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그래도] ‘나’라는 우상 깨뜨리고 영원한 그리스도 생명의 길로
<25> 자기애가 강할 때
이명희2026. 7. 8. 03:09
게티이미지뱅크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만물이 생명력과 푸르름을 더하는 싱그러운 계절을 허락해 주셔서
매일 새롭게 태어나게 함을 감사드립니다
스스로의 삶의 선택과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펼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심을
과거의 파편을 탓하지 않으며 나와 다른 자신을 원하지 않으며
언제 어디서든 닥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지 않은 미래를 오늘의 중심에 놓고 현재의 행복과 자유로운 삶을 구속하지 않게 하심을
두려움이 없는 삶을 원하기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당당히
딛고 선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내딛는 용기를 갖게 함을 감사드립니다
누군가 당장의 희생과 순종을 요구하면서 미래의 대가를 약속하거나
암시하는 경우가 있다면 자신의 선호나 의지를 따르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 적이 자신의 내면에서 영원히 죽지 않게 되어
자기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미움 또는 증오의 감정을 긍정하되 일정 선을 넘지 않도록
자신을 하찮게 생각지 않고 단단한 땅 위에 튼튼한 다리로 당당하게 서 있도록
행복을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또는 낮은 곳에서 구하지 않고
자기 높이에 맞게 구할 수 있도록
더 나아가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를 도와주소서
살아가는 동안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품게 하시고
자신을 존중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계획하고 진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이루어지게 하시고
교만하지 않고 수고하는 모든 일들이 많은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자기애와 나르시시즘의 경계
BTS는 2018년 발표한 노래 ‘앤서 러브 마이셀프(Answer: Love myself)’에서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좌절하고 넘어지더라도, 미로를 헤매더라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실수투성이인 어제의 나도, 가면 속으로 움츠러드는 오늘의 나도, 불안해하는 내일의 나도 모두 빠짐없이 나이니까 사랑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너를 위해 사는 게 인생”이라고 말했다. 남의 시선이나 평가를 의식하지 말고 상대방의 거친 말에 상처 입지도 말고 자신이 만족하고 행복한 일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네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의 말이다. 자신의 삶에 닥치는 모든 것,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와 상처도, 설령 고통스럽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일지라도 모든 것을 긍정적인 태도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는 착한 사람보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용기를 낼 것을 권면한다.
그러나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하면 나르시시즘이나 교만, 아집으로 흐르기도 한다. 남을 무시하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는 아둔함은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와는 결이 다르다. 자기를 존중하는 적당한 자기애와 나르시시즘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세상은 혼자 살아가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성경은 나르시시즘과 자기애를 넘어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친다.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둘째 계명이라고 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
17세기의 유명한 청교도 토마스 왓슨은 저서 ‘천국을 침노하라’에서 “천국은 값없이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싸워야 한다”며 “주님은 우리를 재촉하신다. 따라서 영혼의 힘을 다 쏟아부어 목숨 걸고 위에 있는 천국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침노해야 하는데 하나는 죄를 죽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의무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부정과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했다. 죄를 죽이고 은혜를 살리기 위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험담을 하기도 한다. 분명 나쁜 일인데도 멈추지 못한다. 내 안의 이기심과 교만, 위선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품어주는 것을 방해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처음으로 예고하신 후 베드로의 항변을 꾸짖으며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의미는 내 안에 있는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주권의 교체를 뜻한다.
내 욕망과 계획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는 결단이다. 당시 로마 시대에 십자가를 지는 것은 사형 집행지로 가는 길을 의미한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한 삶의 고난이나 어려움을 진다는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내어놓는 절대적인 순종과 희생을 상징한다. 자기중심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인생의 중심에 놓고 예수의 섬기는 길을 따라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저서 ‘나를 따르라(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그는 그에게 ‘와서 죽으라’고 명령하신다”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의 자아는 죽고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라는 의미다. 본회퍼는 회개 없는 용서, 제자도 없는 세례를 ‘값싼 은혜’라고 비판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삶의 변화나 고난 없이 세상과 똑같이 살아가는 ‘그리스도교의 숙적’이라고 했다.
반면 참된 은혜는 우리에게 ‘따름’을 요구하며 그것은 곧 자기 부인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고 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오늘의 안락함을 기꺼이 내줘야 한다. 현대인들에게 ‘나’라는 우상을 깨뜨리고, 그리스도라는 참된 생명의 길로 들어서라고 강권한다. 베드로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던 것처럼 믿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회퍼가 말하는 제자도의 최종 목적지는 그리스도와 연합해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로 사는 것이다. “제자도는 추상적인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나 자신을 결합하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스스로 생명을 내어주셨다. 우리의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십자가는 고난이 아니라 나를 내려놓는 사건이며 십자가의 길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길이다.
성경 속 자기애와 자기 부인
성경은 나르시시즘의 형태인 자기 우상화와 교만,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멸시하는 행태를 경고한다. 불안과 질투에 매몰된 사울 왕은 나르시시즘의 파괴적 양상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인정에 집착해 하나님의 명령보다 백성들의 눈치를 더 보았으며, 자신의 기념비를 세우는 데 급급했다. 다윗이 자신보다 높은 찬사를 받자 병적인 질투를 드러내며 그를 제거하는 데 남은 생애를 바쳤다.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아들 요나단이나 제사장들을 죽이려 하는 등 타인을 도구화할 뿐 공감 능력도 없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외모와 권력에 취한 자기 우상화의 표본이다. 성경은 그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었다고 기록한다. 자신의 머리카락 무게를 재며 외적인 완벽함에 집착했다. 성문 어귀에서 백성들을 가로채 “왕이 너의 말을 들어줄 판관을 세우지 않았다”며 교묘하게 아버지 다윗과 백성 사이를 이간질하고 자신을 구원자로 포장했다.
헤롯 아그립바는 신이 되고자 한 자아의 사례다. 사도행전 12장에 등장하는 그는 대중의 찬사에 취해 스스로 신격화했다. 사람들이 그의 연설을 듣고 “신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외칠 때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결국 자기애의 끝인 교만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성경이 말하는 ‘자기를 부인하는’의 의미는 단순히 자존감을 낮추라는 게 아니다. 자아의 중심을 나한테서 하나님께로 옮기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자신의 사명이 주인공 예수를 소개하는 조연임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
사도 바울은 가문 학벌 지위 등 모든 스펙을 갖췄지만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180도 바뀌었다. 자신의 강함이 아닌 자신의 약함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했다.
결국 ‘자기 부인’은 타인의 인정에 목매거나 완벽한 신이 되고 싶은 거짓된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나를 찾는 길이다.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
기사원문 : https://v.daum.net/v/20260708030952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