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지도 '자부랑깨'
동양의 나폴리라는 통영 부두엔 할매김밥집과 싱싱한 우렁쉥이, 도다리, 서대 파는 노점 많다. 통통배가 내만의 푸르고 부드러운 파도 헤치고 한산도 돌아나가자, 숲에 덮힌 그림같이 푸른 섬들이 보인다. 배가 외해로 나가 물결 거세지자, 디젤여객선은 물위로 가랑잎처럼 올랐다 내렸다 한다. 탈탈탈 발동기 소리내면서 앞으로 전진을 못하여 표류할까 겁난다. 멀리 눈 앞에 자그맣게 보이는 목적지는 신기루 같다. 가도가도 닿지 않는다. 그렇게 지루하게 다섯 시간 망망대해 건너가서 닿은 곳이 연화도다. 곧이어 암벽에 제비집처럼 매달린 집 몇채 보이는 상노대 하노대 나타난다. 동네 사람들 뗀마 타고와서 배에서 내린 손님 싣고가는데, 파도가 선착장 위로 넘나들고 있다.
이곳이 절해고도구나 하고 생각할 무렵 욕지도가 나온다. 욕지도 동항리는 메밀잣밤나무와 아열대 상록수림에 덮힌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이때부터 타고간 여객선이 갑자기 당당해진다. 호수같은 포구에 들어서자, 바다에서 그렇게 초라하던 작은 배가 부웅부웅 뱃고동 울리고, ‘비 내리는 삼천포에... ...’ 은방울 자매 <삼천포 아가씨>를 구성지게 틀어놓는다. 전에 어업전진기지였다는데 이젠 한물 갔는지 언덕 아래 문 닫은 목로주점 몇 개 보인다. 인적 고요한 파도 넘실거리는 석축에 물개같이 새카만 몰꼴의 아이들만 훌치기낚시 하고있다. 훌치기 채비는 주먹만한 납덩이에 커다란 바늘 셋 달린 것이다. 그걸 숭어떼 다니는 바다에 원투해서 획획 잡아채는데, 서너번 던지면 한번은 배나 꼬리에 걸린다고 한다. 숭어들이 볼만하다. 슈벨트의 가곡 '숭어' 생각난다. 어떤 놈은 물에서 갑자기 사오미터 공중으로 점프하여 철퍼덕 수면에 떨어지는 놈도 있고, 떼숭어가 방향 바꾸며 물속을 이리저리 헤엄치는 모습 보인다. 갑자기 꼬맹이 하나가 팽팽한 줄 당기길래 가보니, 숭어가 아이보다 힘이 쎄다. 아이가 숭어한테 질질 끌려다니다가 끌어내는데 보니, 싱싱한 숭어가 거의 사십 센치 쯤 된다.
물결이 와서 부딪치는 석축 위에 화장않은 부스스한 얼굴로 담배 물고 어슬렁거리는 아가씨 보인다. 파시(波市)가 한창이던 시절 뱃사람 상대하던 목로주점 아가씨다. 젊음도 가고 건강도 가고, 기둥서방마져 외면한 도시 창녀가 마지막으로 흘러오는 곳이 섬이라 한다. 내품는 담배연기가 서글퍼 날라가는 갈매기도 외로워 보인다. 오감도(烏瞰圖)의 시인 이상(李箱)이 사랑한 금홍이도 저랬을 것이다. 그들 분위기는 어떨까. 술잔에 어리는 인생의 쓴맛을 만나보고 싶었다.
숙소는 동항리 끄터머리 '자부랑깨'란 곳으로 정했다. 낮으막한 언덕 위 집이라서 앞에 짙은 숲으로 덮힌 동그란 섬이 보이고, 옆에 옥동초등학교가 있다. 등 너머 해안에는 테니스코트만한 넓직한 반석이 있다. 위가 평평하고 엄청나게 큰 그 반석은 아파트 오층 높이 쯤 된다. 파도에 흔들리는 느낌까지 나는 그 위에서 내려다보면 옥같이 맑은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생긴 하얀 물거품이 장관이고, 물속에서 쫒고 쫒기는 크고 작은 물고기 신기하다. 섬은 하늘도 푸르고, 물도 푸르고, 나무도 푸르다. 그 속에 바다는 변화무쌍하니, 아침 해는 황금빛으로 빛나고, 한낮 파도는 에메랄드빛 향연 벌린다. 황혼엔 검붉은 포도주빛으로 천지 수놓고, 밤엔 푸른 은파가 백사장에 밀려와서 은구슬 뿌린다. 나는 낮엔 바다 위 날라다니는 부질없이 아름다운 흰구름 구경했고, 밤엔 영롱한 뭇별 거느리고 서천으로 흘러가는 애잔한 초생달 구경했다. 나는 ‘자부랑깨’에 와서 신의 오묘한 창조의 솜씨를 엿보았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부드러운 산들바람 만났을 때, 싱싱한 팔손이나무를 만났을 때, 로빈새(Robin redbreast)가 가슴을 피로 물들였다는 호랑가시나무를 만났을 때, 이름모를 야생화를 보고, 아름다운 산새 울음소리를 듣고, 나는 보일 듯 말 듯한 그 분의 자취를 느꼈다. 나는 거기서 성경 속을 거니는 느낌, 낙원을 구경하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이 원양어선 선원인 집 안주인은 손이 푸짐해서 상에 두툼한 도다리구이와 손바닥만한 홍합이 올라왔다. 등 너머 해안에는 내가 트랜지스터를 틀어놓고 바위 그늘에 앉아있으면 해녀들이 흘낏흘낏 쳐다보곤 했다. 그들은 나이 많은 해녀 인솔하에 제주도에서 원정온 해녀들인데, 밤에 날 찾아왔다. 올때는 손에 팔뚝만한 해삼이나 전복 들고왔는데, 나를 찾아온 핑계는 <섬마을 선생님> 연속극 듣는다는 핑계였지만, 낮에 한 물질 때문에 오면 피곤하여 대개 연속극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풋잠 들다가 이슥한 밤에 서로 깨워서 돌아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