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경 선생님 문학행사 후기
사회를 보면서도 언급했지만, 다큐멘터리인 <이 영화는 아직 등급이 없다>에서 어느 감독의 인터뷰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영상은 늘 아름답고 순수하며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것만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질 수 없다. 어떤 소재들은 관객들이 보기 힘들거나 회피하고 싶어하는 시국의 문제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보아야만 하는 것이며 당당히 마주하여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혜경 선생님의 작품들은 대체로 붕괴되어가는 가족의 이미지나 무기력 혹은 폭력적인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를 등장시킴으로써 90년대에 두각되었던 가족 해체의 문제를 여실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들은 선생님의 작품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던 90년대를 지나오면서 더욱 고착화되었고, 아버지는 가족에 대하여 힘이나 결정권이 없으며, 젊은이들은 자신의 이전 세대를 냉소하는 등 세대 간의 괴리가 점점 깊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이혜경 선생님의 작품 속에서, 우리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회피하고 싶어하는 가족간의 문제나 사회적 치부에 대해서 목격할 수 있도록 하는 당대성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온정과 여운이 넘치는 문장을 보면 절대 이 거대한 시스템적 문제가 단순한 상황 인지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자들과 작가가 되기 위한 독자들은 '이해하도록 운명지어진' 힘을 수용해야 하는데, 이때 '이해'란 사회 병폐에 대한 일반적인 목격만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폭력과 무질서, 질서의 붕괴, 세대의 갈등, 말라붙은 온정이 어디서 왔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만 한다. 그 질문의 끝에는 '관계'가 있다.
심리학 분야에서는 무척 유명한 실험 중 하나가 바로 스텐리 밀그램의 '복종'이라는 프로젝트인데, 전선을 한 사람에게 연결시켜놓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맞추지 못했을 경우 점점 더 전압을 올려 고통을 전달케 하는 실험이다. 이때 실험 참여자들은 '눌러도 괜찮으니 누르고 싶으면 누르라'고 말한다. 참여자들은 계속 전압을 올려 앞에 있는 사람을 '고문'한다. 이 실험의 목적은 2차대전 때 전체주의를 표방했던 나치의 맹목적인 압제에 아무런 반항 없이 많은 사람들이 순응한 이유를 밝혀내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밀그램이 얻은 결과는 '맹목적인 희생과 동의만을 강조하는 압제자의 명령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영원히 그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였다.
그렇다면 관계를 포기했을 때 폭력은 사라지는가? 폭력은 사라지겠으나 사람은 고독해질 것이다. 프랑스의 천재적 작가였던 프랑슈아즈 사강은 자신의 일기 <독약>에서 이렇게 썼다. '품에 안을 사람이 없을 때, 고독이 청탁받지 않은 일과 동의어가 될 때, 삶은 서글퍼지기 때문이다'라고. 결과적으로 관계의 단절은 온정과 연민이 부재한 고독만을 가져올 뿐이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밀그램의 실험은 극단적인 일례인 나치스에 대한 것이었다고 해도, 완전한 단절은 결국 황폐함만을 불러올 것이다. 천부적 악인이 아닌 이상 관용이나 이해가 도덕적인 해답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관계에 대한 연민이 폭력 해소에 궁극적인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이혜경 선생님의 소설은 90년대에 당대의 문제였던 가족과 관계 문제를 더욱 심화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렇듯 거듭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이때 이혜경 선생님의 작품을 읽은 우리들은 '문학의 쓸모'에 대해서 사유하게 된다. 가령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구타당하여 죽어가는 아이가 앞에 있다고 했을 때, 냉정하게, 문학은 이 아이를 구할 수 없다. 아이를 구하는 학문은 의학이나 심리학, 법학 혹은 가족상담학일 것이다. 문학은 이 모든 항목들을 포괄하고 있기는 하지만, 즉 총합체이긴 하지만 개별체는 아니다. 문학이 겨냥하는 것은 당장 앞에 놓인 아이의 안위가 아니라 아이를 길바닥에서 죽어가도록 내어놓은 거대한 문제의 해결이다. 이것이 당대성을 표방하는 문학 텍스트의 힘이다. 문학은 개별적인 희생자의 영혼을 구원하지 않는다. 영혼의 구원은 신학의 몫이다. 문학은 이 시대의 영혼을, 혹은 병들거나 부재한 사랑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문학이 상대하려는 것은 폭력에 시달리는 희생자가 아니다. 말했듯 희생자의 안위는 의학과 상담학, 심리학, 신학의 책무이다. 시대를 병들게 하고 치유 불가능한 지점까지 해체시킨 질긴 이데올로기와 같은 '폭력'에 대적하는 것이 문학인 것이다.
예일대학교 중앙도서관의 이름은 '바이네케 고문서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에는 창문이 없다. 오직 대리석과 기타 건축적 재료가 건물을 감싸고 있을 뿐이다. 태양이 떠오르면 붉은 햇빛이 벽을 투과하여 마치 거센 화염처럼 도서관 내부를 감싼다. 한양대 건축학부에서 강의하는 서 현 교수는 이 도서관을 가리켜 "건축가는 웅변하고 있다. 지식은 위대하되 허약하고, 강건하되 위험하다. 폭력은 어디에나 잠존하며 타오르는 불길처럼 얼마든지 세상을 덮을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폭력에 대항하는 것은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도서관이자 책이며 문학 텍스트라는 말이 된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솟구치는 폭력의 화염은 도서관 내부의 책을 태우지 못한다. 도서관에 배열된 책은 곧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문학적 정신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해체된 시대를 다시금 치유한다. 선생님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람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모든 학문의 총집합체인 문학을 한다는 긍지를 느낀다. 문학은 관계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 병들고 해체된 시대에서 문학은 홀로 생존하려 하지 않는다. 문학의 쓸모는 해체의 시대에서 가까스로 생존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데에 있지 않다. 생존자들에게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연민만이 폭력과 분쟁으로 가득한 시대를 회복시키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사회를 맡게 해주신 큰선생님, 한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늘 사회를 보면서 더욱 초대손님으로 오신 작가 분들께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작품세계에 신경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