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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총 개요
제 1 절 6. 25전쟁 개관
6.25전쟁은 북한이 1950.6.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위하여 기습적으로 불법 남침한 전쟁이며, 유엔군측과 공산군 측이 1953.7.27일 휴전에 합의하기까지 3년 1개월 2일간 전개된 전쟁이다. 이 전쟁은 종전이 아닌 정전 또는 휴전상태로 멈춰져 있다.
6.25전쟁은 발발 후 1년여의 기간이 가장 심한 격동기였고, 나머지 기간은 전선의 변화가 거의 없는 교착기였다. 격동기 1년간 공산군이 세차례 38선으 넘나들었다. 그 첫번째는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두번째는 중공군이 평택-삼척선까지, 세번째는 중공군이 서울 북방 구파발-강릉선까지 각각 진출하였다. 그러나 공산군의 공격은 국군 과 유엔군이 격퇴한다. 그 첫째 북한군 남침시는 낙동강까지 밀려났다가 97일 만에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구축하고 청천강 이북까지 진출한다. 두 번째 중공군이 개입하여 북한군과 조중연합군에 다시 밀려 평택-삼척선으로 밀렸다가 90일 만에 이들을 격퇴하고 38선을 회복한다. 세 번째 조중연합군이 다시 공격을 해와 다시 서울 북방-강릉선까지 밀렸다가 39일 만에 다시 적을 38선 근처로 격퇴하여 전쟁 이전의 상태를 회복한다. 6.25전쟁 기간중 공산군이 38도선 이남에서 머문 기간은 226일이고,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에서 머문 기간은 76일이었다.
6.25전쟁 기간,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발생한다. 국군과 유엔군의 인원 손실은 77만 6천여 명이고, 공산군은 2백여 만 명에 달하였다. 전투원이 아닌 민간인 피해도 남한 100만여 명, 북한 150만여 명 등 250여만 명에 달하였다. 그 당시에 남북한 전체 인구가 2500만임을 고려하면 무려 10%가 되며, 여기에 피난민이 320만 명. 30만 명의 전쟁 미망인. 10만명의 전쟁 고아가 발생하였다.
6.25전쟁의 발생 원인과 결과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입장이나 이념적 시각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공산주의 침략에 대응항여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전쟁이다. 여기에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스탈린이 세계공산화 책략의 일환으로모택동의 지원을 받아 김일성이 일으킨 남침전쟁이자 국제전쟁이었다. 도한 6.25전쟁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북한의 무력남침을 저지한 국가수호 전쟁이었다.
제 2 절 북한의 남침 이후 상황 요약
1. 북한군의 기습남침과 서울 피탈
북한군이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아 1950.6.25일 일요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기습남침을 시작하였다. 북한군은 200대의 T-34전차를 앞세워 38선을 돌파하여 6월 26일 13시경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를 함락하고, 28일 -1시경 북한의 선두부대가 미아리 고개를 넘어 국군 은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적에게 내주었다.
이러한 북한전차 미아리고개 출현 보고를 받은 당시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명령에 국군 공병부대가 6월 28일 02시30분에 한강교를 폭파하여 한강 북쪽에 있던 150만의 서울 시민 피난길이 막혔고, 철수하지 못한 국군이 무기를 버리고 혈혈 단신으로 한강을 도하하는 바람에 전투력이 50%이하로 떨어진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이 춘천지역에서 북한군 제2군단을 3일간 저지함으로서 그들이 서울을 우회하여 수원을 점령하여 국군의 철수를 차단하여 포위 격멸하려던 전략적 기도를 좌절시켰다.
또한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을 지체하는사이 국군은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여 재편성,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간 적의 한강도하를 저지한다. 이 기간에 미군이 지원군을 파병하여 국군을 지원하게 된다.
2. 유엔군의 참전과 지연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지체없이 참전을 결정하여, 6월 26일 미국의요청으로 긴급 소집된 유엔안보리는 북한군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이들이 38도선 북쪽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한다. 이어 28일 유엔은 유엔의 요구사하을 거절한 북한군에게 군사적 제재를 결정하여 역사상 최초로 1950년 7월 7일 유엔군을 창설하고 초대 사령관에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임명한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4일 맥아더에게 서신을 보내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였다.
이러는 사이 미국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을 한반도에 파병하였다. 그 선두 제34연대가 '50.7월 2일 부산에 도착, 국군의 시흥사가 수원에서 평택으로 철수한 7월 4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 죽미령에서 처음 북한군과 전투를 시작으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세에 눌려 금강선이 무너진자. 이어서 미 제24사단이 대전전투에서 사단장 딘소장이 실종(차후 포로가 됨)되는 상황에서 7월 20일 물러나고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으로, 미 제25사단이 그 우측 상주지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북한군의 공세는 게속되어 '50.7월 말에는 결국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물러나게 된다.
3. 낙동강방어선전투
낙동강방어선은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으로 이어지는 방어선과 동해, 남해로 둘러사인 직사각형ㄹ 모양의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유엔군이 대구 북서쪽 왜관으로부터 낙동강을 따라 창녕-마산-진동리에 이르기까지 112KM 구간을 담당하고, 왜관으로부터 북동쪽으로 낙정리-구미동-청송-영덕을 연하는 138KM를 국군이 담당하였다. 유엔군이 담당하는 마산.왜관일대와 국군이 담당하는 다부동. 기게. 포항 일대의 지역에서 국가의 운명을 건 공방전이 게속되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 되면서, 9월이 되어 유엔군은 미군을 포함하여 자유우방국의 지원병력이 도착하면서 양측의 전투력이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북한군은 기용한 전투력을 낙동강방어선 돌파에 투입하였으나, 미군의 신형 3.5인치 로켓포와 공군의 위력으로 북한군 전차는 200대중 100대만 남았고, 유엔공군의 끊임없는 후방차단으로 대부분의 보급을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해상보급도 재해권을 완전히 유엔해군이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에 낙동강 벙어선이 곳곳에서 돌파되곤 한다.특히 유엔군이 담당한 대구 북방 왜관과 다부동지역이 심각하였다. 이에 메 제8군사령관은 한 때 방어선을 마산-밀양-울산으로 이어지는 데이비드선으로 철수를 검토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4. 인천상륙작전과 38도선 회복
북한군은 8월부터 9월 중순까지 국군과 유엔군을 낙동강 이남 지역으로 몰아 붙이며 최후 공세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전세는 점점 유엔군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러는 가운데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여 9월 15일을 기해 미제10군단이 중심이 된 상륙부대를 인천에 상륙시킨다. 인천상륙작전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절대 불가의 지역이라 했지만 맥아더는 이곳에 상륙작전을 개시하여 북한군 13개 사단의 후방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선 반격작전에 북한군은 붕괴되고 9월 28일 서을 탈환하게 된다.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은 9월 말에 38도선까지 진출한다
5. 38도선 돌파와 북진
1950년 10월 1일, 동해안 지역의 국군 제3사단이 38도선을 처음 돌파한 후 북진작전이 시작되었다. 이어 유엔의 북진결의에 따라 10월 9일, 서부지역의 유엔군도 38도선을 돌파한다.
유엔군의 돌파작전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 두만강변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10월 21일 평양 북쪽 순천에 도달한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2대대는 순천 북쪽 50KM 위치의 개천을 점령하라는 명령에 전 병력을 차량에 탑승시켜 당일 개천에 도달한다. 이어서 10월 26일에 제6사단 제7연대가 초산 북쪽의 압록강까지 진출했다. 비슷한 시기에 동부전선에서도 미 제7사단이 혜산진에,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일대에 그리고 국군 제1군단도 해안선을 따라 청진 일원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25일 이후 중공군의 기습적인 제1차, 제2차 공세가 전개 됨에 따라 전쟁의 양상은 다시 철수에 이어 38선 이남으로, 그리고 서울을 다시 피탈하게 된다.
6. 중공군 참전과 유엔군의 철수
압록강을 통하여 비밀리에 중공군이 1950. 10월 19일 처음으로 북한지역 깊숙하게 들어와 산악지역에 은밀히 기동하여 유엔군의 기동을 보면서 은거하게 된다. 도중에 정찰조에 포로가 된 일부 병력이 중공군임을 밝혔지만 유엔군의 맥아더 사령부는 이를 믿지 않았고, 들어왔다 해도 소수의 병력만 들어왔을 거라 판단하여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다.
반면 중공군은 아무리 맥아더 원수가 귀신같은 전략가라 할지라도 자민함에 빠져 중공군의 은밀기동을 믿지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중공군 1차 공세]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의 미제1군단과 국군 제2군단이 10월 25일 공세에 중공군은 처음으로 전선에 돌발 출현하여 특히 초산으로 진출하는 국군 제6사단 및 국군 제1사단. 국군 제8사단이 온정리와 희천 일대에서 일대 타격을 입고 바로 이어서 지원하러 들어온 미 제1기병사단마저 심대한 타격을 입고 청천강 선으로 철수하게 된다.
[중공군 2차 공세]
다시 유엔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11월 24일 크리스마스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중공군의 2차 공세가 바로 시작되어 청천강 교두보가 무너지고 평양으로 12월 4일 철수한다. 구장동에서 미 제25사단과 제2사단이, 덕천에서는 국군 제2군단 예하 국군 제7사단이 무너지고 영원-맹산에서는 국군 제2군단의 제8사단이 무너진다. 하지만 서부지역에서도 대재앙이 벌어진다. 군우리에서 미 제2사단과 터키여단이 엄청난 피해(미 제2사단이 사상자가 4,940명)를 입고 철수하게 된다.
한편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미 제1해병사단이 11월 27일 무평리(희천과 강계 중간지점)를 공격하기 위해 장진호의 하갈우리로 진출하고, 그 우측에는 미 제7사단 제32연대가 진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 제9병단의 포위 공격에 함흥으로 철수하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이란 신조어를 생산하며 고토리와 황초령을 돌파하여 철수에 성공한다. 반면 중공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 아닌 승리로 엄청난 피해를 입어 전투병력의 50% 이상이 전사상자 아니면 동상으로 이 이후에 3개월 이상을 전선에 나타나지 못하고 결정적으로 1.4후퇴시 중공군의 승리를 이끌어 내지 못하게 된다. 국군 제1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청진까지 진출하고 제3사단의 1개 연대가 헤산진으로 진출하여 미 제7사단 연대로부터 지역을 인수받게 되지만 서부전선의 중공군 출몰에 철수를 하게 되어 12월 8일부터 흥남철수작전으로 묵호와 부산 등으로 함선을이용하여 철수한다.
서부전선에서도 계속 철수하여, 38도선 이남으로 내려와 미 제1군단은 김포반도에 터키여단을, 개성-문산도로를 가로 지르는 임진강 하류에 미 제25사단을, 고랑포-적성구간에 국군 제1사단을 배치하고,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단은 전곡일대에, 미 제24사단을 김화-의정부 축선상의 영평일대에, 영 27여단을 군 예비로 덕정부근에 집결시킨다.
중부전선에는 국군 제3군단이 (제9사, 제11사) 12월 10일 후방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종료한 제9사와 제11사를 육군본부에 원복시키고 양평으로 이동하여 제2, 제5, 제8사단을 배속받아 군단 창설이후 최초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 무렵 국군 제2사단과 제5사단은 11월 27일부터 육군본부 통제하에 낙동강 전선에서 낙오되었다가 태백산맥을 통해 북으로 도주하여 철의 삼각지대 일대에 집결한 인민군 패잔병을 소탕하고 있었다. 국군 제2사단(제31연대 결)은 가평으로 이동해 제17연대를 철원부근에 제32연대를 의정부 부근에, 그리고 배속된 제5사단 제35연대를 구화리에 배치하여 연대별로 패잔병 소탕작전을 실히하였다. 그리고 제5사단(제35연대 결)도 춘천으로 이동하여 제27연대를 청평의 호명산 일대에, 제36연대를 가평 북쪽의 지암리에, 배속된 제2사단 제31연대를 홍천에 배치하여 병참선을 확보하면서 패잔병 소탕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제3군단이 양평에 도착한 '50.12월 13일을 전후하여 국군 제2사단과 제5사단이 패잔병 소탕을 일단락 짓고 원대 복귀하여 제2사단을 가평 북방에, 제5사단을 중앙의 춘천 북쪽에, 제8사단을 우측방 춘천 동쪽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한다.
국군과 유엔군은 30여 만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출현으로 미 제8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고, 서부전선 부대들은 12월 중순에는 38도선 북방까지, 12월 말에는 임진강-연천-춘천 북방-양양으 연하는 38선 부근까지 철수한다.
동부전선의 부대들은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하여 부득이 흥남으로 철수하여 , 12월 14일부터 12월 24일까지 부산으로 해상철수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평양을 점령한 중궁군 제13병단은 12월 하순 개성-철원 북방까지 진출한다. 중공군 제9병단은 장진호-함흥 축선에서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했으나 이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게 되어 재편성에 들어가고 대신 북한군 제3. 제5군단과 제2전선 부대인 제2군단이 동부전선에서 남하하여 38도선상에 방어배치를 한다.
7. 중공군 총공세와 유엔군의 반격
[중공군 3차 공세(신정공세)]
'50.12월 하순 38도선 북방에 전개를 완료한 공산군은 12월 31일을 기해 주공을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으로 지향하고, 화천-춘천--원주 축선에 조공을 지향시켜 38도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국군 과 유엔군은 38도선에서 물러나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 내아주게 된다. 그리고 사전에 계획하였던 평택게삼척을 연하는 37도선으로 철수한다.
한편 중공군은 1월 7일 수원-여주-강릉선까지 진출하고 그동안 입은 피해로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하고 방어로 전환한다. 이에 유엔군은 중공군의 역량이 한계점에 다다른 것을 간파하여 1951년 1월 25일을 기해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중공군 4차 공세(2월 공세)]
국군과 유엔군이 한강 남안-횡성선에 이르렀을 때에 다시 중공군의 4차공세가 '51.2.11~2.18일까지 전개되었다. 횡성과 지평리에서 격전을 하여 일부 유엔군이 물러났으마 바로 공세이전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유엔군이 3월 15일 서울을 다시 재탈환하였다. 그리고 3월 말엔 다시 38도선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유엔군은 38선 방어에 유리한 일명 캔사스선으로 불리는 임진강-영평천-화천저수지-양양을 연하는 요지를 점령하고 중부지역에서는 와이오밍선이라 불리는 철원-금화로 다시 진격을 계속하였다.
[중공군 5차 공세(춘계공세 4월. 5월)]
이러한 상황에서 중궁군이 5번 째 공세가 되는 춘계공세를 개시하였다. 이때 중공군은 개전이래 최대 규모인 3개 병단 11개군 35개 사단의 중공군과 북한군을 총동원, 4월(4.22~30)에는 서부전선, 5월(5월16~22)에는 동부전선(양구-인제)에서 각각 주공을 지향하여 총공세를 취한다. 그 결과 공산군의 일부 부대가 중동부 하진부리 일대까지 진출하지만 유엔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큰 손실을 입고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된다.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5월 말에 세번째로 38선을 회복하고, 6월 중순에는 문산-연천-철원-김화-화천-간성에 이르는 주요 지역을 점령한 다음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그리고 전쟁은 휴전협상 테이블에서 설전과 휴전협상에서 유리ㅐ한 위치를 점유하기 위하여 고착된 전선에서 소모적인 국지전 양상으로 전환되었다.
제 3 절 전쟁상황 및 양측의 전쟁지도
1. 전쟁상황
중공군이 춘계공세에서 치명적인 인명손실로 급격한 전력의 약화로 공격능력을 상실하였고, 미국 역시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유리한 상태에 있었으나, 전쟁 이전의 원상태에서 휴전을 모색한다는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수차례 걸친 유엔과 미국의 휴전 제의를 묵살하고 있던 공산군 측이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유엔대표를 통해 휴전을 제기하였다.그것이 계기가 되어 7월 10일부터 휴전히담이 개시되었으며, 6.25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휴전회담이 개시될 때, 쌍방은 협상이 최종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군사작전을 계속한다는 전제하에 회담을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회담이 순조로울 때는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하나,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전투는 휴전회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수단에 불과햇고그래서 제한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휴전회담이 개시되면서 소강상태를 유지하다 '1951년 8월에 접어들어 다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개성에서는 양측의 대표가 가장 중요한 군사분게선 설정과 비무장지대 설치에 관한 내용을 협의 중에 있었다. 당시 유엔군측은 현 접촉선을 분계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공산군은 기존의 38선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다. 회담이 지연술책은 공산군이 시간지연으로 전력을 재정비할 속셈이었다.
이와 같이 휴전회담이 지연되자, 유엔군은 현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한된 공격작전을 단행했다. 10월 말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유엔군은 당시의 대치선에서 평균 10KM를 전진하여, 서부전선에서는 판문점-역곡천까지, 중부전선에서는 금성남방까지, 동부전선은 고성 남쪽까지 각각 밀어 올렸다. 특히 펀치볼 전투에서는 쌍방간에 피해가 컸다.
쌍방간에 방어 상태가 장기화 됨에 따라 방어진지가 견고하게 구축되고 전투양상이 이전과는 다른 진지전 형태로 벼해 많은 피해가 가중되어 갔다. 이에 공산군은 10월 25일 휴전회담을 재개하야 유엔군측 안을 수락하고 군사분계선 설정에 합의를 이루었다. 1951년 11월 27일 당시의 접촉선(임진강 하구-판문점-상명리-금성-송정-가마우골-신대리-남강)을 연하는 선을 임시휴전선으로 책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곧 휴전이 되는 것처럼 진행되다 기타 안건의 처리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12월 말 백지화 되었다. 그럼에도 1952년 전반기까지는 회담의 추이를 지켜보며 전선을 소강상태가 유지된다. 그리고 1952년 후반기에 전선은 다시 가열되기 시작된다. 그러나 전선은 고착되었고 전장은 국지전 양상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쌍방은 심리적 주도권 쟁탈을 위한 소모적인 전투만을 반복하게 된다.
2. 중공군의 전쟁지도 및 군사작전
휴전화담 기간 중 공산군의 전쟁목표는 38도선을 군사분게선으로 하는 휴전이었고 전략목표는 "휴전회담에서의 유리한 조건 조성과 그들의 손실된 공세역량을 회복하여 군사력 우위의 확보"이었다. 이는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의 김일성, 그리고 중국의 모택동 간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목표와는 달리 그 이면에는 공산군 측이 밖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은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공산군 측에게 휴전은 다니 밖으로 드러낸 명분상의 전쟁목표일 뿐이고, 그들이 휴전회담 기간을 이용하여 실질적으로 수행하고자 했던 군사전략은 적극적 방어를 통한 지구전과 춘계공세에서 입은 전력손실을 만회하기 의한 공세역량 만회, 전선지역의 요새화, 그리고 그들의열세한 공군력과 화력을 집중적으로 증강하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휴전회담으로인한 전선의 소깅상태를 이용하여 그들의 방어선을 3중으로 편성하고 유엔군의 항공폭격이나 지상포격에도 견딜 수 있는 유개호 또는 엄체호를 구축하였다.
또한 중공군은 야포와 고사포 등의 화기와 장비를 전방으로 추진하는데 그들의 역량을 집중하였다. 아울러 그들은 소려느로부터 항공기가 2개월 내로 지원될 것을고려하여 9월 공세를 목표로 전력의 정비와 강화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중공군은 휴전화담이 시작된지 불과 10일 밖에 안된 7월 20일부터 이미 유엔군 전초선으로부터 1~5KM 떨어진 지역의 주요 지형지물에 전초저항선을 설치하고 이곳에서 유엔군의 작전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유엔군은 이러한 공산구늬 전술적 변화가 종전의 관행이나 교리와는 다른 것으로 대응하면서 유엔군의 중요작전지역에 대한 저찰 및 탐색활동을 강화하였다. 중공군은 장마로 인한 불량한 기상조건을 이용ㅎ해 부대를 전방으로 추진 배치하였다. 이러한 중공군의 활동에 대해 유엔군은 중공군이 부대배치의 조정없이 곧바로 공격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것으로 판단하였다.
3. 국군과 유엔군의 전쟁지도 및 군사작전
휴전회담 기잔 중 유엔 및 미국의 전쟁목표는 "명예로운 휴전"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전쟁목표를 추진하는데 있어 유엔기구를 통한 현안을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토대위에서 미국이 수립한휴전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 휴전협정으로 적대행위를 종결한다.
둘째 : 38도선 남쪽에서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수립한다.
셋째 : 한국에서 외국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한다.
넷째 : 북한의 새로운 침략을 저지하거나 격퇴할 수 있도록 한국군의 건설을 허용한다
한편 미국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가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이어지거나 , 동맹국의 지원을 얻지 못한 채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으로 확대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가지 미국은침략자에 대한 징벌을 계속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미국은 휴전회담에서 토의 주제는 한국과 한국 내의 군사문제로 엄격히 제한되어야 하며 어떤 정치적 영토적 문제(중국의 유엔가입, 대만 문제 등)와 관련되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따라 휴전회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캔사스-와이오밍선 이북으로 북진을 제한하였다. 아울러 휴전 이후를 고려하여 북한군의 침략에 맞설 한국군의 건설을 지시하였다. 특히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쟁은 계속될 것이란 점을 상기시켰다.
이상에서 휴전회담 기간 중에 유엔군의 작전목표는 휴전회담의 타결을 지원하고 유엔군의 방어서늘 개선하며 공산군의 공세역량을 저지하는데 중점을 두게 되었다.아울러 유엔군의 군사작전도 이러한 제한전쟁전략에 따라 제한된 목표에 대한 작전만을 실시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전선에서 유엔군의 지상적전 임무를 총괄하고 있는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도 이러한 제한된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다라서 그 범위를 벗어날 경우에는 뱉플리트 장군도 유엔군사령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였다, 이에 다라 밴플리트 장군은 캔사스-와이오밍선을 넘지 않는 범위내에서 제한된 작전목표에 대한 공격작전만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미 제8군의 주요 작전은 중동부 전선의 남쪽으로 쳐진 전선의 만곡부를 없에 전선을 정리하고, 서부전서늬 병참선을 확보하는데 작전의 목표를 지향하여 실시하였다.
제 2 장 유엔군과 공산군의 전쟁지도
제 1 절 국내외 정세와 전황
1. 국제정세의 추이
가. 국제 동향
6.25전쟁은 1951년 7월 10일 개막ㄷ된 휴전회담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휴전회담은 그 자체가 "피를 흘리지 않고 사우는 또 다른 전쟁", 설전이었다.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전선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휴전회담과 전선에서의 전투는 "서로 물고 물리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즉, 휴전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였고, 회담이 매끄럽지 못하면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이르 반영하듯이 '51년 12우러 말까지 양측은 휴전햡상에 대한 타결을 보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휴전회담의 장기화는 한국전쟁의 조기 타결을 바라는 자유진영에서는 이를 우려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엇다. 그들은 전쟁의 장기화가 자칫 전쟁의 확대로 이어짖 않을 까 우려하였다.
한국에 군댈 파견한 미국의 동맹국들은 휴전의 장기화 및 확대를 우려하여 중국에 대한 제재나 한국에 병력을 추가로 파견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영국은 중국에 대한 제재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격고 있는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만회하려고 하였다. 영국은 "중국에 대한 더 이상의 군사적 경제적 압력은 영국의 경제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치령인 홍콩을 자칫 위협에 빠트릴 수 있다"고 판ㄷ나하였다. 인도 등 중립노선을 취하고 있던 중둥국가들도 휴전회담의 조기 타결에 합세하였다.
휴전회담이 진행ㄷ되는 동안 미국 등 자유진영의 서방국가들은 체제 결속을 강황해 나갔다. 캐나다의 오타와에서는 '511.9월 17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12개 회원국이 모여 상호안보협력을 다짐하면서 이탈리아의 재무장과 그리스 및 터키의 나투가입을 논의하였다. 또한 미국은 태평양지역에서 공산침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집단안전보장체제를 위해 노력하였디. 그 첫 시도가 '51년 9월에 있은 일본과의 평화조약 체결이었다. 이는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후 재기를 노리고 있던 일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대일 평화조약은 '51.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강화ㅣ회의에서 참가국 51개국 중 48개국이 조인함으로서 성립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지난 6년간의 연합국의 점령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독립국가로 재탄생하였다. 미국도 이를 통해 태평양지역에서 반공동맹 체제를 구축하에 되었다.
그러나 미극의 대일강호조약 및 안보조약 체결에 태평양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우방국가인 필리핀.호주.뉴질랜드가 크게 반발하였다. 이들 국가는 미국이 자국에 대한 아무런 보장책 없이 일본과 강화조약을 추진하자, 이에 대한 우려와 불만을 나타냈다. 미국은 이들 우방에 대한 안보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과의 강화조약에 얖서 태평양ㅇ녀안국가와 개별 도는 다자간 안보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1951년 8월 30일에는미.필리핀상호안보조약을 체결하고, 9월 1일에는 호주-뉴질랜드.미국 간 상호방호조DIR인 앤저스(ANZUS) 조약이 체결되었다
휴전회담 기간 중 유엔참전국은 전투부대를 파병한 16개국과 의료지원국 5개국을 포함하여 21개국에 이르렀다. 소련이 휴전을제의하기 전인 1951년 6월까지 한국에 전투부대를 파견한 나라는 15개국이었고,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한 나라는 3개국이었다. 콜롬비아는 '51.6월 15일에 가장 늦게 한국에 전투부대를 파견하였다. 태국은 '50년 11월에 이미 육군과 해군을 파견한데 이어 '51년 6월 23일 공군부대를 파견하였다, 도한 노르우ㅐ이는 '51.6월 22일에, 이탈리아는 '51. 11월 16일에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유엔회원국 중 전투부대를 파병한 나라는 모두 16개에 이르럿고, 의료지원부대를 파병한 국가는 모두 5개국에 달했다.
특히 휴전회담 기간 중 미 합참은 한반도에서 앞으로 있을지 모를 재앙에 가까운 군사적 비상사태에 대비한 "우발게획"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핵무기 투발훈련"으로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미 합참은 이를 통해 "공산군 측에게 군사적 압력수단으로 사용함으로서 휴전회담이 신속한 진행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 미 전략공군사령부가 한국의 주부전선에서 "허드슨 하버"라는 암호며으로 1951년 10월 15일가지 핵무기 모의 투발훈련을 실시하였다. 이 훈련은 미 제8군의 지상 작전을 지원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에 반해 소련을 비롯한 공산진영에서는 휴전회담 기간을 통해 그동안 소진된 군사력을 재건하고 유엔군의 철군을 유도하도록 하여 한반도의 적화전략 목표를 계속 추구한다는데 목표를 두고 휴전협사을 지도하는 이중성을 나타냈다.
2. 양측의 휴전회담 수용 배경
가. 유엔군 측의 휴전회담 수용 배경
중공군 개입 이후 전쟁정책을 놓고 한국정부는 "한반도통일"을 위한 군사적전을 게속 추구해 나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미국정부의 입장은 한국정부와 확연히 달랐다. 미국은 중공군의 개입이후 유엔군의 37도선으로의 철수와 서울 재탈환, 그리고 미리고 춘계공세 이후 38도선 부근에서의 교착상태를 지켜보면서 휴전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국정부는 전면전쟁을 통한 군사적 승이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불가피하게 할 것이며, 한반도로부터 유엔군의 철수는 미극에 대한 자유 우방국의 신뢰를 떨어 뜨릴 것으로 판단하였다. 미국은 한국전에 참전한 이후 1951년 6월가지 78,800명의 인원 손실을 보앗고, 전쟁 비용도 100억 달러를 상회하엿다. 이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첫 1년 동아늬 그것보다 두 배가 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전쟁에서의 승리의 전망은 보이지 않았고, 미국의 여론도 부정적 이었다.
그렇다고 전쟁을 계속하게 되면 이는 곧 제1차 세게대전에서처럼 소모전 양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내다 보았다. 더욱이 전재을 끝내기 위해 최후의 방법으로 중국 본토에 대한 폭격을 하게 되면 "자칫, 중국의 동맹국인 소련의 참전 불러와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미국은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최적의 대안으로 휴전을 고려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으로서는 주적이 아닌 중국과, 그것도 한반동에서 사워야 한다는데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소련이 조종하고 있는 게임에 미국기 말려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은 한국에서의 전쟁을 군사적으로 방아가 가능한 지역을 확보한 후 군사적 승리가 아닌 정치적 타협에 의해 종결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명예로운 휴전정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미국은 한국에서의 적대행ㅇ위가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돌입하거나, 그 적대행위가 주요 동맹국의 지원을 얻지 못한 채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으로 확대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며 한국에서의 전쟁이 제한전임을 재확인하였다. 특히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자유 민주국가와의 우호 증진에 노력하지만, 이 지역에서 소련의 힘을 감소 및 제거함과 동시에 중국에 대한 정치.외교.경제적 제재 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미국이 중요시하는 국가위신과 대의명분, 그리고 외교적 실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의 이러한 휴전정책에 대해 한국을 제외한 유엔 및 자유진영의 국가들이 환영하였다.
나. 공산군 측 휴전회담 수용 배경
한반도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공산군에게 '51년도 춘계공세는 전쟁수행 면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중공군은 '50년 10월 25일 한국전에 개입한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대공세를 실시하였지만 그들의 의도대로 유엔군을 쉽게 격퍼할 수 없음을 알게 ㄷ되었다. 특히 '51년도 5월 공세는 그들의 군사적 한계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대규모 군대를 파병한 중국ㄱ은 여섯 차례의 공세를 통해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중국은 한국전 개입ㅁ 이후 약 46만 명의 손실을 입었고, 북한군도 개전 이후 56만 며의 손실을 입었다. 이로써 공산군의 손실은 무려 102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산군 입장에서 이런 커다란 손실에 비해 얻은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더욱이 '51.5월 공세를 포함한 여섯 차례의 대규모 공세를 통해 소진된 전투력은 향후 그들이 작전을 수행하는데 매우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판단하였다.공산군은 이전의 대규모 공세와 같은 공격작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전투력도 단기간 내에 회복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휴전회담 개시 싯점에서 전쟁이전 상태인 38도선 부근에서 유엔군과 대치하여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장에서 화력의 열세는 중공군의 작전뿐만 아니라 전력손실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1951년 6월 유엔군은 화포 3,569여문, 탱크1,300대, 항고이 1,670여대, 항공모함을 포함한 함정 270척 등을 보유한데 비해 공산군은 소량의전차와 항공기 및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고, 성능 도한 유엔군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열세하였다. 여기에 재래식 통신과 수송수단, 그리고 미국 공군의 후방차단작전에 의한 기간시설의 파괴로 인한 군 수송 및 보급ㅊ체계의 마비는 작전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중국정부는 그들이 발행하는 6.25전쟁 공간사에서 잉에 대한 비교적 객관적인 분석을 제시하였으며, 그 주된 내용은 유엔군이 쾌속 기동능력과 선진 수송도구를 갖추고 있어 복브도 빨랐고, 배치 조정 및 공격방어 전환도 빨랐다며, 승이를 위해서는 현대화 전쟁에 상응하는 군사지식과 고도의 조직력 및 현대화 장비를 갖춘 후방근무지원부대가 필요하다고 평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바안은 많지 않았다. 첫째는 혅재와 같이 불리한 작전을 계속하는 것인데 이는 향후 물자 보급이 더욱 어려워지리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둘째는 현 상태에서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셋째는 전면공격을 감행하는 것인데 제3차 세계대전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 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종식시키는 길 뿐이었다.
그렇다고 중국이 불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끝낼 수는 없었다. 중국에게도 명분과 어느정도의 실리가 필요하였다.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 38도선에서의 휴전이었다. 즉 1950년 6월 25일 이전의 상황으로회복될 수만 있다면 휴전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라 판단하였다.
모택동은 1951년 6월 중순 전쟁의 장기화 및 협상가능성을 동싱에 고려하면서 군ㅅ하적으로 지구전을 충분히 준비하고 정치적으로 협상을 준비한다는 화전양면정책을 결정하고, 팽덕회에게 장기전 사상교육. 38도선 부근에서 적극적인 방어실시/ 38도선을 군사분게선으로 하는 휴전혀상 개시준비. 등을 지시하였다. 또한 모택동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있는 김일성과 가오강으로 하여금 스탈린에게 먼저 휴전문제를 제의할 것을 권고 하면서. 스탈린에게 "소련정부가 먼저 휴전 요구를 하고 적측이 휴전묹제를 제기하면 조선과 중국이 이에 동의하는 방안을 건의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51. 6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조.중.소 회담에서 스탈린.김일성. 가오강은 "38도선을 경계로 휴전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휴전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0일 후인 '51.6월 23일 유엔주재 소련대표인 말리크가 자유인졍에 휴전을 정식으로 제의하였고 자유진영에서 이를 수락함으로써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마침내 휴전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소련의 휴전제의에 대해 중국은 6월 25일에, 북한은 27일에 각각 지지를 표명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ㅇ아들였다. 이로서 유엔군 측은 그 동안 추구해 오던 휴전에 의한 한국에서의 전쟁을 종결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제 2 절 쌍방의 정책과 전쟁지도
전쟁이 개시된 이후 춘계공세까지 쌍방은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밀리고 미는 격전을 통해 어느 일방의 결정적 승리의 쟁취가 불가능하고 거기에는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이 수반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으로서는 자유진영 국가들로부터 전재의 조기 종결 압력을 받게 되었음은 물론 무한정한 인적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중공과 이를 지원하는 소련이 존재하는 한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반면 중공과 공산진영도 5차에 걸쳐 최대 80개 사단을 투입했으나 막강한 화력과 기동력을 앞세운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병력보충과 물자지원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경험과 인식이 전쟁 1년 만에 전선이 전쟁전 현상으로 회귀하고, 군사적 수단 대신 정치적 수단으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1. 유엔군의 정책과 전략
국군과 유엔군은 '51 초,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인한 1.4후퇴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1월 말 평택-삼척선에서 재반격으로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였다. 3월 말 38도선으로 진출하여 전쟁전 상황을 회복하였고 4월 초에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유리한 지형, 이른바 캔사스선까지 점령하였다.
그후에 중부전선의 방어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철의 삼각지의 저변을 연결하는 와이오밍선으로 진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투르만 정부와 갈등을 이르킨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을 '51. 4. 11일자로 해임하고 리지웨이가 부임하고 제8군 사령관에는 벤플리트 장군이 부임되었다.
그 당시에 미 행정부는 대한 정책을 수정하여 적절한 휴전 장치하에 전쟁을 종결하고 전쟁전 상태로 복귀한다는 정책을 모색하였고, 휴전협상 제안에 마찰을 빚은 맥아더 원수를 해임한 것이다.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긴급 담화를 통하여 이러한 미 행정부의 휴전 정책에 반대하고 북진 통일만이 유일한 대안이라 강조하게 되지만 분위기는 휴전으로 가고 있었다.
적의 춘계공세를 격퇴한 유엔군은 5월 17일 결정된 한반도에서 통일. 독립민주국가의 수립문제는 군사적 수단과는 별도로 정치적 수단에 의 계속 추구한다는 것에 맞는 군사전략을 추구하게 된다.
2. 미국의 휴전협상 기본 정책
미국의 휴전정책에 대한 기조는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48/5(약칭 NSC 48/5)에 수록되어 있다. NSC 48/.5는 1951년 5월 17일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문서로 미국의 한국에서의 휴전정ㅊ책을 포함한 대한정책을 담고 있다. 미국은 NSC48/5에서 향후 대한정책을 어떻게 수행해 나갈 것인가를 밝혔다.
미국은 그들이 앞으로 수행할 정책목표를 두 가지로 구분하여 수립하였다. 하나는 당장 처리해야 할 현실적인 당면목표로서 한국에서의 적대행위를 종식하기 위해 휴전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는 미국과 유엔이 오랜 시간을 두고 장기적으로 해결핳 "최종목표로서 통일. 독립. 민주. 한국의 건설"이었다. 1947년 유엔총회에서 결정된 이후 미국과 유엔이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될 한국에 대한 최종목표이었다.
이때 미국은 장기목표보다는 당장 한반도의 전쟁을 종식시킬 당면 목표, 즉 휴전정책 실현에 무게를 두었다. 이를 위해 서 유엔기구를 통해 해결한다는 기본 방침에 기본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가) 먼저 휴전협정으로 적대행위를 종격한다
나) 38도선 남쪽에서 대한민국 통칙권을 수립한다.
다) 한국에서 외국군을 단계별로 철수하게 한다
라) 북한의 새로운 침략을 저지하거나 격퇴할 수 있도록 한국군의 건설을 허용한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가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이어지거나, 동맹국의 지원을 얻지 못한 채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으로 확댇되는 것을 피해야 된다고 하면서도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가지 미국은 침략자에 대한 징벌을 게속 할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미국은 휴전회담에서 토의는 한국과한국내의 군사 문제로 엄격히 제한 ㄷ되어야 하며 어던 정치적 영토적 문제와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나. 휴전협상 실패에 대비한 미국의 대책
1) 미 합동참모본부의 판단과 건의
미국의 전쟁지도부는 1951년 5월 NSC48/5문서를 통해 한국에서의 전쟁종식을 위한 휴전정책을 대통려의 재가를 받아 최종적으로 선택하였으나, 군사적 입장에서그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휴전회담은 실패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전면전이 재개될 수도 있다고 미국은 판단하였다. 미국은 이에 대한 대책마련이 필요하였으며 합참은 이에 대해 우발계획을 수립하여 7월 13일 마셜 국방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 한다.
(1) 최대한 빨리 전면전에 대비한 최상의 준비태세를 갖춘다
(2) 유엔군사령관에게 현 가용부대의 능력과 안전에 부합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확보하도록 지시한다
(3) 청천강-원산까지 북진하도록 한다
(4) 북한지역의 모든 시설에 대한 공격제한을 해제한다. 여기에는 나진과 압록강 댐, 한국 측 수풍발전시설을 포함한다
(5) 한국에서 시작된 공중교전은 한만국경선을 고려하지 않고 추격한다. 그러한 추격은 적기가 착륙한 후에도 계속되며 대응하는 적 대공화기를 무력화 한다
(6) 중국과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공유격대에 대한 지원과 적 병참선 차단 및 파괴를 적극 지원한다.
(7) 일본 자위대의 조직과 훈련, 그리고 장비를 촉진한다
(8) 한국군이 방위력을 갖출 수 있도록 발전 및 장비시킨다
또한 미 합참은 휴전회담이 실패할 경우 유엔결의에 의해 한국을 지원하고 있는 유엔 회원국에게 해상봉쇄를 지원하도록 하고, 더 많은 군대를 제공하도록 하며, 중공군이 그들의 군대를 스스로 철수하도록 정치적 경제적 압력을 가할 것을 국방장관에게 건의 하였다. 국방장관 마셜은 이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으며, 현 싯점ㅇ에서 어떠한 의견도 피력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2) 미국 국무부의 입장과 판단
미 국무부는 휴전회담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우발계획을 '51.8월 18일 수립하여 합참에 의견을 구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 국무부는 휴전 후 개최될 정치회담에 중국과 소련이 참가하는 문제와 회담이 결렬될 경우였다.
첫째 : 휴전결정에 대해 합참은 비 교전 국가인 중국과 소련의 휴전 후에 있을 정치회담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합참은 그 회담은 한국 문제에 국한하여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국방장관도 여기에 동의하였다.
둘째 : 합참은 휴전회담이 결렬될 경우 국무부가 다른 유엔참전국들과 협의를 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것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유엔군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고 지적항였다. 이는 미국의 군사적인 행동에 제한을 주게 될 것으로 보았다. 합참은 7월13일 국방장관에게 건의한 조치사항들을선호하였다.
마셜 국방장관은 국무부의 자문에 대한 합참의 의견을ㄹ 국무장관에게 통보하면서 7월 13일자 합참의 건의사항을 승인하였다. 하지만 공중전에서 즉각 추격에 대해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그 문제를 검토할 때가지 유보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미 국방부로부터 통보받은 미 국무부는 휴전회담 결렬에 대한 합참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하지만 미 국무부는 해상봉쇄는 그 실행이 어려울 것을로 판단하고, 그 대신 경제봉쇄 도는 금수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미 국무부는 합참이 국방장관에게 건의사항에 포함되지 않았던 휴전회담 실패 시 자유중국군의 중국 본토 및 한국전선의 투입을 재검토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합참은 자유중국군의 한국전 참전에 대해서는 반대하면서도 중국 본토에서 운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3) 미국 전쟁지도부의 휴전실패에 따른 대책 강구
휴전회담이 결렬될 경우에 대비하여 미전쟁준비부는 미 합참의 건의사항을 검토한 후 10월2일 다시 합참에 연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미 합참은 한국 상황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7월 13일 국방장관에게 건의한 내용을 다시 검토하게 되었다.
한편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9월 23일 휴전회담이 결렬될 경우에 대비하여 유엔군사령부 차원의 우발계획을 별도로 수립하였다. 그는 휴전회담이 결렬되면 원산에 상륙작전을 실시한다는 게획이었다. 이때 그가 우려한 것은 원산상륙작전으로 소련이 전면 개입을 하고 핵공격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휴전회담이 조기에 타결되지 않고 계속 될 경우 전 전선에 걸쳐 전면공세를 펼치면서 원산 또는 다른 지역에 상륙작전을 고려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할 뿐만아니라 공산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개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때 유엔군도1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는 유엔군사령부의 우발계획을 검토해 줄 것을 워싱턴에 요청하였다. 미 합참은 10월 12일 유엔군사령부의 우발계획을 검토했으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이 부재 중이고, 유엔군사령부의 건의한 내용이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검토하고 있는 내용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미 합참은 '51.7.13일 건의사항을 재검토하고 이에 대한 수정안을 국방장괸의 스인을 받은 ㅎ후 11월 3일에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제출하였다. 이 수정안에서 합참은 "적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증가할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 이는 유엔군사령부의 능력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유엔사에 회담 실패에 따라 실시하게 될 국나작전의 시기.성격.규모에 대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에 덧붙여 미 합참은 청천강-원산에 대한 북진 한계선을 철회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미 합참은 수정안에서 여러가지 고려사항을 건의하였다.
첫째 : 미국은 한국에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소모해 가며 미국의 육.해.공군 부대를 무한정 묶어두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둘째 : 휴전회담이 실패하면 군사적 승리를 위한 여론의 압력이 커질 수도 있다.
셋째 : 만주나 중국을로 전쟁을 확대한느 것이 미국의이익이 부합되는지에 대해 고려해야 할 것이다.
넷째 :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한국상황을 재검토하고 휴전회담이 실패할 경우 미국의 목표를 확정할 필요가 있다.
미 합참의 휴전회담 실패에대한 수정안을 보고받은 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이를다시 검토하였다. 미 국가안보회의는 휴전회담이 실패할 경우 "한국의 통일을 가져올 완전한 군사적 승리는 미국으로 하여금 지상군과 공군의 실질적인 증원, 그리고 중국에 대한 해상봉쇄가 필요학게 될 것이다. 아울러 핵무기 사용도 필요하게 될 것이다"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휴전회담이 실패할ㄹ 경우에 대하여 여러가지 사항들에 대해서도 토의하였다.
첫째 : 미국은 필요한 자원이 부족하며 적어도 1952년까지늕 그러한 상태가 계속될 것이다.한국에 대한 증원을 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것이다. 그것은 유럽에 계획된 부대증강을 지연시킬 것이며, 육군의 일반예비를 고갈시키고 미국 군사력의 전개에 기형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둘째: 다른 유엔참전국들도 전재이 확대되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에서 전쟁은 유엔에 의해 협조된 노력보다 미국의 일방적인 노력으로 변질될 것이다.
셋째 : 한국에서 군사력의 확대는 그것이 승리를 가져올지라도 극동지역에서 긴장을 크게 고조시킬 것이다. 한국에서 미국의 전쟁목표 학대와 보다 큰 군사력의 운용은 소련과 중국에게 그들의 안전보장에 대한 위협으로 비쳐질 것이며, 이로 인해 북한지역에서 미국과 소련의 직접적읹 대결을유발하게 할 것이다.
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이것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휴전을 계속 추구하면서 제한 전쟁을 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미국이 중국에서 공산주의 힘을 타격할 마지막 기회를 상실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미국은 중공의 공군기지를 공격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때는 제한전쟁이 불가능학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미국의 국가 이익을 고려할 때 제한전쟁이 최선의 방책이 될 것일라 결론지었다.
또한 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휴전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공산군 측의 새로은 침략위협이 계속될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억제책은 미국과 동맹국이 공산군의공격으 받으면 한국에서 뿐만아니라 중국에 대해서도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점을 명확하게 경고하는 것이었다.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미구과 우방이 이러한 확고한 공개적인 표명을 최선 방책으로 보았던 것이다
4) 미국전쟁지도부의 전략지시와 군사전략
가) 미 합참의 유엔군사령관에 대한 전략지시
미국 전쟁지돕는 한국전선에서 유엔군 및 한국에 대해 작전지휘를 하고 있는 유엔군사령관에게 전략지시를 하달하엿다. 1951년 5월 17일 트루먼 미국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에 제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핵심은 한국전쟁에 대한 해결조건으로 휴전을 가져오며, 38도선 이남에서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모든 외국군이 철수하게 하며, 한국군에대한 군사력 증강을 허용하는 것이엇다. 이렇듯 미국 전쟁지도부는 휴전으로 전쟁을종결하는데 있어서 38도선 이남을 확보하고, 한국에서 외국군을 철수하며, 북한의 침략에 맞설 한국군을건설한다는 것이었다.
미 합참은 유엔군사령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미 합참은 5월 31일 유엔군사령관에게 구사작전에 있어서 캔사스-와이오밍 선을 초월하는 작전에 대해 사전 승인을 받을 것을 지시하였다. 이는 유엔군사령관에게 화천 저주지를 연하는 이북지역을 공격할 때는 그 이전에 승인을 받으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공산군이 그 지역에서 전력을 증강하자 미 합참은 이 제한사항을재고한 후 수정한 내용을 유엔군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이 하달하였다.
[유엔군사령관은 지상작전과 관련하여 귀하의 임무를 지원하고, 유엔군사령부의 안전을 보장하며, 적을 게속적으로 교란하는데 필요하거나 바람직스러운 전술작전을 실시하도록 승인한다. 여기에는 적의 ㅎ방지역에 대한 게릴라 작전, 제한된 상륙 및 공수작전을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된다.]
이것은 7월 10일 미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을 거쳐 대통령에게 최종승인을 받았다.합참은 이 지시를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하달하였다.
또한 미 합참은 7월 2일 유엔군사령관에게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가지 적대행위는 중지되지 않으며 , 어떠한 상황과 장소에서도 38도선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처럼 휴전회담을 전후하여 유엔군사령관이 워싱턴으로부터 받은 전략지시는 휴전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대한민국이 통치하게 될 38도선 이남 지역을 반드시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휴전회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캔사스-와이오밍선 이북으로 북진을 제한하였다. 아울러 휴전 이후를 고려하여 북한군의침략에 맞설 한국군의 건설을지시하였다. 특히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나) 유엔군의 제한목표 공격과 후방차단작전
휴전회담 기간 중 워싱턴의 전쟁지도부의 전략지시를 수행할 유엔군사령관 겸 미 극동군 사령관은 리지웨이 육군 대장이었다. 그는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원수의 전격적인 해임에 따라 미 제8군사령관에서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가 부여받은 임무는 휴전협상을 지도하고, 휴전협사에 지자ㅏ을 주지 않을 정도의 제한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가 워싱턴으로부터 부여받은 작전지역은 캔사-와이오밍선을 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범위를 벗어날 때는 미 합참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다라 유엔군의 지상군 사령관인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도 이러한 제한된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범위를 벗어날 경우는 밴플리트도 유엔군사령괸의 승인을받아여만 했다. 그럼에도 밴플리트는 보다 야심찬 공격계획을 수립하여 유엔사령관에게 보고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9월 1일 실시할 예정으로 계획된 "제압작전게획"이었다. 이 계획은 전선에 투입된 중공구을 격멸하고 평양-원산선까지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리지웨이 장군이휴전회담이 시작된 시점에서 대구모 작전의 추진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이 작전은 원산에 상륙작전을 실시함과 동시에 캔사스-와이오밍 선에서 일제히 진격힌다는 공격작전계획이었으나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당시 정일권 총참모장은 아쉬움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워싱턴 당국은 북진 당시 소련과 중공을 자극한다며 맥아더의 전략을 억제하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휴전협상을 위해 밴플리트의 작전을 제한하고 있다. 맥아더 전략이 억제당함으로서 북진통일이 좌절되었듯이 밴플리트 작전이 제한됨으로서 이번에는 평양-원산 징격이 좌절되었다"
이처럼 유엔군의 지상에서의 대규모 공격작전은 휴전회담 때문에 제한을 받게 ㄷ디었다. 하지만 공중공갹은 달랐다. 이에 유엔군 사령부는 미 제8군의 지상에서의 제한목표 공격에 대한 공격작전과 달리 유엔공군을 이용하여 적 후방지역에 대한 차단작전을 실시하였다. 이는 휴전회담이 개시된 직후 공산군이 휴전회담의개최로 전선이 소강된 틈을 이용하여 보급품ㅂ과 장비를 전선지역으로 추진하여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하고 내린 조치였다.
이에 딸 유엔공군은 전선으로 연결된 부한 내의 모든 철도와 도로를 차단하여 휴전에ㅐ 응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이 후방차단 작전은 1951년 8월 18일에 개시하였다. 후방차단작전에는 미 제5공군이 미 극동해군과 미 미 극동공군 폭격사령부의 지원을ㄹ 받아 수행하였다. 하지만 이 작전은 유엔군이 어느정도 공산군의 보급수송을 차단 또ㅡㄴㄴ 지연시켰으나 공산군 측 휴전협정에 끌어들이는 데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다) 미 제8군사령관의 제한목표 공격작전 개념과 실시
(1) 미 제8군사령관의 제한목표 공격작전 개념과 원칙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공격형의 장군이었다. 그래서 유엔군사령관에게 평양-원산 선엥대한ㄴ 공격게획을 수립하여 승인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유엔군 사령괸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무위로 끝나게 된다. 이루 밴플리트는 멀리는 워싱턴의 전략지시로부터 가깝게는 유앤군사령관의 작전 지시에 따라 제한된 공격작전만을 수행하게 되었다.
휴전회담 전후하여 밴플리트 장군의 휘하에 있는 유엔군은 휴전회담 분위기와이와 관련된 군사작전의 제한으로 활력을 잃고 있었다. 이 무렵 공산군은 전선의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전력증강을 꾀하고 있는데 반해, 유엔군은 주로 정찰활동과 포로획득 등 소극적인 전투 활동을 함으로서 군의 전투효율이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유엔군 장병들이 휴전회담이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는 데에서 생긴 현상이었다. 밴프리트는 이러한 현상이 적의 공격시 패배로 이어지지 않을 까 우려하였다.
밴플리트는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공산군에게 혼란을 주면서 유엔군의 전선첨단을 날카롭게 다지는 한편, 유엔군 방어선의 취약 부분을 개선하는 제한목표를 선정하고 이에 대한 공격작전을 실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밴플리트 장군은 7월 29일 제한목표공격과 종심깊은 정찰활동을 통해 적의균형을 파괴하고, 적의 바어선을 돌파하여 그들의 배치를 탐색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그는 미 제1군단에 대해서는 "철의 삼각지대"에 대한 종심 깊은 전투정찰을 실시하게 하엿고, 미 제9군단에는 현재 실시하고 있는 작전으로계속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에 대해서는 대우산을 계속 공격하면서 국군 제1군단과 협조하여 1031고지에서 뻗어내린 고지군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2일 후인 7월 31일에 명려이 취소 되엇다. 이유는 장마 때문이었다. 30년 만의 심한 장마로 시계가 제한되고, 통신이 곤란하며, 도로가 침수되어 부대 기동이 어렵고, 이에 따라 포병사격 및 항공지원이 곤란하였기 때문이다. 이 작전은 미 제2사단 제38연대가 대우산을 탈취한 상황에서 중단되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장마가 그치자 8월 18일 공격작전을 재개하였다. 이때 밴플리트 장군의 작전 목적은 유엔군의 방어선 중 남쪽보급로 처진 만곡부를 밀어 올려 기복을 없애고, 아군 병참선과 캔사스선 방어에 위협을 주는 지형지물을 탈취하는데 있었다. 그는 공세작전을다음과 같이 단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한다.
첫째 : 군의 방어선 중에서 가장 취약한 중동부 지역의 미 제10군단 전선의 중앙, 즉 해안분지 북쪽 고지군을 점령하여 만곡부를 제거함과 동시에 이와 협조된 작전을 통해 국군 제1군단의 방어선을 남강까지 추진한다
둘째 : 미 제9군단 정면의 금성분지를 점령하여 철의 삼각지를 확고하게 통제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함은물론 철원-김화간의 철로를 확보한다
셋째 : 미 제1군단의 방어선을 10KM 정도 추진하여 연천-철원 철로를 확보함과 아울러 이를 철원-김화 철로와 연결시켜 서울-김화 도로는 물론 이 철로를 군 병참선을로 이용한다.
이렇듯 미 제8군은 제한목표 공격을 통해 유엔군의 방어선을 개선하고 와이오밍 선을 캔사스선과 같은 강도로 구축하도록 지시하였다. 밴플리트 장군은 7월 24일 미 제1군단사령부를 방문하여 외이오밍 선에 대한 운용개념을 캔사스선과 관련시켜 다음과 같잉 규정하였다.
"우리는 적이 캔사스선에 도달하기 전에 적의 공격을 분쇄하고 그들을 지연하여 응징하기 위힌 전초선으로서 와이오밍선을 점령하였다. 이는 우리들로 하여금 방어준비를 보다 잘하게 하여 적이 캔사스선의 아군진지에 도달하면 보다 적은 적은 손실로 적을 살상할 수 있도록 하려는 우리의 방침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와이오밍 선을 주저항선이나 주전투진지로 계획하지 않았다. 그런데 적의 전면공세가 있을 경우에는 이는 여전히 우리의 방침이다. 하지만 적이 제한공세를 취할 경우 본관은 와이오밍 성에서 적을 저지하거나 적어도 그곳에서 적에게 아주 가혹한 응징을 가하기를 원한다. 적이 와이오밍 선을 공격할 경우 지난 5월 공세 때의 전력으로 공격한다면 우리는 적을 그곳에서 저지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와이오밍 선에서 전면공격이 아닌 제한된 목표의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
또한 밴플리트 장군은 왜 38선이 군사분게선으로 적합하지 못한 잉ㅇㅇㅇ유와 와이오밍 선의 군사적 중ㅇ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 적이 화천지역의 도로망에 접근하게 되며 아군지지의 측방포위를 허용하게 된다.
둘째 : 전력의 근원이며 서울 시민의 식수원인 화천저수지의 통제권을 적에게 넘겨주게 된다
셋째 : 적이 서울에 너무 근접하여 수도에 대한 기습공격을 허용하게 된다.
미 제8군사령관의 이와 같은 방침에 따라 중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부대들은 와이오임 선에 주력을 배치하고 방어시설을 강화하였다. 또한 캔사스 선에도 예비전력을 배치함으로서 이중 방어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2) 미 제8군사령관의 제한목표 공격작전 계획과 실행
(가) 포복작전
포복작전은 해안분지를 탈취하기 위한압박작전의 일환으로 8월 18일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미 제10군단의 우익사단과 국군 제1군단의 좌익사단이 참가하였다. 작전 목적은 해안분지 동쪽인 동시에 서화계곡 동측의 884-924-1031고지로 이어지는 났시바늘 형상의 종격실 능선을 탈취하여 서화계곡의 기동로를 확보하고, 남강을 통제할 수 있는 지역까지 밀어 올려 동측방에서 해안분지를 압박하는 것이다.
밴플리트 장군은 이 포복작전과 연계하여 해안분지 서측에서도 미 제2사단으로 하여금 983고지(일명 피의능선)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미 제2사단에 배속된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가 983고지를 공격하였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국군 제7사단이 983고지 서측의 554-883고지를 공격하였다.
(나) 맹금발톱 및 아파치작전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는 8월 27일 세로운 공격작전계획을 유엔군사령관에게 보고하였다. 그는 미제8군 예하 군단장이 참석한 군사령부 작전회의에서 이 새로운 맹금발톱작전을 9월 5일 실시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이 작전의 목적은 유엔군의 동부전선의 방어선을 최대 24KM까지 밀어 올려 만곡부를 없애고, 이 지역에 투입된 적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상륙작전을 포함한 대규모 공격계획이었다.
첫째 : 상륙작전부대를 운용하여 원산을 점령한다
둘째 : 기갑부대로써 해안도로를 따라 원산 남쪽의 적 보급기지를 공격한다
셋째 : 공세작전으로 미 제10군단 정면의 만곡부를 제거한다.
유엔군사령관은 보고를 받으면서 원산지역 작전을 취소하면서 지상 작전민을 승인하였다. 이에 밴플리트 장군은 원래 게획을 축소.조정하여 아파치 작전으로 명칭을 바꾸고 8월 29일 이에 대한 명령을 다시 하달 하였다. 여기에는 미 제9군단과 미 제10군단, 그리고 한국군 제1군단이 참가하게 되었다. 이에 각 군단은 다가오는 작전에 대비하여 8월 29일부터 부대를 배치하게 된다.
그런데 이 무렵 피의 능선전투에서 아군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자 밴플리트 장군은 아피치 작전의 규모로 볼 때 인명손실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9월 5일 유엔군사령관에게 이 작전의 취소를 보고하였다. 그리고 유엔군사령관이 9월8일 이를 승인함으로써 아파치 작전을 완전히 취소되었다.
(다) 특공작전과 폴라선 진격작전
타격작전이 취소된 후 미 군단에 의한 제한된 공격작전이 새로이 계획되었다.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이들 작전을 승인함으로써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첫째 : 미 제1군단장 오다니엘 소장이 주도한 "특공작전"이다. 이 작전의 목적은 군단의 전선을 역곡천 남안까지 10KM 추진하여 방어선을 개선하고,연천-철원 간 철로와 병참선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작전은 1951년 10월 3일에 시작되어 10월 하순에 종료되었다.
둘째 : 미 제9군단장 호지 중장이 주도한 "폴라선"진격작전이다. 이 작전의 목적은 군단 정면의 방어선을 개선하고, 철원-김화 간 철로와 도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작전목표는 적의 주요 작전기지인 금성을 통제하는 것으로 10월 10일부터 하순까지 금성 남쪽 고지군인 폴라선을 점령하고 작전을 종료하였다.
(라) 터치다운작전과 해시계작전
미 제2사단은 10월 중에 터치다운 작전을 계획하였다. 이 작전은 미 제10군단이 하계작전의 연장선에서 실시한 추계작전 기간에 실시되었다. 미 제2사단은 10월 13일에 단장의 능선과 10월 15일에 1220고지(김일성고지)을 탈취하였다. 이때 국군 제8사단이 어은산 남쪽지역의 1090고지를 점령하였고, 국군 제5사단이 가칠봉 북방의 1211고지를 점령하였다.
또한 미 제8군은 추계작전의 일환으로 해시계작전을 계획하였다. 이 작전의 목적은 중부지역의 방어선을 철원 서북족 송현리에서 평강 북서1KM지점을 경유하여 금성 동님쪽 4KM 지점의 폴라선으로 추진하고, 나아가 동해안에서 북진하는 국군 제1군단과 통천에서 연결하여 지대내의 적을 섬멸하고 새 방어선을 설정하는 것이다. 미 제8군은 이 작전을 11월 1일에 실시할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작전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취소되었다. 이는 1951년 10월 25일 휴전회담이 재개되고, 비무장지대가 설치되면 현 접촉선에서 몇 KM씩 뒤로 물러나야 하는데 많은 피해를 수반할 이 작전을 강행할 필요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유엔군사령관은 11월 11일 이 작전을 취소하였다.
(라)유엔군의 편성과 전력증강 노력
휴전회담 기간 중 유엔군은 한국군 1개 군단 및 10개 사단, 미군 1개 야전군, 3개 군단, 7개 사단, 영국군 2개 여단,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네덜란드.뉴질랜드.캐나다.프랑스.필ㄹ핀. 터키. 타이.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에서 파견된 대대 및 연대규모의 부대들로 구성되었다.
한국에 파병된 지상군 병력은 한국군이 273,000명, 미군이 253,000명, 그리고 그밖의 유엔군이 28,000명으로 총 554,000명에 달하였다. 하지만 지상군 병력은 공산군에 비해 2대 1로 열세였다.
한편 밴플리트 장군은 휴전회담 기간을 이용하여 한국군 간부의 질적 향상과 부대훈련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결국 유엔군의 지상 전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밴플리트는 이를 위해 7월 16일 유국총참모장 이종찬 소장을 만나 국구의 교육훈련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군 장교들의 질적 향상을 위해 250명의 장교를 미국 보병학교 및 포병학교에 유학보내기로 이종찬 총참모장과 협의하였다.
또한 밴플리트는 한국군 훈련소 개선을 위해 제주도 훈련소를 방문하고, 신병 훈련 개선방안에 대해서도 노력하였다. 그는 신병 교육훈련을 위해 1주간의 야영훈련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특히 밴플리트 장군은 정방사단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그는 한국군 사단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집중강화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를 위해 7월 하순에 미 제9군단에 야전훈련소를 설치한데 이어 각 군단에 야전훈련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제9군단의 부군단장 그로스 준장을 야전훈련소 소장에 임명하여 한국군 부대훈련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전방의 사단은 군단예비로 전환시 야전훈련소에 전 장병이 입소하여 9주간에 걸쳐 집중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개인훈련에서부터 대대훈련까지 실시하였다.
3. 한국정부의 전쟁지도와 전시조치
가. 한국의 전쟁지도부와 전쟁수행 체계
휴전회담 기간 중 한국의 전쟁지도부는 국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전쟁 전반에 대한 지도와 책임을 지는 국방부를 포함한 전시내각이 있었다. 그리고 유엔군과의 연합 및 합동작전을 협조하고 추진해나가는 육.해.공군 총참모장으로 구성된 군사지휘부가 있었다.
휴전회담을 전후하여 전시내각 및 군 수뇌부에 변동이 있었다. 이는 1951년 초 에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사건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문책인사였다. 이승만 대통려은 4월 24일에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국방부.내무부.법무부. 등 사건과 관련 있는 장관들에게 사직하도록 권고 하였다. 이에 5월 27일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해임되고, 그 후임에 이기봉이 구방장과으로 취임하였다.
이 무렵 이시영 부통령이 그 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국민방위군에 대한 처리과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사표를 제출한다. 국회는 5월 8일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선출한다.
또한 이 사건을로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인 정일권 중장이 그 직에서 해임되었다. 정일권 장군은 6월 23일 해임되고, 그 후임에 이종찬 준장이 소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육군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육.해.공ㄹ군 총사령관 직책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국군 수뇌부, 특히 육군은 휴전회담에 즈음하여 그 지휘의 폭이 좁아졌다. 육군본부는 11951년 중공군 5월 공세 이전까지는 미 제8군사령부를 통해 국군 군단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행사하였으나, 이후 국군 제3군단의 작전 실패로 인해 한국의 육군본부는 작전지휘 계선 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는 현리전투의 살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군 제3군다늘 해체하고 배속된 국군 사단들을 국군 제1군단 및 미군 군단에 배속시켰다. 또한 전방의 국군 군단 및 사단을 통제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도 이대 폐지되었다. 이대부터 한국의 육군본부는 작전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인사. 군수. 훈련 임무만 수행하게 되었고, 미 제8군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직접행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유엔군사령부가 휴전을 적극 추진하고, 이에 반해 정부가 휴전에 반대하는 입자을 취하게 되자 구군 수뇌부는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나. 한국정부와 국회의 휴전반대
휴전회담은 한국에 커다란 충격이었다. 통일이 보장되지 않은 휴전은 한국정부, 국회, 그리고 국민들에게 커다란 실망과 함께 분노를 안겨주었다. 이에 온 국민이 휴전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엇다. 여기에는 대통령으로부터 나이어린 학생, 그리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국민들이 동참하였다.
6.25전쟁 발발 이후부터 이승만 대통령은 38도선 폐지와 압ㄺ강. 두만강으로의 진격을 외치며 통일 한국을 추구하였다. 다시는 국노가 분단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것이 당시 한국정부와 국민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1951년 5월 춘계공세 이후브터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간에는 전쟁 이전상태로 돌아가는 휴전회담을 위한 막후 접촉을 진행시키고 있엇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북진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며 휴전반대 운도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한국 국회도 여기에 적극 동참하였다. 국회는 1951년 6월 5일 휴전반대결의를 통해 중공군의 침략행위 중지와 철수를 요구하고, 한국의 완전한 자주통일을 주장하면서 어떠한 형태의 휴전에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휴전회담은 한국정부와 국민의 듯과는 관계없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가시화되어 가고 있었다. 1951년 6월 23일 유엔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는 휴전제의를 발표하였다. 이에 중국과 북한이 지지를 표명하였다. 이를 주시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한국의 입장을 밝히는 장문의 "휴전안 반대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성명서에서 휴전의 부당성을지적하면서 이것이 한국 국민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게 되는지를 밝혔다. 그리고 향후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통일없는 휴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켰다. 나아가 진정한 평화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언급하면서 공산주의 책략 속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공산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로 철퇴할 것을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만이, 비로소 유엔이 선언한 제 목적에 합치되는 평화 교섭과 시작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첫째 : 한국민은 민족통일을 원하고 있다. 남한 사람에 못지않게 38도선 이북에 사는 한국 남녀들은 하나의 정부, 즉 대하ㄴ민국 정부 밑에 통일되기를 원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 5년 동안 우리의국토를 분할하여 온 인위적인 경계선을 또다시 건설하려는 어떠한 제안도 결국 우리 전 한국민은 깊은 실망을가지고 보게 되는 것이다
둘째 : 해결을 지으려 하면 반드시 한국민에 대한 공산침략이 장차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실한 보자을 주어야 한다.
셋째 : 한국민은 그들이 민주적으로 또 합법적으로 선출한 대표를, 즉 한국정부를 통하여 화평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협의를 받고 정보를 받을 수 있게 되어야 한다.
한국정부는 휴전 5개 조건을 받아들이면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교섭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였다.
첫재 : 중공군은 한국으로부터 국경을 넘어 만주로 완전히 철수하되, 북한 비전투원의 생명과 재산에 손상을 가해서는 안 된다.
둘째 : 북한 괴뢰군은 무장을 해제하여야 한다.
셋째 : 유엔은 제3국이 북한 공산당에게 군사적이어가 재정적이거나 기타의 형식으로 원조치 못하도록 방지함에 동의하여야 한다.
넷재 : 대한민국 정식 대표가 한국 문제의 전부 혹은 일부를 토의하거나 고려하는 어떠한 국제적 회의 혹은 회합에도 참가하여야 한다.
다섯째 : 한국의 주권이나 영토를 침범하는 어떠한 안이나 행동도 적법적 효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치 않을 것이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7월 3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휴전회담을 반대하는 전문을 발송하며, "휴전불가"입자을 명백히 밝혔다. 하지만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간의 휴전회담은 한국정부의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계속되었다.미국과 유엔군은 이 시점에서 휴전반대에 대해 강경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정부를 달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가 7월 10일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고 그동안의 휴전회담 경위에 대해 보고한데 이어 7월 16일에는 휴전회담 내용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리지웨이 장군이 비무장지대 기초로서 군사분게선 설치에 대해 설명하자, "북한군의 해.공군이 고갈되었는데 압록강. 두만강까지 밀어 붙이는 것이 더 좋은 방안"이라고 면박하였다. 대통령은 "휴전은 공산군을 도울 것이며 이로써 제3차 세계대전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북진작전은 공산군을 패배시켜 소련과 중공 간의 간격을 벌리고 소련 위성제국을 동요시켜 세계대전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며 북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다. 국군 수뇌부의 휴전에 대한 입장과 고민
1950년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군 작전의 통일과 편의를 위해 국군을 유엔군사령관 지휘 하에들어가는 통수권 차원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유엔이 한국의 국가적 이익과는 반대로 휴전정책을 추진하게 됨으로써 문제는 달라졌다. 이 때 유엔군의 작전지휘를 받아야 하는 군 수뇌부는 난처한 처징에 놓이게 되었다. 미국은 한국이 대대적으로휴전에 반대하는 것을 알고 휴전회담 추진상황을 극비에 붙였기 때문에 국군으로서는 휴전회담에 대한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시에 유엔군 측 한국군 대표로 지명되어 휴전회담에 참석했던 백선엽 자운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제1군단으로 동부전선에서 춘게공세에서 패한 북한군을 추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7월 6일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이 전화로 부산으로 내려가 대통령을 만나보라는 전화가 왔었다.
유엔군 측이 백선엽 장군을 지명하여 육본에 차출을 요청한 것이다. 부산에 내려가 대통령을 만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지금 우리는 통일 없이는 살 수 없어. 그런데 유엔군 측에서 휴전회담을 한다고 당신을 대표로 보내달라데 우리 정부 입장은 결사반ㄷ대니까 알아서 잘해봐" 였다.
휴전회담은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워싱턴 지시를 받고 직접 진행시켰고, 미 제8군사령관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았으니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도 모르고 있었다.
라. 국군의 편성과 전력 증강 노력
휴전회담을 전후하여 국군은 적의 공세에 대비해서 전선배치에 중점을 두었고, 이와 병행항여 교육훈련 강화를 통해 군의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휴전회담 기간중 한국 육군은 1개 군단(제1군단) 및 10개 보병 사단이 있었다. 보병사단으로는 수도사단을 비롯해 제1.2.3.5.6.7.8.9.11사단이었다. 사단에는 105밀리 포병 1개 대대가 사단을 일반지원하고 있었다. 한국군 지상전력은 북한군에 비해 열세였다.
한국정부는 1951년 4월부터 육군을 20개 사다으로 화장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고 미국에 한국군 증강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중공군 5월 공세에서 국군 제3군단의 붕괴와 해체로 인해 한국군 저투력에 대해 의문을 갖게되었다. 특히 유엔군 사령괸 리지웨이는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한국군 확장에 부정적 태도를 취하면서 25만 명 선을 주장하였다. 이는 1950년 10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한국군은 총병력 25만 명에 10개 사단을 한국 육군으로 인가해야 한다"고 워싱턴에 건의환 데애서 비롯되었다. 이는 1950년 11월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었다.
따라서 한국군 정부가 요청한 20개 사단에 대한 증강계획은 1052년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한 클라크 장군에 의해 1953년에 가서야 실현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끈질긴 한국정부의 노력으로 미 극동사령부와 미 제8군사령부는 한국 육군의 전력증강의 일환으로 155밀리 포병대대 3개 대대 창설을 지원하였다. 이대 창설된 부대는 제99.98.97포병대대였다. 이들 부대는 1951년 9월 5일 부터 10월 6일 사이에 창설되었다. 또한 10월 5일에는 한국 육군에 2개의 전차중대를 최초로 창설학기도 하였다. 이때 창설된 전차중대는 제51.52전차중대였다.
한국 해군은 1950년 8월 16일 창설된 제1함대 체제를 휴전회담가지 계속 유지하고 있었고, 해병대도 제1연대 및 제5대대 체제를 유지하며 동부전선과 김포반도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국 공군은 1951년 8우러 1일기하여 비행단을 제1전투비행단으로 개편한데 이어 정찰비행전대를 제2정찰비행전대로 개칭하였다. 특히 공군은 12월말까지 1개 전투비행단을 창설하고 F-51 20대를 포함한 5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병력도 5,406명으로 증원시키는 등 노력을 하였다.
특히 1951년 8월에는 공군의 발전을 위해 미 군사고문단이 설치되었다. 이는 미국정부가 정식으로 스인한 것이 아니고 미 극동군 내에서 조직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공군은 이로 인해 전투능력의 향상을 기하게 되었다. 한국 공군이 지리산지구공비토벌작전을 비롯하여 서해지구, 원산지구, 사리원지구 작전 등에 독자적인 출격을 하게 된 것도 이에 기인하고 있었다.
특히 휴전회담 기간 중 한국정부와 유엔군사령관 및 미 제8군사령관의 지휘관심과 배려로 한국군 장교들에 대한 질적 향사을 기할 수 있게 되엇다. 한국군 장교를 미국 보병학교와 포병학교에 유학을 보내 군사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이에 150명의 한국군 보병장교와 100명의 포병장교가 미국의 군사락교에서 24주간 교육을 받게 되었다.
또한 한국군 장교 후보생 교육기간도 기존의 18주에서 24주로 늘려 장교양성ㄴ 과정에서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하였다.
4. 공산군의 기도와 전략
모택동의 중공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51. 2월 공세까지 4차에 걸친 대규모 공세를 시도, 서울을 점령하고 최대 37도선까지(평택-제천-삼척)진출했으나 유엔군의 반격에 다시 38도선으로 밀리면서 막대한인적 물적 손실을 가져왔다.
중공군은 다시 유엔군을 한반동에서 축출하기 위해 4월 공세와 5월 공세를 취했지만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과 기동력에 결국 8만 5천여 명의 막대한 손실만 입고 다시 38도 선상으로 후퇴해야 했다.
결국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유엔군의 화해전술에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그들의 군수지원 능력은 유엔군의 현대화된 화력과 기동성에 7~10일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따라서 중.조지원군사령부는 지구작전으로 전환하고 유엔군의 휴전제의를 수용하기로 결정되면서 이후의 전쟁은 휴전회담에서 상호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고지쟁탈전과 전선의 교착이 장기화 되었다.
가. 공산군 측의 전쟁지도와 전쟁수행체계
휴전회담 기간 중 공산군 측 전쟁지도부는 소련의 스탈린을 정점으로 중국의 모택동과 북한의 김일성이 그 축을 형성하였다, 이들 전쟁지도부의 전략 지침을 받아 1950년 12월초 창설된 조중연합사령부가 한반도에서의 작전전반을 통제하여 지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전반적인 지도는 전쟁기간 내내 소련의 스탈린이 모택동 및 김일성과 협의를 한 후 상황에 따른 전략지침을 내려주는 방식을 취했다.
1951년 7월 휴전회담 개막당시 북한주재 소련대사 겸 군사고문단장은 라주바예프 중장이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의 전쟁지도에 대한 실패책임을 지고 경질된 스티코프 대사의 후임이었다. 스티코프는 8.15광복 이후 북한정권에 설계자이자 실세였다. 이들 북한주재 소련 대사는 김일성을 상대로 스탈린의 지침을 전달하고 이를 스탈린에게 보고 하였다. 또한 중국줒재 소련대사 로시친과 소련군사고문당장 크라소프스키는 모택동을 상대로 스탈린으로부터 지시받은 전쟁관련 내용을 전달하고 이를 스탈린에게 보고하였다.
중국 전쟁지도부의 핵심에는 모택동과 주을래가 있었다. 모택동은 북한에 파견된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를 통해 작전지도를 포함환 전쟁 전반에 걸쳐 베이징에서 원격으로 조정하고 있었다.
북한의 젅쟁지도부 및 군사지휘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을 비롯한 부수상겸 외상인 박헌영, 부사령관 최용건, 총참모장 남일, 조중연합사 부사령관 김웅 등이 있엇다. 특히 김일성은 조중연합사령부의 지휘계선 상에서 배제됨에 다라ㅣ 실질적인 공산군 측의 작전지휘는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휴전회담을 전후한 공산군의 전쟁수행체계를 보면 소련의 스탈린이 전쟁의 주요사안에 대해 직접 관여하면서도 겉으로는 자문형식을취하는 것처럼 행동하였고, 중국의 모택동이 스탈린의 자문 및 지도를 받아가며 이를 실질적으로 관장하고 있었다. 이것은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1951년 6월 30일 전문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스탈린은 휴전을 어떻게 진행해야 될 것ㅇ딘가에 대한 전반적인 지침은 물론이고 휴전회담 장소를 개성으로 할 것을 유엔군 측에 통보하라는 등 세심ㅁ한 부분가지 관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잇다. 그는 모택동에게 "휴전회담을 지휘할 사람은 바로 모택동 자신이다. 우리(소련)는 개별 문제에 대해 조언할 뿐이다. 우리는 김일성과 접촉할 수 없다. 귀하가 직접 김일성과 접촉해야 한다"며 휴전협상의 책임을 모택동에게 떠 맡겼다. 이러한 기조는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김일성은 주로 모택동과 휴전회담 관련 상황을 협의하였고, 모택동은 이를 다시 원문 그대로 스탈린에게 보고하면, 스탈린은 이에 대한 조치를 전문을 통해 발송하였다.
나. 공산군 측의 전략지침과 군사전략
(1) 공산군 전쟁지도부의 전략지침
공산군은 휴전회담을 앞두고 치밀한 계획 하에 움직였다. 휴전회담 장소를 원산항에 정박한 덴마크 병원선에서 개최할 것을 요청한 유엔군 측의 주장에 38도선 상의 개성을 들고 나온 것도 궁산군 측의 전략적 포석에 따른 것이다. 공산군 측은 미군 측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미리 게산해 놓고 융렌군 측과 밀고 당기는 전략을 구상하며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를 추구해 나갔다.
스탈린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유엔군 측의 공중폭격과 국지적인 상륙작전에 대비할 것을 주문하였고, 모택동은 이를 받아들였다. 또한 그들은 유엔군에 비해 낙후된 중공군과 북한군 장비에 대한 개선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대책을 마련한 다음 스탈린과 모택동은 휴전회담에 임하는 전략지침을 다음과 같이 마련하였다.
첫째 : 휴전회담이 시작되기 전에 전선을 강화하여 유엔군의 공세를 차단한다. 이를 위해 공산군 측 전쟁지도부는 회담이 시작되면 병력 및 장비의 전선 이동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제1방위선에 대한 병력을 증강하고 필요한 탄약보급을 완료하도록 조치한다. 모택동은 휴전회담에서 유엔군이 그들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세를 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라고 팽덕회에게 지시하였다.
둘째 : 유엔군의 북한지역 후방에 대한 상륙작전에 대비 한다. 인천상륙작전 이후공산군 측 전쟁지도부는 유엔군이 또 다시 북한 동서해안지역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이에 대한 대비를 소흘히 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모택동은 유엔군이 중국 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산군 측 전쟁지도부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유엔군이 북한지역 동서해안에 대한 기습적인 상륙작전이었다. 이에 공산군은 유엔군의 상륙작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대비책을 강구한다. 중국은 3개 군을 원산에 배치하여 유엔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히도록 하였다. 또 다른 3개 군을 유엔군의 서해안 상륙에 대비하도록 조정. 배치하였다.
셋재 : 공산군 측 전쟁지도부는 유엔군에 비해 낙후된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굱 전력강화 및 지상군에 대한 장비공급이 시급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이를 위해 노록하였다. 여기에는 공군력 증강, 60개 사단에 해당하는 장비공급, 소련군사고문단의 파견 등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1951년에 이것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하고 공군력 증강에 대해 부분적인 조치만이 이루어졌다. 소련 공산당중앙위원회는 모택동의 공군력 증강 요청에 대해 10월 20일까지 평북 안주 일대에 3개의 비행장을 신설하도록 하고 그곳으로 공군기지를 이전하는 문제를 결정하였다.
(2) 공산군의 지구전 및 공세역량만회 전략
휴전회담을 전후한 공산군 측 군사전략은 적극적 방어를 통한 지구전과 춘계공세에서 입은 전력손실을 만회하기 위한 공세역량만회 전략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틀 속에서 공산군 측은 휴전회담에 임하고, 작전을 지도하여 나갔다. 모택동은 6월 중순에 "지구작전과 평화회담을 통하여 전쟁을 마무리 짓는다"는 향후 전쟁지도방침을 결정하면서 이를 수행할 군사전략으로 지구작전과 적극방어를 확정지었다.
모택동은 "조선에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뎐도한 바어진지를 구축하고 한편으로는 적극방어의 수단으로 적군(유엔군)의 유생역량을 대량 살상시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장비개선과 훈련의 강화로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증대시켜 점차 적군과 아군과의 전력대비를 바꾸어 최종적으로는 승리하거나 또는 적군으로 하여금 어려움을 알고 물라나게 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공산군은 이러한 전략에 따라 휴전회담으로 인한 전선의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그들의 방어선을 3중으로 편성하고, 유엔군의 항공폭격이나 포격에도 견딜 수 있는 유개화 또는 엄체화 진지를 구축하였다. 또한 곤산군은 야포와 고사포 등의 화기와 장비를 전방으로 추진하는데 그들의 역량을 집중하였다. 아울러 그들은 소련으로부터 항공기가 2개월 내로 지원될 것을 고려하여 9월 공세를 목표로 전력의 정비와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공산군은 휴전회담이 시작된 지 불과 10일 밖에 안 된 7월 20일 경에는 이미 유엔군 전초선으로부터 1~5KM 떨어진 지역의 중요 지형지물에 전초저항선을 설치하고 이곳에서 유엔군의 작전활동을 방해하였다.
공산군은 유엔군의 정찰활동에 대해 보다 강력히 대응하면서 정찰활동과 유엔군의 중요지역에 대한 탐색활동을 강화하였다. 이와 더불어 공산군은 장마로 인한 불순한 기상조건을 이용해 부대를 전방으로 추진 배치하였다. 이는 공산군이 부대배치의 조정없이 곧바로 공격할 수도 잇는 준비를 갖춘 것으로 유엔군은 판단하였다.
이처럼 공산군 측은 처음부터 휴전회담의 조기타결에 뜻을 두고 있지 않앗다. 그들의 숨은 의도는 휴전회담을 지연지키면서 춘계공세에서 입은 전력손실을 신속히 보충하고 나나가 공세역량을 축적하여 군사적 우위를 회보하는 것이엇다.
(3) 공산군 측의 편성과 전력중강 노력
공산군 츠그이 전력은 중공군 5개병단. 19개 군. 55개 사단, 북한군 8개 군단. 27개 사단으로 보병사단만 80여 개에 달했다. 이를 병력으로 삺펴보면 중공군이 77만 여명, 북한군이 34여만 명으로 총 112만 명이었다. 공산군은 이들 전력을 제1선(전방), 제2선(후방), 예비전력으로 구분하여 운용하였다.
중공군은 서부와 중부의 주요 전선을 담당한 반면 북한군은 동부전선의 산악지역을을 담당하였다. 휴전회담 기간중에 모택동은 지구전을 통해 공산군, 특히 중공군의 현대화(소련의 지원에 의한)를 도모하였다. 그중에서도 그는 공산군의 공군전ㄹ력 증강에 노력하였다. 공산군은 공군전력을 향상을 위해 소련에서 훈련받은 중구 공군과 북한 공군의 실전배치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는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할 때 스탈린의 방침이었다.
이에따라 1951년 6월 중순 개최된 조.중.소 모스크바 회담 후 스탈린은 한국전선의 중공군을 지원하는데 8개 전투비행사단을 포함해 16개 사단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하고, 모택동에게 8개 전투비행사단의 전선배치를 지지하였다.
이때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북한에 투입할 전투비행사단의 기종을 MIG-9에서 신형인 MIG-15로 교체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스탈린이 이를 수락하여 이들 전투기들이 '51.9월에 실전 배치될 에정이었다. 이에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평양 이남지역에 중공공군이 이용할 수 있는 비행장 3개를 건설해 주도록 요청하는 한편, 중국공군의 한반도 투입에 박차를 가하였다.
한편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60개 사단용 장비공급과 소련군사고문단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잘 진행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중공이 요청한 83명 규모의 군사고문단 대신 중공군사령부에만 5명의 군사고문관을 파견하엿고, 60개 사단의 지원 장비에 대해서도 '54년 말에나 가능하다고 답신했다.
제 3 장 유엔군의 반격과 전선의 교착
제 1 절 개 요
유엔군은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저지한 후 반격으로 전환하여 현재의 휴전선과 비슷한 지역에서 국지전에 돌입하게 된다. 기간 중에 서울 북방-마석-용문산-홍천-하진부리-대관령-강릉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한 후. 5월 23일 반격으로전환, 가평-화천 진격전 등을 전개하면서 공산군 측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 후 국군과 유엔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임진강하구-연천-철원-김화-해안분지-거진 북방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한 6월 15일 이후부터 공산군과 서로 마주 보면서 장기적인 국지전에 돌입한다. 이를 전략적인 측면과작전적 측면에서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략적 측면에서 당시를 요약하면 6.25전쟁의 발발에서부터 중공군 춘계공세에 이르기까지 밀고 밀리는 격전을 치룬 결과 쌍방 모두 어느 한쪽의 결정적인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였다.그리고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의 손실이 수반 된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미군은 무한한 인적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중공군과 이들에게 물자를 지원하는 소련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였으며 동시에 자유진영의 다른 구가들로부터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공산군 또한 유엔군의 한반도 축출이라는 목표를 위해 총 다섯 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세에서, 화력과 기동의 열세에 목표 달성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병력보충과 물자자원에도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전력적 판단에 따라 공산군은 자발적 철수를 결정하였고 국군과 유엔군도 제한적인 군사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장 상황은 전쟁 발발 1년 만에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아 갔다. 그리고 '51.6.23일 유엔주재 소련 대사인 말리크가 휴전협정을 제의하고 유엔군측이 이를 수용함으로서 휴전협상 테이블에서 설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휴전협정에서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교착된 상태하 전선에서 국지전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다음으로 작전적 차원에서 보면, 공산군은 '51.4.22일에서 시작된 제5차 1단계(4월공세)와 5월 16일에 시작된 제2차공세(5월공세), 즉 그들의 춘계공세를 중공군이 참전한 이래 최대 규모로 약 50만명이 투입되어 4월에는 서부전선(개성-화천)에서 , 5월에는 동부전선(양구-인제)에서 실시한다.
5월 공세에서 현리일대에서 종심 약 50KM에 달하는 거대한 돌파구를 형성하면서 한 때 하진부리-대관령 일대까지 진출했으나 , 5월 20일을 전후하여 공산군 주력의 공세활동은 현저히 감소한다. 공세작전을 펼친 5일동안 공산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조직적인 지연작전과 강력한 포격 및 항공 폭격에 큰 손실을 입어 더이상 공세작전을 펼칠 수 없게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그 결과 공산군의 공세는 서울 북방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되고 후퇴하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춘계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면서 5월 23일일 기해 제3차 반격작전을 개시한다, 그리고 캔사스선.와이오밍선. 신캔사스선 등의 작전통제선을 설정하여 5월 말에 다시 38선을 돌파하고, 6월 중순에는 임진강 하구-연천-철원-김화-해안분지-거진을 연하는 주요지역을 점령하였다.
그 결과 공산군과 유엔군 간의 접촉선이 개략적으로 현재의 휴전선과 비슷하게 형성되었고, 앵측은 이 선을 따라 대치하면서 장기간의 진지전 및 고지쟁탈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제 2 절 피아의 전선 상황
1. 중공군의 철수
중공군은 '51. 5월 16일 중동부 전선에서 주공으로 2차 춘계공세를 개시하여 현리 일대에서 종심 60km에 달하는 돌파구를 형성하여 하진부리-유촌리까지 진출했으나 20일을 전후 하여 공세활동이 현저히 감소되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유엔군의 밤낮을 가리지않는 항공폭격과 포병화력에 막대한 인적손실을 입고 후방 보급로의 붕괴와 물자지원 능력의 한계로 결국 5월 21일 후퇴를 결정하게 된다. 이 명령에 적은 화천저수지 북쪽의 북한강을 전투지경선으로 하여 중공군이 서쪽으로, 북한군이 동쪽으로 철수하였다.
2. 유엔군의 반격
중공군의 5월 공세가 절정에 도달한 5월 18일, 풍암리로 진출한 중공군이 미 제2사단에 압력을 가하고 선두부대들이 국군이 방어 중인 속사리-하진부리 방향으로진출하여 중동부 전선 붕괴 직전에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정보판단에 중서부에 있는 중공군 4개 군이 소규모 양동작전만 펼치고 뚜렸한 공격 징후가 없다는 것을 판단하고 중동부 전선의 공산군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서부전선에서 철의 삼각지로 이어지는 주요 병참선을 위협할 수 있도록 2개 사단 규모로 철원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미 제1, 9군단이 공격계획을 수립하는 동안에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직접 전선 정찰을 실시하여 중동부 전선에 적의 전선이 과도하게 돌출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8군사령관에게 공격범위를 전전선에 확대하여 반격을 실시하도록 명령하였다.
미 제8군은 이에따라 제1단계 목표인 토페카선인 문산-가평-춘천을 연하는 선으로 진출한 후에 신속히 제2단계 작전으로 철원방향으로 전환하여 교통의 요지로 "긴 자루"의 목에 해당하는 포천-철원 축선상의 영평 부근과, 김화축선상의 화천 부근을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제1, 9군단과 제10군단의 미 제1해병사단은 적의 주력부대나 예비대가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5월 20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도 21일을 전후하여 풍암리-하배제-속사리를 연하는 선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 미 제10군단은 양구-인제를, 국군 제1군단은 양양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한다.
3. 유엔군의 지휘관계 및 전투편성
가. 지휘관계
공산군의 춘계공세를 격퇴하고 재반격을 시작하는 싯점에 유엔군의 지휘관계중 상부 구조는 '51.5.25일을 기해 한국군 제3군단이 해체된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변화가 없다. 국군 제3군단이 해체되면서 국군 제9사단이 미 제10군단으로,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으로 지휘관계가 전환되었다. 또한 미 제8군의 예비사단으로 하진부리 일대에서 중공군의 돌파구 확장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미 제3사단이 미 제10군단으로 전환되고, 새롭게 국군 제8사단이 미 제8군의 예비가 되어 미제10군단 지역에 배치되었다.
이후 유엔군의 재반격이 진행 중이던 5월 29일을 기해 국군 제9사단과 미 제3사단은 미 제10군단에서 미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었다.
나. 전투 편성 및 주요 지휘관
축선별 주요부대 편성은 서부지역(개성-문산축선)은 미 제1군단이 미1기병 및 25사단, 영국군 제29여단. 영연방 제28여단. 국군 제1사단이, 중서부 전선(철원-동두천 축선)은 미 제9군단이 미 제7 및 24사단, 국군 제2 및 6사단으로, 중동부는 미 제10군단이 미 제2 / 3 / 1해병사단 및 미187공정연대, 국군 제5 / 7 / 9사단으로,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은 국군 제3사단. 수도사단. 11사단으로 편성된다. 여기서 국군 제8사단은 군예비로 미 제10군단지역에 배치되고, 이디오피아 대대가 제8군 예비였다.
국군 제9사단 및 미 제3사단은 5월 29일부 미 제1군단으로 배속전환된다
미 제1군단은 터키여단이 미 제25사단에 배속되어 있고, 벨지움 대대가 영 제29여단에 배속, 필리핀 제10대대가 미 제25사단에 배속, 국군 제5해병대대가 영 제29여단에 배속되었다. 여기서 국군 제1사단장은 강문봉 준장이 제11연대장 문형태 대령, 제12연대장 김한주 대령, 제15연대장 김안일 대령이었다.
미 제9군단은 영구군 제27여단이 미 제24사단에 배속되었다. 한국군 제2사단은 사단장 함병선 준장, 제17연대장 이정석 대령, 제31연대장 신동우 대령, 제32연대장 조재미 대령이었다. 국군 제6사단은 사단장 장도영 준장, 제2연대장 차문호대령(5.25일부 송대후 중령), 제19연대장 임익순대령이었다.
미제10군단의 국군 제5사단은 사단장 민기식 준장, 제27연대장 유의준 대령, 제35연대장 김익렬 대령, 제36연대장 황 엽 재령이었다. 국군 제7사단은 사단장 김형일 준장(5.26일부 김용배), 제3연대장 정 진 대령, 제5연대장 조성화 대령, 제8연대장 이현진 대령(6.19일부 최주종)이었다.
국군 제 1군단은 군단장 벡선엽 소장. 부군단장 장창국 준장. 참모장 최홍희 준장이었다. 제3사단은 사단장 김종오 준장(5.23일부 백남권), 제18연대장 유양수대령. 제22연대장 장춘권 대령, 제23연대장 김종순 대령이고 수도사단은 사단장 송요찬 준장. 제1연대장 한 신 대령. 제26연대장 서정철 대령. 제1기갑연대장 이 용 대령이다. 제11사단은 사단장 최덕신 주장(5.23일부 오덕준). 제9연대장 오익경 대령. 제13연대장 최석용 대령. 제20연대장 박권근 대령읻다.
군예비의 국군 제8사단은 사단장이 최영희준장, 제10연대장 권태순대령. 제16연대장은 이존일 대령. 제21연대장은 하갑청 대령(5.30일부 전부일)이며 태백산 전투사령부는 사령관이 이성가 준장이었다.
제 3 절 작전경과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서울 북방-마석-홍천-하진부리-대관령-강릉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한 국군과 유엔군은 5월 19일에 하달된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을 근거로 미 제8군사령관이 수립한 작전게획에 따라 5월 20일 이후부터 전 전서네 걸친 반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미 제8군이 설정한 적전목표는 먼저 제1단계로 문산-가평--춘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을 점령하고, 신속히 제2단계 작전으로 전환하여 포천-철원 축선 상의 영평 부근과 춘천-김화 축선 상의 화천부근을 점령함으로써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토페카 선을 점령할 중서부전선의 미 제1, 제9군단은 적의 주력부대와 에비대가 바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그들을 섬멸하기 위하여 5월 20일을 기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도 양구-인제를 목표로 5월 23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동해안 축선의 국군 제1군단 역시 양양을 목표로 5월 26일 공격를 개시하였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적의 춘계공세가 시작된 이후 지속된 수세엥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 38도선을 향해 일ㅈ제히 공격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먼저 캔사스선까지 진출한 다음 와이오밍선과 신캔사스선을 차례로 확보함으로써 6월 15일 경에는 임진강하구에서 철원-김화-해안분지(펀치볼)-향로봉-거진 북방을 연결하는 새로운 진출선에서 공산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군과 유엔군의 제3차 반격작전 경과를 크게 작전단계별(캔사스선, 와이오밍선, 신캔사스선) 및 주요 축선별로 구분하여 정리해 보겠다.
1. 캔사스선으로 진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은 먼저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하기 용이한 캔사스선을 확보하고자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문산-포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을 점령한 다음 캐사스선 상의 영평을 점령할 목적으로 국군 제1사단을 문산 축선에, 미 제1기병사단을 동두천 축선에, 그리고 미 제25사(터키여단 배속)을 포천 축선에 각각 투입하여 '51.5.20일을 기해 3개 사단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이 날 중서부 전선의 미 제9군단도 포천-춘천에 이르는 토페카선을 목표로 좌로부터 미 제24사. 국군 제2사. 국군 제6사. 미 제7사단을 배치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은 미 제1해병사단과 미제2사단으로 하여금 적의 보급로인 홍천-인제-간성을 연결하는 도로상의 요지인 양구와 인제를 점령하도록 함으로써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미 제3사단으로 홍천-인제를 연결하는 도로의 남쪽에 포위된 적을 격멸하는 계획을 수립하여 5월 23일 기해 반격을 개시하였다.
아울러 동해안 축선의 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대관령 전투에서 격전을 치룬 수도사단을 정비한 다음 좌전방 산악지대에 수도사단, 우전방 동해안에 제11사단을 배치하여 병진공격을 실시하고, 국군 제3군단에서 배속이 전환된 제3사단을 군단의 에비로 운용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5월 26일을 기해 대관령과 강릉을 연하는ㄴ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였다.
가. 임진강-영평 진격전
캔사스선
백학 전곡 한탄강 영평 영평천 연곡
고랑포 관모봉
임진강
장파리 적성 미 제1기병 미 제25사
*감악산 동두천
금곡 *칠봉산 *해룡산 포천 미 제25사 미 제2사
문산 법원리 덕정 토페카선
내화산.외화산
가납리 대보리
*내화산 동거리 문산천
금촌 봉일천 의정부
*명봉산 *앵무봉 신촌
곡릉천 관산리 고양
일산 *고봉산
삼송리 지축 마석
국1사 미 제1기병사 미25사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5월 20일, 문산-포천을 연하는 토페카 선을 점령한 후 캔사스선 상의 영평을 확보할 목적으로 국군 제1사단을 문산 축선에, 미 제1기병사단을 동두천 축선에, 그리고 미 제25사단(터키 여단 배속)을 포천 축선에 투입하여 3개 사단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좌전방 공격사단으로 동거리-내화산을 목표로 도로의 좌측에 제11연대, 우측에 제12연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진출중, 제12연대 방향의 관산리 일대의 적이 강력히 저항하여 정찰기지 확보를 하고 있던 제15연대를 작전지역 중앙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봉일천-삼송리 도로의 동쪽 248고지 일대에서 적의 저항을 받기도 했다.
이 무렵 사단의 우인접 미 제1기병사단의 제5연대도 지축리 일대에서 공격이 돈좌 되었다. 이로인해 내화산-명봉산을 연하는 선에서 방어로 전환하였다.
제1사단장 강문봉 준장은 적이 주력부대들이 임진강을 건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강력히 저항한 것으로 판단하고, 북한군 제1군단 주력의 임진강 도하를 차단하기 위해서 공격을 결심하고, 제11연대는 보전조로 신속히 문산을 경유 적성을, 제15연대는 법원리 밑에 있는 금곡을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이중으로 차단하고 제12연대가 정면으로 공격하여 지대내 적을 섬멸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단의 공격에 앞서 21일 03:00시에 적 1개 대대 규모가 법원리 남쪽의 외화산에서 제11연대에 선제공격을 하여 진출에 차질을 빗게 되고 제15연대는 적의 공격으로 문산천 도하에 실패하였다.
공격연대들은 폭우와 적의 저항으로 지연된 부진했던 작전을 만회하려 22일 동이 틀 무렵 공격을 재개하여 군단에서 제일 먼저 토페카선을 점령했다.
한편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과 우전방의 미 제25사단은 적의 저항과 기습적인 역습으로, 의외로 공격이 부진하여 국군 제1사단보다 하루 늦은 23일 가납리와 신촌부근의 토페카선으로 진출했다.
이때 미 제1군단장은 제2단계 작전 목표인 영평을 공격하기 위해 5월 초순 부산에 도착하여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친 캐나다 제25여단을 미 제25사단에 배속하였다.
그러나 항공정찰과 첩보에 의하면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군 제65군이 미 제1군단의 진출 속도보다 빠르게 후퇴하고 있었다.
군단 선봉에 나선 미 제25사단은 미 제89전차대대, 제27연대 제1대대, 공병 1개 중대로 "돌빈 특수 임무부대"를 편성하여 25일 영평을 점령했으나 적이 먼저 임진강 북쪽으로 철수하여 각 부대들은 27일을 전후하여 미 제1기병사단이 임진강-전곡, 미 제25사단이 전곡-영평의 캔사스선에 진출하였다.
(가-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문산 이천리 용산골 밤나무 숲에서 발굴되는 유해의 국적은?
유해발굴작전을 2000년부터 통제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어디를 발굴할 것인가, 그리고 과연 아군(국군, 학도병 / 경찰, 유엔군 등)일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금 애매하면 일단 발굴보류를 하고 좀더 많은 지역주민을 만나고 참전용사를추적하여 증언과 제보를 받으려 노력한다. 이곳도 바로 문산이란 임진강변에 가까운 장소는 공산군의 퇴로이며 많은 우국인사들을 납치해서 북으로 끌고 가는 길목이다. 따라서 이곳 일대를 발굴할때는 이런 면에 관심을 갖고 조사활동을 실시해야 한다. 그런 어느날 탐문과정에 이천리에 가매장된 유해가 밤나무골에 많이 있다는 제보로 발굴작전(2년여에 100여 구 발굴)이 실시된다는 사실에 우리 조사팀이 투입되어 사실관계를 확인결과 실제 이 마을의 제보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제보자(76세) 000 :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고 아버지로부터 들은 내용인데 국군을 매장한 것이 아니라 적군을 가매장 했다 한다. 원래 밤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밤나무는 그 이 후에 심어졌다. 밤나무를 심을 때도 동네 어른들 사이에 여러 이야기가 있었고 그래서 다른 곡식을 심는 밭으로 사용못했다.
"그럼 지금 발굴하는 팀에게 그런 이야기는 안했습니까"
제보자 : 나 말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하고 있다. 처음엔 나를 찾아와 물어보는데 자꾸 정말 국군이 아닌 것을 목격했느냐고 따지듯이 물어와 나중에는 모른다고 다시는 만나지 않했다.
발굴단은 진실을 외면하지 말고 숫자에 너무 현혹되지 말고 정상적인 유해발굴을 하길 바랄 뿐... .
나. 고양시 삼송동, 지축동(흥국사)일대 전투 흔적
전사 기록에는 국군 제1사단이 중공군 5월 공세이후 재진격간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다고 기록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일대를 정밀 탐사 및 탐문결과 만족할 만한 흔적이나 제보.증언을 듣지 못했다.
나는 많은 시간을 이 업무에 전담하여 참전용사님, 지역주민을 만나고 전사를 연구하여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일을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국군 제1사단의 전사가 약간은 과대 포장되어 전쟁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려 누군가가 노력했다는 의문이 든다는것이다.
다. 박달산 영장리 유해는 군인인가 민간인인가(2년에 걸쳐 100여구 발굴)
박달산은 국군 제1사단이 중공군 5월 공세이후에 진격간 북한군과 전투를 실시한 곳으로 산 능선 6km에 엄청난 개인호가 분포되어 많은 유해를 발굴(100여 구)한다. 한편 이 지역은 1번국도변에 있어서 전쟁 당시에 이 일대로 북한군이 남한의 유력인사들을 납치해 끌고가는 루트였다. 또한 지역 프락치들이 활동을 많이 하면서 북한군이 점령기간에는 우익들이 피해를 입었고, 아군이 진출하면서 반대로 부역자들이 처형되는 장소라고 한다.
사실 이 곳 일대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제보활동과 현장탐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분명 경고하여 발굴을 함부로 하지말라는 장소를 어찌된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후임 발굴팀들은 아무런 스스럼없이 발굴을 했다. 전사 위주 전투지역에서 발굴을 실시해야 하고, 이런 민간인 추정 유해의 가매장 지역은 명확한 심사로 그 진실을 밝혀야 한다.이렇게 하므로써 박달산 일대의 전투지역에서 발굴된 유해마저 오해를 받을 수 있다.
라. 파주 월롱면 월롱산 유해발굴(20여 구)
월롱 지역은 6.25전쟁 초기 전투시에 국군 제1사단이 1번국도와 경의선을 끼고 있는 지역으로 임진강선이 무너지면서 축차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전투를실시하였던 곳이다. 또한 '51.5월 말 임진강선으로 진격하며 국군 제1사단이 다시 북한군과 전투를 문산천을 두고 진격작전을 벌인 곳이다.
우린 이 일대에 대한 정밀탐사와 지역 탐문활동을 수시로 실시하여 월롱산 우측의 내외화산지역을 포함 도내리 일대와 월롱일대를 조사했다. 월롱산 정상에 올라서먄 바로 서해로 흐르는 임진강이 보이고 지역일대를 감제관측하는데 최적의 고지였음을 확인하였다.
월롱산 입구 우측방 덕은리 146고지 일대에서 북동방향으로 형성된 많은 개인호를 확인하여 지역주민들의 제보를 들어보니 전쟁 다음해 5월('51.)에 국군이 들어와 길 맞은편 파주역이 있는 곳에 진지를 형성한 북한군과 전투를 실시했다 한다.
"저기 흐르는 강이 문산천인데 그 너머에 북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그럼 국군인지 미군인지 누가 이곳에 들어왔습니까?"
"국군이 왔고 내가 그 당시에 8살인데 옆에 가서 건빵도 얻어 먹었어요"
"나중에 덕은리 앞산에서 전사한 군인을 보지 못했습니까?"
"전쟁이 아직 하고 있을 때인데 동네 개들이 입주둥이가 빨갛게 피가 묻어 있서 어른들이 몽둥이로 쫒아내곤 했는데 우리는 거기가서 전투화도 벗겨서 집에 가져왔어요. 형들은 벗겨서 신기도 했고"
"그럼 그 유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변에 있는 호속에 넣어 묻어주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처음 전쟁이 나서 이곳에서 우리 국군이 많이 전사했다고 하는데 본적이 없습니까?"
"그때는 우리는 잠을 자다 북한군이 동네에 들어와서야 전쟁이 났다는 것을 알았어요, 밖에 나가보니 군인차들이 남쪽으로 많이 내려가고 있었고 나는 그걸 바라보고 있다가 할아버지가 야단쳐서 집으로 들어갔어요. 죽은 사람은 보질 못했어요"
"그럼 월롱산에는 올라가 보셨습니까?"
"전쟁이 끝나고 탄피 주으려 자주 올라갔어요. 제일 높은 곳으로 가보니 탄피도 많았고 바로 고지 밑에는 호구덩이도 많아요"
우리는 덕은리 고지에서 6구, 월롱산에서 14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마. 양주 남면 신암리지역 발굴 유해(75구, '17)는 국군인가, 아니면 북한군인가, 아니면 중공군인가?
이곳 신암리 지역은 바로 동북방이 감악산(675)이고 서쪽에 파평산(497)이 자리잡고 있다. '51.4월 중공군 공세시 영국군이 바로 북쪽 설마리에서 많은피해가 발생한 설마리다.
설마리 북쪽은 중성산이고, 그 북쪽이 가여울지역으로 바로 임진강이 흐르고 있는 6.25전쟁의 주요 격전장이다. 따라서 피아간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일대를 우리는 여러번 탐사와 탐문활동을 통해 주요 고지군은 유해를발굴했지만 발굴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리 남쪽 신암리, 매곡리 일대에서 탐문 및 지역주민 간단회를 실시하여 영국구 유해를 찾으려 노력했다.
[제보 내용]
지역주민 최장해 : 약 20년 전에 이사('17기준)왔다. 여기 와서 이장일을 보는데 어르신들이 하는 말이 집 밑밭 일대에 죽은 중공군 유해를 다수를 구덩이에 매장 했다고 들었다.
지역주민 박무용 : 어릴적부터 할머니에게서 본인 소유의 밭 일대에 정확한 지점은 얼 수 없지만 전사자 유해가 많이묻어 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시기는 모르지만 군인들이 와서 주민들을 동원해 주변에 죽어있는 전사자(아군인지 잘 모름)를 단강에 들고와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고 한다.
지역주민 박하영 : 1.4후퇴시 군인들이 일대를 점령하는 과정에 발생한 전사자들을 마차 창고에 모아두고 구덩이를 굴토한 뒤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 후 주민들이 마차창공에 모아둔 시체와 주변 일대에 미처 수습되지 않은 시체들을 모아 구덩이에 매장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창고에 모아둔 시체들의 머리가 짧고 누비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중공군 전사자 시체 다수를 묻었다.
지역주민 000 : 당시 여기 저기 군인들이 죽어 있었다. 1.4후퇴시에도 있었고 설마리에서 영국군이 당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5월이 지나면서 국군이 들어와 마을에서 노역자를 집집마다 모집하여 흩어져 있는 시체들을 단가에 날라 지금 길옆이 옛날에는 밭이었는데 그 곳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조금 오래된 시신은 살짐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벌레가 기어다녔다. 국군은 보질 못했다.
나. 가평-화천 진격전
*광덕산 화천저수지
*두류산 화천 캔사스선
*백운산 사창리 구만리 *병풍산
장암 수밀리 신포리
*국망봉 *석룡산 *화악산 지암리
일동 적목리
*강씨봉 *가덕산
*청계산 토페카선
*운악산 *북배산 춘천
*계관산
신팔리 가평 매봉
현리 북한강 원창고개
*개주산 신점리
청평 *호명산
*174 홍천강 홍천
미 제24사 국제2사 국제6사 미 제7사 미 제1해병사
중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도 좌인접 미 제1군단과 같이 5월 20일 가평-춘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을 점령한 후 화천을 점령할 목적으로 좌로부터 미 제24-국 제2사- 국 제6사- 미 제7사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진출 속도는 느렸다.
미 제8군사령관은 동쪽의 미 제10군단의 전투정면을 축소하기 위해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제9군단이 홍천 부근을 인수함에 따라 미 제1해병사단의 작전지역을 미 제7사단에게 맡도록 하여 홍천-춘천-화천 도로를 따라 진출하여 화천저수지 서쪽 지역을, 국군제6사단은 북한강 서쪽의 계관산-북배산-가덕산-지암리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좌전방으로 진출하는 미 제24사단은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국군 제2사단의 엄호하에 청평-가평 도로를 따라 신속히 가평을 공격하고, 국군 제2사단은 미 제24사단의 가평 진출을 엄호한 다음 대보리로 진출하여 미 제1군단과 연결하도록 하였다. 군단은 이 계획에 의거 5월 24일 07:00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에 미 제8군사령관, 제9군단장은 적이 빠르게 후퇴하는 것을 포착하여 각 부대는 중대단위 이하의 적은 우회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7사단장은 제7수색중대와 전차 1개 소대, 공병 1개 분대로 "하젤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춘천을 정찰하고 복귀하도록 명령하였다.
정찰임무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자 중공군 제60군의 1개 연대 규모가 춘천 남쪽 신점리에서 원창고개에 이르는 고지군에 저지진지를 점령하고 완강히 저항하였다. 특수임무부대가 다소 늦게 오후에 춘천에 도달했을 때는 적이 대부분 적이 빠져나간 상황이었고 일부 부대가 아군의 공격에 무력화 되면서 미 제9군단장이 현장을 순시하기 위해 신점리로 이동 중에 16:00시경 중공군 매복부대에 고립되었으나 전차소대의 지원으로 구사일생 구출되었다. 저녁 무렵에 원대복귀하였다.
해가 뜬 뒤 춘천 북방지역을 세밀히 항공 관측결과 약 10,000명의 중공군이 춘천-화천도로와, 부근의 보조 도로에 집결해 있으며 , 또 춘천 서쪽과 북서쪽에도 다수의 중공군이 발견 되었다.
중공군은 24일 하젤 특수임무부대의 춘천 진입을 아군의 주력으로 오인하여 많은 부대들이 신속히 빠져 나가기 위해 집결된 것으로 분석되고 유엔군은 강력한 포병화력과 항공 폭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이 기회를 포착하여 미 제7-17연대가 기동화하여 춘천으로 진출함으로서 선도부대가 되었고 좌측의 국 제2사단의 엄호하에 가평으로 진출한 미 제24-21연대도 제17연대와 지암리에서 연결하기 위하여 가평-지암리 도로를 따라 공격을 계속하였다.
한편 국군 제6사단도 좌우인접에서 미 제21연대와 미 제17연대가 지암리에서 화천을 공격하고 있을 때에 북한강 북쪽에서 가평-춘천 사이의 계관산-북배산을 연하는 산악지대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날 항공 관측에 의하면 미 제10군단 지역에서 빠져나온 중공군 1만~1만 2천명이 차량과 야포를 이끌고 행군 대형을 유지하여 화천저수지 남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식별되었다.
이에 군단장은 국 제6-19연대는 계속하여 지암리를 서쪽에서 공격하고, 사단 주력은 미 제7사단과 화천저수지를 공격하기 위하여 춘천으로 집결토록 하였다.
공격 선봉에 나선 미 제24-21연대와 미 제7-17연대는 26일 오전에 지암리에서 합류하였고, 이 무렵 국 제6-19연대도 지암리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로써 3개 연대는 춘천-화천 도로와, 가평-지암리 도로, 그리고 지암리 남쪽의 국군 전선으로 형성된 삼각형 모양의 우리 속에 중공군을 몰아 넣었다.
미 제17연대는 적의 퇴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보전조로 화천 진출을 기도했으나 적의 저항에 진척이 없었다.
5월 27일 아침을 전후하여 중공군은 대대규모로 포위망을 탈출하려 했으나 봉쇄하고 있는 아군에 격멸되고 말았다. 이후 조직적으로 탈출하려는 부대는 없었고 2,000명이 포로로 잡혔고 28일에 38,000명이 아군에 투항하여 적의 전의는 완전히 상실되었다. 28일 오후에 구름이 걷히면서 항공 폭격이 진행되고 미 제17연대가 14:00시에 화천에 진입하였다.
당시 상황을 중공군 전사에는 "중공군 제180사단이 화악산 우측 매봉을 점령했으나 아군이 사창리-화천선을 점령하여 포위되었으며 이때 주요 지휘관들이 동요되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분산 돌파를 채택함으로써 심각한 손실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공군 제180사단은 당시 와해 되어 버렸다.
"중국이 본 한국전쟁(당시 부사령관 홍학지 지음, 272~288페이지 참조)"에서 보면 문제의 제180사단은 사단장이 정기귀였다. 이 부대는 중공군 제60군의 서쪽 끝에서 측면 엄호 임무를 맡고 있다가 북한강을 건너 북배산과 가덕산의 샛길로 접어들어 철수 길에 올랐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미군 대병력이 산속 비탈길을 따라 행군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사단장은 대낮 산길에 미군탱크가 끝없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만 포위된 것으로 착각을 했다. 그래서 사단장은 서둘러 부대원들에게 산속 깊숙이 몸을 숨기라고 명령을 내렸다. 물론 미군은 1개 사단 병력이 이 산속에 이런 대부대가 숨어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단장은 노출에 대비하여 암호문을 태우고 무전기를 끄도록 함으로써 상급부대와 소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사단장은 전 대원에게 각개약진으로 포위망을 둟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본인은 소수의 인원과 귀환할 수 있었으나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중공군이 조선에 들어온 뒤 당한 가장 큰 손실이었다"라고 기술하였다.
또한 중공군 제60군은 철수할 때 예하부대에 "그 자리에서 멈춰 부상병을 옮기는데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이 적시되지않은 상태에서 예하 부대에 전달 되었고 마침 제180사단이 철수할 때는 북한강 이남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병력이동을 멈춰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다. 방어에 유리한 강북지역으로 들어가 멈춰야 했다는 것이다.
또한 제181사단은 화천까지 철수해 왔는데 상부로 부터 제180사단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뒤돌아 가야했다. 이미 병력은 1만 4천여 명이 고작 몇 천 명만 남았고 여기에 미군의 엄청난 포병화력과 항공 폭격에 큰 피해를 입고 있었고 미군 탱크부대를 만나 괴멸될 순간 그래도 무전기와 암호문을 버리거나 태우지 않아 제180사단을 지원하는 포위망을 풀라는 전보를 받아 철수를 할 수 있었다.
이 무렵 국군 제6사단(제19연대 결)은 화천 저수지 남쪽으로 공격을 하여 구만리발전소-병풍산을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진출했다. 당시 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후퇴하는 중공군을 추격하여 길가에 늘어진 중공군을 쓰레기 줍듯이 트럭에 실어 담았으며, 아군 1개 소대가 적 대대병력을 무더기로 생포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낭보를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 작전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화천 저수지를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으로"파로호"라 부르게 했다.
한편 국군 제2사단은 23일 청평호 북쪽의 174고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여세를 몰아 호명산을 점령하였다. 24일 사단은 전선 조정계획에 따라 미 제24사단의 가평진출을 엄호하고 군단의 좌전방 영 재28여단의 현리-개주산 지역을 인수받았다.
사단은 28일 운악산을 공격하면서 강력한 적의 저항을 받았으나 특공대를 편성하여 수류탄 공격으로 탈환하고 적를 추격하여 청계산, 강씨봉, 적목리, 수밀리를 경유하여 28일 석룡산-백적산으로 진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명산 남서쪽 하단 174고지를 공격하던 제 2사단 제31연대 제1중대 제2소대는 적 2개 중대를 개활지로 유인하여 격멸시켜 한국군 최초로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이 3일간의 전투에서 미 제9군단은 미 제10군단 지역에서 올라오는 중공군을 완전 포위는 못했지만 총 62,000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군단도 341명 전사, 2911명 부상, 195명이 실종되는 손실을 입었다
(나-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운악산 정상(849) 일대는 서서 걷기도 어질어질 했다
광덕산(1047)-도마치봉(937)-국망봉(1167)-강씨봉(830)-청계산(849)-원통산(567)-운악산(940)-현등사에 이르는 구간에는 개인호가 다수 분포되어 있다. 특히 광덕산의 좌측 박달봉, 광덕산 -상봉-독바위에 이르는 구간은 능선 전체에 개인호다. 유해도 이 일대에서 500여구를 발굴했다. 이미 앞에서 광덕산 일대의 전투는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가 아니라 국군 제2사단이 '51.6월초에 진격하면서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고 했다.
광덕고개에서 백운산-도마치봉에 이르는 구간도 종결실 능선에 전부 개인호로 6.25전쟁 당시의 것이다. 그러나 이 일대는 유해가 식별되지 못했고, 도마치봉일대에서 몇구, 그리고 국망봉에 이르는 고지군 중심으로 10여 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그러나 제2사단이 적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는 운악산은 사실 높이에 비해 고지군이 좁아서 올라서면 어질어질 할 정도다. 이곳에서 전투를 했다하지만 사실 전투흔적은 그렇게 없었다.
나. 호명산 밑 174고지에서 유인 격멸했다는 중공군의 시신은 어디에?
전사에 국군 제2-31연대의 1개 소대가 적 2개 중대를 개활지로 유인하여 섬멸하여 미 대통령 부대 표창까지 받았다고 기록된다. 우리는 호명산을 포함하여 174고지 일대를 탐사 및 탐문을 실시하여 그 사실을 확인하려 했다. 미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으니 그 진실은 당연한 것일진데 막상 죽은 중공군이나 북한군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찾지못한 유해가 14만여 명 이듯이 중공군도 찾지 못한 유해가14만여 명이라고 심양의 항미원조 열사능에 기록되어 있다. 발굴된 중공군 유해를 우리가 인계한 유해가 그 곳에 납골묘가 건립되어 봉안되어 있다.
유해발굴 작전간 항상 그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많이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시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물론 일부는 방치되다 자연속으로 녹아 들었을 것이고, 또 그 일부는 당시에 모아서 화장처리되어 바람에 날려 갔을 것이다. 또 일부는 전투지역에 아직 남아 있어 우리 발굴단이 발굴하게 되는 것이고 일부는 전투지역이 아닌 곳에 모아져서 집단으로 가매장되어 홍수등 자연재해로 강물에 실려 사라지던지 아니면 현재도 우리가 모르지만 주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참전용사 증언]
1)김원길(제2-31연대) : 나는 '51. 1월에 입대하여 화기소대 경기관총 사수로 보직을 받고 풍기.안동.풍산 일대에서 공비토벌 작전을 했다. 이후 부대가 여주를 거쳐 청평으로 이동하여 발전소에 도착해 보니 중공군이 수 없이 있었다. 새벽에 장구와 북,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며 우리 진지로 물리리듯이 몰려왔으나 경기관총으로 사정없이 갈겼고 다음날 아침에 보니 시체를 남기고 모두 후퇴했다. 나는 오성산에서 부상당해 후송되었다.
2)엄세창(제2-31-1-2중대) : 본인은 '51. 4월말인지 5월말인지 31연대 소속으로 광덕산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중대장이 전사했고 상봉 7부 능선 부근에서 2개 소대가 공격해 5명이 생존했다. 절벽지형이라 전사자를 수습하기가 곤란했다. 유해들이 계곡에 있을 것이다.
3)박장원(제2-32연대) : '51년도에 가평지구 화악산, 매봉산에서 전투했다. 백둔리의 명지산 전투에서는 50여 명이 폭사하는 장면도 목격했다. '50. 10~11월에는 춘천시내 전투에서 아군이 많이 전사했다.
다. 화악산 일원 그 많은 숯가마터에 가득한 중공군포로 그리고 시신들?
(굶겨서 만드는 중공군 장교와 여군의 비화~!), 제19연대 참전용사 김용철님의 증언
이비화는 들은 그대로 밝히기가 곤란하다. 너무 비인간적 대우로 포로를 자체 부대에서 심문하였다고 하지만 심문이 아니고 인간으로서는해서는 안되는 행위를 시켰다. 굶기고 보는 앞에서 못된 행위를 시키고, 그리고 그 손으로 죽이게 하는 천벌을 받아야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전쟁은 그걸 용서하고 있다.
화악산에만 숯가마터가 100군데가 넘었다고 한다. 이 숯가마터에 시신이나 포로들을 집어넣고 통제했다고 하다. 실제 두 개의 숯가마터는 제보로 확인하여 1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그런데 그 많은 숯가마터를 찾지를 못하고 있다.
라. 지암리 계곡은 중공군의 무덤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대대장을 했다. 부대가 관측대대로서 고지 정상에 음향소대 진지를 운용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현 제2군단 작전지역은 음향소대와 레이다 진지 선정을 위해 재임기간 수없이 탐사를 해야 했다.
전상에 보면 중공군 1개 사단이 완전 포위되어 사단장부터 탈출하고 그 대부분의 병력은 포로가 되거나 투항하는 곳이 지암리와 매봉- 화천 사이다. 얼마가 사살되었는지 아마도 2~3천은 넘을 것 같다. 지금 지암리. 오월리 사냥터와 매운탕골 위로 올라서면 개활지가나오는데 이곳이 집단 매장지였다. 이 일대에서 발굴된 유해는 개인호가 아닌 개활지에서 지역주민 제보로 100여 구 발굴 된다.
이곳 전투는 5월말~6월 초 전투뿐만 아니라 1.4후퇴시도 우리 국군 제5사단이 와해되어 홍적령에서 몽덕산(695)-가덕산(858)-북배산(867) 능선을 따라 북한강을 넘어 탈출하기도 했다. 춘천 사북면 지촌리와 서오지리에는 중공군 임시 묘지가 있었다.
마. 지암리-신포리 간 도로변에서 불태워지는 군인들~!
'51. 5월 말에서 6월 초의 유엔군 진격간 이곳 일대에서 죽어간 중공군이 지암리-신포리 구간의 도로변에 널려 있었다고 한다. 전진하는 차량이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바로 길 주변에 시체를 긁어 모아 놓고 기름을 부어 태워버렸다고 한다. 지금 전차 사격장으로 들어가는 원천리 보령에서 만난 제보자를 따라 본인의 밭 둑을 따라 당시에 화장한 화장재를 군데 군데 묻었다는 위치를 확인해 보았다. 또한 제보자가 말하는 한 곳은 북한군인지 중공군인지 대위급 장교가 묻혀 있는 곳도 확인했다. 그러나 삽을 데지는 안했다. 발굴 대사이 아니니까!
바. 북배산, 가덕산 등 그 많은 유해는 헬기장 만들며 모두 훼손되었다.
춘천 서측방 북배산과 가덕산 고지에는 헬기장이 만들어졌다. 군 작전용이므로 군에서 만들었다. 그런데 헬기장을 만들 당시에 유해발굴에 대한 통제가 없었기 때문에 유해발굴은 그 당시는 생각도 못하는 시절이다. 그러니 선착순으로 평탄작업을 하기 위해 고지별로 2~3M는 낮아졌다고 봐야 한다. 그 한 예가 광덕산과 상해봉지역 유해 발굴시 유해는 대부분 파쇄되어 흘러내린 훍더미 속에서 발굴되었다.
사. 화천 저수지에는 정말 중공군 유해가 수장 되었나?
캔사스선 진출을 위한 러기드 작전간 미 제9군단은 '51.4.3일부터 국군 제6사, 미 제1기병사, 영 제27여단으로 화천저수지를 공격하게 된다.
미 제9군단장은 좌전방에 영 제27여단, 중앙에 국군 제6사, 우전방에 미 제1기병사단으로 공격, 4월 6일에 영 제27사와 국군 제6사는 캔사스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우전방 제 1기병사단은 중공군 제39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캔사스선 남쪽의 화천저수지 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당시에 화천댐은 18개의 수문이 있고, 화천댐의 수위가 최고일 대에 수문을 개방하면 수위가 3~4m 상상하여 아군의 횡적이동과 주보급로 운용에 많은 지장이 초래된다는 공병부대장의 의견으로 미 제8군은 러기드작전의 목표에 화천댐을 포함했다.
이에 미 제9군단자은 특수훈련을 받은 미 제4유격중대가 7일 군단에 배속되자 미 제1기병사단에 잽배속하여 이들이 은밀히 침투하여 수문의 시설과 장비들을 정지시킬 것으로 에상한다. 그러나 미 제1기병사단장은 유격중대에 의한 기습공격을 준비하지 않고 댐바로 남쪽의 캔사스선 점령에만 주력한다.
군단의 우려대로 중공군 제39군은 8일 자정 4개의 수문을 완전 개방하고 6개는 부분 개방하여(당시 댐 수위는 절반 정도 였다) 북한강 수위가 2m 정도 상승하여 춘천부근의 가교들이 떠내려 가고 피해가 일부 발생한다. 그러나 중공군의 주력이 철수하면서 미 제1기병사단이 용이하게 캔사스선을 점령하지만 화천댐은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미 제1해병사단에 진지를 인계하려 했으나 군단장은 화천댐을 확보하여 인게하도록 명령한다. 그래서 제1기병사는 9일부터 11일까지 3차에 걸쳐 공격을 개시했으나 탈취하지 못한다.
결국 제9군단장은 차후 '51.4.12일부터 예정된 불굴작전(돈틀라스 작전)으로 탈취하기로 하고 미 제7기병연대와 미 제1해병사다네 배속되어 있던 국군 제1해병연대의 교대를 승인한다.
이후에 미 제9군단은 '51.4.21일부터 석룡산-화악산에서 와이오밍선의 육단리와 복주산-화천저수지를 연하는 선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국군 제6사단은 좌인접의 미 제1군단의 미 제24사단과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영 제27여단과 교대하여 사창리-와이오밍선으로 공격하고, 우인접 미 제1해병사단은 제5.7연대와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와 화천 북쪽의 와이오밍선을 공격하여 미 제1해병사단은 화천 북으로 진출하여 제7해병연대가 백적산을 전투지경선으로 국군 제6-2연대와 접촉하고, 제5해병연대가 신읍리 일대, 국군 제1해병연대가 구만리 발전소를 넘어 풍산리 일대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 4월공세를 맞아 축차 철수하게 된다.
화천 댐은 250피트의 18개의 수문이 있었다. '51.4.30~5.1 어간에 미군이 프린스턴함에 소속된 제193 비행대대에서 6대의 비행기가 2000파운드의 폭탄을 적재하고 출격하여 댐을 폭격하여 일부 반파하고, 이어서 100~500파운드의 VT탄을 적재한 12대와 어뢰를 적재한 8대가 출격하여 1개의 수문은 완전히 파괴시키고, 다른 수문에도 10피트 정도의 파공을 만들었다. 따라서 6월 초에 미 제1해병사단이 순조롭게 진출할 수 있었다.
미 제9군단은 '51.5.25일 아침에 실시한 항공정찰 결과, 중공군이 대규모 철수를 탐지하게 된다. 이에 따라 미 제7사단 제17연대가 춘천으로 진출하고, 국군 제2사단의 엄호하에 가평으로 진출한 미 제24사단 제21연대가 지암리에서 미 제7-17연대와 연결하기 위해 가평-지암리 도로를 따라 공격한다. 그리고 국군 제6사단도 5월 23일에 가평-춘천사이의 산악지대를 따라 지암리-화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제2연대와 제7연대가 적의 방어 거점인 계관산-북배산을 연하는 고지군으로 공격하는 동안, 제19연대는 우회기동으로 북배산 후방으로 진출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 때 미 제9군단장은 중공군이 통과할 군단의 최종목표인 화천저수지 서쪽의도로 교차점을 조기에 점령, 적의 퇴로를 봉쇄하기 위하여 중아으로 진출 중인 국군 제6사단의 예하 부대 중 제19연대는 계속하여 지암리를 서쪽에서 공격하고, 사단의 주력은 미 제7사단과 함께 화천저수지를 공격하기 위하여 춘천으로 집결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후 공격의 선봉에 나선 제24사단의 제21연대와 미 제7-17연대는 26일 오전에 지암리에서 합류하였고, 이 무렵 국군 제6-19연대는 지암리로 진출하였다.이로써 이들 3개 연대는 춘천-화천 도로의 가령-지암리 도로, 그리고 남쪽의 국군 진출선으로 형성된 삼각형 모양의 우리 속에 중공군을 몰아넣는데 성공한다.
포위망 내의 중공군은 대대단위로 탈출을 기도하지만 대부분 섬멸된다. 이후 미 제24-21연대와 미 제7-17연대는 북쪽으로 계속 진출하고 국군 제6-19연대와 미 24-5연대가 합동으로 포위망 내의 잔적 소탕 작전을 실시, 2,000여 명의 포로를 잡는다. 그리고 5월 28일 미 제24-5연대가 마지막 소탕작전을 벌이는 동안 하루에 3만 8천여 명이 국군 과 유엔군에 투항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내 5월 28일에 미 제7-17연대가 적의 저항을 뚫고 화천에 진입하게 되고, 국군 제6사단(제19연대 결)은 화천저수지 남쪽으로 이동하여 구만리발전소(화천 발전소)-병풍산을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였다.
미 제9군단은 5.24~5.30일까지 실시된 가평-화천 진격전에서 군단 목표인 캔사스선을 확보하게 된다. 이 작전의 결정적인 전투는 화천저수지 서쪽 도로 교차점과 춘천-화천간 도로, 춘천-사창리간 도록, 사창리 -화천간 도로, 그리고 가평에서 화천에 이르는 도로변에 집중되었고, 이 포위망에 중공군은 탈출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미 제10군단에 밀리어 올라 오는, 동쪽의 중공군 병력이 철수하면서 화천 저수지에 수장되었다는 내용은 조금 과장 되었다고 본다. 참전용사의 증언에 의하면 화천저수지에 추격하여 와보니 강물이 현저히 낮아져 있고, 들어난 강가에 군데 군데 말들이 죽어 있는데 사람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 후로 진격하여 지금의평화의 댐 부근으로 이동해 가게 되는데 죽어 있는 시신들이 강물 속에 들어갔는지는 모른다. 이 직여에 오래 살았다는 주민의 이야기를 빌리면 실제 전후에 강물을 다 빼고 실제 시신이 있는지 조사도 진행되었다고 한다. 강물 속에 수장되었다는 유해는 없었다고 한다.
다. 양구-인제 진격전
제8군사령관은 22일 중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이 공산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하고전황이 호전될 기미를 보이자 군단의 방어 정면을 축소 조정 후, 공세작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고 신속히 소양강 선으로 진출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지대내 적을 포위 격멸함과 동시에 적의 증원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은 2개 사단으로 적의 주보급로인 홍천-인제-간성 도로 상의 요지인 인제를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1개 사단으로 도로 남쪽의 포위된 적을 격멸하도록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은 한계-인제 도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양구를, 미 제2사단(미 제187공수연대, 국군 제7-3,5연대 배속)은 한계-간성 도로 동쪽으로 진출하여 인제를, 미 제3사단(국군 제8, 9사단 배속)은 운두령 점령에 이어 속사리-현리 도로와, 하배제-양양 도로의 교차점 부근인 창촌을 각각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예비인 국군 제5사단은 하안홍리, 제7사단(2개 연대 결)은 유동에서 계속 정비토록 하였다.
공격준비를 완료한 부대들은 5월 23일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지형이 험하고 적의 저항으로 진출이 부진하게 되자 미 제8군사령관의 독촉을 받은 군단장은 미 제2사단에 전차 2개 중대를 중심으로 특수 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소양강변 음양리의 교량을 조기에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제2사단장은 한계-인제 도로로 진출중인 미 제187공수연대에 증원된 제72전차대대와 사단에 배속된 제64전차전차대대의 각 1개 중대와 제187공수연대 제2대대로 "제르하르트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신속히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적이 설치한 도로상의 중공군이 설치한 장애물로 진출이 지연되었다.
이에 공중에서 헬리곱터로 이 상황을 지켜본 군단장은 선두인 뉴맨 소령에게 전차만으로 전속력으로 기동을 하도록 명하여 뉴맨 부대가 북쪽으로 진출함으로써 음양리 남쪽에서 아군의 공중공격을 받고 무질서하게 후퇴하던 중공군 4,000여 명이 퇴로가 차단되어 엄청난 병력손실과 장비를 유기한 채로 소양강을 건너 분산 도주하였다.
당시 상황을 중공군 전사에는 "24일 아군이 소양강 도하장인 부평리, 구만리를 장악하고 퇴로를 차단하여 중공 제9병단 제27군은 홍천-인제 간의 도로 양측의 고지에서 고립되어 최초 계획한 소양강을 이용한 적을 저지하려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부터 적을 추격한 미 제2사단은 25일 제23연대가 소양강 교두보를 확보했으나 제38연대는 북한군의 저항으로 진출이 지연되어 현리까지 진출하였다. 제187공수연대는 동해안의 간성을 점령하기 위해 음양리 남쪽에 집결하여 예비가 되었다.
이 무렵 미 제2사단의 좌측에서 양구로 진출중인 미 제1해병사단은 지형이 험하고 적의 저항이 강하여 겨우 자은리 일대로 진출했고, 우인접의 미 제3사단은 하진부리-속사리에서 창촌을 목표로 공격 중에 있었다.
미 제10군단장은 계속하여 양구를 해병에게 점령토록 독려하고 미 제2사단은 인제를 점령한 후 "베이커 부대"를 편성하여 신속히 간성을 점령하도록 강조하였다. 그리고 미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의 정면의 적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찰리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하배제에서 양양에 이르는 도로를 다라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리 부근의 북한군 제13사단 제19연대의 저항과, 화천저수지-인제 간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철수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북한군 제2, 5군단을 재배치하기 시작하여 군단의 공격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27일 베이커부대는 적의 저항으로 진출이 지연되어 14:00시경 인제로 진입하고 바로 간성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이미 국군 제1군단이 간성에 진입함으로서 취소되었다. 결과적으로 미 제10군단의 재반격은 공산군 주요부대에 심한 손상을 주었지만, 철수로상의 요지인 양구-인제 지역의 확보가 지연되어 포위망 구축에 실패하면서 적의 탈출을 허용하였다.
라. 양양-간성 진격전
제13연대
건봉령
팔음 송죽리
제26연 간성
*1079
*향로봉
신평 *504
원봉 삼포리
제1기갑
칠절봉 수도사
신선봉 용포리
천도리 용대리 미시령 속초
제1연 제20연
당정곡 제9연 하도문
마등령
제5사 캔사스선
원통 설악산 11사
가리산 한계령 마산 가라피 양양
제18연
인제
현리 서림리 인구리
하월천
매복산 가진리 주문진
*복용산
*만월봉
연곡천
11사
오대산 수도사
창동 진고개
하배제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은 중서부와 중동부전선의 미 군단들이 캔사스선 진출 작전을 펼치고 있을 무렵 5월 25일까지 하진부리로 진출한 중공군의 일부와 대관령에서 격전을 벌여 적을 격퇴했다. 이로써 군단도 반격작전에 동참하게 되었다.
군단은 1단계로 매복산-가잔리-인구리를 연하는 선을 목표로 좌전방 산악지역에 수도사단, 우전방 동해안에 제11사단으로 병진공격을 실시하고 해체된 국군 제3군단에서 배속된 국군 제3사단은 송계리에서 군단예비로 부대정비를 하도록 하였다.
군단은 26일 06:00시에 경강국도 변에서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때 중공군 제9병단 제27군과 북한군 제12사단이 대관령 일대에서 타격을 입고 좌인접 미 제10군단에 의한 포위를 우려하여 서둘러 철수하고 있었다.
사기가 오른 수도사-26연대와 제1연대는 27일 매복산, 복룡산으로 진출했다. 또한 수도사단의 우인접 제11사단도 26일 주문진 남쪽 연곡천변의 도로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27일 오후에 캔사스선의 동쪽 끝 지점인 양양을 무혈 입성하였다. 그러나 작전지역의 중앙인 하월천리에서는 제13연대가 28일 02:00시까지 치열한 격전을 펼쳐 격퇴하였다.
한편 제8군사령관은 좌측의 미 제10군단의 인제, 양구 진출이 지연되자 국군 제1군단으로 간성선까지 진출을 명하였다.
국군 제1군단(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항공관측과 수색정찰 결과로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적 제13사단이 한계리-원통 선에, 군단 직힐의 1개 연대 규모가 마등령-미시령 선에 배치되어 철수하는 전방부대들을 엄호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군단은 제11사단으로 설악산 일대를, 수도사단은 강력한 적의 저항이 예상되는 동해안의 간성을, 그리고 재편성을 완료한 제3사단 제18연대는 설악산 남쪽의 가라피-마산리 일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29일 동이 틀 무렵 수도사단의 제1연대는 간성 서북쪽 504고지를, 우전방 제1기갑연대는 간성을, 제11사단의 제20연대는 신선봉을, 그리고 제3-18연대는 가라피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4시간도 못된 09:30분 경에 간성을 점령하였다.
공격을 계속한 수도-제1기갑연대는 30일 간성 서북쪽 토기점리-화진포로, 제1연대는 간성 서남쪽 어천리-신평리로, 사단 수색중대는 고성으로, 제11사단 제20연대는 신선봉 일대에, 제9연대는 마등령 일대에, 그리고 제3-18연대는 가라피를 경유 마산리로 각각 진출하였다.
군단의 작전이 종료될 무렵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의 전투지경선을 서쪽으로 10km를 이동시켜 1098고지-매봉산-당정곡-안산-가리봉을 연하는 선으로 조정하고 당정곡에서 각 군단이 만나도록 하였다. 또한 주보급로인 인제-간성 도로의 확보에 필수적인 전방의 향로봉-1079-건봉령을 연하는 향로봉 산맥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제1군단장은 부대배치를 조정하여 수도사단이 제11사단 제13연대를 배속받아 당정곡-향로봉-거진을 연하는 전방지역을 방어하고, 제11사단은 군단의 측후방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배속된 제13연대를 접적이 경미한 간성 서북쪽의 제1기갑연대 진지를 인수하게 하고, 예비인 제26연대는 제1연대를 초월하여 향로봉 산맥을, 제1연대는 당정곡-매봉산-칠절봉을, 제1기갑연대는 작전지역을 인계 후에 칠절봉-1166-원봉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한편 제11사단(사단장 오덕준 준장, 이 이전은 최덕신 준장)은 산악지형임을 고려하여 중대별로 기동하도록 하고 제20연대는 용대리-미시령 도로의 남쪽 고지에, 제9연대는 설악산 서쪽의 능선에 , 제3사단 제18연대는 마산리-가라피 도로 남쪽의 감제고지에 배치되었다.
군단은 이와같이 6일간의 전투에서 캔사스선을 확보하고 북으로 약 40km를 진출하여 좌측의 미 제10군단 우전방인 국군 제5사단과 사이에부채꼴 모양이 생겼다.
(라-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향로봉 산맥 지표면에 남아 있는 유해
[참전용사의 증언('01년도)]
1) 이종록 (수도사-제1연대 2대대장 역임) : 둥글봉에서 산머리곡산에 이르는 능선에서 주전투가 있었고 현장에서 당시 대대장이다. 산머리곡산에 피아 많이 전사상자가 발생했고 사체수습이 안되어 부패되기 전에 유품은 후송하고 현지 가매장이 이루어졌다. 그후에 노무자들이 사체를 진부리로 이동시키는데 힘이들다보니 계곡에 방치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들었다. 추격해 가는데 북한군이 서커스를 하듯이 계곡 높은 곳을 뛰어넘듯 가는데 묘기였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2)고재일(수도사-1연대 2중대장 역임, 전 건설부장관?) : 산머리곡산에서 8차례 전투가 있었고, 우리가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어 부상자와 영현처리는 비교적 잘 되었다고 알고 있다. 산머리곡산은 상부지시에 의거 2일간 철수하였는데 미 제B-29폭격기가 융단폭격을 하여 어림잡아 약 5M는 낮아졌다.
3)조기환(수도사-1연대) : 사체부패가 심한 아군 전사자는 진부리 마을 인근밭에서 화목을 채취하여 화장을 하는데 직접 참여하였으며 유골함은 봉송하였다고 알고 있음
4) 김병훈(노무자로 참석) : 당시 미군통제하 노무단에 편성(울진 포항지역주민이 90%, 지역주민 10%)하여 탄약통으로 식량(주먹밥), 탄약운반(진부리-삼봉-향로봉) 및 환자 후송하였다. 일방적으로 승리한 전투라 영현처리 여건이 좋았고 북한군은 별도 매장하지 않고 가매장 되었다
향로봉에 올라서면 거의 평탄지면처럼 둥글봉 등을 탐사할 수있다. 1,000m가 넘는 산악지대에 트럭이 올라 올 수 있는 산악도로도 발달되어 있다. 이곳 일대에서 근무하다 전역한 분들의 이야기가 수색정찰 간에 수없이 유해를 목격했다고 한다. 전사에서는 우리가일방적으로 승리를 했고, 어쩌다 북한군의 기습으로 일시적 고지가 피탈당하기도 하지만 바로 역습으로 탈환하였다. 그러니 산악지역에 남아 있는 유해는 우리보다는 북한군일 확률이 높다고 봐야 한다. 나도 향로봉 일대의 둥글봉으로부터 향로봉 전방 고지군까지 탐사를 해본 결과 지표면 유해를 식별하였다.
이종록 참전용사님이 진격했던 산머리곡산은 일대가 모두 개인호이거나 포탄 탄흔이 널려있어 모두가 발굴 가능지역이다. 그러나 증언대로 유해는 많이 발굴되지 않았다. 2,000여개가 넘는 개인호를 향로봉 일대와 산머리곡산일대에서 발굴하였다. 이 일대에서 발굴된 유해는 50여 구에 불과하다. 산머리곡산에 이르는 산악도로 변에 화장하여 묻었다는 제보로 일대를 몇군데 기초굴토했으니 흔적을 찾지는 못했다.
서커스를 하듯 계곡을 어떻게 넘었을까 궁금하여 참전용사님께 다시한번 물어봤더니 기계체조하듯 한사람이 안고 그위로 한사람이 올라서고 또 그 위로 한사람이 올라서서 나무를 붙잡고 손으로 잡아서 끌어 올리는 방법으로 도망쳐 갔다 한다.
나. 신선봉, 상봉 바위무덤에 흩어져 있는 유해들(동해안 함포와 보급대원)
상봉(1242)은 미시령에서 올라서면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신선봉(1214)은 도원라에서 들어서면 접근이 가능하다. '51.5.29일에 국군 제11-20연대가 이 일대로 진출하게 된다. 동해안의 함포 지원과 항공폭격지원하에 진격하게 되는데 바위군이 완전히 조각조각 부서져 버렸다. 이 일대는 북파공작원들의 훈련소가 있는 장소다.
신선암(545)입구 일대에 많은 유해를 목격했다는 북파공작원 이었던 이영철씨의 제보에 따라 우리는 발굴작전을 감행했다. 하지만 흔적을 찾지 못했다. 이러는 동안에 지역주민의 또다른 제보와 절관계자로부터 재보를 얻었다. 상봉과 신선봉에 올라가면 돌틈에 사람뼈들이 흩어져 박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에는 북파공작원들이 훈련을 받다, 아니면 북에 침투하거나 어떤 이유로 숨지면 그 시신을 이곳에 묻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차하면 이상한 발굴이 되는 것이다.
[는뜨고 바라 볼 수 없는 현장, 돌틈에 남아 있는 전사자들은 누구일까?]
이미 앞에서 저항령에서 발굴되는 돌틈의 유해를 언급했다. 바로 이곳의 유해도 그런 모습인데 공교롭게도 모두가 제11-20연대의 전투지역이다.
저항령과 마등령 그리고 이곳 상봉, 신선봉은 발굴되는 모습이 같다. 다만 마등령은 유해가 없고 돌로 구축한 개인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저항령과 신선봉 상봉은 개인호의 형태는 없다. 오직 돌들이 산더미처럼 있고 그 돌 사이에 사람의 뼈가 남아 있다. 그 뼈는 모두가 파편처럼 파쇄되어 돌틈에 기어 있기에 엎드려서 드러내면 된다. 그 사이에 어쩌다가 전투 유품이 있다. 전투화나 통일화 잔해, 탄피, 방망이 수류탄, 포탄 파편 등이 곳곳에 끼여 있다.다만 상봉은 고지 정상 헬기장 인근에 일정 구간 교통호처럼 개인호가 길게 구축되어 있어 발굴을 해야했고, 미시령에서 오르는 중간에 돌무덤이 있는데 이곳에서도 유해가 식별된다.
[고지에 노무자를 올려보내 함포사격을 유도한다?]
도원링에서 오르는데 정말 신선봉이다. 구름이 산 중간에 걸치고 오르는 도중은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어느정도 오르니 구름 저멀리에 동해바다가 넘실대고 있다. 전쟁 당시에는 함정들이 진을 치고 이 일대로 조준사격을 하고 있었으리라. 탐사 후에 내려와 속초에서 북파공작원이었던 이영철씨의 연락으로 사무실로 갔다. 그곳에서 전쟁시 노무자를 했다는 한 명의 참전용사를 만났다. 하지만 익명으로 해달라는 당부다.
"용사님 오늘 우리가 신선봉에 올라갔다 왔고 내일은 상봉에 오르려 합니다"
"그래 뭐 발견했습니까?"
"돌틈에 사람 뼈가 여러군데 있었습니다"
"그래요, 참 그 사람들 억울 합니다"
"아니 무엇이 왜 억을하다고 하시는지요?"
"그 사람들은 노무자들 이에요, 북한군들이 워낙 함포에서 포탄을 쏘아 대니까 끌고 다니는 노무자들을 산꼭대기로 올려 보내놓고 동해바다에서 반응이 어떤가 확인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바로 그 노무자 출신입니다. 15살에 붙잡혀서 등에 실탄 박스를 지고 산을 넘어다녔습니다."
"그럼 국군이 저곳에 올라왔을 때는 무엇을 했습니까?"
"어리니까 동네에 남아 있었는데 데려가지 않고 나이든 남자어른들은 마찬가지로 국군을 따라 짐을 지고 갔습니다. 나도 한두번은 따라 다녔지요. 그러다 오인사격이 가해져 죽다 살아왔습니다"
"그럼 전부 북한군 부역자들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전적으로 아군 노무자라 하기도 그렇고 아주 애매합니다"
전쟁은 비극이다. 대한민국 사람이 죽으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적과 아군을 구별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에 남겨진 유해조각에 신분이 적혀있는 것도 아니고 전부 부역자로 처리하면 발굴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단 1%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발굴하여 DNA 감식으로 신원을 확인해 보는 것이고 그 동안은 발굴단 유해보관실에 남아 있게 되도록 하는 것으로 하고 발굴을 개시하여 무려 200여 구의 무명유해를 발굴했다.
다. 칠정봉에 유엔군 사령관 헬기가 떨어졌다
지금 인제읍에 가면 내과 병원이 하나 있다. 개인 병원인데 원장님이 참전용사다. 바로 제11사단 소속으로 '51.6월에 이곳에서 전투를 했다. 당시에 연대 위생병으로 참여한다. 나는 이곳에 가면 간단한 감기나 내복약 같은 경우는 무료로 치료받고 처방해 주었다. 그 원장님은 나를 만나면 신나게 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하셨다.
[헬기가 떨어지고 유엔군 사령관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응급치료를 해 준 것이 인연으로 미국에 초청돼 가고 의사가 되다]
여기서 유엔군 사령관 헬기가 잘못하여 렌딩하다 나무에 걸려 동체가 푸르륵 떨어졌다. 당시에 한여름이고 포탄이 작렬하여 흙먼지가 산더미 같은데 큰 나무가지에 걸리면서 충격이 완화되어 큰 사고로는 안되었다. 떨어진 헬기에서 높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기어 나오는데 당시에 군의관이 다른 곳에 있어서 직접 위생병인 여기 원장님이 수액으로 씻기고 찰과상에 약을 바르고 치료를 했다다. 그 것이 인연이 되어 나중에 미국에 초정되어 교육도 갔다 왔고 결국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내과의사가 되어 군복무했던 인제에서 병원을 개원했다
[하룻밤 지나면 24인용 텐트 앞에 환자가 수북하게 쌓였다]
당시는 동해바다에서 밤낮으로 포탄을 쏘고, 낮에는 비행기며 박격포탄이 산 능선에 쏟아져 흙먼지가 1M는 되었다. 한번 비내리면 차량이 꼼작도 못하게 된다. 날이 새면 부상자부터 전사한 인원들이 당시에 동원된 노무자들이 단가에 들고와서 야전의무대 앞에 내려놓고 가는데 숫자가 엄청나다.
그러나 사실 아무리 나라를 지키는 영웅이라지만 그 당시에는 죽은자나 살은 자나 입장은 같았다. 생과 사가 별거 아니다. 실려온 전사상자들을 보고 전사한 인원과 부상당한 인원 그리고 후송시킬 인원을 구분하는데 전사한 인원은 인근에서 화장처리 되어 자가봉송 길에 오른다. 후송 갈 인원은 우리가 보급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량으로 정기적으로 내려 보냈다.
문제는 전사한 인원이든 부상당한 인원이든 처리를 기다리는 동안에 북한군의 박격포가 떨어지거나 동해안의 함포가 오폭하여 박살이 나는 경우에 솔직히 정상 처리가 불가했다. 긴급히 다른 곳으로 옮기는데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니 그 유해들은 참 죄송하지만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한다. 능선을 따라 아무데고 굴토하면 유해가 나오던지 유품이 나오던지 할거라 했다.
라. 원봉-향로봉 구간에서 20여 구 유해발굴
이 일대에서 근무한 예비역들의 제보와 우리가 실제 현장 탐사로 확인한 지표면 유해를 포함하여 30여 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하지만 능선의 동쪽(동해안 방면)은 개인호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서쪽 능선에는 포탄 탄흔을 포함하여 개인호가 너무 많았다. 그런데 탐지기를 가동해 보면 별 반응이 약하였다. 알고보니 길 보수작업을 하면서 일부 굴토된 곳이 있다는 것이 증언으로 알게 되었다.
따라서 발굴되는 유해는 통상 능선상 8~9부 능선인데 이곳은 능선의 서쪽 고지군으로 둥굴봉 근처에서 조금 내려서면 또 다른 900~1,000M 고지군이 있고 이곳에 개인호와 일부 고지군은 전면에 교통호가 굴토 되어 있고 이 곳에서 유해가 발굴됐다.
2. 와이오밍선 확보
국군과 유엔군은 5월 20일 이후 실시된 1차 반격작전으로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하기에 용이한 캔사스선으로 진출했으나, 이 선의 요새화와 방어종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쪽의 방어에 유리한 감제고지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엔군사령부와 미 제8군은 5월 말 이 조치의 일환으로 중공군 춘계공세 이전에 확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전곡-철원-김화-화천을 연결하는 와이오밍선을 확보하여 이중의 방어선을 형성하기로 했다.
이에따라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철의 삼각지에서 화천저수지와 춘천으로 향한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와이오밍선으로 제한된 공격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 작전의 명칭은"말뚝을 박듯이 전선을 튼튼이 한다"는 의미로 "파일드리이브"라고 명명했다.
적도 이 무렵 유엔군이 제한된 공격으로 전환하였음을 간파하고 캔사스선 북쪽에서 저항하기 시작함으로서 철의 삼각지대를 두고 다시 한번 혈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가. 철원- 김화 진격전('51. 6.5~6. 13)
와이오밍선
시변리 평강 금성
철원 *584 김화
미 제25사
동막 와수리 화천
미 제3사 토성리
임진강 천광 *고대산
*638 국 제9사 신술리
*402 신흥동
*지장봉
구하리 *향로봉
*가치항
연천
운천 광덕산
미 제1기병 국 제9사 미 제25사
누대 미 제3사 캔사스선 도평리
전곡 영평 *국망봉
미 제1기병
동두천 양문리
영29여
포천 일동
제8군사령관은 이번 작전의 중점을 미 제1군단의 책임지역인 철원과 김화지구 봉쇄에 두고,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9사단과 미 제3사단을 5월 29일부로 미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을 임진강 남쪽에, 미 제1기병사단(영 28여 배속)을 전곡 남족에, 국군 제9사단을 영평 북쪽의 누대리에, 미 제3사단은 운천 남쪽에, 그리고 미 제25사단(터키여단 배속)을 도평리에 배치하였다.
국군 제1사단이 임진강 북쪽에 강력한 정찰활동으로 군단의 좌익을 엄호하는 가운데 6월 3일, 좌전방 미 제1기병사단이 전곡-연천 도로를 따라 북서쪽의 임진강을, 중앙의 국군 제9사단이 향로봉-지장봉을 따라 고대산을로, 미 제3사단이 운천-평강도로를 다라 철원을, 그리고 좌전방 미 제25사단이 도평-금성도로를 따라 김화를 각각 공격하였다.
군단의 주력부대들은 6월 3일 국군 제1사단이 임진강 북쪽에서 강력한 정찰활동으로 군단의 좌측방을 엄호하는 동안, 좌전방 미 제1기병사단이 전곡-연천 도로를 따라 북서쪽의 임진강을, 중앙의 국군 제9사단이 향로봉-지장봉을 연하는 선을 따라 고대산을, 미 제3사단이 운천-평강 도로를 따라 철원을, 그리고 우전방 미 제25사단이 도평-금성도로를 따라 김화를 향해 공격을 시작 하였다. 그러나 적의 강력한 저항과 때마침 폭우로 도로상태가 엉망이고 포병 및 항공 화력을 활용하는데 기상이 변덕을 부려 6월 5일까지 부진하였다. 반면 적은 이 틈을 이용하여 방어진지를 보강하고 예비대를 투입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때 국군 제9사단이 공격하게된 험준한 지형은 가치항-지장봉-고대산 일대는 중공군 제656군 예하의 1개 사단규모가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고 후방의 주저항선 구축을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획득할 목적으로 축차진지를 점령하면서 지연전을 시도하였다.
사단장 최석 준장은 먼저 1개 연대로 향로봉을 점령하고 바로 2개 연대로 병진 공격을 하기로 계획을 수립하고 제28연대가 6월 5일 한탄천 변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가치항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을 극복하고 향로봉을 점령하면서 6일에는 좌측에 제30연대를 투입하여 지장봉 일대의 적의 저항을 극복하며 7일에 제28연대가 지장봉을 점령하였다.
적은 지장봉 북쪽의 402고지와 638고지 일대에 강력한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하여 9일 제30연대는 백병전을 방불케하는 격전을 치르며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천광에 진출하였으나 우전방 제28연대는 우인접 미 제3사단의 진출이 지연되어 일시 방어로 전환하였다.
이때 우측의 미제3사단은 11일이 되어서야 신흥동에서 제28연대와 연결하여, 제9사단은 최종 목표인 고대산을 점령함으로써 와이오밍선에 도달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 900명을 사살하고 26명을 생포하였으며 제9사단은 158명이 전사하였다. 국군 제9사단은 이 전투로 지난 현리에서의 쓰라린 패배를 설욕하고 장병들의 사기도 충천하였다.
한편 사단의 우인접에서 기동한 미 제3사단과 미 제25사단은 6월 8일까지 기상악화로 아군의 항공 및 포병지원이 어려워 고전하다 9일부터 기상이 호전되어 적을 밀어내고 철원-김화를 연결하는 와이오밍선의 우반부를 점령하였다.
(가-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고대산에서 사라진 국군 제9사단 전몰 장병(9사단 참전용사 전우회 회장의 증언, 고대산에서 만난 참전용사의 증언)
나는 우리 전사를 신뢰한다. 하지만 또 의구심을 갖고 있다. 우리 전사는 그 당시에 쓰여진 것이 별로 없다. 가장 근접한 기록이라할 수 있는 전투상보가 전쟁 당시에 쓰여진 것이 언제 일까 질문에 보면 어느정도 접근이 가능한 면이 있다. 사실 우리가 낙동강으로 후퇴할 때까지 전투상조가 업었으리라 본다. 그런다 북으로 올라갔다가 중공군이 무력침공으로 밀어 낙칠 때는 아마도 또 상보는 있을 수 없으리라 본다. 물론 당시에 북으로 진출하지 않았던 제2. 5사단, 그리고 동쪽으로 기동한 제3사단과 수도사단 또한 여유있는 (?) 상황이라 상보를 남겼으리라 본다.
특히 설마 기록이 남겨졌다 할지라도 특히 핻아 사단의 전투 손실에 대해서는 더욱 믿기 어려웠다. 한 예로 제11사단 제8사단의 후방지역 공비토발 작전간 전과는 몇 천명을 넘는데 사단의 피해는 별로다. 또한 제1사단의 경우 유학산지구 전투 중에 하루에 500명의 신병이 보충되었다고 하면서 남겨진 전사자 숫자는 몇 백명이었다. 당시는 밀리는 상활도 아니고 사단이 무슨 위험에 봉착한 사례도 없다. 그럼 예하부대에서 전사망자 보고가 없다할지라도 실종처리는 가능하리라 본다. 너무 허구가 많다. 특히 북진작전시 운산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탈출시에 피해는 남기지도 않했다. 제1사단은 '52년 10월에 벌어진 일명 베티고지 전투지역에 대한(고양대 전투) 기록은 남겼다. 이유는 뭘까, 승리했고 자랑할 만하니까라고 하면 나를 욕할가. 사실 부대별 미 수집 유햐현황도 보면 제1사단은 총 6천여 명 중에 415명이고, 제3사단은 717명, 제5사단은 917명, 제8사단은 1,431명, 수도사단이 822명 등이니 곰곰히 생각할 만 하다.
나는 제9사단 참전용사 전우회장님을 모시고 계웅산에 올라 저격능선 전투지역을 바라보고, 고대산지역으로 이동해 신산리에서 그 당시의 전투 사실에 대한 기억을 살려내려 노력했다
[결국 내산리 540고지군에서 당했다]
지장산을 바라보며 신원사 자릴 보며 용사님의 추억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지장봉(877)은 고대산831)과 금학산(947)에 오르는 남북으로 연결되는 능선상에서 높은 봉우리다. 이곳 일대는 개인호가 다수 확인되었고 지장봉에서 남쪽으로 북대(710)-향로봉(410)-종자산(642에 이르는 산맥이다. 특히 지장봉 바로 밑에는 화인봉(8095)고지가 있고, 그 바로 위에는 담터계곡으로 군용차량이 접근 가능하다. (통제된 도로)
용사님이 심원사 부근에서 계곡을 따라 지장봉으로 올라섰다는 증언으로 우리는 그 계곡을 따라 올라섰다. 오르는 도중에 계곡에 돌을 이용하여 호를 만들어 놓은 모습을 여러군데 발견했다. 수많은 세월 속에서도 많은 것이 남아 있엇다. 위치로 보아 우리가 밑에서 공격하여 오르는 것이니 아마도 공산군이 구축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지장봉 주변에 다수의 6.25전쟁 당시의 개인호가 식별되고 우리는 이 일대에서 1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그러나 실제 많은 제9사단 벼력이 전사한 곳은 도신리 동쪽 540고지군이란다. 이곳에서 앞의 대광리역 일대가 관측되었으며, 적이 없어서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주변에 은거하던 적이 기습하여 중대병력이 전멸했다는 증언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 일대는 그 흔적마저 없었다.
나는 용사님을 모시고 신탄리역으로 향했다. 걸음이 불편하셔 이곳에서 고대산 전투에 얽힌 증언을 들었다. 또한 동송으로 이ㅏ동하여 금학산과 고대산 중간지점으로 차량으로 올라서 증언을 들었다.
[저 꼭대기에서 1개 중대가 녹았다]
용사님이 눈시울을 적셨다.
"선배님, 특별히 기억나시는 일이 있으세요?"
"저곳에서는 우리가 나중에 들어간 백마고지가 보여요. 저 고대산에서는 점령했다고 서로 부둥켜안고 만세를 부르고 했어요. 그런데 적이 어디서 기어 나왔는지 들이닥쳐 우리 중대가 엄청나게 당했어요. 그런고 저놈들은 백마고지쪽(그 당시는 백마고지인줄 몰랐다)으로 후퇴해 버렸어요"
"백마고지 전투는 '52.10월 중순경에 벌어졌는데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렀어요?"
" 그러니까 6월 중순에 점령했는데 바로 캐나다 군대에 넘겨주고 우리는 김화로 이동해 계웅산지역으로 들어가서 터키여단지역을 인수하여 계웅산을 점령했어요 "
[하도 부대가 바뀌어 정신 없었다]
그러다 8월이 되니까 다시 미 제25사단에 넘겨주고 포천인지 어딘가 가서 2달가량 훈련을 받고 10월 말에 이곳 철원에 다시 들어와 미 제3사단 방어지역을 인수받았지. 그래서 이때에야 우리는 지금의 백마고지란 395고지 일대로 들어가 중공군과 대치하게 됐어요. 여기서 해를 넘겨 '52. 4월 초에 원래 미 제1군단이었는데 미 제9군단이 되엇어요"
"그러시면 언제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하게 되었습니까?"
"백마고지 전투라고들 하는데 우리 30연대는 김화 저격능선 전투때 사실 더 많이 상했어요"
"그럼 '51. 6월 말에 잠깐 김화 계웅산지역에 계시다 포천으로 이동하여 2개월 부대훈련을 받고 이곳 철원에 10월중순 경에 들어와서는 '52년 10월 초에서 중순까지 진행된 백마고지 전투를 마치고 부대 정비 및 교육훈련을 위해 사창리로 들어가는데 선배님 연대인 제30연대는 바로 저격능선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했고, 사단은 1개월 뒤에 부대정비를 마치고 11월 말 경에 저격능선 지역으로 이동항여 국군 제2사단 지역을 인수하게 되는 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9사단 내력을 어떻게 잘알아요?"
"네, 이걸 연구하고 나와야 선배님들과 대화가 되는거니까 열심히 노력합니다"
"선배님 나중에 저격능선 저누 지역을 탐사하러 같이 가지지요?"
"그래요, 한달 전에 연락을 주시면 꼭 함께 하겠습니다."
[내가 속한 중대가 여기서 다 죽었어요?"]
그 후에 어느날 일요일인데 나는 친구들과 고대산 등산에 나섰다. 신탄리역에서 내려 칼바위 능선을로 해서 고대산을 올랐다. 일요일이라 많은 등산객이 올라와 정상부근에는 많은 인원들이 모여 사진을 찌고 있다. 우리 일행이 지나가는데 금학산이 바라보이는 방향에 한 나이 많아보이는 분이 엉엉 소리내어 운다. 많은 사람이 놀라서 바라보는데 이름을 부르고 있다. 다가서서 들어보니 전우들 이름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물었다.
"어르신 저는 발굴단 요원입니다. 혹시 여기서 전투하신 용사님이신가요?"
"내가 9사단인데 여기와서 저기 금학산 가는 바로 고지에 모여있다 매복에 걸려 다 죽었어요. 몇 명 만이 살았어요"
"혹시 나중에 포로 교환시라도 돌아온 전우는 만나보지 못했나요?"
"누가 나왔는지는 몰라요. 동네에서 같이간 친구들이 많았는데 나만 살아서 고향에 돌아갔어요"
"저기 고지에서는 피해가 없었나요?"
"무슨 소리예요, 한 5번은 주인이 바뀌었을 겁니다. 죽은 사람을 호속에 집어넣고 싸웠어요. 그 때는 너무 더워서 냄새가 진동하는데 노무자들이 들어와 시신을 옮기는데 그 사람들이 고생많이 했고 피해도 많아요"
나는 용사님으로부터 전쟁관련 이야기를 더 들었고 배웅해 드렸다. 같이 올라 온 일행 분들께도 인사를 올렸다. 여기 올라오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것이고 영웅이라 말씀드렸다.
하지만 고대산 정상 지역은 고수진지를 만들기 위해 주변을 다 파헤치고 일부 벙커를 만들며 전투흔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함게 온 일행이 저멀리 먼저 내려간다.
(가-2). 담터계곡의 바람소리
나는 금학산탐사를 2회 실시했다. 지금은 병력이 상주하지 않는데 얼마전까지만 해도 1개 소대가 상주했다. 그런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콘드라 사고가 발생하여 지금은 상주병력이 없다.
금학산은 동송읍애서 차량으로 약천동을 지나 사단 유격장을 거쳐 능선 정상으로 올라 여기서 부터 걸어서 오르면 2시간이면 충분하다. 고지에 올라 남쪽 능선을 타고 상노리로 내려 서고, 고지 정상에서 북쪽으로 473고지 방향으로 내려선다. 하지만 이곳 일대는 전투 흔적은 많이 없었다.
상노리로 내려서는 지역이 바로 담터계곡이다. 담터계곡 입구에 조그만 가게가 하나 있었다. 우리가 이곳으로 내려 오니까 그 아저씨가 의아해서 먼저 물어왔다.
"뭐하러 갔다 산에서 내려오세요?"
"네, 우리는 전쟁 당시에 죽어간 군인을 찾는 발굴단입니다. 지금 금학산에서, 한팀은 고대산 방향에서 내려왔습니다"
"아유, 지금은 안보여요?"
"그럼 혹시 이 일대에서 많이 보셨습니까?"
"바로 저기 맞은편 전봇대가 반쯤 누워있는 곳에도 몇 명 있어요. 여기 길을 넓히다가 나와서 옮겨묻었는데 전투화도 나오고 했는데 군벌줄은 못 보았어요. 그러고 저기 계곡으로 오르다 우측 산 속에 돌무덤이 많은데 그곳에 뭔가 있는지 조사했나요?"
"아니요, 아직 그곳을 탐사는 안했는데 혹시 무슨 소문을 알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이곳이 6.25전쟁 당시 북으로 가는 피난민(?)이 떼지어 넘던 길입니다]
"북한군이 데리고 간 것이 아니고 피난민이 미군 폭격을 피해 이 곳으로 걸어서 북으로 간 길입니다. 여기 사람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유엔군이 온다며 아작이 난다는 내무서원의 선동에 개나리 봇짐메고 다들 철원으로 해서 북으로 넘어갔어요. 그런데 여기 사람만 이곳으로 간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도 데리고 등에 업고, 봇따리들 메고 이곳으로 넘어서 갔습니다. 미군의 비행기 폭격을 피한다고 들었는데 나는 북한군이나 중공군이 총을 들고 사람을 데리고 가는 모습은 기억에 없습니다."
"아 맞아요, 제가 상노리지역 탐사간 그곳 주민한테도 들었습니다"
나는 이 어르신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떠났다. 그리고 제보 지역에서 3구의 유해를 발룩했다. 하지만 그 돌무덤에서는 몇 군데를 정밀 조사했으나 유해는 보이질 않했다. 물론 유품도 그 주변에서 찾지는 못했는데 왜 이런 돌무덤이 생겼는지 의문점은 남았다.
나. 대성산-취봉 진격전
평강 금성 북한강
김화 와이오밍선 *적근산 백암산
철원
와수리 육단리 마현리 *수리봉 미 제9군단 = 미 제10군단
국2사 *대성산 미 제7사 *취봉 당거리
국6사
미 제1군단 = 미 제9군단 *북주산 사방거리 *997
*887
*643 *재안산
*해산(일산)
신술리 다목리 신읍리
*853
*복주산 화천 화천저수지
광덕산 두류산
백운산 캔사스선
미 제9군단은 최초 백운산-사창리-화천저수지를 연하는 캔사스선에 국군 제2사, 미 제24사, 미 제7사, 국군 제6사를 배치, 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
군단은 와이오밍선 진출작전에 3개 사단을 투입하고 1개 사단은 예비로 확보하기로 하고 좌전방 국군 제2사는 김화 동쪽의 도로를, 중앙 미 제7사는 적근산 남쪽을 통제할 수 있는 감제고지를, 우전방 국군 제6사는 화천저수지 북쪽에서 주변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취봉을 공격하고 미 제24사단은 사창리에서 예비로 집결하였다.
좌전방 국군 제2사-31연대는 사창리-다목리-김화에 이르는 계곡 통로 좌측의 가파르고 험한 산악 능선을, 제17연대는 미 제24사단 제19연대의 두류산 부근 진지를 인수 받아 통로 우측 능선을 공격하였다. 우전방 제17연대는 처음 적의 저항이 경미하였으나, 좌전방 제31연대는 6일 복주산 일대에서 중공군과 7회에 걸친 공방전을 펼쳐 적을 격퇴하고 그 북쪽의 853고지를 기습공격하여 중공군 113명을 사살하고 20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때 사단장 함병선 준장은 제31연대를 예비인 제32연대로 교체하여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측의 제17연대가 대성산 바로 밑의 1041고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서 2개 중대의 돌격으로 극복하고 1041고지를 점령한다.
제2사단이 복주산과 1041고지를 점령하자 적은 물러나기 시작하여 10일 육단리 부근의 와이오밍선을 확보하고 제17연대도 대성산을 확보하여 김화-화천도로로 진출하여 와이오밍선을 확보하였다
중앙의 미 제7사단은 우전방 제31연대의 작전지역을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에 인계하고 화천-김화 도로를 따라 공격하였다. 그러나 7일 03:00시경 신읍리 북쪽에서 2개 대대규모의 기습공격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는 위기에서 예비인 제32연대를 투입하여 구축하고, 다시 9일 다목리 동쪽 고지에서 적 1개 대대규모를 격퇴하면서 10일 와이오밍선인 마현리-사방거리를 연하는 도로변으로 진출하였다.
군단의 공격제대 중에 가장 치열한 격전은 우전방 국군 제6사단지역에서 벌어졌다. 사단은 산악작전임을 고려하여 좌전방은 제7연대가 미 제7사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하여 백암산(1179)으로부터 뻗어내린 취봉-992-887-643고지로 연결되는 종격실 능선을 공격하고, 우전방 제19연대는 화천저수지 북쪽의 일산(1190)과 재안산(1034)을 점령하여 제7연대의 우측방을 엄호하도록 하였다.
이때 사단 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20군이 취봉(989) 일대에 3개 연대를 투입하여 축차적인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우측방 재안산과 일산지역에는 적정이 경미하였다.
국6-7연대장 양중호 대령은 미 제17연대장으로부터 643고지를 3일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는 사실을 듣고 6일 13:00시에 양측방으로 포위공격을 감행하여 탈환하고 취봉방향으로 철수하는 적을 추격했다. 적은 종격실 능선을 이용하여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우측의 제19연대가 당거리로 진출하여 연대의 공격을 엄호하게 되면서 공격 5일째인 9일에 취봉일대를 결국 탈환하게 되었다. 결국 적은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 5~7km 후방의 백암산(1179)으로 철수를 하였고 와이오밍선을 확보하였다.
(나-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신읍 643고지의 중요성과 전투 흔적(지금 반유개호 공사로 흔적이 대부분 사라짐)
신읍 643고지는 바로 하천읍 북방에 있다. 미 제17연대로부터 인수받아 공격하게 되는 국군 제6-7연대는 주간공격으로 탈취하게 된다. 이 능선에서 북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은 결국 수리봉을 거쳐 백암산으로 이어지는 중요 고지였다. 이곳에 중공군이 반 유개호를 구축한 상태에서 미군으 공격을 세번이나 물리친다. 그러나 이미 좌우측방이 아군에게 피탈되어 포위 위협애 직면한 중공군은 대낮공격에 그만 철옹성이 무너져 내리고 제6사단은 수리봉 바로 밑의 지금의 제7사단 신병교육대 뒷편 에서 신읍으로 넘어가는 고갯실 정상 남쪽의 887고지 일대를 공격한다. 하지만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고지 점령 후 바로 역습으로 물러나고 만다. 재차 공격 개시 6일차인 '51.6.10일 새벽에 제7연대는 3개 대대 병진 공격으로 887고지와 취봉을 점령하게 되고 적은 백암산으로 믈러난다.
[887고지에서 우리 분대원이 다 전사하여 내가 직접 고지 주변에 가매장하고 진출했다]
어느날 대구에 살고 계시는 제7연대 참전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본인이 직접 887고지에 본인 분대원 8명을 나란히 묻었다는 증언이다. 그래서 우린 열차편으로 서울로 오시게 한 후 차량으로 모시고 풍산리로 향했다. 그리고 887고지로 모시고 올랐다. 이미 이곳 일대는 우리가 탐사를 하여 개인호 실태를 파악하고 있는지라 현장으로 쉽게 안내했다. 바위가 있고 그 주변에 묻었다는 증언을 현장에서 청취하고 다시 취봉지역으로 모셨다. 차량으로 포병부대안을 통과하여 쉽게 접근했다.
이틀간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신뢰성이 높은 곳을 선정하여 발굴작전을 실시하여 결국 관련 유해 몇 구를 발굴했다. 그러나 결국 전사망기록지의 국군 제7연대 소속을 찾아 신원학인과 유족을 추적하여 DNA 감식절차를 진행했지만 유족을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아군이라고 단정은 못하고 추정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중공군일 확률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 제2사단의 백운산에서 광덕산-상해봉-육단리-천불산으로 이어지는 전투 전사가 없다
(많은 참전용사님들이 광덕산과 상해봉 일대에서 전투손실이 대량 발생했다고 증언)
국군 제2사단은 제9군단의 좌전방 사단으로 제31연대가 사창리-다목리-김화에 이르는 계곡 통로 좌측의 산악능선을, 제17연대는 미 제24사단 제19연대로부터 두류산 부근 진지를 인수받아 사창리-다목리-김화에 이르는 우측 능선을 따라 공격으로 실시한다. 공격방향이 사창리에서 올라 하오고개-복주산-복계산-수피령-대성산 방향으로, 공격방향이 가평 운악산에서 시작하여 국망봉-백운산-광덕산-상해봉에서 한방향은 동쪽으로 하오고게-복주산, 한방향은 상해봉-종격실 능선을 따라 계속 북으로 진출하여 육단리- 천불산- 저격능선, 734고지 등으로 진출한다.
구 한국전쟁사 하권 624~625페이지에 보면 좌전방 제31연대는 '51.6.6일 복주산 일대에서 중공군과 7회에 걸친 공방전을 실시한 후 그 북쪽 853고지를 기습공격하여 중공군 113명을 사살하고 20명을 포로로 잡는다. 그리고 예비인 제32연대를 교대해 투입한다. 그리고 우전방 제17연대가 대성산 바로 남쪽 1041고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극복하고 1041고지를 확보한다.
사단이 복주산과 1041고지로 진출하자 적이 물러나기 시작하여 제32연대가 육단리 부근의 와이오밍선을 확보하고 제17연대도 11일 대성산을 확보하여 와이오밍선이 확보되었다고 기술한다.
바로 여기서 백운산-광덕산-상해봉으로 이어지는 전사가 없다는 것이다. 앞선 캔사스선 진출간에는 가평-화천 진격전에서((601~610P, 하권) 국군 제2사단이 운악산에서 청계산.강씨봉.적목리.수밀리를 경유하여 석룡산.백적산으로 진출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오고개까지 진출하여 갔는지가 의문이다. 하오고개를 가려면 당연하게 광덕산과 상해봉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사창리에서 하오고개로 올랐다고 하는데, 그럼 구 전쟁사에 나와 있는 운악산-청계산-강씨봉-국망봉-백운산으로 이어지는 진출로다(609P). 이 능선은 47번 국도변이다. 여기서 바로 사창리 일대로 진지를 변환(이곳은 미 제24 사지역)했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참전용사님들은 본인들이 광덕산으로 해서 상해봉을 거쳐 육단리 곰배산-삼천봉 방향으로 진격했다 한다.
[ 참전용사의 증언 ]
엄세창(제2-31-11-2중대) : 광덕산 전투에서 우리 중대장이 전사했고 상해봉 7부능선 공격간 2개 소대가 공격하여 5명만 생존했다. 우리는 시신을 수습하려 노력했지만 상당수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박장원(제2-32연대) : 가평지구 화악산, 매봉산 전투에 투입되었고 명지산에서도 치열한 전투를 했으며 50여 명이 한순간에 폭삭하는 장면도 목격했다. (이 내용은 1.4후퇴시 내용으로 판단 됨)
000 님(잠곡리에서 소년병으로 입대, 이후에 정식으로 제2사단 입대) : 중공군 병력에 많은 조선족이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피난을 가지않고 남아 있었다. 당시에 15살인데 키가 작아서 잡아가지 않았다. 중공군이 왔는데 조선족이 많았다. 우리집에 중공군이 자주 머물렀다. 여기서 한가지 전해들은 이야기는 중국땅에서 방망이 수류탄을 만들어 보내는데 조선족들이 화약을 넣지 않고 많은 량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그러니 그들이 만든 방망이 수류탄은 터지지 않는다. 그들 심부름도 했다. 그러다 구군 제2사단이 들어와 군인들 따라 육단리 곰배산에서 전투에 실탄을 지고 올라갔다. 그러면 건빵도 주고 시레이션도 주어서 먹었다. 그런다 천불산으로 따라 올라갔는데 가서 보니 중공군이 철항에 발목이 걸려 있는 체로 기관총을 잡고 죽어 있었다. 그러다 제2사단에 정식 입대가 되어 저격능선 전투도 했고 대마리에서 화살머리 고지 전투도 했다.
000님은 우리동네에 살고 계시는데 이제 기력이 약해지셨다. 봄이 오면 찾아가 인사를 드리려 한다. 겨울을 잘 넘기어 건강을 빌어본다.
이런 사실에 따라 전사는 보완이 필요하다. 광덕산 지구 전투는 제6사단이 아니고 제2사단이다. 굳이 제6-19연대를 부각시키고 싶다면 '51.6월 초 와이오밍선 진격시엔 제2사단이 혈투를 해서 진격했다고 기록해야 한다. 광덕산은 전곡-영평선으로 진출하는 미 제1군단 소속의 우측방 미 제25사단 지역도 아니다. 미 제1군단은 문산-덕정-신팔리-가덕산-춘천으로 이어지는 토페카선을 점령하기 위해 국군제1사단아 좌측에서 금촌-문산으로 진출하여 임진강변의 캔사스선에 이르고,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은 서울 북방 앵무봉 가납리(토페카선)를 경유하여 감악산-적성으로 진출하게 되고 그 우측방 미 제25사단이 마석에서 덕정(칠봉산-해룡산)을 지나 포천-관모봉(영평)의 캔사스선에 5월 28일 도달한다. 와이오밍선을 공격하는 미 제9군단은 좌측방에 국군 제2사단으로 47번도로 우측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따라 기동하며 중앙의 미 제24사단의 측방을 방호하며 국망봉-화악산-지암리-화천저수지로 연결되는 캔사스선에 진출하고 이어서 와이오밍선 공격을 캔사스선인 백운산선에서 진격하여 복주산-대성산 육단리로 진출하고, 중앙의 미 제7사단이 화천에서-마현리-적근산선으로, 구군 제6사단이 가평-화천-화천저수지선에서 우측방 화천에서 산악지대인 643-취봉-수리봉-화천저수지선으로 진출하여 한다.
그런데 백운산 바로 위가 광덕산-상해봉인데 어떻게 사창리에서 제31연대가 복주산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조금 남득이 안가는 전사 내용 전개다.
3. 신캔사스선으로 진출
미 제10군단은 적의 저항이 완강하고 지형이 험준하여 중서부전선의 부대들이 와이오밍선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인 5월 말경 화천저수지-양구-인제를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진출했다. 이 무렵 배속 중인 국군 제9사단과 미 제3사단이 미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됨에 따라 군단의 좌전방인 화천저수지 남쪽에 군단 예비인 국군 제7사단을 , 양구 일대는 미 해병 제1사단이, 소양강 동쪽은 국군 제5사단이 미 제2사단의 인제-원통 일대 진지를 인수하였다.
군단의 전선 정비가 완료되자 제8군사령관은 간성으로 진출한 국군 제1군단과 전선의 균형을 유지함은 물론 중동부 및 동부전선의 부대들이 24번도로(홍천-인제-간성)를 주보급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캔사스선을 이 도로의 북쪽 화천저수지-펀치볼 남쪽-향로봉-거진 선으로 조정 "신캔사스선"으로 명명 하고 "파일 드라이브 작전"의 일환으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이 선을 확보토록 하였다.
이 방침에 따라 국군 제7사단은 화천저수지 북쪽 군량현을, 미 제1해병사단은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와 양구 북쪽의 해안분지를, 그리고 국군 제5사단은 원통 북방의 서화리 일대를 공격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북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가. 군량현 전투
국군 제7사단은 중공군 5월 공세시 소양강 남쪽의 음양리 부근에서 집중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고 군단 예비가 되어 하안홍리 일대에서 재편성에 주력하고 있다 군단의 캔사스선 공격명령에 의거 5월 31일 화천저수지 남쪽의 미 제1해병사단 작전지역을 인수하고 군단의 좌전방 사단으로 전선에 복귀하였다.
금강 노전평
해안분지(펀치볼)
*백석산 비아리 *대우산
*917 도솔산
국7사 = 미 제1해병
*731 *757 대암산
간평 원당리 *1121 *1175
수입천 *504
군량현
마석봉 가아리
*수리봉 함춘리 광치동
양구 인제
*사명산 가장촌 원동지곡(남면 청리 : 원동지골)
이 무렵 양구는 적의 시체가 도처에 참혹하개 널려 있고, 장티푸스 등 전염병이 만연되어 미처 피난가지 못한 다수의 이재민들이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군 제7사단은 화천 저수지 남쪽에 캔사스선을 점령하면서 일부 부대를 북쪽으로 파견하여 정찰 활동에 주력하던 중에, 6일 군단으로부터 신 캔사스선상의 마석봉-504-757고지를 점령하고, 백석산 남쪽의 731고지와 931고지에 강력한 정찰거점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단은 작전지역이 협소하고 산악지형인 점을 고려하여 제5연대로 먼저 공격을 하고 이어서 제3연대를 투입하여 목표를 점령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제5연대는 오전 내평리에서 공격대기지점인 양구 남쪽의 가장촌으로 이동, 공격준비에 주력하였다. 이 기간에 연대장 김상봉 중령은 양구 북쪽 함춘리에서 적진을 관측하던 중에 적의 포격으로 부상을 입고 후송되게 되고 김용배 중령이 부임하게 된다.
'51. 6. 8일 사단은 제5연대가 마석봉과 757고기를 공격하지만 적의 저항으로 탈환하지 못하거나 적의 야간 기습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결국 마석봉은 확보하였으나 757고지는 확보하지 못하자 사단은 제3연대로 제5연대를 초월 공격하고 제8연대가 예비로 소양강 남쪽 진지를 인수하도록 조치했다.
51. 6. 10일 주공이 된 제3연대가 757고지로, 조공이 된 5연대는 마석봉에서 성곡령을 목표로 공격하였으나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탈환하지 못하다 자정이 다 될 무렵에 근접전투로 결국 탈환하였다.
사단은 12일 공격을 재개하여 제3연대가 백석산(1142)으로 연결되는 능선의 발판인 917고지로 진출하고 제5연대도 731고지로 진출하였다.
(가-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마석봉(숫돌봉)~성곡령 일대의 전투흔적과 유배발굴
이 지역은 국군 제7사단이 백석산으로 진출간 전투한 지역으로 마석봉은 일명 숫돌봉이라 한다. 파로호 북안에 있는 산으로 군량리에서 탐문결과 전쟁 후에 이 산에는 미확인 지뢰가 많아서 민간인들이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더욱이 산불이 난 적이 있는데 불발탄이 수없이 터져서 안전문제가 상존한다 한다.
성곡령 능선은 서로는 상무룡리 618-오미령-674-성곡령-756-항렬(도고터널)-두밀령-983-두타연 사태천으로 이어지고, 수입천 너머 오미리에서 731-오천터널-917-백석산으로, 군량현-우측 산악으로 기동하여 장평리에서 수입천을 도하하여 917-백석산으로 기동하게 된다.
따라서 이 기동로를 따라 유해발굴작전을 수행했지만 전사책에 나와 있는 마석봉이나 성곡령일대, 731고지(가거 평화의 댐 건설시 VIP 관람 벙커가 있다)일대는 그리 전투 흔적이 없었다. 아마도 당시 북한군 제6사단은 양갈래고지라 부르는 917고지와 백석산 일대에서 주저항을 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나. 북한강-수입천을 따라 노젓는 배로 병력과 보급품이 방산에 왔다
한 어르신이 연락이 왔다. 본인이 노무자로 9176고지 전투에 참여항여 전사자 유해를 옮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꼭 한번 본인이 싸웠던 곳에 가보겠다는 것이다.
[나이 먹어 전사한 분들께 죄송하다]
당시 노무자는 인간 취급도 안해줬다 한다. 무장도 안했고 군복도 지급하지 않았다. 혹시나 도망치거나 적군의 프락치 역활을 할까봐 일병 계급이 통제하는데 요즘 개만도 못하게 대우를 받았다 한다.
나는 어르신을 양구로 오시도록 안내하여 차량으로 방산으로 모셨다. 할아버지는 바로 본인이 있었던 장소를 알아 보았다. 당시는 배가 북한강을 따라 월명낚시터를 경유하여 수입천으로 들어왔단다. 배로 병력과 보급품이 실려와 버덩말까지 들어왔다.
"어르신은 어떻게 노무자로 들어왔습니까?"
"사실 학교를 다니다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서울로 올라왔는데 1.4후퇴가 되면서 국민방위군으로 불려가 대구 경산 어느과수원 창고에 갔다가 다시 해산되어 돌아오는 길에 붙들려서 노무자가 되었어요. 당시에 군의 상사가 현역으로 처리한다고 해서 따라 다니다가 온것이 7사단을 따라 이곳으로 들어왔지요"
"그럼 그 당시에 현역으로 왜 안하시고 노무자로 계속 계셨습니까?"
안 한 것이 아니고 뭘 모르니까 집에 가라해서 왔는데 지금 확읺니 그 근거가 없다며 전쟁 중 노무자로 인정못한다고 합니다"
"그러시면 지금 여기 오신 목적이 전사자 매장 장소를 증언하기 위한 것인지 어떤걸 말씀하시러 오신겁니까?"
어르신은 방산면 소재지에서 배에서 보급품을 받는 전황, 그리고 양갈래 고지전투가 심하여 밑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전사하는 모습이 보이고 한낮에 올라가 국군으로 판단되는 유해를 당가에 담아 오던지, 아니면 오다가 적 박격포가 떨어지면 옆에 숨었다가 다시 칡순을 잘라 다시 유해를 걸어서 끌고 나온다는 증언을 하신다.
그러다 밤이 오는데 안가시고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탐사에 동참헸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안전 문제가 따르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런 문제다
[예, 발굴단에 실무자입니다. 현재 아버지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는데 오늘 밤을 양구에서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나는 할아버지의 큰 아들 되는 분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나 모르기에 책임문제가 염려돼서였다. 그랬더니 할아버지의 소원이라며 하룻밤 여기서 있게 해주시면 오히려 고맙다고 한다. 그래서 양구읍에서 같은 모텔에 들어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다시 방산으로 가서 여기저기 탐사를 했다.
그리고 어르신이 원하는 참전사실 확인서를 증언에 입각하여 신뢰가 된다는 내용으로 작성하여 드렸다. 부대장 명이 아닌 조사팀 개인 이름으로 말이다.
다. 고대리 일대에 묻힌 유해, 그리고 야전 화장터의 대포소리
성곡령에서 양구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 그 곳에 일하는 분이 계셔 밭에 들어가 잠시 대화를 나눴다. 군량현을 파로호 인공습지가 바라보이는 곳인데 고대리에 가면 군인 전사비가 있다한다. 제7사단 용사의 전사비였다. 이 전사 추모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르신 한 분이 다가 오셨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오?"
"네 군인 전사자 유해발굴단 인원입니다"
"아이고 고생하시네, 그런데 이렇게 세월이 지난는데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그럼요, 동네에 어르신들이 많이 제보해 주셔서 10,000구 이상 발굴하고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아직 뼈가 남아 있는 모양이네요"
"그럼요, 물이 흐르지 않으면 거의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이곳도 모르겠네요, 저기 강변으로 모래밭에 곷밭이 조성되고 있는데 전쟁때에 유골을 가져다 많이 묻었습니다. 그리고 저기 골짜기로 가면 화장터가 있는데 전쟁당시에 7사단 화장터였는데 내가 어려서 그 옆에 가서 놀았어요."
[뻥하고 대포 소리에 놀라서 엎드렸다 보니 화장하던 사람들이 몰골이 흉했다]
"포탄이 터져 다 전사해습니까?"
"아니고 그게 아니고 화장하는 죽은 군인의 배가 터져버려서 온갖 오물을 다 뒤집어 쓴겁니다"
"아니 왜 배가 터졌나요, 그곳에 폭탄이 떨어졌습니까?"
"그게 아니고 화장할 때는 죽은 사람을 엎어놓고 해야 하는 데 앞으로 반듯이 놓고 하다가 열기에 배의 내장안이 부풀려 터져버린겁니다"
나는 어르신을 모시고 화장터로 갔다. 물론 지금이야 흔적도 없다. 그리고 강가의 꽃반 조성 장소도 답사했다. 그러나 발굴작전을 통해서 유해는 찾자 못했다.
나. 도솔산 전투
국군 제7사단이 군량현 전투를 개시할 때 우인접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도 양구 북방의 대암산을 공격하고 있었고 국군 해병연대는 원동지곡에서 부대정비 중에 있었다.
이 무렵 부대 재배치 계획에 의거 해병사단의 작전지역이 소양강 서쪽까지 확대되자, 사단은 대암산-도솔산-대우산으로 연결되는 산악지형을 공격 중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제5해병연대를 소양강 서쪽으로 이동시키고 국군 제1해병연대를 투입하였다.
국군 제1해병연대가 공격할 광치동에서 대암산에 이르는 산악능선에는 북한군 제12사단이 유리한 지형을 이용 주요 고지마다 항공폭격이나 포병화력에 견딜 수 있는 엄체호를 구축하고 능선 통로상에 무수한 지뢰를 매설하여 강력한 거점을 편성하고 있었다.
연대는 6월 4일 항공 및 포병화력의 지원하에 2개 대대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6일 동안 적의 저항으로 1121-1175고지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6월 11일 02:00시 적이 예상치 못한 야간공격으로 3시간만에 돌파하고 여세를 몰아 대암산까지 진출하여(신캔사스선) 우인접 제5연대와 연결 하였다.
이후 연대는 신병을 보충받아 부대정비를 하던 주에 14일 도솔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15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종으로 된 협소한 공격통로에서 두더지처럼 개인호를 구축하며 19일 결국 야간공격으로 도솔산을 점령하였다. 좌인접에는 미 제7연대가 진출하고 있었으며 이 작전간 연대는 사살 2,263명, 생포 42명 등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고 아군도 전사 123명, 부상 582며의 손실을 입었다.
(나-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1121~1175고지 능선에 굴토되어 있는 북한군 진지
이곳 전투는 광치령이 분기점이다.광치령에서 올라서면 1057-1122-1200-대암산 용늪-대암산(1309), 용늪-1304-도솔산(1147)-대우산(1178-가칠봉91242)로 이어지고, 1200고지군에서 동남쪽으로 1145-1176-872의 하향 능선이 가아리로 내려선다. 1200고지군의 북서족으로는 892-막음골로 내려서서 팔랑리에 이른다.
우리는 이곳 발굴을 위해 실제 포항의 해병대 병력을 이곳으로 올라오게 하여 해병대 소려이 통제관이 되어 발굴토록 하였다. 선배 전우의 유해를 찾기 위한 해병의 노력은 대단했다. 당시 참전용사님을 찾아서 현장에 모시고와 증언을 청취해 가며 열심히 발굴을 했다. 이 지역은 거의 8부능선에서 정상부분으로 산악도로가 개설되어 병력 이동은 어렵지 않았으나 위험한 산악도로였다.
나는 팔랑리 일대에 대한 탐문 활동과 도솔산. 대암산. 대우산 지역의 탐사에 신중을 기했다. 아무래도 살아있는 지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개인호나 교통호는 국군이 구축한 것이 아니고 북한군이 구축한 것이다. 개인호에 남아 있는 반유개호는 얼마나 튼튼하게 구축했는지 아직도 포탄시 보호를 받을 정도로 잘도 만들었다.
[그 당시는 동네 사람들 집집이 똥바가지로 철모를 사용했다]
팔랑리 마을에서 전쟁 당시에 군인들을 매장했다는 장소를 찾았다. 동네 들어가는 길을 따라 길 옆으로 가매장 장소인데 많은 곳이 이미 훼손되어 버렸다. 가축들의 집으로 사용되고 길을 확장하면서 매장 장소가 사라졌다. 동네 이장 일을 보시는 분의 집으로 안내 받아 들어가니 마당 꽃밭에 유품들이 널려있다. 반합이며 실탄/탄피며 철모 등 많이도 모아 놓았다.
이장 : 전쟁이 끝나고 산에 들어가니 군인드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널려 있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들어가 철모는 들고 와서 집집마다 똥바가지로 사용하고 탄피는 주워와서 엿과 바꾸어 먹곤 했어요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불발탄을 잘못 건드려 터져서 엄청난 죽기도 하고 손이나 발이 부러져 평생 고생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장 : 찾고자 하는 시신은 그 당시는 산에 들어가면 여기저기 보였지만 지금은 대부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아요. 아까 말하였던 길 옆에 매장지는 대부분 홍수가 났을 때 들어나 훼손되어 버렸고 지금도 일부 밭언저리에는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 곳은 부역자나 반공인사 등이 피해를 받은 것은 없습니까?"
이장 : 이곳은 북한지역이니 보도연맹이나 국민방위병 등은 없습니다. 그러나 국군이 들어와 북한군 내무서원 일당이라는 이유로 처형한 곳은 있습니다. 아직 그 유족들이 발굴해 가지않아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많습니까?]
북한군이 북으로 물러날 때에 적극적으로 북한편인 사람들은 다 따라서 가지 않았습니까?
이장 : 대부분 갔지요. 그러나 일부는 조상묘가 있는 곳이니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혹시 해방 직후에 북한체제에 반대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없습니까?
이장 : 그건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북한은 김일성이 토지를 몰수하고 일제시대 지주나 관공서 출신들은 모두 빈민족자로 붙잡아 처벌하였다. 북한지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이거나 정도가 약한 사람들이니 여기서 그걸 분별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란 걸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대암산 능선에서 20여 구와 팔랑리 마을 길 옆에서 몇 구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물론 북한군이지 우리 해병인지는 모른다. 또한 최초 이곳전투에 참여한 미군의 유해는 식별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발굴팀이 나의 통제를 받지않고 밭 둥에서 5구의 유해를 발굴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뼈도 있다고 하며 잠시 중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완벽하게 원복조치하고 간단한 약식제례를 직접 올려드렸다.
나. 대암산~선점중대 지역의 유해는 5.16이후 붙잡혀 온 인원들이 진지공사간 대부분 유실 되어버렸다
지금은 부대가 존재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내가 한참 발굴작전읅 통제하고 있을 당시는 1개 중대가 있었다. 그러다 용늪이 세게적인 보호장소로 지정되면서 환경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아마도 부대가 이동했을 것이다. 대암산(1329)은 용늪에서 동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큰 바위산이고, 선점 중대는 그 당시에 용늪 바로 북쪽에 분지형으로 되어 있는곳(1304)에 위치해 있었다. 전쟁 당시에 주 격전장은 바로 이곳 1304고지 일대다. 지금도 이 분지형의 주변에는 전쟁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여기서 백병전을 치르고 두갈래로 갈라져 한 곳은 도솔산으로 해서 대우산-가칠봉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펴는 우측으로 장암동 917-월산리-가전리-송노평지역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곳에 5.16이후에 전투시설물을 구축하면서 당시에 붙잡혀온 사회정화인원들이 이곳에 머물며 공사를 했다. 들리는 소문은 그 당시에 엄청난 저누 유품이 나오고 땅을 파면서 유해들이 나왔는데 누가 정성스레 수습하지 않고 처리에 버렸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고 춥고 배고픈 시기이니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다. 용늪에 잠긴 용사들
용늪은 그렇게 깊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연중 물이 마르지 않으니 신기한 지역인다.대암산 줄기 계곡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인북천으로 흘러간다.
나는 이곳을 여러번 탐사를 했다. 이곳에 일과 시간에 머물고 있는 자연문화해설사와 동행하여 용늪의 중앙도 들어가 보았다. 이곳 일대는 백병전이 벌어진 곳이다. 그러면 상산컨데 어둠속에서 야간 전투시 많은 피아군인이 이 늪속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다 총을 맞거나 폭탄이 작열하면 장열히 쓰러지는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실제 용늪 주변과 늪 안에 몇군데의 유해가매장 흔적이 보인다. 전투화가 일부 노출된 상태인데 우리가 발굴은 못했지만 충분히 확률이 높다고 본다. 명복을 빌 뿐이다.
[용사님이 보호하사 멧돼지가 나를 피해서 간다]
그런데 이 용늪의 우측 산악지역으로 개설된 도로(협소하다)를 따라 혼자서 탐사를 했다. 정말 울창한 숲이 밀림이다. 한참을 걷는데 어디서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하지만 눈으로 보이질 않는다. 한참을 탐사하다 본니 옛날 밭모습도 있고 얼마전까지 아마도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그런데 갑짜기 멧돼지 무리가 앞에서 온다. 나도 놀라고 돼지도 놀랐다. 그런데 돼지가 밑으로 내려서서 나를 비껴 간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개인호를 쫒다보니 이상한 곳으로 들어섰다. 용늪 주변을 벗어나 버렸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우린 탐사하다 가끔 개인호에 미쳐서 따라가다 엉뚱한 곳으로 들어서 산을 헤메이곤 한다.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선다. 산악도로는 아니지만 아마도 사람이 옛날에 살았는지 조금씩 길이 남쪽으로 이어진다. 3~4시간을 헤매이다 결국 천도리 뒷골지역으로 내려와 일행과 합류했다. 일행들이 난리가 났다고 한다. 실종신고를 하여 군 수색대를 투입하려 햇다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천여 개의 개인호를 발견한다. 배가 허기진 것은 산딸기로 보충하며 결국 살아서 용감하게 혼자 대암산을 우회하여 밀림속을 헤쳐 나왔다.
라. 도솔산 전투는 그렇게 백병전을 할 수 없는 종격실 칼날 능선이었다. 포병과 항공기, 함포로 초토화!
도솔산 전투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유명한 전투다. 대암산 능선에서 북쪽으로 올라서면 도솔산(1147)이 나온다. 도솔산은 도솔산 대대가 있는 돌산령으로 꼬부랑길이 나있고 양구에서나 인제 천도리에서 이 돌산령으로 기동하다 보면 해병대 도솔산 전투 기념비에 오르는 길이 있다.
[한석산-매봉 전투 사례와 비슷하다]
도솔산 기념비에서 도솔산-1304(남동쪽)고지로 이동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기동로는 기동공간이 없어서 사실 분대단위도 움직이기 힘들다. 도솔산 정상 지역은 많은 개인호나 전투 흔적이 남아 있다. 정상부근에서 전투는 따라서 북한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을 동해안의 함포나 비행기폭격으로 초토화시키고 해병이 진출한다. 이 고지까지 대암산 방향(1304)에서 진격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아니 이런 칼날능선에서 어떻게 전투를 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는 공자였다. 두더지처럼 교통호를 구축하면서 적진으로 접근한 후 야간공격으로 6월 19일 새벽에 도솔산을 점령했다고 하는데 능선에 올라서서 보면 어디에 두더지처럼 교통호를 구축했다 하는지 의문이 든다. 대암산을 공격한다던지 용늪 북쪽 1304고지를 공격하는데 혹시나 그런 전법(일본이 뤄순에서 러시아 군대 격파시 사용)을 사용했다면 그래도 이해가 될 수도 있다.
다시한번 언급하지만 한석산-매봉 전투시 국군 제3사단은 방자로서 지키려 전투를 하면서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는 것이고 이에 반해 제9사단은 공자로서 전투를 하면서 피해가 발생하여 점령하는데 어느 전투가 진지에 전사자가 많이 남아 있을까?
["우리는 전우를 남기지 않는다"]
언제인가 남태령 수방사에서 8월에 에비역 장성을 대사으로하는 유해발굴 사진 및 유품 전시회를 했다. 수많은 선배 장군님들이 오셔서 어느 분들은 눈물을 흘리며 차마 처다보지 못하겠다고 하시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해병대 장군분이 우리 앞에 오셔서 도솔산 전투를 자랑하셨다. 매우 용감하고 지금도 장군님 모습으로 질문을 했다.
"어이 이과장 도솔산 가 보았나?"
"네, 한 5번은 올라가 보앗습니다"
"그래 우리가 그 곳에서 저새끼들을 완전 박살내버렸지"
"아 예, 장군님 혹시 그때 전사한 동료는 없었습니까?"
"왜 없어, 많이 전사했지"
"저희가 유해를 발굴하려 3번에 걸쳐 병력을 투입했는데 발굴하지 못했는데 혹시 알고 계신 곳이 있으시면 알려주십시오"
"여보, 우리 해병은 현장에 전우를 남기지 않아"
나도 더이상 묻지를 못했다. 그 당당한 기백에 나는 눈을 돌렸다. 그 칼날 능선에서 굴러 떨어지면 노무자도 접근이 곤란한 곳이다. 비록 승리한 전투지만 전사자를 완벽하게 처리한다는 답변에 수긍해야 했다.
지금도 도솔산 정상에는 활엽수조차 큰 것이 없다. 화염으로 초토화 되어 얼마동안은 풀도 자라지 않았다. 도솔산 바로 북쪽에 대우산(1128)산이 있고 남북으로 발달된 종격실 능선이 북쪽의 가칠봉(1242)으로 이어지는데 북한군이 어디서 결전을 할 것인가를 분석해 보면 도솔산 전투는 화력전투라 사료된다.
[국군 제5사단 참정용사님의 증언 : "내 전과를 해병이 뺏어갔다"]
그런 어느날 국군 제5사단 제35연대 참전용사님을 만나 의미있는 증언을 들었다. 용사님이 지금의 도솔대대 바로 위로 해서 해안분지를 내려갔다고 한다. 전사의 전투지경선하고는 많은 차이를 나타내는데, 전사에는 국군 제5사단은 미 제10군단의 우측사단으로 원통에서 서화-노전평으로 진출한다. 사단의 우측은 국군 제1군단으로 수도사단이 진출하게 된다. 사단의 좌측은 미 제1해병사단으로 최초는 미 제1-5해병연대가 진출하다 해안분지에 이르러 국군 제1해병연대가 인수받아 진출한다.
그러니 전투지경선이 수시로 변하는 상황에서 국5-35연대 일부가 지금의 도솔대대 위치를 거쳐 서화 북방으로 진출하는데 본인이 산 속에 숨어 있던 북한군 3명을 생포했다. 그런데 본대가 저 멀리 내려가고 있어서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포로를 데리고 이동하는데 해병대 상사가 나타나 본인들이 추격하던 중이라며 내 놓으라고 협박조로 말을 해서 큰일 날까봐 몇번 망설이다 결국 내 주고 말았다 한다. 그리고 본대에 합류하여 이 사실을 이야기 하니 중대장이 그 책임자를 아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여러명의 해병대인원 중에 누가 책임자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다. 결국 중대장은 없던 일로 하자며 넘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참전용사 및 지역주민 증언]
안계수(해병 제1-2-6-1소, '19) : 본인은 '49.4월 5일 해병대 1기생으러 입대하여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특히 양구 도솔산 전투에서 적과 치열하게 전투 했으며 1기생부터 8기생까지 참전하였다. 7~8기생들은 훈련도 못받고 참전하여 희생이 컸으며 해병대 역사상 피해가 큰 전투였다. 지금도 도솔산에 가면 후배들의 희생이 기억나 눈물이 나곤다. 전사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김종갑( 해병 제1연 본부/ 전차중대) : 본인은 '50.8월 15일데 입대하여 양구 도솔산 에서 백병전을 했다. 당시 돌능선이었으며 연대 병력의 1/3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을 정도로 아군의 피해가 컸다. 도솔산 정상부근에 방치된 피아 유해가 많이 목격되었다.
이상원(해병 제1-3대) : 본인은 '49.3.31일 해군 제13기로 입대하여 해병대에 배치되어 도솔산 전투간에는 미군들과 함께 공격 간 돌멩이가 많은 고지로 공격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많은 피해를 입었다. 화염방시기를 사용해 공격을 게속하여 고지를 탈환했으며 이후에 김일성고지 전투에도 참가했다.
강홍기(해병 제1-1-3-소) : '50. 8월 30일에 해병대 4기로 입대했다. 도솔산 전투에 참가 했으며, 당시에 중문중학교 30명이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당시 고행 후배 임동원이 전사했으며 아군 전사자는 대부분 수습한 것으로 기억한다
김석진(해병 제1-3-11중대) : 본인은 '50. 8월 5일 해병대 3기생으로 입대하여 전쟁 중에, 화천 수력발전소 북쪽에 당시 중공군과 전투 중 김학수가 호 안에서 전사하였으며, 이후 후퇴하여 춘천북방 무명고지에서 전우 허춘섭(제주 신촌리 )등 5명이, 전투 중 5기생. 6기생 2명이 적 수류탄에 전사했으나 미처 수습하지 못했다('51.4월 전투). 이후에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도 전투를 했다.
김정협(지역주민) : 약초를 캐러 갔다가 용늪 능선에서 전사한 군인을 묻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음며, 서흥리 대민골 화전밭 개간시 개울언덕에서 유해를 목격했다.
김상헌(군복무, 제21사) : 중대장으로 근무시 '96년도 6월경 분소대 전술훈련 중 부대원이 유해를 신고하여 현장확인 결과 유골 2구를 목격하여 수습, 태극기로 감싸서 재매장했다.
*유해는 대우산 일대에서 7구, 도솔약수텨에서 2구, 팔랑리 일대에서 4구, 대암산서흥리에서 18구 를 발굴했다.
다. 서화리-향로봉 전투('51.6.4~6.17)
소양강 고성 건봉령
제1기갑 간성
*1079
노전평 고성리 *향로봉 신평리
가전리
*원봉 제26연
*산두곡산 진부리
해안분지 *916 상배양 (개고개) *981
*840
동개동 대곡 *칠절봉
서화리 *811
*1112
미 제1해병 = 국5사 *매봉산 제1연
천도리 *851 *1242 용대리 속초
대암산
피양동 당정곡 황철봉
명당산 백담사
국군 제5사 = 수도사
양구 *안산
원통
국군 제5사단은 미 제2사단과 함께 캔사스선으로 진출 중 원통 부근에서 군단의 부대 재배치 계획에 의거 미 제2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한 후, 미 제10군단의 우전방으로 후덕리-981-산두곡산(1019)을 연하는 신 캔사스선을 목표로 공격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6월 4일, 좌전방 제27연대는 서화리-인제 간의 도로 우측 명당산-피양동-서화리-987고지로, 제36연대는 향로봉 산맥 서쪽의 1242-1122-산두곡산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능선 접근로를 공격한 제36연대는 의외로 별 저항없이 1242고지를 점령하여 공격발판은 확보하였으나, 소양강 계곡 통로의 우측 종격실 능선을 따라 진격한 제27연대는 명당산 일대에서 적 1개 대대규모의 강력한 저항으로 공격이 돈좌 되었다.
대대는 수류탄만을 휴대한 특공조를 투입하여 결국 5시간의 치열한 근접전투로 136명을 사살하고 명당산을 확보하였다. 이때 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좌인접 미 해병5연대를 저지하고 있는 적의 일부가 북한군 제2-4연대를 증원하고 있음을 확인하여 제36연대로 하여금 적진 후방의 서화리를 공격하도록 했다
서화리를 제36연대가 공격하고 있는 동안 제27연대는 계속하여 적의 역습을 격퇴하며 북쪽으로 연결된 752 및 851고지를 연하는 능선에서 진출이 지연되었다.
이에 사단장은 제35연대를 천도리로 투입하여 적의 퇴로와 증원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제10군단장은 신 캔사스선으로 진출한 좌우인접 부대와의 전선 균형을 위해 신속한 돌파를 강조하였지만 6월 10일 현재 사단은 천도리, 851, 1122고지에서 격전이 계속되었으며 중앙의 제27연대가 공격 4일 만에 851고지의 특화점을 "원계희 이등병(미 은성무공훈장)"이 수류탄 12발을 휴대하고 포복으로 접근하여 3개소를 폭파하면서 고지를 탈취하게 된다.
이후 사단은 11일 공격을 재개하여 서화리와 1122고지를 공격하여 강력한 적의 저항을 극복하고 14일 점령하여 신캔사스선 진출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제5사단은 최종목표인 제35연대의 840고지와 제36연대의 981고지를 15일부터 공격하였으나 목표 탈취에 실패하였다. 사단은 다시 17일 치열한 격전을 통해 목표를 점령하여 14일간의 격전을 끝내고 신캔사스선으로 진출하여 소라지-송노평-이현리를 연하는 선에서 위력수색을 실시하여 주저항선의 방어진지를 보강하였다.
미 제10군단의 작전지역은 중동부 산악지대로 지형이 험준하고 기동로가 제한되며 특히 도로는 지뢰가 매설되어 기동에 어려움이 많았고 특히 기간 중에 많은 비로 산사태 등이 발생하였고 적이 고기를 선점하여 방어벽을 구축하여 저항함으로써 진출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악조건을 물리치고 군단은 마석봉-성곡령-757-도솔산-916-981고지를 연하는 신캔사스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다-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명당산(764)의 유해는 머리가 없었다
명당산은 월학리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월학리 월학초등학교 입구에 참전용사는 아니지만 여군중사로 전역한 분이 칠순이 지나 이곳에 혼자 살고 계셨다. 그러나 한참 후배인 우리를 보고 고생한다며 집에서 커피도 대접하시고 동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고 실제 나서서 관련 마을사람들을 소개해 주셨다.
[걸어가면 해골이 발에 걸렸다]
"마을 전 이장" : 저기 절이 있는 좌측에 밭이 전쟁때에 시신을 매장했다. 전쟁이 끝나고 언젠가 군인들이 와서 파긷도 했는데 다 파 파낸 것인지는 모르겠다. 절 들어가는 입구 마당 둑방에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당시 명당산에는 시신이 그저 걸어가면 발에 걸렸다. 필요하면 같이 탐사에 가겠다.
전사 기록에 453번도로 "서화축선의 우측 능선 접근로를 공격한 제36연대는 의외로 별 저항없이 1242고지를 점령하여 공격발판은 확보하였으나, 소양강 계곡 통로의 우측 종격실 능선을 따라 진격한 제27연대는 명당산 일대에서 적 1개 대대규모의 강력한 저항으로 공격이 돈좌 되었다. 대대는 수류탄만을 휴대한 특공조를 투입하여 결국 5시간의 치열한 근접전투로 136명을 사살하고 명당산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 이야기가 당싱에 시신을 노무자들이 끌고 지금 절(당시는 없었음)앞 계곡으로 내려오다 놓고 가버리기도 했다 한다. 실제 나도 몇군데를 파서 군인들 유품 중에 철모나 탄피들을 주워서 엿장수에게 주고 엿을 먹기도 했다.
[내 발길 앞에 놓여진 피가 아직 마르지 않은 이름모를 새의 두 다리]
나는 어느날 이 분을 모시고 실제 명당산을 탐사했다. 대대 수색중대 인원이 완전무장으로 우리를 호위하고 계곡을따라 산길을
따라 오르는데 갑자기 내 눈에 피가 아직 남아 있는 두 다리가 던져 졌다. 닭이나 꿩도 아니다. 제법 길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두루미 정도는 된다. 도대체 이것이 왜 내 눈에 나타났을까, 앞서간 수색대원은 보이지 않았다 한다. 나는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용사님, 용사님을 찾아가는 저희를 보호 하소서"
그리고 올라서니 산 정상의 고지 주변에 개인호가 수백개는 되는 듯하다. 전사 내용대로면 북한군이 이 호에서 결사항전 했고, 우리는 또한 수류탄을 들고 육탄전을 감행했으니 적군 136명을 사살했다면 우리도 피해는 상당히 있을 것이라 분석된다.
[머리부분은 없이 몸둥이리만 발굴되다]
우리는 제보지역인 절 입구 방벽과 그 좌측 밭 입구일대를 발굴하여 몇 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명당산 발굴작전이 개시 되었는데 50여 구의 유해가 전부 머리부분이 없이 몸둥아리만 남아 있었다. 명당산에서 피양동-749-810-동개동-981고지로 이어지는 산악지대에서 발굴되는 150여 구의 유해 대부분이 머리는 없이 몸체만 발굴되어 무슨 사연이 있는지 의문점이 남았다. 그런데 그 답이 한 1년여지나서 홍천 가리산 탐사간 실제 명당산 전투와 개고개 전투에 참여한 참전용사님을 만나게 되어 수수께끼가 풀렸다. 다음 문항이다.
나. 두개골만 낫으로 잘라 가마니에 넣어 지게에 지고 밤새 날랐다(실제 당사자 참전용사님이 증언)
나는 홍천의 가리산(1080)과 벙커고지 일대를 탐사하다 하루는 가리산 자연휴양림으로 내려와 천현리로 지나다가 한 어르신의 집 문패에 "국가유공자의 집"이라 하여 들어가니 마침 집에 계셨다.
"혹시 6.25전쟁 때에 어느 곳에서 전투했습니까?"
"내가 5사단에서 뭐요 명당산, 개고개에서 전투했고 부상으로 후송을 가 있을 때에 휴전이 되었고 월남전에 갔다 왔지요"
"예, 저희가 전년동에 명당산에서 개고개에 이르는 산악지형에서 유해를 거의 100여 구를 발굴햇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유해가 목이 없이 발굴되었습니다. 혹시 아시는 것 있습니까?"
[내가 직접 그 당사자요]
"내가 처음에는 노무자로 들어가 한 일이 지게 지고 다니면서 죽은 군인의 목을 잘라 오는 일을 했어요. 가마니를 이용하여 목을 잘라 담아오는데 하루에 10명의 목을 벵어와야 하는데 죽을 지경었어요. 그런데 제대로 안하면 통제하는 중사가 가민있질 않아요. 아닌 말로 죽여버려도 됩니다.
"아니 직접 그 일을 하셨다, 그러면 명당산 잘 알겠네요?"
"잘알고 말고 지금도 그 산이 있나요?"
"지금은 잡목이 우거져 있지만 고지 정상 부근은 아직도 나무가 없이 벌거숭이도 개인호에서 5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어요"
"우리가 전투하고 있을 때는 그 밑에 강이 있는데 거기 어딘가 화장터(원통리 월하동?)가 있는데 연대에서 운용했지"
"혹시 그때 목을 가져온 분들이 아군인지 북한군이지 구분해서 아군을 가져오셨는지 북한군을 가져 오셨는지요?"
[우리가 지금 생각하면 죄인이요, 낫으로 목을 자르는데 어떤 사람은 2시간이 걸리기도 해~ ]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밤에만 그것도 전쟁이 끝나가는 시간부터 새벽까지 하는데 우리가 누가 누군지 뭐 알고 하겠어요, 숫자만 채우면 되는데 폭탄이 터지지 어떤 경우는 숨어있던 적군이 총을 난사하여 동료들이 죽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 아수라장인 개인호나 교통호 또는 격전지 일대에 달빛에 비칠 경우에는 그래도 대충 골라서 자르지만 당시는 비도 많이 내리고 칡흙같이 어두워서 손으로 이렇게 돌려보아 머리가 잡히면 우선 잘랐고, 그러니 지금은 너무 그분들께 너무 미안합니다"
"참 무서울 때가 있는데 어떤 전사자는 목을 낫으로 베는데 30분도 안걸리는가 하면 어떤 전사자는 2시간이 넘게 걸려요. 비는 내리지 포탄은 덜어지고 있지 언제 적군이 따발총을 쏘면서 나타날지도 모르지... ."
[지게에 지고 오다 귀신이 온 줄 알고 지게 놓고 도망도 쳤어요]
고생하셨습니다. 하기야 그당시에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많은 인원이 국군의 복장을 착용하고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선별이 어렵겠어요. 또 많은 인원이 폭탄에 신체가 파열하여 누가 누군지 모르잖아요
"잘 알고 계시네요. 전쟁은 정말 비참합니다. 전쟁을 안해본 사람은 이해 못합니다"
저도 작년에 명당산을 탐사하러 올라가는데 그 산 길에 갑자기 무슨 큰 새의 다리뼈에 살점과 피가 묻어 있는 체로 눈앞에 나타나 등골이 오싹하여 그 자리에 서서 용사님께 보호해 주시라고 묵념을 올리고 명당산에 올랐습니다.
"아이고 말도 마소, 한번은 지게에 지고 산길을 내려서다 힘들어 잠깐 쉬고 다시 지게를 지려하는데 옷이 날 잡아 당겨서 깜작놀라 보니 그 잠깐 사이에 피가 옷에서 말라 뻣뻣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다시 지게를 보니 목에서 흐르던 피가 제게 등받이에도 흐르다 멈춰서 붉게 굳어 있어요."
그래서 언제 현역으로 되었습니까?
"개고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지금 화학대가 있던가 부대 뒷산인데 내려서면 개천이 있고 다시 고지로 올라서게 된는데 거기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한 20명이 현역으로 되었어요. 그리고 개고개 981고지인가 지금 아마 포병사격장이 보이는 곳인데 거기서 정식 입대한지 하루도 안되어 부상으로 후송되었다가 휴전을 맞이했고, 원대 복귀했다가 월남에도 갔다 살아 왔어요"
다. 천도리 피양동 고지에 남겨진 국군 유해
사실 "국군 제5사단은 앞에서 언급되었지만 공산군 보급대"란 오명을 갖고 있다. 유해 소재 관련 자룡에서 보면 제5사단은 가장 전투를 치열하게 했다는 '51.9~10.14일까지의 가칠봉 전투에서는 기록자체를 남기지 못했도, '52. 7.10~11.10일 강원 고성지역의 351고지 전투에서 전사 182명, 실종 108명, 미수집 51명을 남겼고, 가장 피해를 남겼다는 휴전 직전의 지금 평화의 댐 북방 동족 능선 883-973-949고지 전투('53.5.1~6.31)에서는 686명의 미수집 기록을, '53.7.13~14일 화천 북방 백암산 전투에서전사 209명, 실종 361명의 기록을 남겼다.
그러니 이곳 개고개 전투는 거의 2주간의 백병전을 방불케하는 전투를 했고,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데도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의문점을 남긴다. 하지만 전쟁을 하지않은 나로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피양동에서 동개동에 이르는고지는 거의 700고지 이상이지만 사실 지표면이 높기 때문에 오르는데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그런다 보니 전후에 많은 전투진지 공사가 이루어져 당시 개인호나 반유개호에 있었던 유해들이 파헤쳐서 벌였다. 그래도 그 당시는 누구도 그걸 말리거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군인이나 주민도 없었다.
[아니 배고픈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해골이 무섭지 않았어요]
천도리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우리 단복을 보고 한 할아버지가 물어오셨다.
"앞에 양반들 그 옷에 글자가 뭐하는 거요?"
네, 우리는 유해발굴단으로 전투지역에서 전사했으나 찾지 못한 유해를 발굴하러 전투지역도 올라가고 지역 주민의 제보도 받고 합니다. 할아버지 이곳이 고향이에요?
"내가 이곳에서 평생을 살았고, 그 당시에 전쟁 직후 군에 갔다와서 배고픈 시절에 먹을 것이 없고 논전답이 없으니 가난해서 힘들게 살았지요"
그럼 할아버지도 이곳 산에 올라가 나물도 채취하고 탄피도 줍고 했겠네요?
"맞아요, 동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산으로 올라갔지. 그래서 옷을 보고 생각이 난거요. 저기 화학부대 뒤인가 그 곳으로 올라다니다 보면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되어서는 해골이 구덩이 마다 있어요. 그곳에는 나물도 잘 자라고 더덕이 큰게 많아요. 그걸 갔다 팔면 돈이 되는데 수입이 좋았어. 그러니 그 해골이 무섭지 않아. 발로 밀면 데구르 굴러가버려요. 지금도 남아 있는지 모르지... ."
라. 칠성고개- 봉화산에 남겨진 혼령(서울 내과 병원장의 제보, 전쟁직후 군의관으로 근무)
전사에 보면 칠성고개와 봉화산 지역이 엄청난 전투가 있었다고 기록된다. 그래서 우리도 자주 접근이 어렵지않아 탐사를 자주했고, 원통리의 화장터(개고개 전투 참전용사님 증언)를 찾으려 노력했다. 왜냐면 당시의 화장병 하신분들의 잉야기를 몇 분한테 들었는데 너무 아픈 증언이었기 때문이다.
[화장병 참전용사 증언 기록]
가. 저격능선전투시 제2사단 화장병(제15사지역 말고개 포병부대 지휘소 앞 공터) : 하룽에 한 두번씩 죽은 군인이 오는데 병과 장교를 구분하여 화장하는데 병은 뭉뚱구려 함께 화장하고 장교는 한 명씩 별도로 구분하여 줄줄이 놓고 화장한다. 그런데 잘되는 날도 있고 하다가 비가 내리던디 아니면 적 폭탄이 덜어져 도망쳤다 하는 경우는 잘 안되어 해골이 그냥 있기도 한다. 그러면 바로 저기 냇가가 있었는데 그곳이나 포탄이 떨어진 움푹파인 곳에 밀어 넣어버리고 화장을 마무리 한다.
우리는 이 증언을 현장으로 직접 모시고 와서 들었고, 그 부대 안에서 30여 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화장터는 부대 지휘소 앞 연병장인대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그 실체는 완벽하게 문화제 발굴 하듯이 굴토하여 장교들과 병(하사관 포함)을 구분하여 화장한 모습을 그대로 확인했다.
나. 제6사단 화장병 증언('51. 6월 화천 발전소 맞은편, 그 뒤로 몇군데 옮겼단다) : 노무자들이 먼저 마른 가지나무를 해오도록 시키고 기름을 준비해 논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포성이 들리고 조금 있으면 트럭에 통상 시신이 들어 온다. 부관병들하고 통제하는 간부가 서류 뭉치를 갔고 대기한다. 이미 신원확인은 대대나 연대에서 끝나고 화장터에서는 화장을 하여 시키는대로 화장재를 유골함에 넣는다.
하지만 갑작스레 적들이 기습도 하고, 박격포탄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다시 땅을 파기가 시간이 없기 때문에 통상 그자리에 다시 하곤 했다. 솔직히 정확하게 누굴 구분하여 화장했다고는 말 못하겠다. 정말 그 분들께 죄송한데 그때는 우리도 어쩔수 없는 방법이었다.
화천 발전소 근처 말고도 휴전 말기는 북한지역 교암산이 있는 성산리 남안 금성천 변에서도 하다가 폭탄이 떨어져 그대로 놓고 주파령 밑으로 후퇴하여 화천 사방거리 어딘선가도 화장터를 만들었다.
[고기잡이를 하는데 그물에 군인이 올라왔다, 5사단 수색대원이다]
나는 이분을 모시고 화천 구만리발전소 앞으로 갔다. 하지만 너무 지형이 변하여 찾을 수 없었고 간동 면 유촌리 초등학교 지역으로 옮기고 오음리 월남파병장병 용사 만남의 장까지 안내해 드렸다.병풍산 우측 방천고개도 올랐는데 기막힌 제보를 했다. 휴전이 되기전에 큰 전투가 없어서 후방의 군인들은 제법 여유 있는 나날이 몇일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는 계급도 올라서 상사인데 상급자를 위하기도 하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민간인 배를 이용하여 고기를 파로호(당시는 화천댐) 에서 고기잡이를 했다. 얼마나 크니 남자 허벅지만 하고 붕어도 별별 고기가 엄청나게 많아서 대원들도 잘 먹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상한 검푸른 물체가 엄청크게 물 수면 위에 떠 있어 꼬챙이로 올려보니 아뿔싸 군복과 방탄복을 입었는데 5사단 마크가 어깨에 선명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이선배님은 민물고기를 먹지 못한다 한다.
[국군 제5사단 수색대가 물속에 빠져 전사한 전투?]
이 사실은 나중에도 언급하겠지만 실제로 국군 제5사단이 '52. 7월~11월까지 고성에서 351고지 전투를 하고 작전지역을 국군 제15사단에 인계하고 간성으로 내려와 부대정비와 훈련을 실시하고 '53년 4월에 김화로 이동하여 북한강 동쪽의 국군 제3사단 지역을 인수하는데 중공군 최후공세인 '53. 6월 공세시 중공군 제60군이 국군 제5사단의 주저항선인 949.973.883고지를, 중공군 제68군은 북한강 서안의 국군 제8사단의 지형능선. 수도고지를 공격하였다.
당시 제5사단은 '53.4. 15일에 제3사단과 교대하여 북한강과 금성천의 분기점으로부터 동으로 통선골까지 949-973(서측 500m지점이 마의 돌출능선)-883고지로 형성된 주저항선을 방어 중이었다. 제5사단장(최홍희 준장)은 제36연대를 주저항선의 좌반부 548-949고지(우두산) 제27연대를 우반부 973-883고징에 배치하고, 이를 전방 연대로써 삼각봉-두경봉-748고지(피의 고지)-689고지(텍사스고지)-오봉능선-승리봉에 소대 규모로 전초를 운용하며 적과 대치 중이었다.
사단의 주보급로는 북한강 동안ㅇ에 개척된 강변도로가 유일한 것이었고, 낡은 터 북쪽에 작전용 교량으로 도보교와 철판교가 가살되었고, 이곳 강변과 629고지 간에는 보급추진용 케이불카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밖에 후동-황병동 간에도 작전용 교량이 설치되어 있었고, 제901부교중대가 당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중공군이 '53년 6월 10일 일몰과 대를 같이 하여수개 제파로 여러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이른바 중공군 "6월 공세"로 불리는 대작전이 펼쳐진다.
결과적으로 사단은3끼를 굶고, 매일밤 중공군의 공격에 수면을 취하지 못해 극도로피로한 상태였으며 많은 전우를 잃어 사기가 극도로 저하 되었다. 14일 저녁 전선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병력들이 황병동으로 몰려들었다. 사단장은 629고지의 케이불카를 폭파하고, 공병대대장에게 북한강 상의 교량폭파에 만전을 기하라 지시한다. 이미 상황은 수습불가로 악화된다. 이에 군단장인 정일권 소장은 현 전선인 미조리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보고 제5사단을 금성천과 북한강에 연한 방어선인 아이스란드선으로 철수시켜 양지촌(462)-후동-널우골(748)을 점령하도록 조치하였다. 이 제 사단은 15일 00:50분부로 철수를 명하였다.
그러나 제1103야전공병단이 북한강 상의 작전용 교량을 02:30~03:00에 폭파시켰다. 이 폭음은 철수하는 병사들을 더욱 놀라게 하였고, 교량이 파괴된 뒤에 적의 추격을 피해 도착한 병력들은 일부는 헤엄쳐서 일부는 보조물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야 했다.물론 중장비의 철수는 불가하였고, 지원된 미군의 중박격포대대도 박격포를모두 파괴하였다. 바로 전쟁 초기 한강교 폭파와 같은 상황이다. 아침 07:00시에 날시가 개이면서 유엔공군기의 한국전쟁 사상 1일 최고 출격횟수인 2,143회의 폭격지원으로 중공군 진지와 병력을 강타하여 돌파구 확장과 추격을 차단하는데 큰 몫을 한다.
이 6월 대공세에 앞서 중공군은 5월 27일부터 아군의 전초에 대해 공격을 가해 ' 우선 주공인 제20병단 예하 제67군의 제2200 및201사단은 5.27~6.4일 사이에 금성 동쪽 국군 제6사단 전초 돌고지(B고지) 와 수도사단의전초 지형능선과 수도고지를 공격하여
이 중에 돌고지와 , 지형능선 끝의 난초고지를 점령하였다. 또한 같은 시기에 제60군의 제181사단은 국군 제5사단의 949고지 전방 피의 고지, M1능선, 두경봉 전추를 공격하였지만 이 공격은 격퇴 되었다.
이 무렵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 제19병단의 공격으로 역곡천 남안 전초에서 혈정이 벌어졌다. 5월 28일 밤 중공군 제46군 제120사단이 미 제25사단에 배속된 터키여단의 네바다고지군이라 불리는 전초 베가스. 엘코. 카슨을 공격하여 ㅂㅔ가스 전초는 5번이나 뺏기고 뺏는 전투로 확보한다. 카슨은 상실하였고 엘코는 미군에게 간신히 인계하였으나 결국 피탈되었다. 여기서 터키여단은 중공군 3,000명을 살상학고 5명을 생포하였으나, 전사 151명. 부상 239명에 2명 실종자가 발생했다.
같은 때에 중공군 제46군 제133사단은 이 네바다고지군 우측의 영연방 제1사단이 방어중인 후크고지(150)를 공격했다. 영국군은 진내전까지 치르면서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적은 170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난다.
한편 중동부 전선의 북한군 제3군단은 미 제10군단의 소양강 상류 금강산-서화 접근로 상의 양견부 812(지금의 쌍용고지 서족 1KM)-854고지를 중공군 보다 며칠 늦은 '53.6.1일부터 공격한다. 결국 812고지는 피탈되고 쌍용고지-854고지선은 확보한다.
동부전선은, 국군 제11사단이 월비산은 상실하였으나 351고지를 확보하 채로 '53. 1. 30일에 국군 제15사단에 인계하였다. 제15사단은 '52.11월 8일에 창설하여 부대교육과정을 거쳐 전선에 투입되었다. 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7군단 예하 제3 및 제7사단이었다. 이전투(6.2~6.5)에서 결국 전사 222명. 부상 537명. 실종 11명이 발생하면서 적에게 넘겨 주었고, 결국 우전방 339고지도 적 7월 오세시 적의 수중으로 넘어 갔다.
다. 문산 해병대 화장장소 참여한 소년의 증언
파주 봉서리 통일동산 자리가 6.25전쟁 당시 문산 북방 도라산지역 전투 등 해병연대가 '53년 전쟁을 마무리할 때까지 이곳에서 하장를 실시한다.
나는 파주일대 탐사 및 탐문활동간 많은 재보 / 증언자를 만났다. 그 중에 한 분이 12살 나이에 이 화장터에 나가 화장장인 하사의 친구처럼 옆에서 심부름도 하고 먹을 것을 얻어 먹고 있었다. 부모님들은 피난가고 없었고 동네는 주로 연세많은 노인들이 주였고 아낙네들이 남아 있었다.
"아니 그래도 어린 나이에 그런 곳에 가기가쉽지않을텐데 어덯게 가셨어요?"
"내가 어렸으니까 갈 수 있었지요. 그때는 여기저기 프락치들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아차하면 소리없이 죽어요"
"그 당시에 파주지역은 수복이 되었는데도 공비들이 숨어서 할동했습니까?"
"그럼요, 말이 수복이지 언제 처 내려올지도 몰라요. 어수선하잖아요. 동네 사람들은 피난갔다 일부가 속속 집으로 돌아오는 상태였는데 군인과 경찰이 통제가 심하고 검문검색도 많았어요"
"그러면 화장은 자주 있었습니까, 누가 화장을 해요?"
"해병대 하사인가 중사인가가 대장이야, 그리고 노무자라 하나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해오고, 총들고 있는 군인들이 데리고 다녔어요. 시신을 실고 군대 차량은 매일 아침이나 오후에 오는데 군복을 모두 입고 있어요. 하지만 어떤 군인은 얼굴이 안보이고 팔 다리가 없는 경우도 있고 얼굴이 깨져버려 피투성이로 와요"
"화장하고 나면 어떻게 하는지 보았습니까?"
"다른 군인들이 모여 앉아서 나무로 된 조그만 상자에 담아서 광목천같은 것으로 싸서 차에 실고 갑니다. 그런데 전쟁이 이곳에서 길어지면서 유가족들에게 아무 화장을 여기서 한다고 알려진 모양인지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주변에 있었어요. 그 분들 중에 몇 몇이 화장장에게 다가와 뭔가 협상을 하는 모습도 보았어요"
[어떤 분은 팔뼈, 어떤 분은 허벅지뼈 하나씩 저 구석에서 들고 가더라고~]
한편으로 충격적이고 그럴 수있느냐고 분통의 눈물도 났다. 하지만 돌아서 가만히 생각하니 이렇게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전쟁나가 전사했는데 전사통지서도 없고, 피난통에 소식을 주고 받을 수도 없고 정말 내 자식이 내 형제가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유가족 입장에서는 귀신이라도 잡아야 할 입장일거다. 그러니 그래도 찾아 갈 수 있는 이곳 파주에 와서 그 흔적을 가지고 가서 "봐라 내가 가서 내 자식을 내 형제를 모셔왔다, 이래도 전사자 아니냐"고 들이대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입장을 이 유해발굴 작전을 통제하면서 발견했다. 비록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전쟁 통에 목숨을 잃었음은 분명할거다. 물론 총을 들고 전쟁터에서 목숨을 받치면 최고다. 하지만 전쟁속에 어디선가 죽어간 그 인원도 전쟁의 피해자다.
[이 싯점에 국가는 보도연맹이든 부역자이든 그 영혼을 달래줄 수 있도록 국가적 차원에서 그분들도 발굴하라, 천도제를 올려라]
국가가 정상적으로 국민을 보듬어 부흥시키고, 교육시키고, 방송이든 신문이든 관련 사실을 제대로 알렸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공산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설영 되었다 치더라도 70년전의 우리 사회는 무정부 상태라할 수도 있다. 박헌영이 날뛰고, 김달삼이 이덕구가 이현상이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에 국가의 잘못도 인정해야 한다. 비록 "국가 유공자"란 비싼 단어는 못 붙이더리도 "그시대 피해자"라는 단어를 붙여서 합동 위령제와 발굴하여 한 곳에 묘지를 만들고 위로관을 건립하여 그 영혼을 보듬어줘야 한다
라. 향로봉 방어 전투
제13연대
건봉령
팔음 송죽리
제26연 간성
*1079
*향로봉
신평 *504
원봉 삼포리
제1기갑
칠절봉 수도사
신선봉 용포리
천도리 용대리 미시령 속초
제1연 제20연
당정곡 제9연 하도문
마등령
제5사 캔사스선
원통 설악산 11사
가리산 한계령 마산 가라피 양양
제18연
5월 말 향로봉 산맥으로 진출한 국군 제1군단의 수도사단은 제1연대를 당정곡-칠절봉에, 제1기갑연대를 원봉 정면에, 제26연대를 향로봉-건봉령에 배치한 후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전방지역에 위력수색을 실시하였다. 좌인접에는 미 제10군 예하의 국군 제5사단이 인제-원통 선에서 신캔사스선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전방의 북한군은 제13사단 제19연대로써 서화리-산두곡산 일대에 강력한 진지를 편성하고 중동부에서 후퇴하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었다.
6월 3일 15:00시에 적 1개 중대규모가 선제 기습공격으로 제1연대의 칠절봉 부근 주저항선에 돌파를 기도하였으나 격퇴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짙은 안개로 관측이 불가한 틈을 이용하여 제1기갑연대의 전초기지인 산두곡산과 원봉 전방의 1209고지, 제1연대의 칠절봉으로 공격을 재개하였다.
한편 군단장은 좌인접 국군 제5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사단의 일부 병력으로 서화리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사단은 제1기갑연대 제3대대와 칠절봉 부근에 배치된 제1연대 제1대대를 6일 06:00시에 칠절봉-대곡리-평촌을 연하는 계곡을 따라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복귀하였다.
이 무렵 군단 후방지역에서 공산군 패잔병들의 활동은 경미한 반면에 전방의 적 활동이 점차적으로 증강되자 군단장은 주저항선 방어태세를 보강하기 위하여 부대 배치를 조정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군단의 계획에 의거 대승령 일대에서 측후방을 방어하던 제11-9연대는 간성 북쪽에 배치하고, 용대리-미시령을 방어하던 제20연대는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제1연대의 당정곡-매봉산 지역을 인수하게 하였다. 이로써 군단은 당정곡-향로봉-건봉령-거진을 연하는 신 캔사스선에 좌로부터 제20, 제1, 제1기갑, 제26, 제13, 제9연대를 배치하여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다.
수도사단이 방어진지 보강에 주력하고 있을 무렵 8일 09:30분 경에 향로봉과 그 북쪽의 1079고지로 적 1개 대대 규모가 침투하여 한때 주저항선이 돌파되었으나 곧 격퇴되었다.
결국 적은 이 전투에서 주력부대를 상실하고 고성리 방향으로 철수하게 되고, 국군과 유엔군은 중서부전선의 와이오밍선과 중동부 전선의 신캔사스선을 확보함으로써 한강하류-문산-전곡-연천-철원-김화-산양리-펀치볼-서화-거진 선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전곡 동쪽의 부대들은 캔사스선 보다 16~48km 북쪽으로 추진 배치되었다.
이 재반격작전에 의거 지난 춘계공사 이후 궁지에 몰린 공산군은 궁여지책으로 휴전협상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공산군은 협상을 미끼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전력 증강에 혈안이 되었다.
(4-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지금 생각하니 향로봉 산맥 능선에는 발로 밟고 다닌 유해가 많았다.
지금 기록하고 있는 향로봉 전투 관련 결과는 앞에서 대부분 언급되었다. 이곳은 이렇게하여 신켄사스선이 확립되어 마지막 휴전까지 고지전이 지루하게 진행된다.
전사에도 나와 있는 대로 일시적으로 적 1개 대대가 향로봉 북쪽의 1079고지를 '51.6.8일 공격하여 제1기갑연대 제1대대가 일시적 피탈되기도 하면서 결국 12일까지 향로봉과 1079고지. 향로봉 서쪽의 940고지마저 수중에 넣으면서 8차례의 적의 반격을 물리친다.
그러니 능선과 고지마다 적군의 시체는 말할 것도 없이 일부 포탄 등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몸이 망가진 국군 용사 일부가 산에 남겨졌다고 봐야 한다.
이곳에서 근무한 인원들의 제보에 의하면 수색정찰간 많은 수의 유해를 목격했다고 한다. 하지만 매설된 지뢰의 안전성 문제 등으로 들어갈 수 없던 시기라 그대로 바라만 보았는데 어느 시기인가는 보이지 않게 된다. 그것이 추정컨데 산속의 멧돼지 떼들이 먹었을 것으로 본다. 멧돼지가 사람 뼈를 좋아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