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며,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주계정(朱溪正), 이심원(李深源), 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78년(성종 9)성종이 자연 재난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 등 장문의 소(疏)를 올렸다. 소릉 복위는 세조 즉위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모험적인 제안이었다. 이 때문에 훈구파의 심한 반발을 사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이 국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로 인하여 조정 대신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도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1480년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그 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당시는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들이 집권하고 있어 소릉 복위 주장은 용납되지 않았고, 다른 명목으로 박해하려 하였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흘겨보면서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으로써 당시의 금기에 저촉하는 일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였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 개(李 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타계 후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 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1511년(중종 6) 성 현(成 俔), 유효인(兪孝仁), 김시습(金時習)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1513년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782년(정조 6)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상에서는 원 호(元 昊), 이맹전(李孟專), 김시습, 조 려(趙 旅), 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고양시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군 예양서원(汭陽書院), 함안군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월군 창절사(彰節祠), 의령군 향사(鄕祠)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秋江集)>,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귀신론(鬼神論)> 등이 있다.
■ 신 잠(申 潛 고령人 11세, 1491~1554) :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이며, 신종호(申從護)의 아들이다.
유적유물이 그야말로 고색창연 그 자체네요. 예양강은 탐진강의 옛이름이라고 하던데 여양리란 명칭이 아직 살아 있네요. 예양이란 이름이 우아하고 부드러워 보여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