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복음은 한결같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마태28,6; 마르16,6)
"안으로 들어가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루카24,3)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20,2)
이처럼 시신이 없어진 것에 대한 놀라움이 따른다.
누가 훔쳐 갔을까? 누가 처리 했을까?
그들은 한 번도 주님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베드로처럼 수난에 대한 예고는 슬퍼하면서도
부활에 대한 예고는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계실 때에 수없이 많은 기적을 행하신 주님의 능력이
살아 있음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사람의 육체적 죽음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묻어 버리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신은 죽어도, 그분의 천주성과 영혼은
결코 죽을 수 없음을 망각하게 된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저승(고성소; 古聖所)에 가시어,
구약의 의인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심으로
이제 천국이 열렸음을 선포하셨다.

조금만 기다리라. 부활하여 내가, 역사의 예수가
믿음의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말씀과 영적으로 사십일 동안 증거한 뒤
승천할 때 내가 너희들을 다 데리고
천국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함께 가겠다고 복음을 전하셨다.
그리고는 지상으로 내려오셨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자연적으로는 영혼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영적인 몸(영광스러운 몸; the glorious body)이라 불리운다.
사기지은(四奇之恩; 빛남, 무손상, 신속, 투철)
을 입어서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 자유롭다.
문을 열지 않아도 들어가고, 장소도 시간도
구애받지 않고 여기저기 발현하신다.
복음은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
빈 무덤 주변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와의 첫 만남을 소개한다.
그러나 교회의 전승은
마리아 막달레나 이전에 성모 마리아와의 첫 만남을 선포해왔다.

실제로 예루살렘 무덤 성당 내 발현 성당에도
이 사실을 부조를 통해 증명해 주고 있다.
인류를 미움과 불의,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는 주님의 그 크신 사랑,
죽음보다 더 크신 사랑에 동참한 사람들의 사랑의 깊이에 따라
순서가 정해지는 것 같다.
빈무덤…전세계 그 어느 곳에도
하느님에 의해 비어 있는 무덤은 없다.
아마도 예수님과 성모님 뿐일 것이다.
주님은 부활하셨고,
성모님은 부르심을 얻어 입어 몽소승천(蒙召昇天)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성부 하느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성부 하느님께 중재해 주실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가장 가까이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는 뜻이다.
말씀안에, 성체안에, 우리의 인격안에, 역사의 사건과 만물안에,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신명4,7)분이라는 것이다.
빈무덤, 그곳은 확실히 역사의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장소이고,
동시에 확실히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장소이다.
바로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살아있는 강론대이다.

동시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 안에서, 말씀과 성체 안에서,
우리의 영혼의 핵인 심령 안에 주인으로, 주님으로 거주하시기 위해서
(1코린3,16; 6,19~20)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영혼의 안방인 심령을
온갖 이기와 탐욕과 죄로부터 비워지기를 원하신다.
살아 계신 주님은 내 안에, 너 안에, 우리 모두 안에 현존해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첫 인사인
샬롬~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