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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열 생도시절 추억 <1>
-1969년 백마동기 7명 설악산 등반에 부쳐-
2007년 대열산악대장을 처음 맡으며, 그해 회장단(첫 문민회장 김종문)에게 당시 과제였던 입교40주년 행사 아이디어의 하나로 모교방문을 제안하면서 따로 궁리했던 것이 있다. 보관 중이던 내 육사일지에 명기된 생도시절 일화들을 카페에 옮기고 관련된 케케묵은 흑백사진도 실어 그 옛날을 회상하려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게으름과 망설임으로 차일피일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산악대장을 계속 맡으며, 내 산행의 역사적 기원(起源)이 됐던 생도시절 백마중대 동기 7명의 설악산 등반과, 조난당할 뻔했던 추억이 새삼 떠올라 당시의 사진을 올려보려 했지만, 역시 차일 피일 6년여가 흘러갔다.
그러던 중 당시 함께 설악산을 올랐던 오면수가, 이후 반복된 설악산 등산 회고담 끝에 내가 당시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사본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원본을 주면 스캔이라도 하겠다고 해, 결국 내가 벼르던 일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 빛바랜 사진을 접사(接寫)하고, 그때의 이야기를 되살려 그 잊을 수 없는 추억을 함께 되살려 보기로 한 것이다.
자칫 조난당할 뻔 했던 설악산 등반은, 군사훈련이 아닌 등산으로서 내겐 첫 경험이었고. 이후로도 내 인생에서 산과 친해지고 이해하면서 즐기게 된 계기였다. 그러니 1969년 설악산 등반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대한민국 남반부에서 3번째 고산(高山)인 설악산 등반과 겪어낸 고통은 그해 하기휴가 직후의 하훈 유격훈련을 야만적(?)으로 잘 받아내게 했다.
그러나 첫 임지 백암산줄기에서 1천 미터 이상 고지를 무시로 오르내렸고, OAC후 강제 배치된 특전사에서 다시 혹독한 오지 산악을 헤매며 차디찬 땅속 굴에서 잠자리를 가졌던 내가, 산에 진절머리 넌덜머리를 내는 건 당연하고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가? 1977년 이후 민간인과 함께 하는 직장에서 1년이 지나자 무슨 조화인지 그 지겨운 산에 대한 향수가 나를 걷잡을 수 없게 해, 민간 대학산악부 출신들과 산악작전이 아닌 등산에 심취하는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절대 잊지 않고 유념했던 것의 하나가 산에 대한 두려움을 잃지 않고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바로 그 산에 대한 외경(畏敬)심을 평생 가지게 해준 것이, 바로 1969년 혈기왕성(血氣旺盛)하던 시절, 멋도 모르고 올랐다가 된통 혼이 났던 설악산 등산에 대한 추억이고 교훈인 것이다.
이제 당시를 회고해 본다. 마침 그 상황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사진이 아직 남아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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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6월28일 토요일. 우린 하기휴가 출발 전 군장검열을 받는다. 바로 전해인 1968년 생도로선 정규장교유격훈련을 처음 받은 26기의 무슨 경험 전수(傳受) 명목의 드잡이기도 하다. 터키 하원의장 방문에 대한 퍼레이드도 마치고, 휴가출발 신고도 마쳐야 했다.
설악산과 동해방면으로 휴가행선지를 잡은 백마 7명은 14시에 청량리역에 집결했다. 그런데 같은 휴가 계획을 가지고 같은 방면으로 가려고 모인 생도들이 44명이나 된다. 거기서도 휴가복장이 정복이 아닌 작업복을 입었다고 문제 삼는 상급생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린 설악산을 올라야 하는 입장인데 그런 이해도 없이 말이다.
중앙선 열차는 영주에서 동해북부선으로 갈려 다음날 6월29일 09:30경 강릉에 도착.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마치고 설악산으로 직행. 털털거리는 버스로 주문진-양양을 거쳐 동해의 푸른 물결에 심취하며 설악산 입구 어촌에 내렸다. 성사현의 견장 때문에 일행이 늦어져(견장 때문이란 이유가 무엇이었던지 기억이 나지 않네), 해변의 꼬마에게 뱃놀이를 부탁해 즐기는 여유를 가지기도 했다.
설악동입구부터는 마이크로버스로 20여분 가, 신흥사에 여장을 풀고 바로 울산암으로 직행, 청류의 계곡과 울창한 숲과 그 사이로 우뚝 솟은 울산암에 그대로 빠져들고 만다. 아! 역시 듣던 명성 그대로 설악산이구나! 하면서.
사실 나의 이 설악산행은 오면수와 둘이서 하려던 것인데, 방향과 일정이 같아 정상화-노행환-김형석의 팀과, 또 이해호-성사현의 팀이 합류해 모두 7명의 8중대 팀이 이뤄진 것이라고 당시의 일지가 기록해 주고 있다.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당시의 일지를 그대로 옮겨본다. “ 말로만 듣던 흔들바위와 계조암은 울산암 바로 밑의 계곡에 커다란 암석이 몇 개 놓여진 기슭에 차지하고 있었다. 말이 암석이지 여기서부터는 대개의 암석이라 함은 대체로 집채의 서너 배 정도의 크기다. 가파른 언덕을 다시 오르며 울산암에 바짝 다가서면서, 눈에 생생한 건 계조암의 스님의 맑고 싸늘하게 보이는 눈길이었다. 무척 압박을 받았던 게 사실이었다. 나무 그루터기가 여기저기 나둥그러져 있고 그대로 선 채 썩어 나자빠저진 원목이 흔했다. 울산암! 한 골짜기를 완전히 둘러쳐 막고 있는 병풍, 바로 그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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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기록은 없다. 중단됐던 일지는 유격훈련 부분도 없고 병과학교 순회교육부터 다시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설악산 등반에 관한 이후의 스케치도 아직도 생생하다고 믿는 내 기억에 의존할 뿐이다. 그 기억을 여기 접사해 올리는 사진이 도와 줄 것이다.
한편 내가 간직한 사진에선 성사현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 때 카메라를 가져와 친구들 찍어주기 바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인데, 확실치 않다. 43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니 많은 착오가 있을 것이다. 함께 했던 친구들의 즉각적인 시정이 따라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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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누구야? 해호와 행환이? (강릉에 내려 아침을 먹었지) 003
견장 때문에 일정이 늦어진 중에도 설악동입구 어촌에서 뱃놀이를 여유있게
즐기는 건 당시에 함양된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소산? (면수 명수 행환)004
우리가 여장을 풀었던 신흥사. 지금처럼 무슨 호텔 같은 상용 숙박시설이 드물었던 그 시절엔 절에서 이렇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으니. 합장! (007↓)
신흥사에 여장을 풀고 바로 울산암을 향해-흔들바위를 한 번 떨어뜨려 볼 양으로 힘을 다하며, 떨어뜨리면 신문에 나고 책임추궁 당하면 어쩌지 하는 괜한 걱정도 했다. 하지만 역시 역부족이었지요! 괜스레 계조암 스님의 냉냉한 눈총만 받았을 뿐. 009
그럼에도 주변의 바위와 나무가 멋져, 기어오르거나 대롱대롱 매달리며 재롱(?)을 떨었으니, 그만큼 설악의 자태에 넋을 빼앗겼던 듯 010 011 013
울산암 바로 밑에는 당시에도 머루 주스였던가? 뭐 그런 종류의 음료수를 판 듯하다(컵을 보면 그렇지요?). 그 옛날 장수들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 폼을 잡았지만 지금 그 얼굴들 보니 정말 애송이구먼 그려 014 015
드디어 울산암을 올라 정상을 정복하고, 속초바다를 조망하며 나름대로의 요즘말로 갖가지 정복 세리머니를 (누가 누군지 얼굴 다 알까?) 016 017 018
이튿날 새벽에 신흥사를 출발해 설악산 정상을 오르기 전에 찾은 비룡폭포-
흔히 용소(龍沼)라고 해 깊이를 알 수 없고 소용돌이치며, 빠져죽은 귀신들이 잡아당긴다 해서 선 듯 들어서기가 망설여지는 물웅덩이에 겁도 없이, 그리고 여름이긴 하지만 수초 만에 입술이 새파래질 만큼 차가운 폭포수에 몸을 담글 수 있었던 우리. 그게 바로 아~젊음이여! 019 020
폭포를 다녀와 신흥사에서 아침을 먹고 정말 정상을 향해 호기롭게 출발하는 설악의 7인!! 021
이날의 코스는 대충 그려진 설악산 요도를 따른 것이었는데, 비선대를 기점으로 동편의 아득한 금강굴 벼랑길로 마등령에 오르고, 다시 오세암으로 내려섰다가 가야동계곡을 타고 올라, 봉정암으로 소청봉~중청봉을 거쳐 정상 대청봉에 올랐다가 천불동 계곡으로 내려서기 했던 것이다.
기점인 비선대의 등산로 입구-내 기억으로는 당시 설악산 등산로는 바로 전해인 1968년에 처음 만들어졌기에 모든 것이 아직 불비한 상태이다. 사진의 기념비가 바로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022
비선대 금강굴-설악산을 등반한 이들은 알겠지만, 부처님도 모셔진 암굴인 금강굴은 비선대에서 쳐다보면 아득한 절벽 한 가운데 파여 있어, 그곳을 다녀오자면 많은 힘을 소진하게 된다. 등산객들도 보통은 험준한 마등령 길 오르는 것만도 부담이 되는데다, 다시 옆길로 새 한참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야 하는 금강굴까지 다녀오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어서 대개 포기하게 된다.
그러니 당시 우리 일행도 일부만 금강굴을 다녀온 것으로 기억된다.( 아닌가? 사진에선 나와 상화, 촬영자는 면수였던가 해서 말이지) 023
마등령길은 정말 험했다. 한 해 전에야 겨우 개통된 등산로이니 더욱 험했었을 수밖에. 고
개를 잔뜩 뒤로 제쳐야 보이는 전방의 오르막 봉우리! 아 저기가 마등령 정상인가 보다 하고 올라보면 다시 버티고 선 새로운 고개 마루! 이렇게 몇 번이나 속으며 힘들고도 지루하게 오른 계단식 봉우리가 하도 지긋지긋해 "열 한번"이었던 것으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특히 키가 제일 작은 나는 그 가파른 오르막을 해호와 같은 큰 키의 동료들과 보폭을 맞춰 오르자니 일찌감치 다리에 쥐가 나고 말았고, 이후론 길다란 막대기에 의존해 악전고투를 했으니 그 길 더욱 생생하게 기억한다. 026
그런 와중에도 친구들은 봉우리와 능선과 암벽에서 절경을 감상하며 즐길 것은 즐기는 용맹함을 보여주었다. 024 025
마등령을 다 오르기 직전의 한 봉우리에서 우리는 6.25의 생생한 전흔(戰痕)을 볼 수 있었다. 총알구멍이 수없이 난 녹 쓴 철모가 그것이었다.
우리는 저마다 한 번 씩 써보면서 장차 우리가 맡아야 할-선배들이 이렇게 희생되며 지켰던 조국의 보위(保衛)에 대한 사명감을 절감했었다. 빈 말이 아니라 당시엔 실제로 그렇게 우린 철모 앞에서 숙연했었다. 027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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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등령을 넘으면서 우리는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심한 배고픔 때문이다. 아침 출발 당시 적절한 음식을 챙기지 않았다. 요즘 설악산을 가는 사람들이 챙기는 김밥 같은 점심과 초콜릿 같은 간식이나 행동식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생도 고무빽" 하나에 달랑 사이다 3병과 영양건빵 2봉지 정도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물론 우리의 요량은 마등령 너머 오세암이란 암자가 있고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다는 소리도 들은 것 같아, 그곳에서 무언가 보충할 줄 알았다. 그렇지만 정작 오세암에 당도해 보니, 지금처럼 규모를 갖춘 절이라기보다 그저 함석지붕의 시골 "점빵" 같은 일자건물 달랑 한 채였다. 그나마 공교롭게도 주인이 출타중이고 문이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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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배고픔과 피로가 더욱 급격하게 밀려오기 시작했다. 음식 대신 계곡의 물만 잔뜩 마시고 난 뒤 허탈해 하는 이 사진의 모습이 당시의 상태를 여실이 보여주고 있지 않나?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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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이 아끼고 아끼던 영양건빵 한 봉을 마저 나눠먹고 오세암을 떠나, 가야동 계곡으로 봉정암을 향하는데 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거대한 나무와 무릎까지 빠지는 낙엽의 숲길엔 파리들이 윙윙거리는 밀림이었다.
봉정암에 가면 그래도 밥을 얻어먹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그 밀림을 극복하고 닿으니, 여기에도 예상 밖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님이 한 분 계시고 양식도 있었지만 사흘 분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 7명이 한 끼를 얻어먹으면 스님의 그 식량은 단번에 바닥이 나는 꼴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나무대롱을 타고 흐르는 맑고 맑은 봉정암의 약수만 잔뜩 마셔 배를 채우고 당시엔 더 가팔랐던 소청봉 오르막을 오르게 할 뿐이었다.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하지(夏至)를 갓 넘겨 해가 길대로 긴 6월이었지만, 하늘에 남은 해는 노루 꼬리만 했다. 허기가 극도에 달하니 걸음이 느려지고 졸음까지 덮쳐온다. 그 동안의 교육과정에서 터득한 산악작전에서의 주의할 점 정도는 잘 아는 우리였다. 여름이지만 해진 고산(高山)의 기온은 급강하하게 되고 그런 고산에서 졸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그때부터는 솔잎을 씹기 시작했다. 그나마 자양(滋養)을 섭취하기도 하지만 졸음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래도 졸리면 휴식을 위해 졸더라도, 팀을 2개조로 나누어 A조가 가다가 잠자면 B조가 와서 깨워주고, B조가 추월해 가다 자면 다시 A조가 깨워주는 식으로 교대했다. 그 때부터는 등산이 아니라 조직적인 산악행군을 했던 것이다.
소청봉에 올랐다. 중대한 결심을 했다. 더 이상 중청을 거쳐 오늘 목표인 정상 대청봉을 다녀오는 것은 무리라 생각했다. 당연히 포기했다. 당시엔 산정(山頂) 대피소가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서편 하늘의 해는 노루꼬리라도 남았지만, 동편 천불동 계곡은 곧 산 그림자에 묻힐 판이다. 지금의 "휘운각" 방향으로 하산을 서두르는데 그 하산 길이 끝도 없다. 암릉의 절벽엔 무슨 철주와 계단도 없다. 직경10cm정도의 나무 2~3개 정도를 모아 엮고 중간에 박아놓은 꺽쇠가 곧 발 디딤이었을 정도의 한심한 사다리가 전부다.
에너지보충이 전혀 안 된 가운데 극도의 피로가 엄습해 온다. 제일 덩치가 큰 친구의 눈동자부터 풀리기 시작한다. 이젠 물도 부족하다, 지금 휘운각 지점인 "무너미" 고개를 지나 천불동으로 내려서는데 물소리는 들리는데 계곡에는 돌밭뿐이다. 이곳이 바로 "죽음의 계곡 !!
바로 그해 초의 겨울, 우리나라 최초로 히말라야 등반에 나서려고, 빙벽적응 훈련을 하려던 경희대 산악부 중심의 등반대원들 다수가 눈사태로 안타깝게 희생을 당했다는 비보가 뉴스로 전해졌었는데 여기가 그 현장이다.
아~! 산악에서의 조난이 이런 것이었구나! 눈사태가 아니라도 이처럼 무모하게 고산산행에 절대적인 충분한 식량도 갖추지 않고 나서면 이렇게 기력을 상실하고 졸면서 가겠구나! 하는 처절한 교훈을 체감했다.
이후의 천불동 길은 그 눈사태가 남긴 상처로 끔찍하게 파괴돼 있었다. 쇠로 만든 다리의 바닥이 파열된 포탄껍질처럼 갈가리 찢겨져 있었고, 그나마 난간마저 날아가고 끊어져, 깊은 계곡의 물을 건너 돌아서자니 시간이 더 걸리는 건 고사하고 위태롭기도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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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와중에도 구경할 건 다 했지요. 이 험준한 벼랑을 잇는 쇠줄다리는 아마 용소골 지점의 폭포일대라고 생각된다. 이나마 여기라도 다리가 온전하게 남아있어서 큰 다행이었지 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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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난 속에 다다른 곳이 귀면암 아래. 이제부터의 하산은 더욱 시간이 더디어질 것이다. 이미 해는 기울어 사위(四圍)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활로(活路)를 결심한다. 일행 중 비교적 여력이 남아 생생한 면수와 상화 둘이3km정도 남은 비선대까지 가서, 식량과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그것이다.
일행 전체가 함께 하면 그만큼 행선이 더디어지고 상황만 악화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현명한 결정이었다. 비선대로 내려간 면수와 상화의 연락을 받은 비선산장의 주인 이승일씨(당시 34세)가 마침 설악산구조대(당시 설악동 주민들로서 약 30명이 조직돼 있었다고 했다) 대장이었기에, 7~8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우리가 지쳐버린 캄캄해진 귀면암 아래로 와 주었다.
굶주려 기력을 상실한 우리에게 가장 급한 건 먹을 것. 먼저 통조림을 받았는데 쇠고기통조림의 고기는, 단단하다고 느꼈는지 잔뜩 갈증 나 막힌 우리의 목구멍으로는 넘기지 못했다. 대신 부드러운 복숭아통조림의 황도와 사이다 같은 음료수는 순식간에 비울 수 있었다. 그러자 당장 온 몸에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구조대에 의지할 필요도 없었다. 가져온 들것도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그만큼 우리에게 갈급(渴急)했던 건 에너지보충이었던 것이다.
훨훨(?) 날아 비선산장에 도착한 우리는 밥 대신 죽을 잘 얻어먹고 긴장이 풀리고 나니, 온몸에 진통이 오고 극도의 피로가 몰려와 이내 깊은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상화와 면수는 우리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이미 저녁 먹고 잠에 곯아 떨어진지 오래였고.
비선산장에서 응급 숙박한 우리는 아침에도 정성스레 끓여준 죽을 먹고 나니 모두 원기왕성 해졌다. 어제 그렇게 탈진했던 사람들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회복된 것이다. 그것이 젊음이었다. 2년 반의 고된 훈련을 받아온 덕이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조난에 해당되는 사태에 처했었고, 구조를 받은 것이었다. 우리를 구원해준 비선산장 이승일씨가 정말 고마웠다.(이후로도 한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감사의 표시를 전했지만)
비선산장을 떠나 설악동에 내려오니, 우리가 조난당했다는 소문이 깔려있어, 후속해 도착한 생도들이 많이 걱정했다고도 알려졌다. 창피했다. 설악동 파출소에 가서 조난까지는 아니라는 상황을 설명하고 더 이상 신문보도로까지 확산되지는 않도록 조치했다.
우리는 그렇게 1969년 설악산을 다녀왔다. 고산 산행에서 에너지의 보충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산 앞에선 얼마나 겸손해야 하는지 크나큰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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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배움의 보람이 있어 설악산을 떠나는 우리의 모습은 그래도 이처럼 당당하기만 했다. 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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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동을 나온 우리는 강릉까지는 함께 했다. 그러면서 양양 낙산사에도 들렸다.(사진은 의상대와 기우정) 032 033
경포대의 해수욕장에서 그 당시 말로 해수욕도 했었지. 이후는 각자 설악산 이후의 행선을 따라 헤어졌다. 집으로, 화진포로, 계속 동해안의 여행으로.
물론 작별이 아쉬웠다. 전장에서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처럼 . 034 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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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휴가 후 이어진 "하훈" 중 지리산일대에서 겪었던 겁나는 유격훈련을 그 어떤 동기생들보다도 열심히 받아냈었다고 그 7인은 늘 자부했었다.
(유격훈련 당시 백마 8co 동기들-멋지지요! 당시의 그 늠름했던 체력 다 어디 갔나? 등산 열심히 해 당시의 건강 되찾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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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으로서는 이후 1969년의 그 설악산 코스를 수차에 걸쳐 등산했다. 그렇지만 그 때마다 매번 영원히 잊지 못할 이 설악산의 고행(苦行)을 되새겼고, 더 많은 산을 사랑해 다니면서도 늘 그 때의 교훈을 잊지 않고 있다. 이 얼마나 소중한 추억인가??!! ♣♣
첫댓글 당시의 사진이 아직도 있다는 게 대견해 설악산산행관련 사진은 몽땅 다 올렸네요. 특히 이 사진이 필요하다고 한 오면수는 이 사진을 퍼가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 활용하면 될 것이네. 생각보다 마땅한 게 없을지도 모르겠네만...
오면수
김명수 정말 수고했네 너무나도 아름답고 좋은 추억이었고 우리의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자료네
어린 시절 육사의 생활을 되새기면서 새해 복많이 받고 행복하자고.....
벡마 8중대 중대원 여러분!
새해 복많이 받고 건강하고 행복하세, 사지(死地)에서 살아온 우리가 응원합세
ㅎ대단한 추억거리 일세.
며칠전 년말 남산산행 때 대강 이야기 들었지만 이렇게 생생한 자료까지 보관하고 있었다니 대단해요^^.
난 올해 설악산을 공룡능선 포함하여 2번을 갔다왔지만, 요즘은 등산로가 잘 개척되어 있어 힘이 덜 들지요.
그 추억 평생 간직할만 하네. 모두들 성투!!!^^
해수욕장 사진 보니 가슴도 빵빵하고 아랫도리도 탱탱
설악산 역사책에 나올 사례들일세.
이런 생생한 기록들만 모아도 훌륭한 '27기 자서전'이 될텐데...
백마 7인 그때 설악산에서 다련했기에 오늘날 모두 건장 하시나 보네 대열 산대장님이 "산은 절대로 만만히 보면 안된다"는 교훈을 그때 터득하셨구나
'그 때 그 시절' 생각이 그립고 간절하군!!!!
대단한 자료군. 언제나 기록과 정리의 대가인 김명수 동기의 부지런 함에 감탄하는 바이고--당시 젊었을 때 외들 그리 삐삐 마르고 꼭 인민군 유격대 같네--보고 또 보고 해야겠고 잘 보관 해둘 가치가 있는 자료네--산악대장, 귀한 자료 고맙소!
그때의 일기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생생한 기록이어서 명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을 했네. 그래서 나는 명수를 존경하고 좋아하나보네. 정말 수고했네. 사랑하네.....
아이구 황송하게요! 우리 행환생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미남이고, 그래서 이 사진의 추억이 더 아름답고 멋있어 보이는게 아니겠남요! 우리 언제 한번 설악산 그 코스 다시 한번 해야할 텐데. 골반근육 잘 챙겨서리,,하하하!!
아련한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나네. 신흥사에서 자고 새벽일찍 비룡폭포에 가 날씨가 무척 쌀쌀한데도 몰래 새벽수영하며 호기를 부렸지. 생각해 보면 매우 무모하고 또한 위험한 등산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네. 얼굴보니 진짜 어린 아그들이구만. 우리 명수, 글이나 그림이나 시사 만화 그리던 그 솜씨 여전하네. 수고 많았으이 감사하네...
그때 그 7명의 설악전우들이 지금은 마성농장에서 넷이나 (상화 해호 행환 나) 몰켜 열심히 하늘의 뜻과 대지의 감사함을 터득하고 있으니 새삼스럽기도 하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