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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근의 평론 특강
주체란 무엇인가, 타자란 무엇인가
- 기존(구성주의) 철학과 해체(해체주의)철학의 주체론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I. 서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프로이트의 잠재의식론을 넘어서서 인류를 놀라게 할 의식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없을 때, 제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와 ‘나’는 선택된 정보로 만들어진 나다. 철학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필터다. 이 필터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정교하느냐에 따라 세상살이가 달라진다. 타인의 필터를 파악하면 그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알고 있는 필터가 많으면 많을수록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더해진다. 그래서 철학이 중요하다. 철학공부란 타인의 필터를 이해하고 자신의 필터를 갈고 닦는 작업이다.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의 관점을 만들어내고, 우리의 관점이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정말 제대로 아는 것일까? 의식이란, 주체란 무엇인가?
II. 본론
근대적 주체론
-의식과 동일시
-의식만으로 볼 때, 주체는 인간 활동의 통일적 중심
-통일적이고 조화로운 주체 (이성 중심의 기능)
-의식 저변에서 의식에 강력한 규정력을 발휘하는 무의식의 발견은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가능케 했다.
프로이트의 주체
-무의식에 의해 포획되고 조종당하는 비자유적인 주체이다
칸트의 주체
-순수이성과 판단력을 가진 절대주체가 아닐 뿐더러 감성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므로 언어주체는 결코 본질이나 절대적인 의미에 도달할 수 없고 의미화에도 실패한다.
칸트의 윤리학적 주체 -인간의 의식은 스스로 구성하는 것이다.
근대 주체 철학을 낳음. -상징계적 질서(억압된 윤리, 숭고한 이성의 이름으로 상징계의 질서를 합리화하는 윤리)
*합리론-인간이 인식하는 근거는 오로지 이성뿐이라는 인식론
-이에 반해 라캉의 실재계는 현상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 곳곳에서 출몰하는 무엇이다. 우리는 상징계의 막을 찢고 나오는 불순물(대상소타자)*<대상a>를 통해 질재계와 대면한다.
*정신분석의 용어로는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라는 구멍을 채우는 환상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욕망을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라고 말한 이는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욕망이라는 것이다.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 직역하면 “자신이 원하는 작은 상(像)”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인간은 항상 이걸 추구하는데 만족을 못하니까 이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으로, 평생 환상을 찾아 헤매는 이유에 대한 가장 간결한 메커니즘이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금정산은 여전히 사랑을 믿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영혼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흰 구름과 푸른 하늘은 울먹이는 갈증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연기처럼 긴 머리 늘어뜨리고 저 들녘을 내려다보는 일은 낭만주의자들을 끌어당기는 영원한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인지도 모른다. 구름처럼 감미롭고 맑은 향기와 푸르름, 그 유혹과 낭만보다 더 멋진 컴비네이선이 어디 있을까. 사람들은 간절히 구하면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과 마음은 구하는 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집구석을 벗어나는 탈주의 선을 그린다. 멀리 금정산 능선에 눈길을 쫓아가는 것은 채움과 비움의 사이에서 비워둔 만큼 채울 수 있는 여지다. 그것이 어찌 유선 같은 저 산자락뿐일까. 언젠가는 나도 강물이 보이는 언덕에 그림 같은 집을 지으리라.
-인간은 현실(상징계 질서)를 유지하려는 상징계에 갖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상징계를 변화시키는 존재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윤리가 노리는 것>
메를로 뽕띠의 주체
-타자와 나 사이에는 “거리 속의 가까움”이 있다. 가까우면서도 멀고, 멀면서도 가까우며
-다르면서도 비슷한, 참으로 애매한 관계가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로,
-나와 타자 사이에는 씌어지고 지워지고 삭제되면서 각인된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주체는 그냥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하기 위해서” 또는 “~로서” 바라본다.
-낯선 도시에 익명적 개인으로 유입되는 순간, 서로가 서로에 타자가 되어 버린다.
실존철학의 주체
-근대적 주체와의 대결이라는 측면이 있음(주체를 수용하나 합리주의는 반대)
-여전히 자유로운 인간의 선택이 강조되는 주체
라깡의 주체론
-주체의 이원화 /욕망하는 주체와 향유하는 주체, 라캉의 윤리학 <->칸트의 윤리학
-라캉의 윤리학은 욕망하는 주체에서 향유하는 주체로의 이월이다.
-라캉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의 기표 시스템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밝혀냈고, 그 위선적 현실을 변혁시킨 원동력을 실재계에서 가져온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
-자아는 오인에서 시작된다. 자아의 형성은 거울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실제의 자신이 아닌 유사자와의 동일시가 자아의 시작이다.
-인간 정신은 시작부터 타자와 함께한다. 결국 주체의 가장 깊은 핵심에는 타자성이 존재하며, 이는 주체가 근본적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통일과 통합의 가능성이 애초에 결여되어 있음을 뜻한다.
-상징계로 진입한 주체가 상징계의 역동적 구조에 의해 형성되는데, 그 구조는 언어의 구조이다.
-즉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적 구조는 주체 이전에 존재하며 주체와는 독립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언어적으로 구성된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며, 주체는 타자의 담론 안에서 형성된다.
-타자의 욕망에 부합하려 한다는, 즉 타자의 인정을 받기 원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타자의 담론 체계인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기도 하다.
-언어와 욕망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대체작용을 무한히 해나가는 가변적 구조이다.
-이러한 가변적 구조 안에서 형성되는 주체 또한 비동일적이고 분열적이며 비불변적이다. -타자로부터 시작하는 라캉의 주체는 스스로 중심을 지니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탈중심적이다.
-주체는 통일과 조화의 자율적 그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구조가 만들어낸 분열적 결합물이자 비자유적 주체인 것이다.
푸코의 주체론/타자론
-주체는 규율 지키기와 몸 길들이기를 통하여 근대를 살아가는 주체로 만들어지는 것
-기억은 못 하지만, 기계처럼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냥 만들어진 사회 속에서 그것을 지키고 있는 나,
-나는 그대의 탄생
-푸코의 타자는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회적 타자다.
-통상적으로 가져왔던,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비주류, 철학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배제 되어온 그룹
-푸코는 권력이 개인을 타자화하면서 비정상성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개인이 불행하다고 본다.
-개인은 권력이 제도화하는 규율에 단련되고, 규제되고 규격화되는 존재가 된다.
-실존적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헤겔의 타자론
-. 자기의식이란 타자를 전유함으로 획득되는,
-. 주인과 노예의 처절한 권력투쟁 후에 획득되는 노획물
-. 대상을 향한 영토화의 농도가 짙을수록 확실하고 뚜렷해진다.
-. 김춘수는 그의 시에서 주체에 의해 명명되기 이전 존재, 즉 타자를 몸짓이라 표현
-. 또한 나의 선포를 수용한 타자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 헤겔에 있어 타자는 나의 의식의 망에 의해 걸러진 존재이고,
내 의식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 바로 이점이 헤겔의 타자론이 최종적으로 다다른 지점이다.
라깡의 타자론
-. 헤겔이 멈춰선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 라캉의 욕망이론은 소쉬르 언어학에 근본을 두고, 프로이드의 무의식을 은유와 환유로 읽어낸 구조주의 분석이다.
-. "인간의 언어는 무의식의 정신세계를 반영한다"고 그의 사상을 요약할 수 있다.
-.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 "무의식" 은 자신을 이끄는 타자로 보았다.
-. "자아 또는 주체가 아닌 타자가 인간을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진정한
주체란 무엇인가 / 이정우(푸코 연구로 박사학위)
술어적 주체-주어로서의 주체, 자신에게 붙은 술어를 통해서 성립하는 주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범주적 주체)
술어는 주체를 규정해주는 명사나 형용사
예) 앙드레는 교사이다.
-이 술어들이 각각의 주어를 서술하며, 그것은 한 사람의 주체가 이 규정성들을 통해 타자들에게 드러남을 함축한다.
이때 서술되는 주체는 이런 술어들/규정성들을 통해서 타자들에게 드러나지만,
다시 타자들의 인식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인식하게 된다.
이때 “사람들은 ~~~”이라는 언표들이 내면화됨으로써
“나는 ~~~~”이라는 언표들이 성립한다.
전자에서 주체/나는 언표된 주체가 되고, (영희는 철수(나)는 똑똑하다고 말한다)
후자에서는 언표행위의 주체가 된다.
-내가 “나는~~~”이라고 언표할 때, 즉 언표의 주체와 언표행위의 주체가 일치할 때, 한 주체의 자기의식이 성립한다. 더 정확히 말해,
이런 자기의식 없이 주체는 주체일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의 주체가 술어적 주체다.
이 경우, 주체의 구체적인 주체임은 “나는 ~~”이라는 형식에 있어 술어가 들어가는 규정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규정은 부정들을 함축한다. -내가 남자라면, 여자가 아니고
술어들이 주체를 주체이게 한다.
스스로를 의식하는 개체, 주체는 자기와 타자를 가름으로써 주체가 된다.
(헤겔: 타자성 없이는 주체성도 없다)
이런 가름과 되돌아옴으로부터 자기의식이 탄생한다.
‘나’는 규정들이 통접되어 형성되는 술어들의 집합이다.
나는 남자다./나는 불교도다. 나는 교사이다./ 나는 경상도 사람이다./ 나는 1960년생이다.
나의 존재는 곧 이 술어들(의 집합)인 것이다. 술어적 주체로서의 ‘나’의 주체성은 이런 술어들의 통접으로부터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주체는 무수한 규정성들의 계열체이다.
주체의 문제 -현대 사상의 중심부
주체-무위인
‘위’ -사회의 집합론적 구조(이름-자리의 체계 자체에서의 변화가 없는)
무위인- 위의 경계를 가로 지르며, 이-것을 창조 -타자들 사이에서의 되기(타자-되기), 숱한 형태의 ‘우리-되기’를 통해 가능하다.
- 존재론적 행위인 동시에 윤리적 행위이기도 하다.
- 삶의 또 다른 방식을 사유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며,
‘우리-되기’에 창조적으로 공헌할 수 있다.
무위인 -인간이란 술어적 주체로서 이름-자리의 그물 속에서 살아가면서 또한 거기에 고착되지 않으려 하는 계속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 나가려는 이중체다.
-주체는 타자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생성해 가며,
그로써 자신의 동일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 상실로부터의 회복은 주체의 자기 변형을 요구 하며, 이런 요구는 자기에의 물음을 반복케 하는 것이다. 이런 반복을 통해서만 주체는 해 체되는 자신을 재구성해 나갈 수 있다.
해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와의 마주침에 충실할 때 주체는 반드시 해체되어 갈 수밖에 없으며 열려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체성은 그런 해체 과정과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동일성을 만들어가는 능력이다.
이런 이중체의 삶이란 동적이고 뫼비우스적인 이율배반의 선상을 살아가는 것이며, 결국 생성하는 관계를 살아가는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선상에서 생성한다는 것은 계속 새로운 관계를 맺어 나간다는 것이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떤 ‘우리’의 생성을 뜻한다. 아주 작은 우리에서 매우 큰 우리에 이르기까지 각종 형태의 ‘우리’의 형성과 해체가 인간세계에서 관계 맺음의 실질적 의미이다.
큰 주체성의 형성- 끌어당김에 의해 형성
작은 ‘우리’들 사이에 끌어당김이 있을 때 -큰 ‘우리’가 성립
그 힘 -매력일 수도 권력일 수도 있다.
두 남녀의 합쳐짐 -매력을 통해서,
-매력을 통한 큰 주체성의 성립은 작은 주체들 사이에 존재했던 그늘의 소멸을 의미
제국주의에 의한 정복 -권력을 통해서
-권력을 통해 거대 주체의 성립은 커다란 그늘이 작은 그늘들을 덮어 버림을 뜻한다.
-이런 거대 주체는 이미 미래에 갈라질 금을 은폐시키고 있는 것이다.
-거대 주체의 총체성은 오리혀 이름-자리의 체계를 더 공고히 하며(집합론적 형태), 이 경우 역시 진정한 창조를 가지오지는 못한다.
-기존의 집합론적 구조 자체를 변이시키게 될 때, ‘되기’가 가능하고 윤리적 창조가 가능해진다.
진정한 우리-되기
-저항 주체들이 서로에게 그늘을 만들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저항을 생각하면서 상생의 관계를 맺을 때에만 진정한 ‘우리-되기’가 성립할 수 있다.
-저항 주체들의 상승변증법(=상생)이 요청된다.
예) 남북한 -지향점:(민족주의)-전체 저항,
김일성-공산주의(권력의 토대),
박정희-자유주의(권력의 토대)
-‘우리’가 내포하는 비극적인 논리의 모순이 존재
주체-이름-자리로부터의 탈주이다. 탈주는 내재적 탈주이고,
벗어남이 아니라 바꾸어-나감이다.
주체는 이름-자리 체계의 투쟁이 우리를 일정한 주체로 만들어주고, 우리 삶에 의미도 부여해준다.
탈주란 벗어남이 아니라 오히려 부딪침, 끊음, 이음, 가로지름, 가름, 모음의 운동이다.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이다.
주요 사상은 무의식, 은유와 환유, 남근, 상상계와 상징계, 시선과 응시로 볼 수 있는데, 인간의 욕망이 주체이며 반복과 주체분열 등을 통하여 형성된다고 한다. 이러한 것이 구조주의의 다른 이론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남근으로 보였던 대상이 근접하면서 오인임을 알 수 있으므로 대상의 입장에서 볼 때는 기호학이 된다. 대상은 실체 같지만 신비의 껍질을 벗기면 허상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욕망을 지연시키는 욕망의 미끼 "오브제 프티 아"의 입장에서 보면 후기 구조주의이다. 은유와 환유의 차액에 의해 욕망의 충족이 끝없이 지연되는 것은 차이와 연기가 합쳐진 데리다의 "차연"과 같다.
바르트의 욕망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도 마찬가지이다. 연인에게는 사랑에 빠진 대상이 은유지만 그녀는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될 수 없다. 그의 욕망이 너무 강해서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 아니면 그녀를 잊고 다른 대상에 몰입한다. 혹은 그녀를 얻었을 때는 그녀는 더 이상 별이 아니다.
그러므로 은유에 대한 환상은 곧 환유로 이어져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모던 시대의 자아 중심적인 분석에 반해서 프로이드의 무의식을 재해석한 라캉의 정신분석은 주체의 분열에서 시작된다. 주체의 분열을 인식한 주체는 '거울 단계'라는 오인의 구조가 바탕이 된 언어의 세계에 산다. 거울 단계를 지난 주체는 아버지의 질서인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고, 상상 계적 믿음이 오인임이 드러난다. 여기서 욕망이 대상을 향하는 단계가 상상계이고, 그 대상을 얻었을 때 욕망의 완성이 아니라, 어긋나 버리는 단계가 상징계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 발생하는 차액(잉여쾌락)에 의해 다시 욕망이 지속되는 것이 실재계이다. 이 차액은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다시 욕망을 부르게 되는 미끼 "오브제 프티 아"가 된다.
어머니를 둘러싼 아버지와 나 사이의 욕망, 갈등의 삼각 구조에서 상상계가 끝나고 상징계로 어긋나는 것을 라캉은 프로이드의 거세 콤플렉스로 설명한다.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여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즉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서는 순간 주체는 거세되므로, 대상이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키지 못하고 차액을 남김으로 욕망의 회로를 맴도는 주체는 반복과, 주체 분열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거짓말을 하는 나와 그것을 보고 있는 나를 말하기도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나를 보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것은 시선eye 이고 보여지는 것은 응시 gaze 이다. 내가 보기만 한다고 믿는 단계는 상상계이고, 보여짐을 아는 단계가 상징계이다. 이 둘을 합한 변증법으로 바라봄과 보여짐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것이 실재계이다.
III. 결론
- 나는 무의식에 의해 조정받으면서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탈출구는 있다. 스스로의 정신을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다. 내가 지닌 계급적 위치에 의해서 정신적 세뇌를 당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가 의식을 이해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변환 이상의 큰 변화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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