만 주변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의 공동체가 지금보다 더 밝아지고 훈훈해질 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게 참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왜일까?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타인을 위하고 배려하기 위해서는 내가 낮아지고 손해 봐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남을 배려한다면서 자기희생 없이 인색하다면 절대 감동을 줄 수 없다.
[8] 만일 람보르기니 우라칸 슈퍼카 차주가 남을 배려한다면서 하나의 공간 사용료만 지불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모두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불가능이다. 그가 남들 두 배의 공간을 차지하는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아는 모든 이들로부터 그렇게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배려란 사랑의 사촌뻘이다. 남을 사랑하지 않고선 결코 배려할 수가 없다.
[9] 이웃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이다. 그분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모든 죄를 뒤집어쓰신 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남을 배려하고 구원하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모진 고초와 수난을 당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셨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낮고 천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자체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최고의 배려였다.
[10] 굳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 않아도 그만큼 크고 엄청난 배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분은 십자가의 수난까지 아낌없이 다 지불하셨다(τετέλεσται, 요 19:30). 우리 모두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말이다. 그 놀라운 사랑과 배려의 혜택을 고스란히 받아 누리게 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람보르기니 차주처럼, 우리 주님처럼 자기희생이 동반된 사랑과 배려로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박수 받는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다 굳게 결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