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250
■1부 황하의 영웅 (250)
제 4권 영웅의 길
제 31장 유랑의 시작 (7)
중이(重耳)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떠날 때가 된 것 같군요."
조쇠(趙衰)가 중이(重耳)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백적(白翟) 마을을 떠나자는 의견이다. 모두들 침묵했다.
그래도 12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이 곳에 와서 결혼하고 가정까지 꾸민 젊은이들도 있다.
선뜻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이다. 방 안은 깊은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가..........."
마침내 중이(重耳)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곳에 온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소. 나의 처자가 모두 이 곳에 있으니, 여기가 곧 나의 집 아니겠는가."
중이(重耳)의 눈길은 적족 마을에 와서 가정을 꾸민 사람들의 얼굴에 가 머물러 있었다.
중이 자신의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가정이 있는 가신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인가.
아니 떠나야 할 정당한 명분을 가신들 스스로에게 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런 면에서 호언(狐偃)은 가신단의 우두머리다운 관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신들의 행복과 안정을 염려하는 중이(重耳)의 마음을 읽고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공자가 이 곳 백적(白翟)으로 망명하신 것은 가정을 갖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장차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큰 포부를 품고 임시로 와 있는 곳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이 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것을 발제(勃醍)가 일깨워준 것 뿐..
다른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결코 발제를 피해 달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을 위하여....
이 곳을 떠나는 것 뿐입니다."
모두가 호언(狐偃)의 말에 수긍하는 눈빛이었습니다.
중이(重耳)는 조쇠와 호언에게 무언의 고마운 눈길을 보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간다면...........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인가?"
"초(楚)가 좋질 않겠습니까?"
조쇠의 대답이었다.
초(楚)는 남방의 초강대국. 이미 야만의 종족이라고 비웃는 시대는 지나갔다. 중원의 한 제국으로서 어엿한 위치를 굳히고 있었다.
기회가 닿아 초(楚)나라가 도와준다면 중이(重耳)의 귀향은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다.
조쇠(趙衰)가 초(楚)나라를 거론한 것은 이런 시대적 변화와 지리적 여건을 고려한 것이리라.
호언(狐偃) 역시 초를 생각하고 있었음인가. 그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중이(重耳)는 이미 생각해둔 것이 있었다.
그는 좀전과는 달리 단호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제(齊)로 가겠다."
제(齊)나라는 동방의 대국. 초(楚)와는 라이벌 관계다. 현재의 패자국(覇者國)이기도 하다. 다만 거리가 먼 것이 흠이다.
중이(重耳)가 제나라를 염두에 두기 시작한 것은 관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였다.
제환공(齊桓公)이 패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관중의 힘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관중(管仲)이 세상을 떠났다.
후임 재상인 공손습붕도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그 후 포숙(鮑叔)이 재상직을 수행하고 있긴 하지만 제(齊)나라 정치는 상당히 침체 상태인 모양이다.
'이럴 때 내가 제(齊)나라 재상직을 맡으면............?"
중이(重耳)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가정을 해보았다. 재능과 덕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관중(管仲)이 이루어놓은 패업을 지킬 능력 정도는 지니고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가 제(齊)나라로 간다고 해서 곧장 재상직에 오를 수는 없겠지만,
제환공(齊桓公)은 타국의 망명객을 유난히 후대한다고 들었다. 보다 쉽게 기회는 찾아오리라.
단, 한 가지 중이(重耳)의 가슴을 찢어놓는 것이 있었다.
제환공을 모신다는 것은 곧 진(晉)의 상속권을 포기한다는 의미.
다시는 진(晉)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중이의 마음을 가신들이 알면 얼마나 아쉽고 애통해할 것인가.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진혜공(晉惠公)은 한원대전의 패배 후 포로가 되었으나 목숨을 부지하고 귀국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진목공(秦穆公)이 아직까지 진혜공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
서방의 강국인 진(秦)이 진혜공을 인정하는 한 중이가 진(晉)으로 돌아갈 희망은 어디에고 없다.
그럴 바에는 천하 패업을 이룬 제환공(齊桓公)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가신들을 위해서도 낫지 않겠는가.
"제(齊)나라로........
가자!"
중이(重耳)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슬픔을 숨긴 단호한 음성이었다.
호언(狐偃)만은 중이의 단호한 음성에 담긴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는,
- 안 됩니다.
하고 소리치지 않았다.
상속권을 포기하겠다는 중이(重耳)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중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중이의 생각에 반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제(齊)나라로 갑시다!"
호언(狐偃)은 쾌활한 어조로 동조의 뜻을 표했다.
이로써 다음 망명지는 정해졌다.
"공자께서 제나라에 눌러앉으실 생각이 분명한데, 그대는 어째서 제(齊)나라로 가자는 공자의 말에 동조한 것이오?"
중이(重耳)의 집을 나서며 조쇠(趙衰)가 호언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호언(狐偃)이 누런이를 드러내며 조쇠를 돌아다 보았다.
"공자가 제(齊)나라에서 관직만 받지 않는다면, 공자인들 제(齊)에 눌러앉을 까닭이 없겠지요.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이(重耳) 공자를 제환공(齊桓公)의 신하로 들어가게 하지는 않겠소."
"그렇게만 된다면 제(齊)나라로 간들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비로소 조쇠(趙衰)도 빙긋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