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후야. 넌 장한 놈이야
<손주에게 보내는 편지>
아주 오래된 기억이다. 어느 해 10월 29일 오후였다. 높은 하늘 아래 가을은 저만치 비껴가고 있었다. 부산 장산초등학교의 푸른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저마다 짝을 지어 공을 차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내가 기다리는 효림 초등학교 선수들이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좀처럼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설렘 반, 기다림 반으로 계단에 앉아 있었다. 손주가 운동장에서 뛰는 모습을 볼 생각에 마음은 벌써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얼마 후 효림 초등학교 선수들이 도착했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효림 초등학교와 금정 초등학교의 경기였다. 나는 운동장에 들어선 선수들을 한 명 한 명 눈여겨보았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았지만, 우리 인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후는 내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큰 외손자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으로 효림 초등학교 축구부에서 뛰고 있었다. 어린 손주가 축구 선수로 자라나는 모습은 할아버지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두 경기가 끝나고 마침내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었다. 장산초등학교와 효림 초등학교의 대결이었다. 아, 저기 인후가 보인다! 나는 속으로 환호했다.
‘그래, 인후야! 잘한다. 이겨라! 힘껏 뛰어라!’ 목에 걸친 카메라가 방향을 바꿔가며 셔터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인후는 수비진에서 헤딩도 하고, 몸을 날리며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작은 몸으로 공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 어찌나 대견하던지, 바라보는 내 가슴까지 뜨거워졌다.
다음 날 아침, 뜻밖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딸내미 전화였다. 내용은 인후가 더는 축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하루 전까지만 해도 푸른 운동장에서 힘차게 뛰던 아이가 이제 축구를 그만두어야 한다니.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자세한 사정은 여기서 밝히기 어렵다. 다만 학부모와 감독 사이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른들 사이에서 오간 말과 감정이 어린아이에게 어떤 상처로 남았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더욱 마음 아픈 것은 우리 딸의 처지였다. 딸은 암과 싸우며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을 딸에게 인후가 축구장에서 뛰는 모습은 그 무엇보다 큰 위로였을 것이다. 아이가 운동장에서 씩씩하게 달리는 모습을 보면 아픈 것도 잠시 잊을 만큼 기뻤다고 했다. 그런데 그 기쁨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딸과 아이의 어머니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 역시 곁에서 눈시울을 감출 수 없었다. 어린 손주에게 닥친 일이 안타까웠고, 아픈 몸으로 아이의 꿈까지 걱정해야 하는 딸의 마음이 더없이 아팠다. 나는 마음속으로 딸을 불렀다. ‘희야, 힘내라. 너무 아파하지 마라. 인후는 이번 시련을 딛고 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다.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라.’ 그리고 손주에게도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인후야, 괜찮다.
할아버지는 네가 얼마나 속상했을지 다 헤아릴 수는 없다. 어린 네게는 하루의 시련이 백 날을 겪은 것처럼 길고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엄마에게, 할머니에게 말하지 그랬니. 할아버지는 네가 그런 일을 겪고 있는 줄도 몰랐구나. 엄마가 아파서 힘들어할까 봐 차마 말하지 못했다는 네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구나. 그 어린 마음으로 엄마 걱정까지 했으니, 우리 인후가 얼마나 속이 깊은 아이냐.
하지만 인후야, 세상에는 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단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억울한 일을 겪을 수 있고, 잘못한 것이 없어도 상처받는 날이 있단다. 그렇다고 네 꿈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할아버지는 네가 감독님과 함께했던 짧은 시간도 언젠가는 네 인생의 한 장면으로 남을 것이라 믿는다. 사람의 마음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세상 전체가 너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란다.
이제 새로운 학교로 옮겼으니 공부에도 힘을 쏟아라. 반장도 했으니 친구들을 이끄는 법도 배워라. 더 큰 꿈을 품고 언젠가는 전교 어린이 회장에도 도전해 보렴. 무엇보다 네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그 꿈을 잊지 말거라. 할아버지는 네가 육군사관학교에 가기를 바랐다. 장차 훌륭한 장교가 되어 어깨에 별을 다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네가 그 꿈을 이루어 할아버지 어깨에 큼지막한 별 하나를 달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것은 할아버지의 소망일 뿐이다. 네 인생은 네가 살아가는 것이니, 훗날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네가 옳다고 믿는 길에서 떳떳하게 살아가면 좋겠다. 할아버지는 네 생각과 집념을 믿는다. 그러니 이번 일로 스스로를 작게 여기지 말아라. 한 번의 좌절이 네 인생 전체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란다 인후야, 너는 효림 초등학교에서 축구를 하던 짧은 시간 동안에도 네 인생에 소중한 메달 하나를 걸고 나온 셈이다. 그것은 경기에서 얻은 메달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겪으며 배운 인내와 용기의 메달이다.
장하다, 인후야. 그날 푸른 운동장에서 네가 뛰던 모습을 할아버지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카메라에 담아 두었던 네 모습에는 그날의 햇살과 바람, 그리고 손주를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기쁨이 함께 들어 있다. 그때 할아버지는 네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인후야, 너는 장한 놈이야. 할아버지는 너를 믿는다.” 그 말을 마음속에 품은 채 세월은 흘렀다.
“인후야, 그날 네가 겪은 일은 패배가 아니었다. 앞으로 살아갈 긴 인생에서 너를 지켜 줄 인내와 용기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너는 지금도 할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손주다. 인후야, 너는 장한 놈이야. 할아버지는 지금도 너를 믿는다.”
인후야, 그날의 꿈, 별을 달았는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네가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 스스로를 믿으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으로 이 할아버지는 충분하다. 어린 날의 상처가 지금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다만 네가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그날의 일을 패배로만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는 어엿한 삼십대의 사회인이다.그날 네가 겪은 일은 절대적으로 패배가 아니다. 앞으로 살아갈 긴 인생에서 너를 지켜 줄 인내와 용기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너는 지금도 할아버지에게는 자랑스러운 손주다. 인후야, 너는 장한 놈이야. 나는 지금도 너를 믿는다. 넘어졌던 자리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 날로 기억해 주면 좋겠다. 오래전 할아버지가 너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