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5(금)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사람의 됨됨이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들판 전경 /. 이곳은 박경리 작가께서 대하 소설 "토지"을 쓰신 그 배경지입니다.
2012년 7월 26일 여수 세계 해양엑스포 행사를 갔다오는 길에 동행한 식구들과 이곳에 잠시 들렸습니다.
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
후함으로 하여
삶이 풍성해지고
인색함으로 하여
삶이 궁색해 보이기도 하는데
생명들은 어쨌거나
서로 나누며 소통하게 돼 있다.
그렇게 아니하는 존재는
길가에 굴러 있는
한낱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인색함으로 하여
메마르고 보잘것없는
인생을 더러 보아 왔다.
심성이 후하여
넉넉하고 생기에 찬
인생도 더러 보아 왔다.
인색함은 검약이 아니다.
후함은 낭비가 아니다.
인색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만
후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준열하게 검약한다.
사람 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
후한 사람은 늘 성취감을 맛보지만
인색한 사람은 먹어도 늘 배가 고프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
- 박경리의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중에서 -
박경리
1926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출생하였으며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 1950년 수도여자사범대학(現세종대학교)졸업,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에 근무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녀의 남편 김행도는 북한군에 납북당했다. 그의 딸 김영주는 1973년에 저항시인 김지하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이 발표됨으로써 등단, 이후에는 단편들을 쭉 작성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큰 업적은 소설 토지를 들 수 있겠는데, 1969년 문화일보 연재부터 1994까지 총 5부로 완성된 대하소설이었다.
이 소설로 인하여 박경리는 유명세를 타, 영어·일본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는 등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2007년 말 폐암이 발견되어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고, 2008년 뇌졸중 증세까지 나타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2008년 5월 5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통영시 산양읍에 있다. 한편, 그녀가 3부작 연재하였던 '나비야 靑山(청산)가자'는 유작으로 남게 되었다. 1980년 서울을 떠나 원주 단구동에 정착하면서 토지 4,5부를 집필하고 탈고한 생가는 박경리문학공원이 되었으며, 택지 개발로 1998년 회촌마을로 이사하였다. 보상금과 토지공사의 기부금을 합쳐 토지문화관을 세웠다.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와 가까워, 석좌교수로 강의를 오기도 했다. 사후 캠퍼스에 박경리 동상과 시비가 세워졌다.
수 상
• 월탄문학상
• 인촌상
• 한국여류문학상
• 내성문학상 (1959)
• 금관문화훈장 (작고후)
작 품
• 토지
• 김약국의 딸들
• 시장과 전장
• 파시
• 표류도
• 가을에 온 여인
• 불신시대
• 성녀와 마녀
수 필
• Q씨에게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 가설을 위한 망상
여수 엑스포를 다녀오면서 온가족과 함께 경상남도 하동군 평사리 소재 "토지" 배경지 문화관을 관람했습니다.
1926년에 태어난 박경리는 20대에 들어설 무렵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급히 시집을 간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6.25 전쟁 중 공산주의자로 몰려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던 박경리에게는 또 한 번의 시련이 온다. 세 살배기 아들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아들이 죽고 난 후로 그녀는 한해도 빼놓지 않고 작품을 썼고, 아들의 죽음을 바탕으로 한 소설 「흑흑백백」이 탄생한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지아비와 아들을 잃은 젊은 과부로서 노모와 어린 여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녀는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하나 남은 딸아이의 남편인 사위(김지하 시인)마저 사형 언도를 받게 된다. 박경리는 자신의 삶에서 느낀 외로움이나 쓸쓸함을 한과 생명 사상으로 표현하며 문학적 결실로 승화시켰다. 그녀는 책에 대한 열정으로 헌책방을 내기도 했다. 해방 후 인천에는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남기고간 책이 많았다. 이 책들이 고물로 쏟아져 나오면서 당시 배다리 근방에는 헌책방 시장이 형성됐다. 박경리 작가가 헌책방을 낸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20대의 박경리는 그곳에서 책을 읽으며 필요한 이에게 책을 전달함과 동시에 문학적 토양을 일구어 갔다.
박경리 작가의 소설 토지의 배경지 및 드라마 촬영장인 경남 하동의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작가 박경리가 1969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26년 동안 연재한 대하소설 '토지'가 1994년 10월 8일 완간됐다. '토지'는 경상남도 하동군 평사리와 간도의 용정, 그리고 진주와 서울 등 도시를 무대로 한말 지주 가문의 후손 '최서희'와 그 주변 인물들의 삶을 통해 일제 강점기 및 근ㆍ현대사를 재조명하고 있다.최씨 집안의 몰락과 재기는 한민족의 몰락과 재건을 뜻할 수 있다.
강원도 원주시 소재의 '박경리 문학공원'
박경리 선생은 토지 3부를 마친 후 1980년 원주시 단구동 742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후 흥업면 매지리에 토지문화관이 건립되자, 원주시는 1999년 단구동 집을 인수해 박경리 문학공원으로 조성했다. 선생의 집필도구 등을 기증받아 1층에 집필실을 복원했고 2층에는 선생의 뜻에 따라 문인들의 사랑방을 마련했다. 지상 4층 규모의 매지리 토지문화관은 후배 문학인들에게 창작 및 집필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대회의실과 세미나실을 비롯, 야외무대와 26개의 집필실, 12개의 창작실을 갖추고 있다. 2006년에는 10개의 창작실을 갖춘 지상 2층 규모의 귀래관도 완공됐다.
박경리 선생님의 옛집이 1989년 택지개발지구로 편입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것을 걱정한 문화계의 요청에 따라 한국토지공사의 시공으로 1997년 9월에 착공해서 1999년 5월에 완공한 것이다. "김약국의 딸들"을 포함해 훌륭한 작품이 많지만 '박경리' 하면 빠질수 없는 것이 바로 대하소설 "토지"라고 할 수 있다. 1969년에 집필을 시작해 1994년에 탈고하기까지 무려 26년이란 시간에 걸쳐 완성한《토지》는 박경리의 삶과 문학이 잘 밀착되어 이루어 낸 우리 문학의 대작이기 때문이다.
1926년 통영 태생인 박경리는 1957년부터 본격적인 집필 생활을 시작하는데, 강원도 원주로 이사를 온 것은 1980년이며, "내가 원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산천을 사랑한다는 얘기다"며 이곳을 좋아했다. 이집에서 토지 4부와 5부를 탈고했으며, 박경리는 1999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토지문화관'이 개관되어 그곳으로 옮겨 지내다가 2008년 타계하셨다. 이곳 문학공원에는 북카페, 용두레벌, 평사리 마당, 홍이동산 등 토지에서 따온 지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박경리의 옛집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핸드프린팅이 보이는데,이른 새벽 눈뜨면 가축들 먹이 주는 것부터 시작해 직접 텃밭을 가꾸었던 투박한 농부의 손 그대로 이다.
경남 통영시 '박경리 기념관'
통영이 낳은 최고의 문학가 박경리 선생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통영시 산양읍 소재지에 2008년 8월 착공하여 2010년 5월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4,465 평방미터의 부지에 지하1층 지상 1층 규모로 다목적실, 사무실, 전시실, 영상실, 자료실 등이 있다.
박경리 선생님의 묘지도 바로 이곳 통영 기념관 근처의 통영 앞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에 위치해 있다.
그동안 사연도 많고 또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던 사외부동산 문제를 매듭지었나 싶었는데, 전번에 근 한달 이상을 들락 거리며 나와 시름을 하였다가 결국은 물건을 놓쳐버린 전임 서사장이 강력하게 항의를 해왔기에 잠시 곤혹스러웠으나, 그동안 수차례 만났지만 茶와 식사을 한번도 얻어 먹지 않고 오히려 내가 지불한 것이 효력이 있었는지, 처음에는 엄청 흥분했던 그 사람이 마음을 접어 안도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착찹하던 차, 오늘 저녁에는 성당에서 부활절을 앞둔 성목요일 세족례 행사(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발을 씻어 주신 것)가 있다고 마나님은 꼭 성당에 가야한다고 당부하는 전화가 왔으나, 앞서서 오늘 저녁 안토니오 형제님을 비롯하여 호총무 그리고 임베드로와 저녁 약속을 대월에서 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순절 시기였지만 나도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다른 형제님들도 똑같은 위로를 방아야 할 심정이었는지? 먼저 저녁에 한잔하자는 연락을 해 왔기에 마치 기다리고 있었듯이 반갑게 맞고 약속했지요.
하여 일과가 끝나자 마자 대월식당으로 먼저 달려가 메뉴를 선정하고 준비상태를 점검했습니다. 마치 군대에서 출동준비태세를 점검하듯이... 오랜만에 남성총구역장을 할 때 아끼던 10구역장 임베드로 형제가 이번에 처음으로 참석해 주어, 더 신경써 철저하게 준비태세 점검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떻든 분위기가 너무 좋아 오늘도 귀가 길에는 차를 놓고 버스를 타고 귀가하기로 맘 먹으니깐, 그때부터 술이 술술 더 잘 들어갔습니다. 상기인의 나우바리임에도 불구하고 임베드로 형제가 비용일체를 미리 계산해 버려서 고맙기에 앞서 미안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하여간 여기서 발동이 걸려 2차로는 마포 소재의 호프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소식을 접했는지 이미 야고보 형제님 내외분이 호프집 창가 좋은 자리에 진지를 확고히 구축하고 계셨습니다. 뜻이 맞는 형제분들이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밤 10시 30분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집이 먼 관계로 아쉽지만 먼저 일어났습니다. 1711호 시내버스가 바로 마포 호프집 앞의 정유장에서 정차하기에 쉽게 오를 수 있었지요.
오늘도 버스 차창을 통해 서울시내 야경을 보면서 많은 상념에 졎었습니다. 집 앞의 버스 정류장에 내렸는데, 정류장의 시계는 밤 11시 48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흑~흑~흑~
- 오늘의 일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