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회] 택시기사 꿈꾸며, 책 외판 생계를 꾸려
리영희 평전/[8장] 필화와 강제해직의 수난 2010/06/06 08:00 김삼웅리영희는 부인과 일곱 살, 다섯 살, 두 살짜리 3남매와 노령의 어머니를 모시는 가장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이 실직을 하게 되면 그 집안은 생존권이 위협받는다. 신문사에서는 인색하게도 마지막 해의 근무가 1년에 미달한다하여 3년분의 퇴직금을 보내왔지만 몇 달 버티기 어려운 돈이었다.
여러날 동안 궁리를 거듭했다.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연구했다. 다시는 사회와 대중을 지식으로 사기치고, 자신을 속이는 불성실한 글줄을 써서 먹고사는 짓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런 뜻을 한 지인에게 써보냈더니, 며칠 뒤에 답신이 왔다.
일단 인텔리가 된 사람이 육체와 노동으로 삶을 산다는 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 사회 현실과의 최소한의 타협은 현실을 살아야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오욕이라고까지 자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리영희는 <조선일보> 시대에 그의 독특한 외신면 제작 외에도 한국 언론사나 문화사에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 그 중의 하나는 용어문제다. 그는 용어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지식인의 역할은 사물의 이름을 정확히 쓰는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공자의 <논어>의 '정언(正言)'편에 나오는 “정치의 요체는 곧 사물의 이름(명칭 또는 명분)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다.”라는 뜻에 따른 자세였다.
그가 외신부장으로 있는 동안 <조선일보> 외신면에서는 ‘베트콩’이라는 낱말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북괴’도 ‘자유중국’도 ‘자유대한’도 사라졌다. 북한은 소련이나 중국의 괴뢰가 아니고 대등한 자주국가인데 왜 북괴냐 하는 것이었으며, 30년 계엄통치하의 대만이 독재대만이면 몰라도 왜 자유중국이냐, 또 중국의 정통성은 대륙의 8억 인구 쪽에 두어야 하는데 대륙을 중공이라 부르고 섬을 중국이라 부르는 것은 맞지 않다. 대륙이 중국이고 섬은 대만이라 하는 것이었다.
이름을 바로써야 정치혼란이 없다는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의 현대적 적용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광신적 반공주의가 판치던 60년대’에 이루었던 일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바른 말만 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대개 자기 분야에서 확실한 능력과 열성과 권위를 인정받고 있을 것이 전제된다. (주석 20)
리영희의 ‘정명 쓰기’는 광신적 반공주의 세력의 거부반응을 받으면서 차츰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조선일보>에서 시작된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 조선일보>에서 겪은 수모와 이른바 명사라는 인텔리들의 사악한 모습에 진저리를 치면서 그러나 여전히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생계를 위해 양계업을 해볼까하고 관련 서적을 구해다 공부했다. 함석헌은 1950년대 서울 신촌에서 양계를 한 적이 있었다. 자립하려면 최소한 2년은 먹고 살 밑천이 있어야 가능했다. 다음에 생각한 것이 택시운전기사였다. 군대에서 험준한 전방고지를 트레일러에 짐을 싣고 지프차를 몰고 다닌 기술이 있어 가능할 것 같았다.
살고 있는 제기동 건평 13평의 한옥을 팔면 30만원쯤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공화당 비밀 창당자금을 만들기위해 불법으로 일본에서 들여온 ‘새나라 택시’의 값이 30만원 수준이었다. 집을 팔고 월세로 옮기면서 택시 영업을 하면 그럭저럭 가족과 먹고 살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노모가 노발대발이었다. 힘들게 가르쳐 놓으니까 택시운전사가 웬 말이냐, 너의 아버지가 남의 집 셋방에서 돌아가실 때 마루건너 주인댁 눈치 보느라고 가슴이 터져 나오는데 울음소리도 못 냈는데, 다시 이 늙은 어미를 남의 집 셋방으로 끌고가겠다는 말이냐는 한탄이었다. 어머니는 당시 77세였다. 지주 딸 출신의 어머니는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옛날의 호기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택시운전사 일도 접어야 했다. 부인이 힘겹게 노동을 하여 푼돈을 벌었지만 생활비에는 어림도 없었다. 깊은 고민과 시름에 빠졌다. 지금까지 밖으로만 향해있던 눈을 처음으로 가족과 자신의 내면으로 돌렸다. 고뇌는 며칠을 두고 계속되었다.
자신이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조건을 인정하기를 거부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인텔리가 스스로 인텔리임을 부정하려는 것은 관념적 인식착오가 아니었던가? 쥐꼬리만한 지식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인텔리가 노동자의 생활을 미화한 것이 인텔리의 환상이 아니겠는가? 과연 육체노동적 생존이 인텔리적 부도덕성을 정화할 만한 가치와 효용성을 지닌 것인가도 생각하였다. 그럴수록 자기가 관념주의자의 모습을 띠고 나타나 보였다. 환상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조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주석 21)
그러고 있을 무렵에 작가 이병주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부산의 <국제신보> 주필로서 4.19혁명 공간에서 ‘중립화통일’을 사설로 썼다가 5.16쿠데타 뒤 박정희한테 4년여 감옥살이를 마치고 최근 출옥했다. 출옥 뒤 지난 4년의 역사를 알기위해 묵은 신문철을 뒤적이다가 리영희의 외신기사를 접하게 된 것이 만남의 인연이었다.
그는 친구 회사의 골방 하나를 빌려 ‘아폴로’라는 1인 출판사를 내고 소설을 썼다. 그리고 처녀작 <소설 알렉산드리아>가 수록된 단편집 <마술사>를 발행했다. 이병주의 살아온 역정을 아는 터라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이 되고 리영희는 ‘외판사원’으로 취직했다. 판매고의 몇 할이 수입으로 된다는 조건이었다. 매일 새끼줄로 책 20권을 묶어들고 서울시내의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들을 찾아다녔다.
말재주가 없고 사교성이 부족한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책의 내용을 설명하고 교실에 맡겼다가 월급날 수금하는 방식으로 시내 학교를 순방했다. 각별히도 추웠던 그 해 겨울 어느날, 책꾸러미를 들고 지친 몸으로 법원 근처에 서있는 그에게 말을 건넨 사람이 있었다. 통신사 후배기자였다. 쥐구멍이라도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성북동 삼선교 한성여고 가파른 언더길을 올랐다. 여러 날째 내린 눈으로 언덕길은 온통 빙판이었다. 무거운 책을 들고 빙판을 오르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일어나지 못한 채 엉거주춤거릴 때 여학생들이 깔깔거리며 웃고 지나갔다.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른다. 빙판의 언덕길 중도까지 간신히 올라온 그는 책짐을 내려놓고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터질 것 같이 가쁜 심장에서 허파에서 뿜겨 나오는 숨이 거센 바람에 희게 얼어서 날려갔다. 그는 다시 일어설 생각을 잊은 채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주석 22)
리영희에게 짧은 기간의 ‘육체노동자’생활은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음에는 새로운 자각이 생겨났다.
“인텔리가 노동자가 되는 것은 혁명가적 신념과 결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석 23)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 시대에 수많은 청년들이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기득권을 버리면서 열악한 노동판에서 노동자들과 생활하고 노동자들의 권리의식을 일깨웠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이만큼이라도 가능한 것은 그들의 희생도 기여했다. 그 중에는 리영희의 딸 미정이도 있었다.
주석
20) 조유식, '리영희 그 독한 기자정신의 역정', <월간말>, 1995년 5월호.
21) 앞의 책, 257~258쪽.
22) 앞의 책, 260~261쪽.
23) 앞의 책, 262쪽.
예나 지금이나 가장이 실직을 하게 되면 그 집안은 생존권이 위협받는다. 신문사에서는 인색하게도 마지막 해의 근무가 1년에 미달한다하여 3년분의 퇴직금을 보내왔지만 몇 달 버티기 어려운 돈이었다.
여러날 동안 궁리를 거듭했다.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연구했다. 다시는 사회와 대중을 지식으로 사기치고, 자신을 속이는 불성실한 글줄을 써서 먹고사는 짓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런 뜻을 한 지인에게 써보냈더니, 며칠 뒤에 답신이 왔다.
일단 인텔리가 된 사람이 육체와 노동으로 삶을 산다는 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 사회 현실과의 최소한의 타협은 현실을 살아야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오욕이라고까지 자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리영희는 <조선일보> 시대에 그의 독특한 외신면 제작 외에도 한국 언론사나 문화사에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 그 중의 하나는 용어문제다. 그는 용어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지식인의 역할은 사물의 이름을 정확히 쓰는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공자의 <논어>의 '정언(正言)'편에 나오는 “정치의 요체는 곧 사물의 이름(명칭 또는 명분)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다.”라는 뜻에 따른 자세였다.
그가 외신부장으로 있는 동안 <조선일보> 외신면에서는 ‘베트콩’이라는 낱말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북괴’도 ‘자유중국’도 ‘자유대한’도 사라졌다. 북한은 소련이나 중국의 괴뢰가 아니고 대등한 자주국가인데 왜 북괴냐 하는 것이었으며, 30년 계엄통치하의 대만이 독재대만이면 몰라도 왜 자유중국이냐, 또 중국의 정통성은 대륙의 8억 인구 쪽에 두어야 하는데 대륙을 중공이라 부르고 섬을 중국이라 부르는 것은 맞지 않다. 대륙이 중국이고 섬은 대만이라 하는 것이었다.
이름을 바로써야 정치혼란이 없다는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의 현대적 적용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광신적 반공주의가 판치던 60년대’에 이루었던 일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바른 말만 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대개 자기 분야에서 확실한 능력과 열성과 권위를 인정받고 있을 것이 전제된다. (주석 20)
리영희의 ‘정명 쓰기’는 광신적 반공주의 세력의 거부반응을 받으면서 차츰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조선일보>에서 시작된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 조선일보>에서 겪은 수모와 이른바 명사라는 인텔리들의 사악한 모습에 진저리를 치면서 그러나 여전히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생계를 위해 양계업을 해볼까하고 관련 서적을 구해다 공부했다. 함석헌은 1950년대 서울 신촌에서 양계를 한 적이 있었다. 자립하려면 최소한 2년은 먹고 살 밑천이 있어야 가능했다. 다음에 생각한 것이 택시운전기사였다. 군대에서 험준한 전방고지를 트레일러에 짐을 싣고 지프차를 몰고 다닌 기술이 있어 가능할 것 같았다.
살고 있는 제기동 건평 13평의 한옥을 팔면 30만원쯤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공화당 비밀 창당자금을 만들기위해 불법으로 일본에서 들여온 ‘새나라 택시’의 값이 30만원 수준이었다. 집을 팔고 월세로 옮기면서 택시 영업을 하면 그럭저럭 가족과 먹고 살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노모가 노발대발이었다. 힘들게 가르쳐 놓으니까 택시운전사가 웬 말이냐, 너의 아버지가 남의 집 셋방에서 돌아가실 때 마루건너 주인댁 눈치 보느라고 가슴이 터져 나오는데 울음소리도 못 냈는데, 다시 이 늙은 어미를 남의 집 셋방으로 끌고가겠다는 말이냐는 한탄이었다. 어머니는 당시 77세였다. 지주 딸 출신의 어머니는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옛날의 호기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택시운전사 일도 접어야 했다. 부인이 힘겹게 노동을 하여 푼돈을 벌었지만 생활비에는 어림도 없었다. 깊은 고민과 시름에 빠졌다. 지금까지 밖으로만 향해있던 눈을 처음으로 가족과 자신의 내면으로 돌렸다. 고뇌는 며칠을 두고 계속되었다.
자신이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조건을 인정하기를 거부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인텔리가 스스로 인텔리임을 부정하려는 것은 관념적 인식착오가 아니었던가? 쥐꼬리만한 지식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인텔리가 노동자의 생활을 미화한 것이 인텔리의 환상이 아니겠는가? 과연 육체노동적 생존이 인텔리적 부도덕성을 정화할 만한 가치와 효용성을 지닌 것인가도 생각하였다. 그럴수록 자기가 관념주의자의 모습을 띠고 나타나 보였다. 환상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조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주석 21)
그러고 있을 무렵에 작가 이병주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부산의 <국제신보> 주필로서 4.19혁명 공간에서 ‘중립화통일’을 사설로 썼다가 5.16쿠데타 뒤 박정희한테 4년여 감옥살이를 마치고 최근 출옥했다. 출옥 뒤 지난 4년의 역사를 알기위해 묵은 신문철을 뒤적이다가 리영희의 외신기사를 접하게 된 것이 만남의 인연이었다.
그는 친구 회사의 골방 하나를 빌려 ‘아폴로’라는 1인 출판사를 내고 소설을 썼다. 그리고 처녀작 <소설 알렉산드리아>가 수록된 단편집 <마술사>를 발행했다. 이병주의 살아온 역정을 아는 터라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이 되고 리영희는 ‘외판사원’으로 취직했다. 판매고의 몇 할이 수입으로 된다는 조건이었다. 매일 새끼줄로 책 20권을 묶어들고 서울시내의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들을 찾아다녔다.
말재주가 없고 사교성이 부족한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책의 내용을 설명하고 교실에 맡겼다가 월급날 수금하는 방식으로 시내 학교를 순방했다. 각별히도 추웠던 그 해 겨울 어느날, 책꾸러미를 들고 지친 몸으로 법원 근처에 서있는 그에게 말을 건넨 사람이 있었다. 통신사 후배기자였다. 쥐구멍이라도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성북동 삼선교 한성여고 가파른 언더길을 올랐다. 여러 날째 내린 눈으로 언덕길은 온통 빙판이었다. 무거운 책을 들고 빙판을 오르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일어나지 못한 채 엉거주춤거릴 때 여학생들이 깔깔거리며 웃고 지나갔다.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른다. 빙판의 언덕길 중도까지 간신히 올라온 그는 책짐을 내려놓고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터질 것 같이 가쁜 심장에서 허파에서 뿜겨 나오는 숨이 거센 바람에 희게 얼어서 날려갔다. 그는 다시 일어설 생각을 잊은 채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주석 22)
리영희에게 짧은 기간의 ‘육체노동자’생활은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음에는 새로운 자각이 생겨났다.
“인텔리가 노동자가 되는 것은 혁명가적 신념과 결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석 23)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 시대에 수많은 청년들이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기득권을 버리면서 열악한 노동판에서 노동자들과 생활하고 노동자들의 권리의식을 일깨웠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이만큼이라도 가능한 것은 그들의 희생도 기여했다. 그 중에는 리영희의 딸 미정이도 있었다.
주석
20) 조유식, '리영희 그 독한 기자정신의 역정', <월간말>, 1995년 5월호.
21) 앞의 책, 257~258쪽.
22) 앞의 책, 260~261쪽.
23) 앞의 책, 2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