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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0일 토요일 [(백)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베르나르도 성인은 1090년 프랑스 디종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시토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뒤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되었다.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몸소 모범을 보이며 수도자들을 덕행의 길로 이끌었다. 또한 그는 교회의 분열을 막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신학과 영성 생활에 관한 저서도 많이 남겼다. 1153년에 선종한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1174년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830년 비오 8세 교황은 성인을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천사가 에제키엘 예언자를 주님의 집으로 데려가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와서 주님의 집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게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율법 학자들처럼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고,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강력히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막상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
희망의 예언자 에제키엘
구약시대 대표적인 예언자 중에 에제키엘 예언자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경 남쪽 왕국 유다 지방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에제키엘이란 이름이 지닌 의미는 ‘주님께서 힘을 주신다.’입니다. 그는 이름에 걸맞게 주님께서 주신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고통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성전과 예식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신학자인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독창적인 역사관을 주장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박학다식하며 지혜와 경륜이 탁월한 재원이었습니다. 그의 예언자로서의 삶은 이사야나 예레미야 예언자 못지않게 슬프고 고독하며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족들의 타락을 두 눈으로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뚜렷이 내다보고 있었고 그것이 머지않아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정복자 느부갓네살에 의해 자행된 1차 유배 때 포로가 되어 동족들과 함께 바빌로니아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 전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차 유배 후 5년이 지난 30세 무렵 그발강 가에서 예언자로 불림을 받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틈만 나면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려 우상숭배에 빠지던 배반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얼굴은 또 얼마나 두껍고 뻔뻔한지? 거기다 마음까지 돌처럼 완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다 별것도 없는 선민의식과 우월감에 젖어 하느님 말씀과는 담을 쌓고 살아갔습니다. 자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경각에 달려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죽음과 멸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어찌 그리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동족들의 죄와 타락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지도자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가난한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했습니다. 사제들은 율법을 짓밟고 성전에 바쳐진 예물을 더럽혔습니다. 예언자들은 점쟁이나 마술쟁이로 타락했습니다. 백성들은 부모를 홀대했으며 이방인들, 과부와 고아들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간음과 근친상간이 만연했습니다. 이런 동족들 앞에서 에제키엘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했습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부르짖었습니다. 악행을 밥 먹듯이 저지르던 동족들 앞에 준엄하고 강경한 어조로 경고하고 또 경고했습니다. 예루살렘 함락 전에 그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죄와 멸망에 대한 경고에 집중되었지만 유배지에서 펼쳐진 그의 예언은 다분히 희망적이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이 유배생활이 종지부를 찍을 것이며, 산산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이 화려하게 재건될 것이다. 그때 동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감격스럽게 귀향할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 번 이스라엘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그의 예언과 가르침은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고 있던 동족들에게 큰 힘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재건과 이스라엘의 해방은 유배지의 번득이는 감시자들의 눈초리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할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의 예언과 가르침은 다분히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이었습니다. 그는 ‘가슴속에 두 가지 영혼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행동거지가 신비롭고 독특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에 사로잡혀 자주 환시들을 보고 때로는 며칠씩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상징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 마비 증세도 보였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가르침 가운데 마른 뼈들이 일어나는 장면은 참으로 독특하고 의미심장합니다. 완고하고 부정한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 심판의 결과는 ‘마른 뼈’였습니다. 벌어져서는 안 될 인간의 만행으로 인한 대량학살, 그 자취가 지구촌 곳곳에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더 이상 똑같은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후손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아직도 그 현장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순간 받은 느낌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절망, 좌절, 깊은 슬픔, 통탄, 두려움... 에제키엘 예언자도 비슷한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예제키엘 예언서 37장 11절) 그렇군요. 뼈들의 무덤 앞에 우리 인간은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두려워하고 통탄합니다. 그러나 희망과 위로의 예언자 에제키엘은 거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본심, 하느님의 간절한 마음을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올리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의 안에 내 영을 넣어주어 너희를 살릴 것이다. 내가 너희를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에제키엘 예언서 37장 13~14절)
예제키엘 예언자는 주님의 현존이 거룩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에만 국한되지 않고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한 유배지 바빌로니아에도 지속된다는 것을 반복해서 선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러운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분명히 주님께서는 현존하고 계실 것입니다. 죄와 불행과 절망 속에서도 부단히 희망하고 인내하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바일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 독서:에제키엘 43,1-7ㄷ
수능을 망친 딸에게 엄마가 이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딸, 너의 세 번째 수능이 끝났구나. 수능 날 축 처진 어깨로 들어온 딸의 모습을 보며 누구보다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구나. 아직 세상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한 채 대학의 문턱에서 성공보다 실패와 좌절감을 먼저 알아버린 우리 딸이 너무 안쓰럽고 가엽구나. 저녁도 먹지 않은 채 밤새도록 흐느껴 울 때 엄마도 방 너머에서 같이 울었다. 몇 번이고 방문을 열고 보듬어 주고 싶었지만 참고 또 참았단다. 사랑하는 우리 딸 엄마 아빠는 네가 명문대에 가지 않아도 좋다.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엄마 아빠는 앞으로도 너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해 줄 생각이야. 재수하고 삼수한 지난 2년간의 시간이 언젠가는 너에게 멋진 경험이 되리라고 믿는다. 너는 인생의 낙오자가 아니야. 그저 남들이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며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할 뿐이란다. 우리 딸이 대학가면 등록금 하려고 엄마 아빠가 모아둔 돈이 있는데 딸이 원한다면 이 돈으로 여행을 보내주고 싶구나. 세상은 넓고 볼 것도 먹을 것도 느낄 것도 많이 있단다. 너의 식견을 넓혀주고 싶구나. 언제든지 말하려무나, 언제든지. 오늘은 언제쯤 집에 올 거니? 웃으면서 우리 사랑하는 딸을 맞이하고 싶네.
- 누구보다 너를 사랑하는 엄마가 -
어쩌면 부모로서 당연히 그렇게 보내야만 하는 문자지만 현 시대엔 왠지 모르게 감동적이기 때문에 인터넷에 그 문자 사진과 함께 전문이 올라와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1등만 강요하는 엄마에게 질려서 ‘엄마 됐지!’라고 1등 성적표에 적어놓고 자살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발판이 되어주고 거름이 되어 주는 사람이지 자신의 발판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자신을 이용하고 명령하기보다는 자기의 발판이 되어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럴진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저는 가끔 성화 중에 하느님께서 아기 천사들의 머리를 밟고 앉아 계신 모습들을 보며 천사들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천사들을 기껏 만드셔서 당신 발판으로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를 읽어보니 그런 발판으로 쓰이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동쪽으로부터 하느님의 영광이 큰물이 밀려오는 소리와 함께 성전 쪽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동쪽은 태양을 상징하고 하느님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인간이 동쪽으로 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로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에덴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고 말하는 의미는 그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면 됩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은 1531년 멕시코에서 발현하셨고 그 모습을 후안 디에고의 망토에 새겨 넣어 주셨는데, 당신의 머리는 태양을 향해 23.5도 기울어져있습니다. 지구가 태양을 향해 23.5도 기울어져 있지 않으면 지구상에 생물이 살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지구는 태양을 의존해야 하는 존재이고 태양의 빛이 도달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별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주님의 자리에 앉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동쪽으로부터 오셔서 성전에 자리를 잡게 되시는데,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바르고 그의 머리로 닦아 드리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는데 그 기름은 예수님의 다리로 흘러서 우리 머리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겸손과 순종의 정신이 없다면 우리는 그분의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순종은 라틴어로 ‘sub-missio’라고 하는데 ‘자신을 밑에 놓는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발밑에 우리의 머리가 놓여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우리 발판이 되셔서 우리 죄로 짓밟힘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이 우리 왕이 되시게 하기 위해 발판이 되어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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