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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가입한 벌로 내년에 출판하려고 정리해 둔 원고를 올립니다.
고중영 詩集 .
선운산 한 때
1. 소국(小菊)
외할머니 부고(訃告)가 날아든 날
가난한 내 어미는
눈물도 없이
밤새 등잔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2.풍경
-영안실-
“툭” 문이 떨어져 나간다.
바람이 거센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낡은 탓이다.
떨어져 나간 문 안 쪽
망자의 이름을 지우는 神의 붓 끝에선
검은 먹물이
뚝 뚝 떨어지고
한 바퀴도 채 못 돈 그의 윤회가
시급히 반송되고 있다.
지금-
3. 이슬
엷어지다 엷어지다가
기어이 찢어진 하늘 틈새로
지상의 어둠이 날렵하게 빠져나간 새벽
어느 뉘가 두고 가신
뭉클한 그리움을
한 구슬 방울방울 고이 빚어
어디에 둘까 망설이다가
오래 전 써 둔 시구(詩句)에서
풀잎하나 집어내
눈시울 끈을 달아
매달아 놓고 바랏자니
떠나던 날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글썽이던
젖은 그대 눈망울입니다.
4. 무명
툭툭- 날 건드리는 것
이게 뭐지?
밀어내며
가만히 좀 있거라.
잠시 뒤 또
툭툭-
가만히 좀 있어 봐야.
이 일만 끝내고야.
끝내고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고
천정에서 방바닥까지 늘어진
회색빛 어스름.
내 마음 소꼽질.
5. 내 이름은 사람
내가 사람이므로
가진 것이 마음뿐입니다.
마음을 밟고 오소서.
밟고 오신 소중한 흔적
깊이깊이 묻었다가
좋은 인연으로 꽃피는 날
향기로는
천길 만리를 날아
당신의 꿈이겠습니다.
마음으로 주고받아
몸으로 엮는 것이
당신이 꿈꾸는 사랑이어니-
6. 그 무엇에 대하여
우주구조論을 읽다가
창을 열고무작위로 쌓인 어둠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헤쳐
수백억년 전에 죽었다는
별 조각들을 차례로 집어 들고
요모조모 살피다가
누군가 잃어버린 꿈의 조각들이겠거니
짐작이나 하다가
일전에 어느 문우의
시집출판기념회에 갔다가 잃어버린
맞춤型 돋보기를 아쉬워하다가
문득.
세상의 어둠이란
태초 이래 나처럼 부실해서
잘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아쉬움으로 짠 절망의 천이었구나?
하다가
한 가지 위안이었던 것은
/아하, 내게도 아직은
잃어버릴 뭔가가 있었구나./였다.
7. 청량산 行
추석이라 해서 따로 할 일도 없고
찾아갈 곳도 마땅찮은 사고무친이라 산에 오르다.
해발 400미터쯤에서 부터 헐떡이던 임도(林道)가
한 쪽 폐를 잘라낸 환부에
덩실한 기와지붕을 올린 문수사(末寺)를 지나면
오를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길은 어디서나 슬플 만큼만 가늘어지다가
탁- 끊어지고 만다.
더는 갈 수없는 나라
높다랗게 매달린 저 봉우리를 넘으면
어딜까?
어디쯤일까?
갈수 없는 곳은 늘
영원이라는 말이 똬리를 틀고 있을 것 같아
또 한 번 슬프다.
올해는 물이 많은 해라 곳곳이 그렇겠지만
청량산 골짝을 흐르는 물소리 또한
다른 곳 못지않게 우렁우렁하여
그 소리에 귀때기가 시퍼렇도록 얻어맞은 떡깔나무는
그래도 무던한 성품인지
바람 속에 한들거리는 의연한 자태가
속인과 다른 바 있다.
그쯤 해서 고목 끌텅에 주저앉아
내게도 혹 그리운 사람은 없나? 생각을 더듬다가
/부질없다./고 우겨넣은 가슴팍에서는
산안개 같은 회한이 모질게 피어오르는데
옹졸한 범부의 볼품없는 연민이 마뜩치 않았던지
벙긋하려던 밤송이가 표정을 굳힌 채
허공을 향해 눈을 흘기고 있었다.
8. 청보리 바람새야
잔허리 휘청한 정(情), 밑거름으로 두어도
겉 씹혀 설컹대는 가난 지긋지긋하던 시절.
삼신할머니 사촌 쯤 될 법 한 앵심으로
풋보리 썩썩 훑어
목구멍 찢어져라 꺽꺽 씹어 넘기던 한 끼니-
생 배꼽 트고 나온 칠삭둥이 팔삭둥이
적삼 고름 늘 헐렁해 눈물겹던 조선의 어미는
자식 놈들 판에 박힌 사주팔자를
모잽이 짱짱한 한판으로 넘겨 쳤다는
알상급제 통발文 재우치는 봄 나절에
모쪼록 창포물에 감은 머리카락
차르르
차르르
"까시럽다" 눈치에 밀려
속앓이로 끌어안았던 어사화 치마폭에 싸들고
따 놓은 당상을 향해
움직씨 늠실늠실 담박질 치고 있다.
註: 고창 청보리축제에 낭송하기 위해 문화원에서 청탁한 시 입니다.
9. 별산제
솔잎 지는 소리가
인생처럼 쌓입니다.
물 속 같더니
촛불 흔들림에
적막 한 폭 찢겨
촛농은 흐르고
잠시 비껴간 사람들
잠시 비껴간 인연들-
솔잎 지는 소리
인생처럼 떠나고
산은 다시
옷깃을 여밉니다.
10. 바람을 조각하는
깊이 묻힌 밤의 뿌리를 뽑아드니
빛의 알갱이들이
조롱조롱 딸려 나온다.
새벽이 되자
바다는 덮었던 검은 천을 걷어
수평선 멀리 밀어 놓았다.
이런 새벽에
바닷새 한 마리 나는 일을
무심하게 여기지 말라.
날개에 쌓인 어둠을 털어내는
저 안도(安堵)가 없다면
세상이 어찌 이만치 평화로우랴.
마침내 이글이글 열리는 하늘
멀리 물결소리.
11. 수향제(隨響齊)
-금강초롱-
겨자씨만한 우주가
땅에 떨어졌을까?
각질 터지는 소리 있고
사람의 믿음 같은
줄기가 오른 뒤
아침이 비로소 첫눈을 뜬 날
세상을 피워 올리느라
낯이 붉어지도록
영봉채(影烽彩) 눈부신
낭자머리
그 꽃.
12. 씨동무
숨 줄이 하도 어여쁘기로
홑으로는 행여 모자람 있을까 저어
씨앗 어미 한 품에 나란히 기르며
어질고 부드러움으로
유별난 것을 스스로 깎게 하고
밝고 따스한 것으로
모자람을 채우게 하느니
삶의 모양새가 이리도 곱지 않던가!
살음이여!
살음이여!
눈으로는 다 볼 수 없는 바깥과
더듬어 가늠 다 못할 안쪽을 갖추나니
더불어 아끼며 가꾸는 것이면
참의 오롯함이
이에서 더할 수 없음이리.
13. 가을
1.
가을 뫼 앞 머리칼 포르르 떠는
잔디 빛 하늘 길은 임이 가신 길
하얀 적삼 앞섶을 여미시며
가신 길 더욱 멀어 그지없어라.
한식경 넋 놓는 흰 조각달.
2.
가을은 독설(毒舌) 같다.
말끝 마다 혓바늘이 돋아
햇살은 낱낱이 흠이 잡히고
귀뚜라미 울음도
저만치는 찔렸다.
14. 오직 抒情을 위하여
-多獅島-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나부다.
솜 같은 피로가 밀려드는 오후 여섯시 퇴근길
공덕동 로터리를 지나다가
세월의 앙금을 벗겨내는 초침소리에 놀라
다사도 가는 뱃길이 출렁출렁 떠오르면
갈기봉 눈썹달 아래 서리 밭을 갈며
날 기다릴 누이의 맨발이 시렵겠구나.
나 이제 풀어 헤칠 여장도 없이
억센 팔뚝 휘두르는 해풍 속에
잊힌 듯 엎드렸을 다사도에 들어
나 한번 다시 보기가 평생의 소원이라는
아! 박속같은 누이의 손을 끌고
쌓인 세월에 발목 푹푹 빠지는 갈기봉에 올라
까치발 발갛게 언 누이의 손 호호 불어주리라.
주름 잡힌 바다 흰 머리카락 곱게 빗겨온
착하디 착한 누이의 여생을 위해
자운 빛 은은한 꽃가마 엮으며 지새리라.
거친 바람에 쓸린 흉터,
가슴깊이 박혀 끝내는 못 잊을 작은 섬이여.
15. 일기 1
석천 지나 안골로 치닫는 외길에
가슴을 뜯어 먹힌 봄이
앵두나무 가지마다
핏물 뿌렸습니다.
애끓는 윤심덕의 노랫말로 뿌렸습니다.
16. 소품.
항상 창문을 열어두는 하늘과
잘 닦인 거울을 내다 거는 수면과
正音을 자랑하는 바람의 활시위
탁상시계는 늘 자정 너머에 있고
어디서
여인의 치마 쓸리는 소리,
이보다 더 예민해지거나
혹은 그리워지는 것들-
17. 추상(秋霜)
씨알마자 내려놓은 풀깍지가
선 채로 입적하는 도를 깨우치려고
백발을 머리에 이고
눈은 크게도 먼 채
18. 종이 鶴
탈속한 표정이다.
이른 아침 창을 열면
안보여도 느껴지는 신선함 같은
싸-알한 몸가짐을
신중하게 선택했으리.
누구였을까?
깨끗한 심상을 소재로 하여
귀틀집을 설계하는 도목수처럼
그리움과 간절함 사이에
목줄을 띄우며
기도 하듯 기도 하듯
고이 접어
갸륵한 숨결을 불어넣은
한 페이지의 저 창세기.
너무 무겁지 않은
부동심을 품은 종이학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접힌 날개로 날아 온 세월 저쪽
천년을 응시하고 있다.
19. 아침을 위한 삽화
자객처럼 숨어있던 빛이
잠든 하늘의 심장을
콕 찔렀습니다.
붉은 피
누리누리 번졌습니다.
20. 여여
손바닥에 얹힌 밉잖은 새벽 2시 40분을
팔 길이만큼 넌지시 밀어 놓는다.
기름이 바닥난 귀뚜라미 보일러의 투정 말고는
세상이 온통 캄캄하다.
경전 한 줄 읽은 배 없이
부처를 흉내 내던 내 빈방에
끊긴 인연 같은 어둠은 무엔가?
싸알한 인삼차 맛 같은 3월의 밤기운이
슬그머니 고집을 꺾는 무렵
옆구리 찔린 사내의 절망적 깊이에서 조차
온갖 부활은 채비를 갖추는데
세상을 다 주어도
나 없으면 기쁠 일이 없다든 아내는
이제 돌아오는 길을 잃었나보다.
밤새 창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내 무료함을 지켜보든 초침이
드디어 영원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풀쩍 뛰어 건너고 있다.
21. 첫눈에 대한 소고(素考)
바다로 간 목마를 생각하며
라이너 릴케를 생각하며
첫눈이 어둠을 타고 내리는 날
잊었던 너를 생각하며
네가 두고 간
무공해 꽃잎 같은 미소 한 스푼을
커피에 타거나,
어느 날
이마를 조아리는 산촌의
서근새 널브러진 벌에서
불현듯 만나야할 사람을 만난 듯
첫눈을 만난다면
가슴 저 밑바닥을 밟고 오는
발자국소리 듣는다면
손수건같이 편안한
혼자만의 슬픔에
흠뻑 젖을 수 있으려는가.
첫눈 내리는 날
참으로.
22. 원죄
태양을 불살라버린
계절의 막바지에서
버릴 것 다 못 버린
저 슬픈 육욕.
그 팽팽한 살집 속에서
스멀스멀 번지는 추파가
적빛 노을에 젖을 때
神의 내려 뜬 시선 끝
一点에
벌거벗은 채 매달려
속죄를 기다리는 능금 한 알
아! 이브여.
23. 여백
詩가 꼭 눈물겨워야 하는 건 아니다.
살구냄새 고운님의 이별같이
뜨거워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떨어지는 꽃잎 포르릉
딱히 까닭 없는 무궤적이면 좋은 것이고
남천강 물속에 들어앉아
시리게 더욱 시리게
몸을 닦는 별빛 같으면 더 좋은 것이다.
시가 꼭
깃털처럼 가벼워서만 좋은 건 아니다.
시가 꼭 사람을 짓누르는 운명같이
그렇게 무거워야만 좋은 것도 아니다.
한여름 밭갈이에 지쳐
잠뱅이 한쪽을 걷어부친 농부가
당산나무 아래서 배꼽을 드러낸 채 잠든
그런 정경을 그린 수채화면 좋은 것이고
아이에게 젖을 빨리는 첫 어미가
부러울 것 없단 듯 지긋이 내리 뜬 시선 끝에 매달린
젖몽실 만큼의 무게면 좋은 것이다.
아니면
누렇게 바랜 종이에 오래전에 적어두었건만
펼쳐보지 않아도 기억나는
그 사람 떠오를 때면
코 끝 찡해오는 작은 슬픔이면
더할 나위 없는 것이다.
24. 바위
앉아서 백년
곰곰이 천년
입적한 그날부터
사람을 섬기는
神으로
神으로-
25. 二題
능소화
잎삭 웃는 소리가 왼 종일 자지러진 날
한 뼘 해를 사려들고 뜨락으로 나섰더니
낭창한 허리 틀며 우화등선 하는 미인
못 보낸다 부여잡고 치정을 앓았거니와
너는 더 그렇다하여 귓볼 붉혀 있구나.
돌배
찬 서리 내린 둔덕에 지그시 기대선 낭구
물찬 자태로되 내 사람은 아닌 듯 해
애석히 돌아서다가 구면인 듯 되도니
앙그만 적삼을 열고 불쑥 내민 젖가슴
26. 봄 봄
쪽 우려 하늘 청청 채워놓고서
무리무리 쓸어안고 자빠지는 보리밭
이파리 까실한 이 봄날에
일면식도 없는 사-포에게 편지를 쓰면
모르겠다.
흰 배추나비 항간의 소문대로
장다리 밀방의 끈적한 꿀단지에
시큼한 고시앙대 결심 굳힌
肉筋을 찌른 채
아침나절에도 벌씸거려 보고
저녁참에도 질벅거려 보는데
손사래 환호 작작
가는 허리를 뒤틀며
나들이 나온 아지랑이 아가씨
아무리 세상물정에 어둡다기로
아서라 그쯤에서 요실금 잦을라.
고것들
꽃 분분 분단장한 목덜미 근지러워
천지분간을 모를 판에야
오호라,
봄은 와도 봄이요 가도 봄이던 걸.
27.무념(無念)
노을이 진다 해두자
따라
들꽃들 무리무리 진다 해두자
시루봉 바람둥지 아래
저녁연기 매캐하니
눈 매운 사람들은
바삐 바삐 방으로 들고
하늘 한 폭 찢어 든 구름
뒤늦은 밤마실 간다 해두자
외양간 황소만
꾸먹꾸먹 생각 깊다 해두자
그렇거나 말았거나
상관없다 해두자
세상은 그냥 세상이라 해두자
28. 언필칭
밟고 지나간 세월에 밟혀
제 앙가슴에
푸른 멍 자국이 생겼다고
칭얼대는 저 강물
겨우 달래놓고 돌아와 보니
내 눈에 몇 방울 튀어
삶의 증거처럼 박혀있다.
29. 설 뫼
고운님 속저고리 빛은 저리 고와서
비단결 소복한 은애(隱愛)로 쌓여도
그립다,
목 안에 머금어 지엄(至嚴)이니
바람조차 심히 송구스러운 듯
밟고 지나간 발자국 하나 남기는 법 없고
뛰놀던 메아리도 목청을 눕힌 여기서는
미미한 나부낌도 눈이 부시어
사람,
사람이 여태 저지른 짓 맑게 씻기니
참선에 든 고요만 저리 돋보일 뿐
묶였던 세상일들이 비로소 끈을 놓네.
백결선생의 거문고 소리 돌아와
봉우리, 계곡, 능선 가리지 않고
스스로 열어 길을 닦느니
고운님 저고리 속 살 아파하실라
설피마자 벗어던진 햇살이
맨발인 채
조신, 조신 서편으로 가는 중이네.
註: 설피-눈 위를 걷기 편하도록 만든 신발.
30. 새벽에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가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흔들림 없는 고요 속에
사심 없이 나를 엿보는 또 다른 나를
손짓으로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너를 또 다른 나라고 부르는 건
또 다른 나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규정한
흔들림 없는 내 믿음 때문이다.
내가 지금의 이때를 새벽이라 말할 수 있는 건
찰나에게 새벽이란 이름을 부여한 내 의지 때문이며
내가 한 대상을 기탄없이 꽃이라 부를 수 있는 건
내가 그 안에 내 마음을 심어
색과 향을 길러낸 까닭이며
내가 그대에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떼 묻지 않은 내 그리움을 또 한 번 말끔히 닦아
알건 모르건 상관치 않고 그대 안에 심은 까닭이다.
내가 꽃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내게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음이고
내가 그리움의 생김새를 그리지 못한다면
내게는 그리움을 영접할 마음자리가 없음이고
내가 스스로를 존재라고 규정하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섬기려는 올곧은 신념이 없는 까닭이니
그대여!
그대는 나는 또 다른 나이고 너이며
이웃이고 세계고 모두라는 걸
말로 하기 전의 침묵으로 이미 서로 알고 있다.
지금 밖에서는 밝음으로 존재를 섬기려는 빛이
안으로 들어올 때를 겨냥하고 있구나.
31. 연가시리즈 6. 봄
봄은 곡선이다.
갖 풀린 땅을 헤집어
그대 손가락이 끄집어낸 봄은
겨우내 속앓이 견뎌 온
내 연가의 첫 소절이다.
그 연초록 선율을
훈풍 나긋한 오선지에 올려놓으면
너울로 파동 치다가
몸바심에 풀리는 고전무용이다.
귀를 열면
새끼손가락 은근하던 약속들이
망설임 끝에 돌아오는
여간 수선스런 발소리다.
맞아들이면
맞아들이면
사랑니 순하게 돋아 볼을 깨무는 햇살의
붉힐 수밖에 없는 첫 정이다.
아니,
더할 수 없이 부풀리다가 마침내
눈에서 놓치고 마는 봄은
한시름을 앓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시절 병이다.
32. 고드름 수정고드름
저만치는 길어서 좋은 모본緞 치마 자락이
내딛는 걸음마다 아프잖게 밟히는 밤
청실홍실 엮어낸 어여쁜 합근례(合根禮) 뒤
섬돌을 밟고 신방으로 드는 가시버시님들
백옥같은 버선발
잔가락은 쓰다듬고 미진한 정 한데 묶어
기우린 열두 줄 방울방울 잠긴 율(律)에
분단장 곱게 시켜 돌려 세운 앞 뒷 態를
처마 끝에서 옹기종기 엿보던 고드름이
弦에서 튀어 오른 파장에 놀라 달아나며
한소리 떨어뜨린 음계(音階)는 “짤랑"
]
33. 봄날은 간다.
낭가(娘家)의 노래가 흐르는
이 땅에
봄이 또 왔구나.
/봄은 다시 찾아와
녹음방초 성화시라
시절은 하! 좋은디/
그렇게 좋은 날이거든
마을 야유회를 한 번 따라나서 봐.
훨씬 벗어나서
증평의 무릉계곡도 좋고
해남 두륜산도 좋지.
속아지 잘 터지는 김밥 두어 줄에
칠성사이다 한 병이면 넉할 거여.
혹, 먼저 옆구리 찌를 줄 아는
그런 사람과 동행이라면 더 좋을시고.
진달래 볼고족족한 입술 땜시
초승달 실눈썹에 붙은 그리움처럼
아쉽고 갈증 나는 일 있거든
그 자리에 그냥 엎으러 져서 허으-
그래,
그렇게 봄은 또 왔다 가는 거여.
34. 기다림
三岳에 오신 달님 가르마도 바르기에
잠 못 이루는 자정을 데리고 후원으로 나가
풀잎 끝에 맺힌 이슬 눈시울로 길어다가
자규 울음에 불붙여 밤새도록 달여 보오.
35. 覺
호박 모종을 옮길 때는 행여
소똥을 우분(牛糞)이라 우기지 마라.
소똥 삭힌 자리
그 착실한 모듬지가 섭섭해 한다.
비가 와서 가려던 곳 못가고
호박 모종을 옮기는데
고놈의 호박모들 참 예쁘더라.
되새김질로 곰삭힌 소똥 모듬지에서
세상으로 아장아장 걸어 나와
오동통한 두 볼에 지그시 빼 문 혓바닥
크으- 고운짓거리로 빼 문 그 혓바닥.
꽃삽으로 뜨다 말고
/소똥 더럽지 않더냐?/ 한마디 묻자
"끙" 뿌리에 힘 한번 주더니
현자(賢者)처럼 말없이 웃는다.
그럴 테지, 그랬을 테지
소똥이 아닌 우분으로야 어찌
호박의 그 인정스런 맛을 낸다할 것인가.
그리고 또한,
참 맛 안버리고 본심대로 살아낸다는 것
그보다 더한 진국이 어디 따로 있다든가.
호박 모종을 옮길 때는 행여라도
소똥을 우분(牛糞)이라 우기지 마라.
36. 목어(木魚)
물고기가,
아가미를 닫은 물고기 한마리가
하늘만 한 부레를 꿈꾸던 한마리가
너무 단단해서
도무지 열리지 않는 법문(法門)에
관솔구멍을 뚫고
백내장 흐릿한 눈을 딱 붙인 채
세상에 가득 찬 자비를
제 몸에 묻은 한 티끌 작은 속에
훔쳐 우겨넣으려다가
과중에 못 이기어 찢어진 제 부레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는-
물고기가,
아가미를 닫은 물고기가
백내장 흐린 눈을 감아야
세상이 투명하게 잘 보이는 이치를
터득해 보자고
오늘도
법망에 매달려 말라가고 있다.
37. 절명 詩帖
-매천 황현-
/나라가 망한 날 이 땅에 선비 한 사람 죽는 일이 없어서야
어찌 애통하지 않겠느냐/
1.
반야봉 아랫길에 비친 노을이 성기다.
육모정 굽은 길을 걸어 부르튼 발
흘러간 내력을 앓듯 쓰다듬어 달래노라면
매천사는 저만치 눈 아래 누웠는데
산을 넘어 떠나는 구름
하늘 길 구만리에 아득하다
어제가 오늘 같더니 오늘은 내일 같을지-
눈시울에 꽂히는 산바람 恨처럼 차가운데
길 잃은 철새 한 마리 저 혼자 울고 있다.
나 이제 이 길로 매천사에 들어가
허름한 전당 돌아앉은 *待月軒에 엎드려
따뜻하여라 충절, 남기신 뜻 품에 안고
그날처럼 울다가 지쳐 쓰러지면
이 땅의 숨소리 되고 노래가 되고
땅에 잦아도 오래 共鳴할 흐느낌 되라.
죽어서도 오욕을 질타하는 눈빛이 되라.
2.
秋鐙揜卷懷千古(추등암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남기신 절명 시 달필을 앞에 두고
아름다운 싯귀에 닫지 못해
*세월의 등잔불 아래 천고의 한 덮어두니
*참다운 지식인 되어도 사람답기 어렵다.
임의 뜻이야 그렇다 할 일이언만
돌이켜 애석하다 남기신 遺子弟書에
복받친 아우 또한 둠벙에 목숨 버리니
못 다한 이승의 우애, 피맺힌 천륜이
늦가을 나무 잎에 홍동백서로 물들더니
백년 흐른 오늘 아물어 흔적 되고
어여쁜 묘정비의 단아한 碑文이 되고
봄 터져 움 되고 떡잎이 되었다가
굵은 둥치 향기 짙은 梅木으로 자라
드높은 향기 되고 넉넉한 그늘 되었으리.
*대월당: 매천선생이 약사발을 마시고 죽어간 房
*매천선생의 한문 싯귀를 譯한 문장임.
38 겨울 연가
석양에 미끄러진 조락(照落)이다.
계절 속으로 무너지던 산 그림자가
가녀린 길 하나를 그어놓았다.
동상에 걸린 길은 이따금 절룩거리고
그 길을 밟고
머물 곳 없는 사람들 다 가고나면
황야는 홀로 남아 가슴이 시리다.
어디서 날아오는 눈송이
어디로 날아가는 눈송이.
39. 민들레
보시게,
저렇게 치장 없는 둘레 꽃이
저토록 아담해지는 비결.
벌 나비 다급해 하는 이 봄에
뉘라서 알까?
통통한 꽃 잎 켜에서
뭉떵뭉떵 쏟아진 소문 때문에
머리카락 하얗게 빛 바래고서야
속량 받은 씨앗들
애가 말라죽은
청상의 恨이라는 걸-
40. 隨想작법. 1
-알암-
잘 숙성된 계절의
끝자락이 갈라지며
해바라기 씨알 영그는 그 집
울 밖으로 뻗은 밤나무 가장이에서
하안거(夏安居)를 마친 僧이
진갈색 법의(法依)를 차려 입고
세상과 통하는 문을 열며
할(喝)을 외치는 모양을
수염 가실한 옥수수들이
갸우뚱 듣고 있다고 쓰는.
41. 조용한 세상
새가 날아가며 긋고 간
一点 획(劃)이 투명하다.
응시하고 있던 누군가가
손가락을 들어
그 투명한 劃을 자르자
하늘 아랫부분이 절단되어
흘러내린 空이 지상에 눕고
하늘 윗부분을
부리에 쪼아 문 새가
하늘을 마자 날았다.
응시하던 뉘도 따라 날았다.
42. 수상작법(隨想作法) 3
오늘 아침 송광사 대웅전 뒤
무상室에서
몇 해 전까지 나이 90을 헤아리다가
어딘가에 놓쳐버렸다는 老스님의 기침소리를
經밭을 지나듯 송구스럽게 밟고 온
열한 살배기 동자승이 문 밖에 선 채
"조실스님
서리가 하얗게 내렸습니다.”고
문안을 올리자
"응? 누가 마음을 두고 갔다고?"
그대여!
그대 일생도 죽을 곳을 찾아
목숨 걸고 헤매던 삶이었던지?"
오늘 아침 삼각산 중턱
부암동 하이츠빌라
버선목 알싸한 앞뜰에도
허옇게 서리 내렸습디다.
43. 청매화 밭을 사다.
봄이면 물빛 아지랑이들이
몸을 풀러 올라온다는
두평마을 경사진 산 2번지
삼신할메 짱짱하던 고집처럼
푸르스름한 꽃이 핀다는
청매화 밭을 사던 날
"자식놈 따라 도회지로 나가고 보니
청매 따는 꿈을 접을 수밖에요"
봄이면 지천으로 피는 청매 홍매 꽃등을 매달고
수십 년 전
청사초롱 첫 밤 이후
아껴둔 말 미뤄둔 사랑을
매화꽃으로 대변하고 싶었다던
반거치기 도시인 남궁씨는 흥정도 서툴러
"기왕에 버릴 과수원인데
웬 돈을 그리 많이 주시려오.
청매가 곁에 없으면
홍매는 열매를 못 맺는다오.
그리 아시구려."
사랑가 끝내 못 부른 칠순 남궁씨는 돌아서다 말고
늦자식 삼아 길렀다는 청매화 밭을 휘휘 둘러보는데
눈시울이 얼핏 겨워지는 듯해서
"제가 대신 정성껏 보살피겠습니다."
위안삼아 말을 건네다가
꿈을 두고 돌아서는 남궁씨가 안쓰러워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내년 봄 청매화 밭에 꽃 자지러지게 핀다면
꽃 소식이나마
인색하지 않게 보내야 할까보다.
44. 길에서 4
너무 멀리 와버렸을까?
갈 곳도 모르는 길을
무작정 와버렸을까?
어느 날 문득 지친 몸을
나무등거리에 기대며
“너무 멀다.”는 독백이
지쳐있을까 두렵다.
45. 가을 童話
머물러 쉴 곳 없는 하늘을
떠돌다 떠돌다가 지친 낮달이
인왕산 중턱
중고개 여울물에 몸을 담그고
제가 빠져나온 허공을
무욕처럼 바라보다가
절집 처마에 매달린 풍경(風磬)을
툭- 한 번 건드려 보고는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물길 따라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46. 겨울나기
황촛불 바작바작 타고 있는
방에
내 그림자 버리고 왔습니다.
밖에 내리는 눈도
마음마자 벗어놓고 왔는지
그림자도 없이
하얀 백설(白雪)입니다.
눈부신 일념을 조심스레 집어
바지 주머니에 넣으니
그대여!
슬프고 따스한 내 겨울이
흑백 뢴트겐에 찍힙니다.
47. 솟대
-바닷가에서-
심원천리 허공 구만리를
날고 싶은 몸
벼리품 깎아 제단에 올려놓고
날개 접은 너와
비바람에 나부끼던 전생처럼 만나
잔물결 소곰소곰 맴돌아 나가는
물길을 건너며
귀틀 부서진 전설이나
맘 놓고 소곤거려 보자꾸나.
48. 元旦
물방울 하나
어느 날 당신의 비원을 타고 날아간 일점 순수가 물방울이 되어 열사의 사막 한가운데 뚝 떨어져 내려 고요히 엎드렸습니다. 엎드린 물방울은 모래 위에 귀를 대고 생명이 오는 소리, 생명이 가는 소리, 그 영묘의 소리들을 모아갑니다.
세기의 요정 *사라 브라이트만이 그 물방울을 집어 들고 살피다가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녀가 들어가자 물방울은 드디어 體가 되어 출렁입니다.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색깔이 됩니다.
그 출렁임과 빛, 색깔들이 사라의 입술을 스칩니다. 스치는 소리가 목소리로 변합니다. 그녀가 목소리를 빗질하기 시작합니다. 곱게 빗질해가는 그 소리가 노래가 됩니다.
그 노래가 무심히 지나가던 내 시심을 붙듭니다. 시심은 나의 넋입니다. 붙들린 넋이, 아니 내 시심이 노래의 파장, 노래의 색채에 물들고 있습니다. 나 지금 흔들리며 또 흔들리며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나 지금 가슴을 열고 순수로 출렁이는 당신의 비원에 힘껏 젖어들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비원이기도 하고 세기의 요정이기도 하고 노래이고 물방울이기도 합니다.
49. 보리를 심으며
내가 뿌린 씨알 하나가
어느 질서 위에 앉아
믿음의 터를 고르고
제 몸을 썩히면
땅은 태동할 생명을 힘껏 포옹하려고
복부를 연다.
/진실로 네가 죽지 않으면
새롭지 못할지니/
지극한 말씀은
씨알의 배꼽에 탯줄을 꽂고-
태초부터 거룩했던 것,
/있게 하려는 의지/가
천지의 운행을 만나는 오묘함이니
어느 날 엄숙한 고요를 헤치고
첫발 내딛은 푸른 발가락들이
신령스러운 여행을 시작하면
그들만을 위한 창세기는
장엄하게 열릴 것이다.
찬란하진 않으나
참됨으로 거듭 난 生의 창세기.
50. 봄 바라기
얼어 빨개진 입춘의 코빼기가
동백 봉오리 위에 앉아
남녘으로 몸을 기우리고 있다.
지나던 햇살이
사랑니 살짝
봉오리를 깨무는 입춘 부근.
51. 인식과 문자 사이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잠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를 읽다 말고
토끼 막을 어슬렁거렸는데
토끼가 피워 올린 꽃
새하얀 귀때기 꽃
잽싸게 꺾어 가슴에 품은 대신
내 눈을 토끼에게 주고 오다.
*왕인박사가 창시한
일본 최초의 詩歌 "난파진 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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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옥고를 전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몇번이고 두고 두고 읽겠습니다.
고중영 선생님의 주옥같은 시들을 여기서 뵙다니요. 저도 두고두고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