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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를 드리라! (레 2:1-3, 11-13)
지구촌에서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병이 있습니다. 걱정과 근심이라는 병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걱정과 근심이라는 병을 다 앓고 있습니다. 이것을 유형별로 일곱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제가 말씀드리는 이 대상 가운데 어디에 해당되는지 한번 체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지나간 일로 걱정 근심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 끝난 일인데 걱정 근심 속에서는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우 때문에 걱정 근심을 한다고 합니다. 이 기우라는 말은 기 나라 사람들이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을 하고 살았다 하는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공연히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걱정 근심을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일이 내 뜻대로 안된다고 걱정 근심을 한다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자기 이름을 떨치고 싶은데 도저히 그 이름이 떨쳐질 기회를 얻지 못해서 걱정 근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섯번째는 완전히 맡기지 못해서 남편도 믿지 못하겠고 아내도 믿지 못하겠고 재물을 맡기려 해도 불신이 오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신뢰가 깨어져버려 맡기지 못하는데서 오는 걱정 근심이 많답니다. 여섯번째는 날씨 때문에 걱정 근심하는 현대인들이 많답니다. 어떤 행사를 계획해 놓거나 결혼 날짜를 받아놓고 날씨가 어떨까 걱정 근심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일곱번째는 병들까봐 걱정 근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걱정 근심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걱정 근심은 안할 수 없지만 사람의 정서상 걱정 근심을 오래하면 거기서 모든 병이 발생하고 걱정 근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걱정 근심이라는 이 자체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거기서 자꾸 병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기쁨의 제사
오늘 저는 구약의 제사 중에 소제를 말씀드리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소제라는 이 제사는 우리에게 현재는 드려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제의 의미는 우리 신앙생활에 아주 실제적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안고 있는 걱정 근심의 문제들과 주 앞에서 우리 자신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하는 삶의 의미를 생생하게 새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를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제사입니다. 그러나 소제만은 속죄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을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제의 강조점은 기쁨과 평강 가운데서 하나님께 섬기고 헌신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소제의 히브리말 뜻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드린 자도 기쁘고 받는 자도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과 평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혹시 선물을 주고 후회해 본 적이 있습니까? 공연히 내가 주었구나 하는 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은 언제 준 것이라도 기억할수록 기쁜 것입니다. 받은 선물도 괜히 받았다 하는 선물은 의미가 없습니다. 소제는 드리는 사람도 기쁘고 그 선물을 받으시는 여호와 하나님도 기뻐하는 제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번제를 통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나타내셨습니다. 번제는 제물이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는 속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 앞에 바쳐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드려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제가 가지는 기쁨과 평강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진 아름다운 제물이 되었습니다.
예물의 중요성
소제의 강조점은 예물에 있습니다. 번제는 제물이 죽어야 되고 제사장이 그 제물을 불살라 드리는 제사 자체에 큰 의미가 강조되지만 소제는 제물 그 자체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 예물이 무엇인가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라고 했습니다.
소제의 예물은 고운 가루입니다. 곡식을 드리더라도 고운 가루로 만들어서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절차가 있습니다. 첫째는 충실한 열매를 골라야 됩니다. 쭉정이나 상한 곡식이 아니고 충실한 열매를 골라서 이 열매를 볶아야 됩니다. 그리고는 이 열매를 빻아야 됩니다. 그리고 채로 쳐서 부드러운 가루를 만들어야 합니다. 곡식 그대로는 주 앞에 바쳐질 수 없습니다. 충실한 곡식이 볶아지는 과정 그리고 빻아져서 고운 가루로 변하는 그 가루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가루를 가지고 예배드리러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소제를 드려야 되는데 소제의 가루를 갖고 오신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적 소제는 우리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미상으로 소제는 구약적 소제가 아닙니다. 구약 사람들처럼 양이나 소나 짐승을 가지고 가루를 가지고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사는 우리들은 복음 안에서 소제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있고 제물이 있습니다. 이건 명백히 구분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예배는 예배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제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성이 된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도 소제도 그대로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번제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소제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구약방법으로 소제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주님이 명하신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고운 가루
고기를 볶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살아 있는 그 곡식 자체가 완전히 죽으려면 볶아져야 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곡식이 볶아지는 과정입니다. 곡식의 모양이 그대로 있어서는 가루가 나오지 않습니다. 곡식이 빻아져야 됩니다. 우리의 육을 죽이고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하는 육이 깨어지는 과정이 있어야 영적으로 가루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의 덩어리가 빻아져야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나쁜 습관의 덩어리들이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온갖 죄악의 덩어리들이 깨어져서 가루가 되어야만 소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예배드리는 우리 자신이 제물이고 우리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사장이 있어야만 예배가 되고 예배 인도자가 있어야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기도 할 수 있는 제사장입니다. 여러분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들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얼마든지 전도를 할 수 있는 선지자들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령을 물리치고 악령을 다스릴 수 있는 왕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제사장이요 우리 스스로가 제물입니다. 소제는 우리 자신이 소제물로 드려질 수 있고 소제 드리는 제사장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는 것입니다.
누룩과 꿀을 넣지 말라
이 소제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규칙을 또 하나 보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11절에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소제물에 넣지 말라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누룩과 꿀입니다. 이 두 가지는 거짓 교훈과 악을 상징합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이 먹는 빵은 누룩을 넣어야 됩니다. 부풀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꿀을 넣어 단맛이 나야 빵이 맛이 있습니다. 육을 위해서 먹는 빵은 반드시 누룩과 꿀을 넣어야 됩니다. 과자나 빵이 달지 않으면 맛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육신을 위해서 먹는 빵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되는 누룩과 꿀을 넣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누룩은 거짓교훈을 말합니다.
"삼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니라"(잠5:3)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 멍에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잠25:27)
꿀을 많이 먹는다는 것은 탐욕을 상징합니다. 꿀은 달기 때문에 자꾸 먹게 됩니다. 그래서 탐욕을 부리는 것을 꿀에다가 비유했습니다. 거짓 교훈과 악을 재물에 섞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금을 치라
그리고는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다. 13절에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소제물에 있어서 하나님이 넣지 말라고 하는 두 가지와 반드시 넣으라고 하는 한 가지는 영적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큰 교훈입니다. 누룩과 꿀을 넣지 말고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다.
요즘 우리들에게 있어서 본질과 비본질의 문제에 충돌을 많이 경험합니다. 교육에 관한 토론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얼마 전 교육에 대한 대토론을 제가 들어봤는데 우리가 함께 느끼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학교에서 학부모에게 이런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아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라는 설문조사를 했을 때 컴퓨터 기술자가 되는 것, 교수가 되는 것, 의사가 되는 것, 법조인이 되는 것 등 여러 가지가 많이 나왔는데 아주 특이한 한 어머니의 답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이렇게 답을 적었습니다. "내 아이가 미안합니다. 제 잘못이라는 말을 정직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어머니의 대답은 우리에게 많은 암시를 줍니다. 많은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의 사람됨을 관찰한 게 아닙니다. 자기 아이의 어떤 기능을 본 것입니다. 우리 애는 교수가 되어야 하고 의사가 되어야 하는 것을 바라고 있는데 이 어머니는 그 아이 자체를 본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우리 아이가 교수가 되기 전에 의사가 되기 전에 미안합니다 라는 이 말을 정직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먼저 되는 것을 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교육 정책이나 교육 자체에 너무도 사람을 망가뜨리는 불순요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어떤 기술자, 기능자격자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격은 되는데 사람은 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안된 사람들이 자격을 가지고 있고 권세를 가지고 있고 돈을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 사회에 모든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로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육형태가 사람을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오직 목표는 점수요 대학진학이라는 것입니다.
장애를 극복하라
장애라는 말은 그 의미가 고칠 수 없는 상태의 병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장애인을 볼 때 이 사람은 장애 이대로 한 평생을 산다고 보고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장애라는 말 자체가 회복이 불가능한 개념을 가지고 있답니다.
여러분, 그런데 오늘 현대인들이 육체는 멀쩡하면서도 내면에 정서적으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장애를 안고 산다는 것입니다. 불안장애가 있는데 불안해서 제대로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또 공포장애가 있답니다. 지금 미국 사람들은 공포 속에 살아간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더 중증은 공황장애라고 합니다. 나들이를 하는데 오늘 무언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다 해서 장애를 안고 산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나 하려면 점쟁이한테 찾아가서 물어보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점쟁이나 무당이 성업하는 이 현상이 우리 사회가 공황장애증 환자들이 많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오신 분들은 공황장애증은 안 걸린 줄로 제가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런 장애는 극복하고 삽니다만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서울시민 중에도 불안장애, 공포장애, 공황장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 강박장애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도 매우 심한데 못고친다고 합니다. 장애라는 것은 못고치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사람은 다스려야 되지 못고친답니다. 강박장애란 못믿는 것이랍니다. 강박관념은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도저히 좋게 생각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디 놀러갔는데 가스를 안잠궜구나 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놀지 못하고 집에 와야 된답니다. 와서 보면 잠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왔는데 나와서 한참 있다가 문을 또 안잠궜구나 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처증과 의부증이라는 이 몹쓸병도 전부 강박장애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못믿는 것입니다. 부인이 좀 친절하게 맞아줄려고 웃으면 그 아내의 웃음 자체를 가지고 의심을 한답니다. 저 사람이 왜 웃느냐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누룩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꿀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저히 받으실 수 없는 불순한 것들이 너무 많은 장애를 일으킵니다. 오늘 우리 자신이 소제물이 되려면은 누룩과 꿀을 제거해야 됩니다. 내 생활 속에 이런 것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소제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배의 성결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에 가면 임페리얼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 임페리얼 박물관에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닙니다. 교회사의 흔적이며 대사건입니다. 역사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강렬한 메시지입니다. 그 그림은 로마 황제가 주교 앞에 무릎을 꿇고 비는 장면의 그림입니다. 거기 담긴 사연이 이러합니다.
A.D 390년 로마의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네로와 도미시안 황제와 더불어 삼대 악인입니다. 수많은 크리스찬들을 죽이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간 악인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밀라노에 유명한 성당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예배를 드리겠다고 행차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찬들을 향해서 많은 악을 저지른 이 황제가 크리스찬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입니다.
밀라노의 그 당시 주교는 암부로시우스라는 유명한 분입니다. 교회사에 아주 칭송받는 믿음의 종입니다. 이 암부로시우스 감독이 데오도시우스가 예배드리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신은 오늘 이 성당 안에 들어올 수 없소 라며 성당 앞에 막아선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 일어났습니다. 당장 황제가 칼을 빼서 주교의 목을 치지 않을까 모두 긴장을 하고 있는데 암부로시우스의 그 행동이 너무도 위풍당당하니까 황제가 감히 격한 행동을 못하고
"내가 오늘 예배를 드리로 왔소."
"당신같은 죄인은 이 성당에 들어와 예배를 드릴 수 없소."
"다윗같은 사람도 죄를 범하고 하나님 앞에 살지 않았소?" 그때 암부로시우스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다윗왕을 모방하려고 하는 것이요. 그렇다면 다윗왕의 회개를 먼저 모방하시오."
그 말에 데오도시우스가 주교 앞에 무릎을 꿇고 비는 그 사연을 담은 것입니다. 이 암부로시우스는 거룩한 제물에 누룩과 꿀을 섞을 수 없다는 소제의 정신을 그 사건에서 우리 앞에 보여준 것입니다.
섬김의 제사
여러분, 이 소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몫이 있고 제사장에게 드려지는 몫이 있고 그리고 드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몫이 있습니다. 이것을 묶어서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소제를 드린 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헌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소제는 기쁨과 평강이 강조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기쁨과 평강이 빈약한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자꾸만 육신의 것이 모자란다고 탄식하지만 사실은 신령한 기쁨이 너무나 모자랍니다. 신령한 평강이 너무 모자랍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이 기쁨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너무도 부족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소제의 삶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불순물이 너무 섞여있고 소금이 쳐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서 소멸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까? 소금은 맛의 왕입니다. 모든 맛을 지배하는 맛이 소금이라고 합니다. 소금의 맛을 이길 다른 맛이 없답니다. 단맛도 신맛도 소금을 이기지 못한답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모양을 부풀게 하고 맛을 변질시키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맛을 더 맛나게 하는 근본맛이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 소금이 있어야 합니다. 이 소금이 무엇일까요? 기쁨과 평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4:5)고 했습니다.
관용이라는 말이 성경에서 여기밖에 안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보니까 참 무게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애용하고 가까이 하고 강조해야 될 말입니다. 우리가 용서라는 말과 사랑이라는 말은 많이 사용해서 익숙합니다. 우리가 너무도 쉽게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모든 사람 앞에 관용을 나타내라는 이 말이 사랑이라는 말이나 용서라는 말보다 더 실제적인 것입니다. 관용이라는 말의 의미는 내 안에 있는 기쁨과 은혜와 평강으로 인해서 상대방의 약점과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데 내 안에 너무 기쁨이 충만해서 내게 넘쳐나는 기쁨을 가지고 상대방의 약점을 덮어주는 것이 바로 관용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왜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까? 관용이 빈약해서 그렇습니다. 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나야 사랑 못할 사람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고 상대방을 용서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했던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입니다. 내 잔이 넘쳐나야 상대방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내 잔이 넘치질 못하니까 나도 모자라는데서 무슨 상대방을 생각할 여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넘쳐나는 기쁨, 넘쳐나는 평강 그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관용은 나타내는 것입니다.
맺는 말
여러분, 하나님이 받으시는 소제물은 과연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우리 자신이 소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인격이 고운 가루가 되어야 됩니다. 덩어리로는 안됩니다. 그리고 누룩과 꿀을 섞지 말아야 하고 소금을 쳐야 됩니다. 그 소제물을 주 앞에 드리는 것은 나 자신이 그렇게 드려지는 예물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나 자신의 소제물만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평강은 나 혼자 누리는 은사가 아닙니다. 기쁨과 평강은 섬김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뻐하기 때문에 이 기쁨이 넘쳐서 섬기는 것입니다. 평강이 넘쳐서 남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헌신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소제물의 효력입니다. 소제물을 드린 자는 기쁨을 가지고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섬김의 표적이 어디입니까? 주님은 무엇을 가장 귀한 섬김으로 받습니까? 생명입니다. 여러분, 고운 가루는 우리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다 고운 가루가 될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저 모습대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습니다. 불신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고운 가루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은 바로 거기로 집중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섬김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좋은 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사죄함을 입고 내가 하나님께 드려진 기쁨을 가지고 아직도 하나님께 드려지지 못한 자들을 제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이 그 자리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섬김의 표적은 곧 생명입니다. 생명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 생명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소제물의 원료입니다. 우리 교회가 풍성한 소제물을 드리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