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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颐和园)
중국 근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황후의 여름 별장
북경의 북서쪽에 위치한 이화원은 북경의 관광지중 가장 많은 볼거리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곳으로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으며 2000년에는 국제표준화 기준인 ISO 9000, ISO 14000 질량환경관리 부문 인증을 취득하였습니다. 주로 만수산(萬壽山)과 곤명호(昆明湖), 서호, 남호, 3개의 섬과 인공호수로 구성되어 있고 29,000평방미터의 부지에 수면(水面)이 3/4을 차지하며 전당, 누각, 정자가 도합 3,000여칸으로 황제와 황후가 정치 활동을 하며 휴식, 유람하던 중국 최대 규모의 황실 정원입니다.
주위 8km. 인공호인 쿤밍호[昆明湖]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흙을 쌓아올려 만든 완서우산[萬壽山]이 북부에 있고 모든 건축물은 산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통칭 천간낭하(千間廊下)라고 불리는 장랑(長廊)이 눈길을 끈다.
12세기 금나라 때 지은 작은 궁전을 시초로 명조(明朝) 중엽에 만들어졌으며,
청조(淸朝)의 건륭제(乾隆帝)가 많은 전각(殿閣)을 세우고 정원을 꾸몄다. 서태후(西太后)가 살았던 별궁으로서 유명하다.
1860년 톈진[天津] 조약의 비준을 강요하는 영국·프랑스 연합군 8만이
베이징 서쪽 교외의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웠을 때 이곳도 화재를 입었다.
1894년 서태후는 환갑 축하연을 베풀기 위해 해군증강용으로
영국에서 차용한 돈까지 개축을 위해서 횡류(橫流)하였는데,
이것이 청 ·일전쟁(淸日戰爭)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베이징 최고의 관광명소로
호상에 떠 있는듯한 석주(石舟)와 석교(石橋), 해당화 ·난초 ·수양버들,
색채가 선명한 건축물과 장랑(長廊) 등이 경관의 조화를 이룬다.
1998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화원은 1153년 금나라의 태조가 행궁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화원이 별궁으로 본격적으로 건설된 것은 청나라 건륭제 시절이었습니다. 당시까지 아직 이 원림은 청의원으로 불리웠으며 750년간 황제의 정원으로 사랑 받아 오던 청의원은 2차 아편전쟁 때인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20년후 서태후(慈禧太后 자희태후) 는 환갑 축하연을 베풀기 위해 해군증강용으로 영국에서 차용한 예산까지 유용해 (후일 청일전쟁 대패의 결정적 빌미을 제공 하였다고 하며, 당시 청나라 해군이 대포를 발사하였는데 화약이 들어갈 자리에 모래가 들어가 발사되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화원을 짓지만 1900년 의화단 사건때 연합군에 의해 또다시 파괴되었습니다.
1860년 아편전쟁(阿片戰爭: Anglo French allied invasion)으로 북경이 함락되자 칭이위안과 원명원(圓明園)의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다. 1886년 자희태후(慈禧太后: Cixi, 츠씨, 서태후)는 중국해군 북양함대(北洋艦隊: Beiyang Fleet)의 자금 30만 냥(两)을 유용하여 칭이위안을 재건하고 확장하여 이허위안(頤和園)이라 개명했다. 석방(石舫: Marble Boat)과 같은 수많은 자희태후의 사치는 청조(淸朝: 1644-1912)몰락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허위안은 금조(金朝: Jin, 1115-1234)의 행궁(行宮)으로 조성되었다. 원조(元朝: 1247-1368)의 몽고황제 쿠빌라이 칸(Kublai Khan)은 서산(西山)에서 이허위안까지 운하를 건설하여 북경의 용수공급을 개선했다. 그는 또 저수지로 사용하기 위해 호수(지금의 곤명호)를 확장했다.
건륭제(乾隆帝, 1765)때 실질적인 황실정원이 되면서 청의원(淸漪園/淸漪园: Clear Ripples, 칭이위안)으로 불렀다. 장인들은 중국의 다양한 궁전과 정원형태를 재현했다. 곤명호는 항주(杭州: Hangzhou)의 서호(西湖: Xihu, 시후)를 모방하여 기존에 있던 수역(水域)을 더욱 확장했다.
인수전(仁壽殿: Renshoudian, 렌쇼디엔)
동문을 들어서 조금 걸으면 서쪽에 인수전(仁壽殿: Benevolence and Longevity)이 보이는데, 궁전지역의 주요건물이다. 원래 근정전(勤政殿: Qinzhengdian)이라 칭했는데 광서제가 인수전(Renshoudian)으로 변경했다. 인수전 내엔, 옥좌, 병풍, 공작깃털로 만든 장식용 부채, 향로, 크레인모양의 등이 원래 진열되어 있던 대로 남아 있다. 병풍은 아주 독특한데, 아홉 마리의 용과 각기 다른 226개의 수(壽)자가 새겨져 있다.
인수전 앞뜰에는 속이 빈 불사조와 용모양의 청동상이 있다. 마당의 진귀한 4개의 돌(壽星石 등)은 사계를 표현한 것이다. 인수전의 북쪽엔 연년정(延年井: Yannianjing)이 있다. 자희태후가 이 물을 먹고 열사병에서 회복되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옥란당(玉澜堂: Yulantang, 유란탕)
옥란당(玉澜堂: Jade Ripple)은 본전과 두 개의 보조전각으로 이루어진 삼합원(三合院: Sanheyuan)형태의 “ㄷ”자 건물이다. 건륭제(乾隆帝: Qianlong, 1735-1796)가 처음 지어 국사를 처리하던 곳이었으나, 1860년 소실되었고 1892년 재건축 되었다. 1898년의 개혁운동 백일유신(百日維新)이 실패하자 개혁을 옹호했던 광서제(光緖帝: Guangxu)는 이곳에 연금되었다.
옥란당의 명칭은 서진(西晉: 265-316)의 육기(陸機/陆机: Luji)의 시 “Jade spring with ripple water”에서 유래했다. 동쪽 전각의 응접실과 반대쪽의 침실은 광서제 때의 것이다. 자단(紫檀)의 다리에 침향(沈香: agalwood)의 판으로 된 광서제의 책상은 섬세한 조각품이다. 두 겹의 유리로 된 병풍엔 전통적인 중국과 서구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덕화원(德和園: Deheyuan, 더허위안)
인수전 북쪽의 덕화원(德和園)은 경극(京劇/京剧, jingju, 징쥐)을 관람하던 곳이다. 좌전(左傳: Zuozhuan)에서 따온 덕화(德和: Dehe)는 “섬세한 가락을 들으며 심신을 안정 시킨다”는 의미이다. 덕화원은 대희루(大戱樓/大戏楼), 이악전(頤樂殿/颐乐殿), 분희루(扮戱樓/扮戏楼)로 이루어져 있다.
청조(淸朝:1644-1912) 극장은 피서산장(避暑山庄)의 청음각(淸音閣: Qingyin), 자금성의 창음각(暢音閣), 그리고 대희루 등의 3곳인데, 이중에서 21m 높이의 대희루가 가장 크다. 자희태후의 회갑을 기념하여 세운 대희루는 3층으로 지어졌다. 각각 복(福: Fu), 녹(祿: Lu), 수대(壽臺/寿台: Shou)라 부르는데, 각층의 마루는 통풍구가 있고 수대(壽臺)아래에는 깊은 우물과 5개의 연못이 있다. 이 우물과 연못들은 소리의 공명(共鳴)을 통해 음향효과들 확대시킨다. 특수효과는 각층 밑에서 이루어졌다.
의예관(宜藝館/宜芸(艺)馆: Yiyun)
옥란당 북쪽엔 “학문에 정진하기 좋은 곳”이란 의예관이 있다. 본관은 광서제의 황후 륭유(隆裕: Longyu)의 거처였고, 서쪽의 이어진 건물에는 황비 진비(珍妃: Zhenfei)의 거처였다. 1898년 백일유신(百日維新)이 실패하자 광서제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건물이 나뉘어졌다.
본관은 앞쪽에 5개의 방과 뒤쪽에 3개의 방이 있고 10여 개의 연결된 객실이 있다. 이곳에는 많은 귀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안주인의 품위를 나타내는 술이 달린 문 옆엔 건륭제(乾隆帝: Qianlong)가 상감 새긴 10여 개의 석판이 회랑에 있다.
낙수당(樂壽堂/乐寿堂: Leshoutang, 르쇼탕)
곤명호의 북동쪽에 위치한 낙수당은 건륭제(1711-1799)가 그의 어머니의 처소로 처음 건립하였으나, 1860년 아편전쟁으로 소실되었다. 1887년 자희태후가 여름에 머무는 별장으로 재건했다. 그녀는 48명의 시종과 수천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이화원에 머물렀다. 낙수(Leshou)는 논어(論語: BC 551-479)의 “지자락(知者樂), 인자수(仁者壽)” - 지혜를 갖춘 사람은 즐겁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 – 에서 따온 말이다.
본관엔 옥좌(玉座), 부채(宮扇:궁선), 책상(御案:어안), 그리고 유리병풍(圍屛:위병) 등이 있다. 옥좌 양쪽의 자기는 청조(淸朝: 1644-1912)를 대표하는 청화백자이다. 동으로 만든 4개의 커다란 향로(香爐)엔 9개의 복숭아가 새겨져 있는데, 백단(白檀)을 태워 실내공기를 향기롭게 하였다. 홀 천장의 커다란 샹들리에는 1903년 독일에서 수입한 것인데, 중국에서 사용된 초기전등 중 하나이다. 자희태후가 어탁(魚卓)이라 불렀던 탁자는 자단(紫檀)의 틀에 유리로 장식하였다. 탁자엔 작은 궁전과 경관들이 새겨져 있다. 동쪽의 내실은 자희태후의 침실이었고, 서쪽은 의상실 그리고 뒤쪽으로 궁녀들의 대기실이 있다.
낙수당 앞뜰에는 동으로 만든 사슴(鹿), 학(鶴), 보병(寶甁)이(각각 2개) 일렬로 서 있고 옥란(玉蘭/玉兰: Yulan, 목련), 해당(海棠: Haitang, 능금), 모단(牡丹, 작약)이 심어져 있다. 동상들은 육합태평(六合太平)의 의미 취한 것이고 꽃들은 옥당부귀(玉堂富貴)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영지(靈芝/㚑芝: Lingzhi)처럼 생긴 거석은 “청지수(靑芝岫: Qingzhixiu)”라 하여 건강을 보호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랑(長廊/长廊: Changlang, 창랑)
악수당 서원(西院)에서 석장정(石丈亭: Shizhang)에 이르는 장랑은 길이가 728m, 칸이273개로 세계에서 가장 긴 회랑(回廊)이다. 중간중간에 “춘하추동”을 본뜬 유가(留佳) , 기란(寄澜), 추수(秋水), 청요(清遥)라는 4개의 정자가 있다.
장랑은 만수산의 남쪽 아래의 자연적인 지형을 따라 곤명호 수변에 지어져 그림 같은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1755년 장랑을 건축할 때 건륭제(乾隆帝)는 화가들에게 절강성(Zhejiang)의 항주(Hangzhou)의 경치를 스케치하여 오게 하였다. 화가들은 돌아와서 서호의 경관 546개의 그림을 장랑에 그렸다.
중국문화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17,000여 폭의 그림들은 다음과 같다.
서유기(西遊記/西遊记: 손오공), 삼국연의(三國演義/三国演义: 삼국시대), 홍루몽(紅樓夢/红楼梦: 가보옥), 서호풍경(西湖風景), 이십사효(二十四孝: 효자24명), 장창화미(張敞畵眉: 장창고사), 우랑직녀(牛郞織女: 견우직녀), 장량납리(張良納履: 전국시대인물) 등의 그림이 있다.
각 그림의 주요부분은 반원형의 도리의 안쪽에 그려져 있는데 그림을 위해 하부구조를 놓지 않았다. 그림들은 화가들의 영감에 의해 창작된 것이다. 대부분의 그림들이 전형적인 “Sushi Colored Paintings”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배운전[排雲(云)殿: Paiyundian, 파이윤디엔]
배운전의 이름은 진조(晋朝) 곽박(郭璞: Guopu, 276-324)의 시구 “신선배운출(神仙排雲出),단견금은대(但見金銀臺/但见金银台)” –신선이 나와 구름을 물리치고, 한가로이 금은대를 바라본다 - 에서 따온 이름이다.
만수산 남쪽의 중앙에 위치한 배운전은 축하연회에 쓰였던 곳이다. 대웅전(大雄殿: Daxiong)이 있던 장소에 지어 자희태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에 사용되었다. 붉은 기둥과 금색 기와의 배운전은 21개의 방이 있다. 배운전 앞에는 동으로 만든 용(龍), 불사조(不死鳥), 보병(寶甁)들이 있다.
자단(紫檀)에 구름 속의 용을 화려하게 조각하여 만든 중간 크기의 옥좌는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평가된다. 옥좌 양쪽에 침향(沈香)나무로 수(壽: Shou)자를 조각해 놓았다. 섬세하게 장식된 병풍과, 궁선, 그리고 독일 화가가 그린 자희태후의 유화도 있다.
배운전의 남쪽의 정문이 배운문인데, 장랑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문 양쪽에는 동으로 만든 사자상이 호위하고 있고 양측에 12속상석(屬相石: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이 있다.
남호도(南湖島: Nanhu, 난호도)
3천여평에 이르는 남호도에는 함허당(涵虛堂: Hanxu), 감원당(鑒遠堂/鉴远堂: Wangyan), 용왕묘(龍王廟/龙王庙) 드의 건물이 있다. 함허당은 배들의 훈련을 사열하던 곳이었고, 용왕묘는 광윤령우사(廣潤靈雨祠/广润灵雨祠: Guangrunlingyuci)로 바뀌어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가 되었다. 남호도는 조각된 돌과 청색과 백색의 돌들이 섬을 둘러싸고 있다
석방(石舫)
청안항(清晏航: Qingyanhang)으로도 알려진 대리석 배는 건륭제(乾隆帝: 1711-1799)가 강남을 순회하던 배의 창루(舱楼)를 모방하여 1755년에 지었다. 옛 글에 이르길 “물은 배를 움직이게 할 수 있고 뒤집기도 할 수 있다” 고 했는데, 여기서 일반백성들을 말하는 물은 왕실을 지지할 수도 있고 전복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건륭제는 청조(淸朝:1644-1912)의 확고한 통치를 상징하는 거대한 석방을 물위에 건축했다.
1860년 소실된 후, 1893년 자희태후는 해군자금을 유용하여 다시 건축하였다. 삼감모양의다채로운 유리창, 수레바퀴, 색 벽돌들이 포장된 석방은 36m 길이에 2층 구조이다. 각층에 거대한 거울을 붙여서 우기에도 자희태후는 차를 마시며 호수경관을 감상할 수 있었다. 각 방향에 4개의 용머리를 설치하여 배수를 용이하게 하였고, 떨어진 빗물은 수로를 통해서 용의 입으로 그림같이 뿜어진다.
후호(后湖)
석방(石舫)을 통과해 북쪽으로 걸으면 후호를 만나게 된다. 작은 건물들이 둘러싼 후호 주변의 풍경은 한가하고 안락하다. 우거진 실록과 구불구불한 길은 후호주변의 풍경과 구별되는 독특한 모습이다. 만수산은 3면이 호수가 감싸고 있는데, 후호는 조망이 좋은 한가로운 장소다. 수변(水邊)에는 조원제(眺遠齋/眺远斋: Tiaoyuanzhai) 해취원(諧趣園/谐趣园: Xiequyuan), 소주가(蘇州街/苏州街) 등이 있다.
해취원(諧趣園/谐趣园: Xiequyuan, 시에취위안)
이허위안 북동쪽 끝에 위치한 해취원은 아름다운 설계와 독특한 배치로 “정원 속의 정원”으로 유명하다. 중국 북부지역의 정원 중에서 남부지역의 전통정원을 가장 잘 표현했다.
1751년 건륭제가 강남을 돌아볼 때, 강소성(江蘇省: Jiangsu) 무석(無錫: Wuxi)의 기창원(寄暢園: Jichuangyuan)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허위안에 유사한 정원을 짖도록 하고 혜산원(蕙山園: Huishanyuan)이라 칭했다. 1811년 수리한 후 해취원으로 변경하였으다. 1860년 소실되었다가 1893 재건되었다.
해취원은 3면이 경사면으로 가운데 연못이 있다. 해취원엔 7개의 별관, 5개의 홀, 수많은 회랑과 작은 다리들이 우아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 곳은 자희태후의 낚시 장소였는데, 환관들이 몰래 물 속에 들어가 바늘에 고기를 걸어주었다고 한다.
해취원 8경으로 유명한데, 재시당(載時堂/载时堂: Zaishi), 묵묘헌(墨妙軒/墨妙轩: Momiao), 취운루(就雲樓/就云楼: Jiuyun), 담벽재(淡碧齋/淡碧斋: Danbi), 수락정(水樂亭/水乐亭: Shuile), 지어교(知魚橋/知鱼桥: Zhiyu), 심시경(尋詩徑/寻诗径: Xunshi), 함광동(涵光洞: Hanguang)이 그곳이다
십칠공교(十七孔桥: Shiqikongqiao, 쉬치공촤오)
곤명호 동쪽 수변(水邊)과 남호도(南湖島)를 연결하는 십칠공교는 건륭제(乾隆帝: 1711-1799) 때 지어졌다. 길이 150m 폭 8m 이며, 소주(蘇州) 보대교(寶帶橋: Baodai)와 북경의 노구교(蘆溝橋: Lugou)의 특징이 접목되었다. 수면에서 보면 무지개 아치형태로 보인다. 난간의 대리석 기둥엔 554개의 사자상이 그리고 다리의 양쪽 끝에는 기괴한 동물이 조각되어 있다.
소주가(蘇州街/苏州街:Suzhoujie, 쑤저우제)
60여 개가 넘는 상점들이 300m의 거리에 들어서 있다. 강소성 소주시를 본 따서 후호(后湖) 수변에 설치한 소주가는 후호가 거리의 역할을 했고 수변이 상점이다. 이 곳은 황제들과 후궁들이 상가를 거니는 듯한 기분을 내기 위한 오락장소였다. 환관과 궁녀들은 좌판상인, 손님, 상점직원으로 역할을 나누어 시장풍경을 흉내 내었다.
오늘날에는 염색 점, 기념품 점, 약국, 은행, 신발상점, 찻집, 전당포, 청조복장을 착용한 사무소 등의 점포들이 있다
입장권:35원
중국여행 커뮤니티(가이드 렌트카 호텔 골프 맞춤여행 항공권 기차표 공연표)
중국:86)186-0127-8483 한국:013-0297-1332 메일:tehwan365@hotmail.com 카톡:litaih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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