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31:1-4 여호와여 내가 주께
다윗은 어떤 큰 위험으로부터, 혹은 오히려 많은 위험들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다윗은 먼저 그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들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평범한 감사가 아닌 감사를 덧붙입니다.
그 다음으로 다윗은 자신의 구원을 아주 오랫동안 찬양합니다.
끝으로 또 다윗은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선한 소망을 갖도록 그들을 격려합니다.
이로써 성도들은 다윗에게서 가장 탁월하고 기억할 만한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에 대한 본을 찾게 되는 셈입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 본문 1절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가 다윗이 마온 광야를 탈출한 후에 지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의심스러운 점은 조금 있지만 우리는 이 견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다윗은 한가지나 혹은 그 이상의 큰 위험들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처음에서는 다윗이 고통과 곤궁 속에서 어떤 기도를 드렸는가를 말합니다.
또 다윗의 언어는 가장 열렬한 성격의 애정을 나타냅니다.
다윗은 하나님 신뢰를 소망의 근거로 여기며 계속 하나님을 믿습니다.
과거 시제의 동사는 계속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실망을 느끼게 할 그런 분은 결코 아니시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의 믿음을 소망과 함께 한 원리로 취합니다.
한편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이 얼마나 믿음 외에 어떤 것도 나타내지 않는가를 압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로 구원받으리라는 확신을 가졌기에 자신에게 구원만을 약속하였지만 이 교리가 이미 해설된 것처럼 계속해서 자주 일어날 것이기에 그것에 대하여 현재로서는 한번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마다 다윗과 같이 우리의 기도가 이 근원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안전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선포할 수 있는 그런 방법 속에서 우리의 기도를 수행할 것입니다.
'영원히' 라는 의미의 불변화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설명됩니다.
시편 31 편
때때로 하나님이 그의 은혜를 거두실 때, 비록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도움을 상실하였지만 우리를 아주 영원히 내쫓으신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부적절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그를 대적하는 유혹에 대하여 인내로 자신을 무장하기 원하면서 이 두 가지 일, 곧 한동안 고통 속에 있는 것과 또 혼란의 상태에 남아있는 것과의 사이를 대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다윗의 말을 이런 방법, 곧 '어떠한 고통이 나에게 닥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그 형편에 따라 때때로 나에게 주의 구원의 손을 뻗치소서' 라고 다윗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는 이 뜻에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그의 약속을 이루심에서 그 의를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은 그 자신의 의는 아무 소용이 없기에 다윗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그 의에 의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추론입니다.
더 부적당한 것은 하나님이 그의 의로우심을 따라 성도들을 보전하신다고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칭찬 받게 행동하였기에 그들이 상을 받아야 한다고 공의가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에 나타난 그 용어의 빈번한 사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그의 신실성을 요구하며 그 시행에서 하나님은 범죄한 그의 백성들을 하나님 자신의 보호와 후원으로 지키신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 또 항상 한결같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여 그의 소망을 더 확고히 합니다.
2. 본문 2절은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영혼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기도의 자극을 받았는지를 나타냅니다.
다윗은 수사학자들이 늘 하는 것처럼 화려하거나 꾸민 말로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갈망에 대한 열정을 적절한 비유로 묘사합니다.
다윗이 '속히' 구원받기를 원하는 기도 속에는 만일 하나님께서 급하게 도와 주시지 않으면 그의 생애의 모든 것이 끝날 것으로 말하는 절박한 위험성이 나타납니다.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라는 말로 그의 원수를 저항하는 것이 불가능한 다윗의 소망은 하나님의 보호만을 의지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3. 본문 3-4절은 "(3)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4)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입니다.
시편 31 편
이 구절은 '주는 나의 방어를 위한 방주와 같으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의 전 생애를 지도하시고 인도하소서' 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때에 접속사 (와우)는 불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의미를 취합니다.
다윗은 이 반성을 삽입함으로 자신에게 기도에 전념하도록 격려할 뿐 아니라 기도에 응답 받으리라는 확신에 찬 소망을 갖도록 용기를 줍니다.
모든 사건들에서 우리는 그의 기도 속에 그의 의심을 제거하도록 해주고 또 그의 확신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는 그런 일들이 보통 혼합되어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결핍을 설명하면서 다윗은 그 자신에게 용기를 주고 또한 격려하기 위하여 그의 기도가 분명히 기쁜 응답을 받으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다윗은 앞에서 주는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 많은 것을 곧잘 요구하면서도 불확실한 사건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해하는 불신자들처럼 이 말들을 분별 없이 던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면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라고 덧붙입니다. 이로부터 다윗은 역시 자신의 전생애 동안에 하나님을 자신의 안내자와 통치자로 모시게 될 것이라는 또 다른 격려를 이끌어냅니다. 다윗은 같은 일을 나타내기 위해 '인도'와 '지도'라는 두 단어를 사용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 사건들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의 생애가 시련을 겪음으로 동일하지 않게 나타나는 변화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내가 가파른 산을 올라가야 한다든지 혹은 거친 땅에서 내내 고투하든지 또는 가시밭길을 걸어가든지 간에 나는 주님이 나의 끊임없는 안내자가 되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이 만일 그들 자신의 공로를 살펴본다면 그들은 항상 스스로 자신 안에 있는 의문스러운 문제점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이 '그의 이름 때문에 혹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때문에' 다윗을 돕지 않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모든 공로에 반대되는 "주의 이름"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이유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4절의 '그물' 은유에서 다윗은 자기 원수들이 자기를 둘러싸던 덫과 책략을 나타냅니다
다윗은 피할 여지없이 그의 생애를 대적하여 자주 일어났던 음모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교묘히 책략을 꾸몄고, 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증오로 그를 미워하였을 때 그의 파멸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이 인간의 힘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을 '그의 힘'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다윗은 그의 고통받는 백성들이 말려들고 있는 모든 덫을 산산이 부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31 편
시31:5-8 내가 나의 영을
다윗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를 구원해 주신 사실을 회상하므로 현재의 난관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5-8).
1. 본문 5절은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입니다.
1) 5절 상반절은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을 선포하며 또 모든 근심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긴 것처럼 자기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높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그분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생명과 죽음의 중재자로 선정할 뿐 아니라 모든 그의 위험에서 그분을 보호자로 조용히 의뢰합니다.
그 동사는 미래 시제로 "내가 맡길 것이다"이며 또한 그것은 계속적인 행동을 나타내므로 현재 시제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또 아무도 자신의 생명을 신실하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무수한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생각하고 또 자신의 생명이 가는 실 끝에 달린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 혹은 호흡이 중단되어 자기의 생명이 곧 끊어지고 말 것이다 라는 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절망 상태에 빠진 다윗은 이것 이외에 그가 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생명의 보호자와 통치자로 믿고 계속 나갔습니다.
많은 일들이 우리를 괴롭힐지라도 백 명중에 겨우 한사람 정도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길 만큼 지혜로울 뿐입니다.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 마치 그들이 안전한 보금자리에 안주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혼란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두려운 어떤 일에 부딪치게 된다면 그들은 곧 그 고통으로 죽고 말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우쭐대면서 헛된 망상 속에서 자신들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든지 혹은 그들이 두려움으로 압도당하고 또 놀라움으로 어리둥절해져서 그의 아버지의 보호에 대한 갈망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든지 두 가지 이유 중의 하나 때문에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시편 31 편
더 나아가 온갖 비애의 폭풍우가 우리를 괴롭히고 심지어는 때때로 우리를 거꾸로 내던지거나 혹은 우리를 의무의 곧은 길에서부터 끌고 가며 혹은 적어도 우리의 위치로부터 우리를 옮길 때 이런 일들을 바르게 하기 위한 유일한 치유는 우리 생명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을 그 생명의 보존자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또한 그 많은 슬픔으로 압도당하는데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비록 우리의 생명이 때때로 여러 종류의 죽음에 노출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에 대한 보호를 맡으시고 또 지켜주시므로 우리는 항상 이 피난처로 피해야 합니다.
사람이 더욱 위험해질수록 더 신중하게 그것을 생각하며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모든 위험한 공격에 대하여 이것이 우리의 방패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동요와 폭풍우 속에서의 우리의 항구, 비록 우리의 안전이 모든 인간의 소망과 동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신실한 보호자이십니다.
이것이 다시 우리를 기도하게 일깨우도록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어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이 확신은 모든 사람이 자기들의 의무를 민첩하게 이행하도록 만들 것이며 계속 두려움 없이 자기들의 전 인생의 과정을 끝까지 투쟁해 가게 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나태하고 무관심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불성실하게 그들의 의무를 포기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걱정으로 압도당하였기에 그들은 위험과 불편에 두려워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섭리의 효력에 대한 어떤 여유도 갖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그 신실하신 보호아래 맡길 만큼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에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도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다른 한편 자기 생명의 보전을 하나님의 보호에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심지어 죽음 가운데서도 그 생명의 안전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실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본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듯이 죽음 그 자체의 파멸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의 생명을 맡겨야 합니다.
다윗이 죽음의 위험 속에서 그의 생명의 연장을 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영혼이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 이 잠깐동안의 생애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도들이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반적인 기도입니다.
첫째로 성도들이 이 세상의 위험에 노출되는 동안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둘째로 파멸 이외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덤 속에서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시편 31 편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과정의 끝까지 그의 능력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신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죽을 때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은 불신을 고치는 가장 적절한 성경의 주요한 말씀들 중 하나입니다.
첫째로 성도들이 불행한 걱정과 염려 때문에 지나치게 자신들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두 번째로 성도들은 자기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였다는 두려움으로 너무 괴로움을 당하지 말아야 하고 헛된 소망과 거짓 도움을 붙잡는 방법으로 기울어지거나 그 속에서 약해지지 말아야 하며 공포와 놀라움으로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성도들은 육신은 죽일지라도 영혼을 소멸시키지 못하는 죽음을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겼을 때에 모든 백성들의 영혼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것은 모든 시험을 이기는 우리의 주요한 논증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주님을 그의 보호자로 부르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라고 부르짖습니다.
영혼은 생명의 좌소(坐所)로 잘 알려진 대로 생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2) 5절 하반절은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과거 시제를 미래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그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그가 과거에 이미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증거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기에 그 하나님이 미래에도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는 것은 작은 격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형용사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참되고' '신실하신' 분으로 부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계속 동일한 분이실 것을 다윗이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도의 확신을 주셨던 이전의 은혜에 그 자신을 연결하는 끈이며 또 앞으로 도움을 바라는 희망입니다.
마치 다윗이 '하나님이여 언제나 한결같으시며 인간들처럼 마음을 변치 않으시는 주께서 바로 그 행위 속에서 주님이 내 생애의 보호자시라는 것을 이미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주님의 손으로 그 보호자가 되셨던 나의 생명을 주님께 맡깁니다' 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다윗이 그의 일시적인 생명에 관하여 선포한 것을 다시 영원한 구원으로 번역합니다.
시편 31 편
사실상 다윗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위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고 말합니다.
만일 다윗이 그런 많은 확신을 일시적인 구원에서 끌어온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구속이 모두 사단의 책략들을 대적하는 무적의 용기를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면 확실히 그것은 악이나 배은망덕보다 더한 것입니다.
2. 본문 6절은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입니다.
자기 믿음이 하나님께 확고히 고착된 사실을 더 잘 나타내려고 다윗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악한 애착에서 자신이 떠났으며 또 불신자들이 애를 쓰는 그 악한 애착에 대한 염려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대되는 일들을 대조함으로 그 주제가 더 잘 실증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허탄한'이라고 해석한 (헤벨)이라는 히브리 단어를 어떤 주석가들의 해석처럼 마술이라고 제한하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동양인들이 이런 술수에 빠졌기에 그것은 그들 가운데서 공통적인 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였던 술책과 또 그 술책으로 인하여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였던 유혹들이 무수하게 많기에 선지자가 단 한가지 종류만을 언급한다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만든 헛된 소망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우리를 멀리 떠나게 합니다.
다윗은 '허탄하다'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 혹은 '거짓'이라고 일반적으로 명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비록 그것들이 엄청난 약속으로 일시적으로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끝내는 그것들이 우리를 속이고 실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인간이 그들의 희망을 걸기 위하여 보통 창안하는 허탄한 것들을 내쫓으면서 자기가 다만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확언합니다.
또한 인간이 세상의 유혹에 스스로 빠졌을 뿐만 아니라 이런 점에서 서로를 속이고 있으므로 선지자는 우리가 그들의 위험스러운 일에 휘말려들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 목적을 위하여 조심스럽게 그들을 피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또한 다윗은 그런 거짓들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미워하였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라는 둘째 절은 첫 절과 연관시켜 읽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거짓된 허탄한 것들은 다윗이 미워하는 이유를 부여하고 있으며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을 무엇이나 다 거부하지 않으면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어떠한 참된 믿음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31 편
3. 본문 7-8절은 "(7)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 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8)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의 기도는 그가 현재의 위험으로부터 구원될 감사를 삽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자들은 오히려 다윗이 기도를 중단하고 맹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 조건이 부가되어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오히려 갑자기 다윗이 기도 중에 중단하면서 자기 자신의 구원을 다짐하였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감사할 만한 풍부한 이유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믿음이 그 자신의 유혹들을 대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윗이 그 자신의 유혹을 나타난 그의 시편 속에 혼합되어 있는 다른 감정들에 대하여 놀랄 것이 없습니다.
이미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후, 역시 다윗이 하나님께 찬양했던 때를 생각하면서 다윗은 그의 노래에 있어서 다른 시대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치 다윗이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도움의 결과를 이것으로 나타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곤란을 감찰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것을 더 잘 확증하기 위하여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 말씀들 속에는 함축된 대조가 들어 있습니다.
다윗은 사면으로 모진 고통에 에워싸임을 받고 있었을 때에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기대하지 않았던 갑작스런 변화를 나타내는 "주께서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라는 다음 구절에 더 잘 나타납니다.
시편 31 편
시31:9-13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다윗은 이제 자기의 비참한 사정을 하나님 앞에서 진술(陳述) 합니다(9-13).
1. 본문 9-10절은 "(9)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 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10)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 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감동하사 자기를 구원하여 주시도록 다윗은 자신의 많은 하소연으로서 그의 비참함과 슬픔의 거대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설득시키는 논증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자신에게 친근히 대하도록 허락하셨기에 성도들은 짐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이 많을수록 성도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고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면서 스스로 용기를 얻습니다.
이런 표현 형식들은 과장법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몸소 느낀 것을 선포하고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다윗의 목적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먼저 다윗은 "그의 눈과 혼과 몸이 근심으로 쇠하여졌다" 고 말합니다.
이것으로 다윗이 이런 재난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하고 고통을 받는 것이 가볍지 않았고 또 그 기간이 잠시동안도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참으로 다윗은 자신이 쉽게 흥분하지 않을 영적 온유함을 그렇게도 많이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찮은 사건으로 애타지도 않았고 과도한 슬픔으로 괴로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다윗은 오랫동안 고통을 인내함으로서 단련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그런 격정의 정도로 물러났을 때 다윗의 고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가혹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 '근심' 이라는 말로 다윗은 자신이 언제나 강철같이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다윗의 슬픔이 지금이나 그때나 극도로 격렬하고 날카롭게 나타날 때에 죄악의 열정으로부터 자유로와진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때대로 성도들이 그들 자신의 열정으로 인한 가혹하고 힘든 투쟁을 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항상 안달을 부리지 않도록 할지라도 조심스럽게 그것과 투쟁함으로 그 거대한 고통들이 그들을 압도하지 못한 마지막에 이 많은 것을 성취한 것입니다.
'생명' 이란 말을 어떤 사람은 생명적인 의미로 이해하는데 우리는 이 해석을 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31 편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뜻, 곧 슬픔으로 그가 소멸되어 그의 생명과 그의 연한이 쇠잔하고 망하여 감을 느꼈다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또한 다시 이 말들로 인하여 다윗은 마음의 무기력을 슬퍼하기보다는 그의 재난의 준엄함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쇠약함을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지라도 다윗은 그것을 위한 치유책을 애타게 찾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내 기력이 나의 슬픔으로 약하며' 라고 말할 때 어떤 주석가들은 '나의 죄악으로'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어 (온)이라는 단어가 두 의미를 가진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것은 더 빈번히 '범죄' 나 혹은 '잘못' 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때때로 '형벌'로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 문맥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이는 의미를 택하였습니다.
비록 다윗이 자기가 어느 때든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다고 그 고통들을 늘 묘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여기서 다윗은 그것들에 대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다만 그의 슬픔만을 다시 언급합니다. 다윗의 일상적인 방법에 따르면 그가 같은 일을 두 번씩이나 다른 말들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2. 본문 11절은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대적들보다도 더 많이' 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 문자 (멤)이 때때로 비교 표시로 사용되듯이 그들이 이 구절을 모든 원수들보다도 더 많이 다윗을 비난했던 다윗의 친구들과 친지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에는 다윗이 다른 생각, 곧 그가 어디에서나 미움을 받았듯이 우리와 그의 원수들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를 대적하는 일에 참가하였듯이 다윗은 그의 친구들과 이웃 중에서까지 악한 이름을 가졌었습니다.
사나운 폭풍우와 같이 인기 있는 의견은 일반적으로 그것 이전에 모든 것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와우)라는 연사가 다윗이 그가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외국인들에게 뿐 아니라 그의 중요한 친구들에게 그가 증오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확대로서 사용되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길에서 그를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길에서' 라는 부사로 다윗은 그들이 비참한 사람은 자기들을 가까이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불행이 자기들에게 전염되지 못하도록 또 다윗이 자기들의 친구라는 어떤 표를 나타내는 것이 자신들에게는 유해하고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그들은 다윗의 시야로부터 아주 멀리 피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31 편
3. 본문 12-13절은 "(12)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와 같으니이다 (13)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계속 같은 생각을 추적하고 있으며 그가 죽었던 사람처럼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는 불평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그들이 죽은 후에도 한동안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됩니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이 더욱 빈번합니다.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과의 사이에 더 이상의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더 이상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사상을 마치 자기가 어떤 곳에도 필요 없고 또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고 자기가 말하였던 것처럼 완전한 경멸과 비열함을 나타내는 파기라는 은유로 설명합니다.
결국 다윗은 많은 군중들로부터 급습을 당하여 공포로 떨게 되었다고 부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라빔)이라는 히브리어를 '무리' 라기보다 오히려 '지위가 높은 자들' 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권위로나 재판하는 권세가 때때로 유력하고 위대한 사람들이 우리를 악인으로 인정하여 비방하고 중상할 때 이것이 우리가 받는 모욕에 추가됩니다.
그들이 우리를 비난하면서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우리를 대적하여 편견을 갖는 일반백성들에 대한 효과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을 다윗이 모든 계급의 귀족들에 의하여 수치스럽게 정죄를 받고 있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적절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 고통을 받는 사람의 결백이 그들의 위대성에 의하여 그늘진 곳으로 버림을 받습니다.
이 해석은 다음에 곧 나타나는 말씀, 곧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에 의해 확증됩니다.
다윗이 계속 같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때에 이 말이 일반 백성들보다 더욱 적절하게 귀족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다윗을 파멸시키려고 거짓 공모하는 악인들의 기본 목적은 모든 백성들이 다윗을 악인이요 또한 신에게 버림을 받은 자로 그를 증오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시 그들이 그의 명성을 망쳐버리는 동안 그들은 다윗을 더 이상 땅위에 살려둘 수 없는 사람으로 멸망시켜야 한다는 의논을 서로 하면서 장엄한 외형과 사려깊은 절차로 그들의 악을 은폐하는 그런 방법을 취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많고 날카로운 유혹으로 그의 마음이 상처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시편 31 편
시31:14-18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다윗은 그런 비참한 처지에서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14-18).
1. 본문 14절은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입니다.
이 번역은 '또한 내가 당신을 의지하였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연결 불변화사 (와우 ; 그리고)는 반의 접속사 '그러나'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대신으로 여기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언급한 유혹의 공격을 반대하는 그의 믿음을 확고히 하면서 자기가 연약하여졌다는 것을 부인하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확고히 섰다고 오히려 주장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그렇게 관대하고 용감하여 육체의 연약함으로 넘어질 수 없다고 자만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에 상반되게 그들이 나타났지만 이런 일들은 동일인에게서 그들이 그렇게 되어야 하듯이 때때로 서로 연합되었습니다.
슬픔으로 수척하여지고 모든 힘을 상실하는 동안에도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멈추지 않는 강력한 소망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믿음의 숨겨진 빛이 내적으로 그의 마음에서 빛날 수 없었던 것처럼 깊은 슬픔과 또한 다른 무서운 공포로 압도당하였던 것은 아니며 또한 그가 하나님을 부르도록 그 자신을 일깨우는데 방해를 받는 것과 같은 그의 유혹의 무거운 짐 아래서 몹시 신음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많은 장애물들이 그가 여기서 한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분투하였습니다.
다윗은 다음에 그의 믿음의 방법 다시 말하면 그가 하나님께서 그를 결코 잊지 않으실 것이며 그를 버리시지도 않을 것이라고 그 스스로 생각한 믿음의 방법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라고 말한 화법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다윗은 그가 이 진리, 곧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시며 다윗이 그것에 반대되는 어떤 암시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진리를 완전히 깨닫고 있다고 나타냅니다.
시편 31 편
이 확신이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을 때까지 우리는 항상 우리의 불확신 속에서 동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포가 내적이고 은밀할 뿐 아니라 - 말보다는 오히려 가슴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 또한 하나님께로 곧바로 향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만이 유일한 증인이십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온 세상으로부터 조롱받는 것을 우리가 볼 때 다만 하나님께만 말하고 또 우리의 양심이 우리에게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는 이 증거에 만족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파도가 격렬하게 우리를 대적하여 치고 또한 아무리 맹렬한 공격으로 우리가 요동시킬 때라도 우리가 계속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으며 또한 거침없이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니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분명히 그것은 순결한 믿음에 대한 틀림없는 증거입니다.
2. 본문 15절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입니다.
자신의 보호를 하나님께 더욱 철저히 맡기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호를 신뢰하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두려워하는 우연하고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들에 대하여 근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합니다.
다윗이 말한 취지는 '하나님이며 나의 생명과 나의 죽음을 섭리하시는 것은 주님의 특권이며 또한 주님께서 홀로 그 능력을 가지셨나이다' 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다윗이 이유 없이는 복수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생명이 일반적으로 괴로움을 받는 여러 가지 사고들을 나타내기 위해 복수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마치 다윗이 그의 시대나 그가 살았던 당시만 하나님의 섭리아래 있었다고 하는 것처럼 '내 시대(時代)' 라는 말을 그가 생존했던 그 시대에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다윗이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엄습하여 오는 여러 가지 변혁과 많은 위험들을 깊이 생각하고 때때로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그는 일반적인 말에 따라 행운과 불행의 중재자라고 믿었던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 있게 의지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첫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을 일반적으로 세상의 통치자라고 일컬을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확증합니다.
또한 어떤 동요가 따르든지 또 어떤 시련과 변화가 그에게 일어나든 지간에 그는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안전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31 편
다윗은 이것에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그를 그의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신다'는 그의 기도의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3. 본문 16절은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입니다.
이 화법은 하나님이 참으로 효과적으로 그들에 대한 보호를 보여주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일반 염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감성의 판단에 따라 괴로움은 구름이 태양을 가리듯이 그의 모습을 감춥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즉각 그를 도와주심으로 그의 은혜와 자비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자기에게 명확하게 나타내주시도록 간청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어둠 속에서는 그것을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은 우리들에게 두 가지 방법으로 비취고 있다고 합니다.
그 한가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보살피시려고 그의 눈을 뜨실 때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자비를 보이실 때입니다.
이 두 일들은 불가분리의 것이거나 그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존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처음 화법에 의해 우리는 우리의 육적 생각에 따른 변덕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화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돌아보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우리의 눈이 감겼거나 혹은 무거운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하소서' 라는 단어로 다윗은 앞의 표현이 의미하였던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에게 분명한 안전의 방법이 없었으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제시함으로 그것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스스로 격려합니다.
4. 본문 17-18절은 "(17)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18)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시편 기자는 그의 기도를 계속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소망을 강화하고 있고 그 자신을 그의 대적들과 대조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그들의 악으로 형벌을 받지 않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 이상 더 불합리한 일은 없을 것이며 또 순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실망 당하고 또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 이상 더 불합리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31 편
우리는 여기서 시편 기자의 비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소망이나 신뢰에 대하여 말하는 대신 다윗은 이제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라고 말함으로 하나님을 부른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또 다윗은 충분한 좋은 이유가 있어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사람은 기도와 강한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 도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라는 말은 죽음이 불신자들에게 닥쳐와서 그들로 더 이상의 가해 행위를 못하도록 그들을 제어하고 가로막는 바로 그 죽음의 때를 의미합니다.
이 침묵은 그들의 거짓되고 믿을 수 없는 책략에와 그들의 포악한 오만에 반대됩니다.
그러므로 바로 다음 구절(18절)에서 다윗은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라고 덧붙이고 있는데 우리 생각에는 그것이 그들의 간악함을 포함하며 악한 핑계와 중상으로 그들이 뜻을 이루려고 하며 또한 그들이 헛된 교만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들의 완고한 자만이었으며 그 완고한 자만이 항상 다윗의 원수들이 방자하게 거짓말을 하게 한 경멸을 낳게 합니다.
누구든지 그의 당연한 권리 이상으로 교만하게 사취하는 사람은 거의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멸시할 것입니다.
시편 31 편
시31:19-21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다윗은 성도에게는 쌓아 둔 은혜가 풍성하다고 하였습니다(19, 20). 또 다윗은 그와 같은 미래의 복에 대한 확증으로 과거의 받은 은혜를 생각하였습니다(21, 22).
다윗은 이런 놀라운 성도의 장래를 생각하여 그들더러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였으며 또한 강하고 담대하라 고 하였습니다.
1. 본문 19절은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향해 상상할수 없는 선과 은혜를 베푸신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은혜' 는 하나님의 복에 대한 결과인 그 하나님의 복을 의미합니다.
문장의 의문형은 특별한 강조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선하시다고 단언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가 경험하였던 은혜에 대한 놀라움으로 황홀해 있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그것은 갑자기 다윗이 기뻐 날뛰는 그런 말을 하게 한 경험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예상외로 놀랍게도 그의 재난들로부터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실례에 의하여 다윗은 신자들이 마음속에 기약하고 또 인간 이성이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더 많은 것을 기대하기 위하여 신자들이 그들 자신의 이해력을 초월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의 종들을 위하여 숨겨졌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 특별한 보화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틀림없이 그것은 무종교와 하잘것없는 것으로 여러 방면에서 그 자체가 확대됩니다.
그리고 무분별하게 그들에게 제시됩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더욱 더 풍부하고 분명하게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구원을 위한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다만 그들 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는 분이시며"(마5:24), 또 하나님은 심지어 비이성적 피조물에게까지 풍부히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임을 친히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만 그의 종들에게만 참되고 충분한 의미에서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이 자신의 은혜를 가장 친밀하게 또 다정하게 누릴 수 있다고 인정하시는 신자들을 위해 감추어두셨다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31 편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감추어졌다' 를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부과하심으로서 그들로부터 그의 은혜를 감추었으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으신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설명하면서 그 구절에 대한 미묘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따로 떼어두시고 또 저축하여 쌓아두신 보화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성도들의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그들만이 그들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열매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야만적인 우둔이 악인들로 하여금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심을 깨닫는 것을 방해합니다.
반면에 악인들은 하나님의 선한 것들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웁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또 세상 모든 곳에 널리 알려졌으며 그것이 일반적으로 다 알려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거룩한 저자의 마음은 성도들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그 대조로부터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중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용을 그의 자녀들이나 가족을 속이지 않는 방법으로 절제할 것입니다.
또 사람이 그의 물질을 다른 사람들에게 낭비함으로 자신의 가정을 빈궁하게 하지도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같은 방법으로 그의 가족이 아닌 외인들에게 실행하시면서 상속의 권리로 그들에게 속하는 것을 그 자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어떻게 비축하실 것인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입양 때문입니다.
이 말씀들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의심 많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어거스틴의 시도는 온당치 않습니다.
그 구절에 대한 어거스틴의 잘못된 견해를 깨닫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섬기는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또 그들의 행복을 지켜주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은혜를 하나님께서 베푸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세상을 만드셨다고 바울이 말한 다음 구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것이 시편기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하늘에 비축해두신 영원한 복이 아니라 이 현세의 생의 보존에 속하는 보호와 다른 복을 배웁니다.
그것이 매우 명백하여서 심지어 불신자 자신들도 그것들에 대한 목격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 눈을 감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지나쳐 버렸습니다.
또 성도들에 대한 그의 아버지로서의 보호를 특별히 무시한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계속 은혜 주심에 대한 증명들이 날마다 빛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편 31 편
심지어 신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그들이 그 빛에 대하여 고의로 그들의 눈을 감지 않는 한 그 증거들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생 앞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들을 주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분별 없이 혹은 무익하게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나타나도록 하기 위한 것인 점을 진리에 따라 말합니다.
2. 본문 20절은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입니다.
이 구절에서 시편기자는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권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자들을 대적하는 모든 해악에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주도면밀하고 수많은 방법으로 그들의 복리를 반대하며 또한 세상의 더 많은 부분들이 그들을 대적하므로 그들은 많은 위험에 자신들을 노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때때로 그들을 도와주시지 않으신다면 그들의 상태는 가장 비참해질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방금 말한 '숨기사' 에 대해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은유가 언뜻 보기에는 뭔가 잘 어울리지 않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어 신자들이 그의 보호아래서만 완전히 안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찬사로 다윗은 신의 섭리를 장엄하게 찬미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만이 모든 악의 종류들을 방어하기에 족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경건한 자들에게 빛나고 있는 한 그것이 모든 악한 자들의 눈을 멀게 하고 그들의 손을 약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편 기자가 '주의 은밀한 곳'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성소를 말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해석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충분히 확정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만일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제어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이 참으로 경건한 자들을 대적하는 포악한 폭력으로 안하무인격으로 덤벼들 것임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욕망과 폭력이 아무리 고삐가 풀렸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모습의 빛으로 그들을 놀랄 만큼 덮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해로부터 그의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시편 31 편
어떤 사람들은 (리카심)이라는 히브리어를 음모라고 번역하며 다른 사람들은 '심술궂음'(혹은 외고집) 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그 단어의 어원은 그 뜻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들어올리다' 혹은 '높이다'를 뜻하는 어근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꾀에 '구설(口舌)의 다툼'이라는 말이 추가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원수들의 잔인한 행위를 두려워할 뿐 아니라 다윗 자신이 너무 많이 경험했던 것처럼 그들의 계속되는 심한 악과 폭력을 무서워할 이유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결백이 당연히 우리의 생명보다 더 우리에게 귀중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보호를 믿으며 우리가 모든 악한 비방을 무시하는 태도로 의를 개발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또한 모든 부당한 비난으로부터 그의 백성들을 옹호하는 것이 하나님 고유의 특권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3. 본문 21절은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입니다.
이 일반 진리를 다윗은 자신의 상황에 계속 적응시켜 나갑니다.
또 다윗은 자기 생명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놀랍게 나타났다고 선포합니다.
다윗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었을 때 갑자기 예상외로 자기에게 주어진 도움에 대하여 다윗이 말할 때 그런 해설자들은 '견고한 성에서와 같은' 이라는 식으로 비교의 표현인 '같은'(as)을 여기서 보충하는 사람들은 정확하게 판단한 것입니다.
다윗은 모든 불행에 표출되어 모든 종류의 상해(傷害)에 그 자신이 노출되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적나라한 모습과 빈곤 속에서 잘 방어된 성이나 난공불락의 요새가 자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도움이 자기에게는 더욱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합니다.
시편 31 편
시31:22-24 내가 경겁한 중에
다윗은 이제 하나님을 확신한(14절) 끝에 찬송하는 것으로 결론합니다(22-24).
언제나 하나님을 확신하는 신앙은 기쁨을 가져오는 법입니다.
1. 본문 22절은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불신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버림을 마땅히 받을만하였다고 고백합니다
또 다윗은 자신이 멸망을 받아 마땅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람들 앞에 이것을 고백한 것을 부끄러운 일로 느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잘못에 대한 치욕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자기를 향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충분히 예증하려 합니다.
다윗은 거의 같은 고백을 시편 116편 1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경겁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가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파즈)라는 히브리어를 '도주' 라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저항할 수 없기에 죽음에서 피하면서 이 공포에 압도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오히려 다윗의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풀이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성급함'으로 번역하든지 혹은 '공포'로 번역하든지 간에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도록 곤두박질을 당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성급함은 조용하고 신중한 숙고와는 반대됩니다.
비록 다윗이 두려움으로 압도당하였을지라도 그 시련으로 약하여지지도 않았으며 또한 이 확신이 계속 다윗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신자들은 때때로 두려움과 성급한 마음으로 불안해하거나 혹은 그들의 지나친 조급함과 성급한 갈망으로 곤두박질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은 곧 다시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다윗의 믿음이 이 시험으로 압도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 문맥으로부터 나타납니다.
다윗이 곧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라고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다윗의 믿음이 소멸되었다면 다윗은 성실하게 그의 기도에 전념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러므로 이 불평은 급한 가운데 나온 말의 실수였습니다.
시편 31 편
그런데 만일 마음의 조급함이 그렇게 많은 장점을 가진 사람이었던 이 거룩한 하나님의 선지자를 절망하도록 몰아붙일 수 있었다면 우리의 마음이 실패하고 또 치명적으로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두려워하지 않을 얼마나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이 다윗의 고백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윗은 이 절의 두 번째 구절에서 그의 믿음이 비록 심하게 흔들렸을지라도 완전히 뿌리가 뽑힌 것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그 동안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들은 때때로 이런 식으로 그들의 불신과 투쟁을 합니다. 얼마간 그들은 낙심할 수 있으며 어느 정도는 그들이 기도하도록 용기를 갖고 스스로를 자극합니다.
육신의 연약함은 심지어 그들이 거의 넘어졌을 때에도 지칠 줄 모르며 또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적의 챔피언임을 보여주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다윗이 완강하게 그 시험들을 대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심 때문에 어느 정도 탈취당한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가 받을 가치가 없다고 깨닫습니다.
(아켄)이라는 히브리어 불변화사는 여기서 반의적으로 이해됩니다.
또한 다윗이 그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공로도 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가 다윗의 불신을 깨뜨리신 까닭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면서 '그러나' 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히브리에서 증언의 표징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그러나 참으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하게 되었던(그렇게 되는 것도 가능한 일일 수 있는) 여러 시험들에 대하여 다윗이 그의 말로 반대하는 것을 믿습니다
2. 본문 23절은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다윗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경하도록 권고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혹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들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다른 어떤 것도 찾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신뢰하도록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만큼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지 않는 까닭에 또 우리의 애정이 하나님께 집착되어 있지 못한 까닭에 우리를 기쁘게 하는 우리 자신의 즐거운 고안들이 어디에서 오는가?
시편 31 편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사랑은 그 안에 마음의 모든 소원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래 모든 사람은 부유하고 행복한 상태를 아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세상의 유혹에 매혹 당하고 있으며 또 세상의 거짓과 사기를 더 좋아하며 백명 중 거의 한 명 정도가 하나님께 그의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곧이어 나오는 이유가 이 해석을 확증합니다.
영감을 받은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기' 에 '온유한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성실한 자를 보호하신다는 말씀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만족을 누리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그들이 그 속에서 충분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과 같습니다.
한편 다윗은 그들이 선한 양심을 지키고 의를 촉진하도록 그들을 권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정직한 신실한 자들만을 보호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윗은 하나님이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고 선포합니다.
그것은 교만한 자들이 한동안 번창하면서 성공하는 것을 우리가 볼 때에 무가치한 경쟁의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모방하도록 유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선포됩니다.
또 그들이 범하는 그들의 오만과 불법이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동안 우리의 영혼을 분쇄하고 또한 깨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선포합니다.
요약하면 비록 불의한 자들이 형벌을 받지 않고 계속 그들의 악을 행하면서 우물거릴지라도, 또 많은 신자들이 두려움과 위험으로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성도들을 지켜주시며 또 교만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마땅히 받을 형벌로 보응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엄중히'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알예테르)의 의미에 관하여 주석가들 사이에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교만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교만한 자'라고 번역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교만에 따라 갚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넘쳐 흐르는' 혹은 '지나치게'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테르)가 히브리어에서 '나머지' 혹은 '찌꺼기'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것 대신에 우리는 '엄중히'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그들의 자녀들과 또 그들의 자손들 그리고 그 남은 자들의 자녀들에게까지 확대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시편 31 편
그밖에도 그 같은 단어가 탁월성을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므로 우리는 그 선지자가 그들의 공상적인 탁월성이 그들에게 방패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적의 요새라고 생각하는 그런 교만한 자들을 세련되게 비난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근거 없는 권위와 힘이 그들을 소경으로 만들거나 혹은 그들을 매혹하여 그들이 과도하게 자신들을 자랑하고 또 그들이 부당하게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나 연약한 사람들을 대적합니다.
선지자는 그들이 내뿜었던 교만에 비례하는 그런 보상이 그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고 세련되게 말하고 있습니다.
3. 본문 24절은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입니다.
이 권고는 앞과 동일한 방법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명령하는 확고함은 다윗이 이미 말하였던 하나님 사랑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유혹을 물리칠 때 우리 가슴에 주의 약속하신 그 방어와 보호를 간직합니다 용기를 주는 다윗의 권고와 확고부동함이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 사람은 사단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예기하고 또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무장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먼저 조용히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의 온 마음에 가득 차 오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도록 노력합니다.
두 번째로 그렇게 하여 확고한 확신과 신뢰할만한 힘을 받게 되었을 때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고통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참고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우리가 소망을 갖고 하나님께 용기를 구하도록 우리를 권고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우리가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우리의 의무를 부여하실 때 하나님은 각 사람의 능력을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며 또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한 인간의 봉사를 측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결점을 치유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결점을 치유하여 고쳐주도록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한 간절히 구하도록 우리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시32:1-2 다윗의 교훈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손길을 무겁게 느끼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를 충분하고 절실히 체험한 다윗은 가장 높고 또 가장 행복한 삶의 일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또 자비스럽게도 그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은혜 안에 받아들이심에 있다는 사실을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다윗은 용서받은 데 대한 감사를 드린 후, 이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곧 다윗은 그 자신의 실례를 보여주면서 다른 사람들이 이 행복 속에서 자기와 교제를 나누도록 그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마스길(다윗의 교훈 시 - 칼빈)
이 시편의 제목은 이 시의 주제에 대한 어떤 생각을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교훈을 주는' 이라고 번역한 (마스길)이라는 히브리어가 7절에서 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체 시의 의도와 주제에 일치한 제목을 그 시에 붙였다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의 증거들을 다윗에게 보이시면서 그를 준엄하게 시험하실 때 그 길고 무서운 고통을 견딘 후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 증거를 그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적용하고 있으며 또한 전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다윗은 무엇이 구원의 중요한 요점을 이루고 있는가를 그 자신과 그들에게 가르치려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비참한 고통 속에 빠지거나 자신들과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이 때에 자신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경우가 더욱 나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화해하신다는 것을 그들이 깨달을 때까지는 계속 치명적인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기서 우리에게 인간의 행복은 다만 죄에서 무상으로 용서를 받은 데에만 있다고 상세히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가 되시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32 편
1 본문 1절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입니다.
1) 이 외침은 다윗의 마음의 뜨거운 열정과 신중한 고찰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거의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그들의 생각을 돌리고 있으며 치명적인 건망증에 사로잡혀 있고 거짓된 기쁨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의 두려움에 압도당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하나님의 원수들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정할 만큼 하나님께서 화해를 하신 자들만이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널리 선포합니다.
이로서 다윗은 다른 사람들 역시 같은 단련을 하도록 그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선과 교만으로 소경이 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엄청나게 하나님을 멸시하기에 용서 구하는 일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용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을 비난하지 않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며 또 많은 상처로 애를 태우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도 완전하지 않기에 용서를 필요로 하며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때에만 우리가 잘 될 수 있다는 고백을 우리의 본성 그 자체가 심지어 악인에게까지도 강요합니다.
그러나 한편 위선은 많은 사람들의 문을 닫으며 이에 비하여 다른 사람들은 사악한 육적 안전에 그렇게도 속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달아도 감동받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냉담해지기만 할 뿐입니다.
2) 이것에는 이중적인 잘못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그런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죄는 가볍게 여기며 하나님의 분노로부터 오는 그들의 위험의 백분의 일도 생각지 않습니다.
둘째는 그들이 죄책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께 은혜 얻기 위해 경솔한 보상을 창안합니다
이렇게 하여 비록 모든 사람들이 죄악으로 감염되었지만 그들은 동시에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얻도록 계산된 공로로 치장되었으며 또한 그들이 비록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지라도 면제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 속죄와 만족을 얻는다는 생각이 모든 시대에 어디에서나 널리 보편화된 견해였습니다.
사단의 이 기만은 교황주의자들, 터어키 사람들, 유대인들,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똑같이 공통적이었습니다.
시편 32 편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의 격렬한 광증으로 넋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는 그런 긍휼로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신다면 인간은 비참한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이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값없는 은혜로 그들이 복을 받게 허락하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의 생애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계속 선포합니다.
그 일에 대하여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성령 하나님은 바울의 입을 통하여(롬4:6) 우리에게 해설자와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증거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 증거는 그의 신자들로 하여금 그 선지자의 참뜻을 결코 깨닫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이 비록 성당에서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와 같은 성가를 부를지라도 그것이 어떤 평범한 말이나 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말씀을 스쳐버립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선지자가 인간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화해하여 주심을 받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을 때만이 가장 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것이 믿음의 의에 대한 충만한 정의였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찬양한 그 복은 전적으로 행위의 의를 파쇄합니다.
교황주의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적인 의의 고안은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천국의 교리에 관한 빛을 갖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항상 모든 백성들 중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속죄와 정화,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하는 다른 방법들로부터 나타나는 것과 같은 그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를 사취하는 것 같은 그런 광중에 기초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그 덕으로 인하여 그들이 복의 큰 부분을 스스로 획득하였던 것처럼 아직도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들의 미덕을 강요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3) 그러나 다윗은 대단히 다른 순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행복을 찾는데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화해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값없이 용서해 주시고 또한 그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시는 그 이외의 어떤 방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기본원리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정당하게 만일 그들에게서 그의 자비하심이 떠난다면 모든 사람들은 전적으로 비참하여지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오직 악한 성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면 그들이 회개할 때까지의 그들의 이전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증오를 받아 마땅하며 또한 역겨운 것임에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시편 32 편
한편 회개한 이후에도 인간이 행한 일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 속에 혼합되어 있는 죄를 용서하시지 않는 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으며 틀림없이 구원의 소망으로부터 제외함을 받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들에게 어떠한 최대 두려움을 주는 것도 그들에게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행한 일들은 오염으로 더럽혀져 있기에 그들의 행위는 상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은 교황주의자들에게는 어려운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별빛도 어두울 수밖에 없는 그러한 하나님의 판단을 평가하면서 그들의 엄청난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값없이 용서받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때 이것을 확고한 교리로 삼는 것이 영원한 구원의 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신뢰하는 자들만이 복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죄 용서를 받으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신뢰하는 신자들과 하나님의 은혜의 성전으로 나가기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 사이의 비교를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4) 다윗은 세 번씩이나 같은 일을 말하였는데 이것은 공연한 되풀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참으로 죄를 용서받은 그 사람만이 복 받은 사람이라는 충분한 자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철저하게 우리 마음 속에 확신하게 되는 그런 방법으로 이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고안으로 인하여 휘말려들고 있으며 할 수 있는 한 그들은 양심의 두려움과 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모든 공포를 걷어치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과 화해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은 성실하게 온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피하고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이 그들의 비참성을 생생하게 깨닫도록 일깨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동요하고 불안해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마음에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맛보았고 또 그것을 붙잡으려고 애를 쓰지만 그들은 아직도 그들에게 닥쳐온 많은 공격 아래 자주 부끄러움을 당하고 또 비틀거립니다.
다윗이 죄 용서라는 주제를 그렇게 많이 주장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가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일깨워서 무관심한 자들을 깊이 생각하도록 그들에게 생기를 주고 또 우둔한 자들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두려움과 염려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평온을 되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전자에 대하여 그 교리는 '그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 그대! 불행한 사람들이여! 한 두가지 양심의 가책이 그대를 방해하지 못하는가?
시편 32 편
그대의 죄에 대한 어떤 한정된 지식은 그대를 두려움으로 후려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가정하라. 그러나 그대가 거대한 죄의 짐으로 압도당하고 있는데도 계속 안전하게 잠만 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와 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반복은 연약하고 두려워 떠는 자들에게 조그마한 위로나 확신도 주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의심들이 그들을 감쌀 때에 그들이 단 한가지의 고통을 이긴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절망은 그들이 동요를 당하는 여러 가지 혼란한 생각 속에서 압도당하지 않도록 성령께서 많은 선포로 죄 용서를 확증하고 비준합니다.
5) 이제 여기서 사용된 표현들에 대한 특별한 힘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분명히 여기서 취급된 용서는 확실히 만족하지는 못합니다.
죄를 일소하시고 제거하시면서 죄를 가리우시고 그 죄를 전가하시지 않으시면서 하나님은 값없이 용서하여 주십니다.
이 때문에 교황주의자들은 그들이 부르는 대로 그들의 만족과 공덕을 얻으면서 이 복을 자신이 탈취합니다.
그밖에 다윗은 용서를 마무리짓기 위해 이 말들을 적용합니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이 형벌의 용서와 잘못의 용서 사이에 구별을 둠으로 그들이 반밖에 용서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려는 목적에 전혀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제 그 시대 상황에서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이 행복이 누구에게 속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만 복 받았다고 깨달았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의인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예배 속에서 또 거룩한 생활 속에서 다윗은 수없이 많은 도움을 받으며 또한 모든 경건의 의무 속에서 자신을 훈련하였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발전시킨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도 훈련시키시어 그가 구원의 알파와 오메가를 하나님께 대한 무상의 화해 속에 두게 하였습니다.
사가랴가 그의 노래에서 '구원의 지식'이 죄사함을 아는데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경건할수록 그 사람은 그 자신이 완전한 의에 더욱 멀다는 것입니다.
또 그가 하나님의 자비이외에는 아무것도 신뢰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더 깨닫습니다.
죄 용서는 의의 초기에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큰 잘못에 빠져있습니다.
날마다 신자들이 잘못을 범하고 있으므로 만일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는 동일한 은혜가 그들의 생의 마지막까지 그들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한번 의의 길로 들어선 것만으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시편 32 편
어떤 사람이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그의 길을 가는 자' '마음이 정직한 자' 들은 복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 의견을 반박할 수 있는데 대답은 쉽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경외, 율법의 완전한 준수, 마음이 온전히 정직한 자는 아무데서도 발견될 수 없으며 성경이 다른 곳에서 말하는 복에 관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기초하며 그 은혜로 말미암아 친히 우리와 화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본문 2절은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신자들을 위선자들과 그들의 행복에 관심조차 없으며 그것을 누릴 수도 없는 하나님에 대한 무감각한 멸시자들로부터 구별합니다.
참으로 악한 자들은 그들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그들의 악에 탐닉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파렴치 속에서 강퍅하여져서 그 임박한 위험을 비웃고 있거나 혹은 최소한 그들은 거짓 아첨 속에 빠져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비참함을 깨달음으로서 불행하게 되고 은밀한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강퍅한 건망증으로 인하여 그들은 모든 하나님의 경외를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위선자들은 자신의 양심이 그들을 찌르게 되면 그들은 쓸데없는 치유로 그들의 고통을 달래려 합니다.
그래서 만일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심판석으로 그들을 소환하신다면 그들은 방어를 위하여 어떤 환영(幻影)을 그들 앞에 제시할는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양심의 빛을 가릴 어떤 덮개도 갖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두 계층의 사람들은 내적 간계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그들의 행복을 찾는데 방해를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사악하게 돌진해 들어가거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고 있는데도 그들이 행복하다고 몽상하면서 교만한 상상으로 스스로 우쭐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의 마음이 그 간사로부터 먼저 깨끗하여지기 전까지는 죄 용서가 어떤 것인지 아무도 경험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간사'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말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처럼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나 반대로 어둠 속에서 자신을 가리거나 나뭇잎으로 자신을 덮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사람은 자신과 하나님을 이중으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32 편
자신의 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치료를 거부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말한 두 종류의 이 간사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은혜를 사모하는 어떤 갈망으로 감동을 받지 않을 만큼 그렇게 강퍅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감동을 받을 뿐이며 용서를 구하는 데에는 냉담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소유하는 것이 얼마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인가를 그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기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것은 다윗에게도 한동안 있었던 일입니다.
믿을 수 없는 안전이 그를 속여서 그의 마음이 어두워져 열심히 행복을 추적하는 일에 자신을 전념하지 못하도록 그를 방해하였을 때였습니다.
때때로 성도들이 같은 병 때문에 애쓰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다윗이 여기서 제의하는 그 복을 누리고 싶다면 사단이 우리의 마음을 그의 간계로 가득 채워서 우리의 비참에 대한 모든 감성을 탈취하지 않도록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속임수를 일삼는 모든 사람들은 이 비참 안에서 필연적으로 쇠잔하여지기 때문입니다.
시편 32 편
시32:3-4 내사 토설치 아니할 때에
다윗은 범죄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시1:1).
여기서는 범죄한 자라도 회개하여 사죄함을 받은 자면 복이 있다고 합니다(1, 2).
그러므로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이렇게 두 방면으로 복을 받습니다 이것도 택하심을 입은 인생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취급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고 회개치 않으면 그 심령이 심히 괴로워집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독이 있는 음식을 먹은 후에 위장이 괴로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범죄자는 오직 회개하므로 만 평안을 누립니다(3, 4).
1. 본문 3절은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주장하였던 교리를 확증합니다.
하나님의 손 아래서 겸손하게 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박탈당하는 것보다 비참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으로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우리가 느끼도록 시험하실 때까지는 이 진리를 우리가 바로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다윗으로서는 단순한 일상적 시련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극단적인 엄격함으로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또한 분명히 이 문제에서 우리 육체의 나태함이 그 파렴치 못지않게 놀라운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강제적인 방법으로 이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서둘러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화해 구하는 일을 결코 그렇게 열심히 서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영감을 받은 다윗은 자신의 실례로 우리가 내적인 시험으로 인한 비참한 고통으로부터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철저히 깨닫게 될 때까지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결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다윗은 자기가 침묵을 지켰다거나 자신의 뼈가 쇠하여지도록 울부짖음과 포효로 자기 슬픔을 증대하려 하였다고 덧붙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윗의 모든 기운이 다 쇠잔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죄인들이 어디로 피하든지 아무리 그들이 정신적으로 감동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의 복으로 그 죄인을 회복하여 주실 때까지는 그 죄인의 질병이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으며 또 그 죄인의 행복은 조금도 촉진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시편 32 편
재갈을 물고 있는 자들이 격렬한 비애로 괴로워하며 내적으로 자기 슬픔을 꾹 삼켜 그 비애를 드러내지 않고 마음 속에 계속 담고 잠잠히 있는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물론 먼 훗날 그들이 갑작스런 광증에 사로잡히는 수도 있으나 그들의 그토록 강한 비애가 보다더 큰 추진력으로 마음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면 나올수록 그 비애는 보다 더 오랫동안 억제되어 온 셈입니다.
'침묵'이라는 용어는 무감각이나 우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완고 사이에 놓여 있는 느낌을 의미하며 또 이것은 미덕에 그런 것만큼 악덕에도 연합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뼈는 늙어 쇠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마음의 무서운 고통으로 쇠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침묵은 소망이나 순종의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의 슬픔을 완화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본문 4절은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그런 막중한 슬픔이 일어났던 곳을 더 충분히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심하게 자기를 대적하였기 때문입니다.
극도로 격렬한 모든 고통들이 하나님의 손으로 그렇게 강렬하게 가하여지고 있으므로 죄인은 그 진노와 준엄하심이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 영원한 죽음으로 휘몰아갈 수도 있는 그 심판자의 처리를 받아야 한다고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극심한 고통들을 생각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 고통의 이유와 근원을 자기가 발견하였기에 자신의 진액이 말랐다고 하소연합니다.
인간의 모든 힘은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나타나실 때, 또 하나님께서 그의 분노의 표징을 나타내심으로서 그들을 비천하게 하고 또한 그들을 뒤엎으실 때 쇠하여집니다.
그러므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사40:7)은 잘 성취됩니다.
다윗은 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줄 알게 된 그 응징은 일반 형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그들을 내리누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서부터 다윗은 성령의 은밀한 감동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지도 받았으며 또한 건전한 교리와 교훈으로 참 종교와 경건 속에서 가르침을 받아왔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이 지혜에 도달하도록 하는 교훈이 불충분해서 그 과정의 바로 그 가운데서 새로 시작하는 초보자처럼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시편 32 편
오랫동안 다윗이 계속 자신의 죄를 통회하여 왔으나 다윗으로서는 날마다 새롭게 이 훈련에 복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번 인간이 타락하며 그들이 이전 상태로 회복하는데 얼마나 긴 시간이 소요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때때로 그들의 채찍을 배가(倍加)하시며 또 그것들을 나날이 증대하실 때까지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얼마나 더딘가를 역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가 잘 알았던 하나님의 손이 자기에게 가해진 채찍 밑에서 자기가 무감각해지지 않았을까 하고 어떤 사람이 다윗에 관하여 질문할 수도 있는데 그 해답은 문맥이 해줄 것입니다.
다윗은 복잡한 슬픔으로 억눌림을 받고 속박을 받았습니다.
또한 다윗이 잘 순종하고 또 치유책을 찾는 제일의 표시인 온유하게 될 때까지 오랜 고통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잔인하게 처리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응징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결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님을 다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만일 가혹한 형벌로 정복당하지 않으면 결코 제어되지 않을 우리의 극렬한 자존심이 겸손해질 때까지 하나님의 손이 맹렬하게 우리를 대적하신다는 것을 또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시편 32 편
시32:5-7 내가 이르기를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 죄를 아뢰매 하나님은 즉시 다윗의 죄를 사하셨습니다(5-).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경고 앞에서도 이런 체험을 하였습니다(삼하12:13).
다윗이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하매 나단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즉각 사죄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사죄 받은 체험을 자기 혼자만 알고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은 은혜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6, 7).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사죄 받은 처지가 참으로 안전하다는 사실을 간증합니다.
다윗은 마치 큰 바다 가운데 있는 반석으로 된 섬에 머무르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회개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에 온전한 안전감을 가집니다.
1. 본문 5절 앞부분은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입니다.
1) 이제 선지자는 자기가 말하고 있는 행복을 얻는 준비된 방법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자신의 불행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다윗의 느낌은 몹시 초조하게 하고 또한 그를 괴롭힐 때 다윗의 유일한 구원은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꾸짖으며 하나님의 용서를 간절히 바라면서 겸손하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만 그의 죄를 기억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아무 유익도 없이 가인의 죄나 유다의 죄가 그랬습니다.
이는 물리친다는 것을 악한 자들의 양심이 그들의 죄로 괴로워할 때 그들은 계속 자신들을 괴롭혔고 또 하나님을 대적하여 초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마지못해 하나님의 채찍으로 나아오도록 하나님께서 강요하지만 그들은 열심히 계속 숨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죄를 깨닫는 대단히 다른 방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이 자원하여 하나님께로 향할 때 그 죄인의 구원의 소망을 완악함이나 위선 위에 세우지 않고 용서를 위한 탄원에 두는 것입니다.
이 자발적인 고백은 항상 믿음과 연합됩니다. 다른 방법은 죄인들이 계속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있는 잠복소를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말은 분명히 자기가 성실하고 진심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아무것도 감추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32 편
다윗이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라고 말하였을 때 후자의 구절은 히브리어의 관용구에 따르면 부연을 위하여 추가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신의 마음을 모두 쏟아 놓았습니다.
위선자들은 변장하거나 혹은 허위 진술을 함으로 그들의 악행을 경감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솔직하고 정직한 입으로 결코 성실한 고백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이 비열함에 대한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아무런 위선도 없이 자기를 슬프게 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알리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이것을 "내 죄를 아뢰고" 라는 말로서 확증하고 있습니다.
마치 재판관이 죄수들을 재판에 나오도록 강요하듯이 악인들이 억지로 끌려나오는 동안 다윗은 일부러 또 마음에 충분한 목적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합니다.
'아뢰었다'는 말은 깊이 생각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공포로 자신의 죄를 자유롭고 솔직하게 고백함에 있어서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통한 그 용서하심을 다짐하며 확신합니다.
2) "자복하리라" 혹은 "내 죄를 아뢰고" 라는 구절은 사람들이 곧잘 그들의 잘못을 전가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는 모든 변명과 구실들을 물리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의 심판에 순종하기로 결정하고 자책으로 자신의 죄를 알게 하면서 용서를 받는 탄원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2. 본문 5절 끝은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입니다.
이 구절은 다윗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아가기 전에 자기가 비참하고 무서운 동요로 인하여 괴로움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나타납니다.
그 말은 또한 죄인이 솔직한 고백으로 자비의 보좌 앞에 그렇게 자주 나아갔던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찾을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기쁨으로 용서하여 주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또한 이 본보기는 비탄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신실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들 자신을 곧 하나님께로 향하면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으로부터 회개와 고백은 은혜를 얻는 이유가 된다고 추리할 수 있는데 그 해답은 간단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죄인들이 하나님께 화해되는 이유가 아닌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고백은 삽입되어 있으나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마음과 입술을 엶으로 참으로 우리의 용서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믿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 32 편
필연적으로 용서와 연결된 모든 일들을 그 용서의 원인들 중에서 평가한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의 고백으로 용서를 얻은 것이지 고백의 단순한 행위에 의하여 그것을 받을 만하였다는 이유는 아닙니다.
믿음의 인도 아래 그의 판단으로부터 다윗은 겸손하게 그것을 탄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옛 시대의 율법 아래 있었던 열조들이 그렇게 하였던 동일한 고백의 방법이 오늘 이 시대 우리들 가운데서도 행해져야 하는데 이것은 교황의 폭군적인 법령을 충분히 논박할 수 있습니다. 교황은 이 폭군적 법령으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또 용서받기 위하여 교황의 사제들에게 우리를 보내고 있습니다.
3. 본문 6절 상반은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입니다.
1) 여기서 시편 기자는 지금까지 자기가 친히 나타냈던 모든 것은 공통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해당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중하게 관찰하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천성적인 불신앙 때문에 우리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는데 느리며 또한 마지못해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다윗이 용서를 얻은 것은 단순한 고백의 행위 때문이 아니고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믿음과 기도 때문이었다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믿음의 참 희생인 기도에 그들이 전념할 것을 명령하면서 그것을 얻는 같은 방법으로 신자들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다윗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한 실례를 보여주셨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로 확대될 뿐 아니라 또한 화해를 어떻게 구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이라는 말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대한 확증을 말합니다.
이와 동시에 시편 기자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탄원자로 엎드리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소망을 얻을 수 없다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2) 즉각 그 뒤에 나타나는 "기회를 타서"라는 표현은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기도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더 정확하게 이사야의 글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데는 시기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언제나 하나님을 필요로 하며 또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만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게으름과 우둔함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방해하므로 다윗은 특별히 여기서 신자들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필요성에 직면한 위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32 편
교황주의자들은 우리가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줄 옹호자를 가져야 한다는 그들의 교리를 보증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악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로부터 그와 같은 교리를 지지하는 논증의 기초를 삼으려는 시도는 아주 불합리한 일입니다. 그것은 논박할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그들이 얼마나 사악하게 전(全)성경을 타락시키고 있는가 또 그들의 무지로 아주 분명한 일들마저 얼마나 곡해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4. 본문 6절 하반은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입니다.
이 표현은 요엘 선지자의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리"(욜2:32)라는 예언과 일치합니다.
그 뜻은 죽음의 깊은 소용돌이가 아무리 사방으로 우리를 에워싸더라도 우리를 집어삼킬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맡기기만 한다면 안전하며 또한 아무런 해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만일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성소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비록 죽음 속에서라도 확실한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배웠습니다.
'홍수' 라는 말에는 피할 수 없는 모든 위험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5. 본문 7절은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또한 비록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몇 마디 말로 찬양하고 있지만 그러나 다윗의 그 간결한 표현 속에 강력한 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 구절에서 다윗은 하나님 이외의 어떤 다른 곳에서는 안전이 없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다윗은 앞으로는 하나님만이 자신의 신실한 보호자가 되실 것으로 확증합니다.
사람들이 이유 없이 과거 시제로 번역하지만 우리는 주저없이 미래 시제로 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이 미래의 고난에서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가 그 고난들을 대적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재난이 자신에게 닥칠지라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자가 되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에우시리이다' 라는 말로 다윗은 많은 여러 가지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대단히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께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또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최대한으로 풍부한 자료를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윗의 일상 방법을 따라 도움 대신 "구원의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께 다윗이 어떻게 감사를 드리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편 32 편
시32:8-11 내가 너의 갈 길을
다윗은 회개하고 사죄받은 후에 남을 가르칠 수 있는 담력을 가집니다(8, 9),
베드로도 회개한 뒤에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눋22:32).
다윗은 여기서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 와 "의인"을 동일시하였습니다.
10절에 "신뢰하는 자"를, 11절에서는 동일한 사람을 "의인"이라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으로만 의인이 됩니다.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은 다윗은 기쁨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다윗은 다른 사람들더러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시9:2).
1. 본문 8절은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입니다
다윗의 권고는 더욱 강력한 힘을 가졌습니다.
거룩한 화자(話者)는 자신의 과정을 모든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지도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특별히 자기 자신에게 적용할 때에 이미 말씀하여진 그 교리가 사람들의 마음에 더 쉽게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방법이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여졌을 때에 아주 조금이라도 그것으로부터 한 사람도 떠나지 않도록 최대한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부터 모든 사람이 자기 형제들을 이 동일한 은혜의 동참자가 되도록 애쓰는 조건 아래서 하나님께 우리가 화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들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기울였던 다윗은 그것을 '주목하여' 라고 묘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에 대하여 염려하는 사람들을 우리 길의 안내자로 지정하셨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하며 그것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로서 가지신 관심이 매우 크시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2. 본문 9절은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이제 자기가 말하려 했던 앞서 말한 말씀들을 종합하여 간단히 설명합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완악을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배우기를 권고합니다.
다윗이 경건한 자들에게 그들의 완악을 고치라는 충고 속에는 많은 지혜가 있습니다.
시편 32 편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하나님의 징계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인다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을 아주 열심히 서두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그렇게도 많은 완만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가 어리석은 것일까? 아니면 완악한 것일까?
그러므로 이 완악함을 이성이 없는 짐승들에 비유하면서 다윗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으며, 동시에 다윗은 완악이 그들에게 아무 이로움을 주지 못하며, 단지 "쓸데없는 저항을 하여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라고 선포합니다.
인간은 재갈과 굴레로 말들의 난폭성을 길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인간들의 완악함을 발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려는 것을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3. 본문 10절은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입니다.
아무런 비유도 없이 다윗은 반역적이고 목이 곧은 자들의 상태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여기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완악을 제어하기 위해 그들에게 재갈과 굴레 씌우기를 원치 않으셨다고 말하였는데 이제는 그들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그들의 비참이 끝도 없을 것이고 또 어떤 한도도 없을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잠시동안 우리를 버려두실지라도 이 탄핵이 우리를 두려움으로 가득 채우고 또 우리 자신이 강퍅하게 되지 않도록 우리를 보존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형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로 온 우리들의 번영, 곧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자들을 대적하여 위협하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불행들을 반성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닫기 위하여 우리를 속이는 그런 하나님의 저주로 인한 번영에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대적하시려고 수없이 많은 역병으로 무장하셨다고 말하셨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무한한 복을 준비하셨다고 덧붙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손 아래서 우리 자신들이 겸손하게 되는 것과 또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 속에서 발견하는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으로는 우리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으며 또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복을 받을 것인데 그 이유는 사단이 어떤 방향에서 그들을 공격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사단을 대적하시며 그의 보호하시는 능력으로 그들을 지켜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32 편
4. 본문 11절은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입니다.
참 행복이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어떻게 준비되었고 또 그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가까이 있는가를 가르친 후에 다윗은 많은 이유 때문에 그들이 기뻐할 것을 권고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관대하고 또한 그렇게 인자하게 그들에게 화해를 제공하시는 것을 그들이 볼 때에 어떠한 것도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확신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는 것처럼 다윗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바울이 우리에게 추천하는 믿음의 열매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경건한 자들의 양심이 조용하고 온유하여졌을 때 평화와 영적 기쁨을 누립니다.
믿음이 살아 있는 곳에 이 거룩한 기쁨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세상 그 자체의 불신앙이 이 기쁨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므로 다윗은 자기가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이라고 명명한 의로운 자들에게만 말하고 있으며 인간을 기쁘게 하는 외적으로 나타나는 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자신의 죄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값없으신 자비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을 다윗이 어떻게 의롭다고 부르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죄를 미워하고 또 다음 전체로 회개하는 사람 이외의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 회개는 용서받을 만한 어떤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니며 믿음은 회개의 영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기 시작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정직한 마음의 상태를 순결하고 완전한 것처럼 받아주십니다.
믿음만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시킬 뿐 아니라 또한 그 인간 속에 있는 불완전한 것을 무엇이나 성화시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그 자신의 어떤 공적으로는 그렇게 큰 복을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의인이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