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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6일(성령강림절 후 네 번째 주일)
열왕기상 18:41~46
하늘 문이 열리는 기도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본문 접맥 적 주제설교형식
김규태 목사
*설교 주제: 엘리야는 세 가지 기도의 원리를 통해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했다.
*설교 목적: 우리는 세 가지 기도의 원리를 통해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해야 한다.
what’s problem?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부탁만 하면 뭐든 들어주는 산타클로스 정도로 여깁니다. 여섯 살배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잠자기 전에 아버지에게 찾아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빠, 저는 이제 기도하러 갈 거예요. 뭐 부탁하실 것 없어요?”
기도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여섯 살배기 아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출처: 토니 캠폴로, 「토니 캠폴로의 회복」(두란노, 2010), 145.
한 기자가 마더 테레사에게 물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하십니까?” 마터 테레사는 대답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듣기만 하지요.” 기자가 묻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다. 하나님도 듣기만 하시지요.”
그러면서 마터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해도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다 보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탄식만 흘러나오는 고통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존 번연은 “진정한 기도란 우리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께 신실하게 쏟아붓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 생활이 개선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십니까?
-출처: 토니 캠폴로, 「토니 캠폴로의 회복」, 141.
이스라엘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애굽처럼 큰 나일강이 있지 않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에는 요단강이 있고 갈릴리 호수가 있지만, 그것으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축복을 내려 주셔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야가 살던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기간에 비는커녕 이슬 한 방울 맺히지 않았습니다(17:1).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엘리야 시대에 북 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왕은 아합 왕이였습니다. 아합은 오므리의 아들로 태어나 주전 869년부터 무려 22년 동안이나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이였습니다.
아합 왕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왕이였습니다. 그는 바알 제사장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열렬하게 바알을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만들고, 아세라 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과연 아합 왕이 섬기던 바알 신은 무엇입니까? 바알이 맨 처음 성경에 등장하게 된 것은 민수기 25장의 ‘바알 브올(Baal-peor)’입니다. ‘바알 브올’(민 25:3)이라는 이름에서 바알은 신의 이름이고, 브올은 지역 이름입니다. 바알이란 이름은 “소유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알이 과연 무엇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바알은 ‘불과 번개’를 소유합니다. 번개는 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알은 불과 비를 주관하는 신입니다. 불과 비는 농경시대에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것들입니다. 바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삶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상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운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상은 우리의 삶과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은 우리의 삶에서 좀처럼 떨쳐 지지 않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날씨를 주관하고, 삶에 풍요를 안겨주는 바알을 버린다는 것이 좀처럼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우상은 우리의 삶에 교묘하게 들어와 우리의 안방 주인 행세를 합니다.
어찌 바알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에 들어와 어느덧 주인 행세를 하는 우상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혹시 여러분에게 자기 사랑과 이기심이라고 하는 우상은 없습니까? 혹시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하나님보다 세상이 주는 쾌락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나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좋아해서 그것이 우리의 삶에 늘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끊어내야 할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상의 헛됨을 알고 그것과 단절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십계명 가운데 둘째 계명이 바로 “우상을 섬기지 말라”(출 20:4~5)는 계명입니다.
열왕기서 저자는 바알을 소개하면서 “바알” 앞에 항상 정관사 “the”를 붙였습니다(18;19;21;22;25;26;40절). 어떤 단어 앞에 정관사 “the”가 붙으면 그다음 이어지는 낱말은 더는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인격이 없는 호칭으로 바뀌고 맙니다.
성경 저자는 바알의 이름 앞에 정관사 “the”를 붙임으로써, 바알이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격을 갖지 못한 그 무엇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상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우상은 우리가 대화하고 의지해야 할 인격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우상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순간, 우리는 인격을 상실하고 우리의 참된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갈멜산 대결은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주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에게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영적 대결을 벌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단의 모든 제물을 불태우는 신이야말로 참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알 선지자 450명이 먼저 자기들이 믿고 있는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던 신, 바알은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당황한 바알 선지자 450명이 자기 몸을 해하면서까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런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를 보면서, 우상에게 복을 구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인원이 많다고 응답이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 오랜 시간을 들인다고 응답이 일어나지 않는다.
셋째, 열심히 노력한다고 응답이 일어나지 않는다.
넷째, 자기 몸을 상하게 한다고 응답이 일어나지 않는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알이 참된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의 말대로, 갈멜산 대결에서 불로서 응답하는 신이 참된 신이었습니다. 바알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는 우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바알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바알은 인간이 만들어 낸 우상일뿐이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18:37).”
what?
엘리야는 기도를 통해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기도를 통해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엘리야를 통해 어떠한 기도의 원리들을 배울 수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는 ‘선포의 원리’를 통해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따라 이제 이스라엘에 큰비가 내릴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아합 왕 앞에 나아가, 다음과 같이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비 소리가 있나이다(41절).”
아직 큰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비가 내릴 아무런 징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엘리야는 오직 믿음으로 큰비 소리를 들었고, 그것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망상이나 과욕에 사로잡혀 내뱉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1절)”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믿었기에 이러한 선포가 가능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믿음을 가리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훌륭한 미술 작품들을 대할 때, 우리는 비록 화가가 그려 놓은 밑그림을 볼 수 없지만, 밑그림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훌륭한 예술 작품이 완성될 수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훌륭한 건축물이나 훌륭한 자동차가 아무리 정교하고 완성도가 높더라도, 우리는 디자이너의 상상력을 스케치해 놓은 단순한 밑그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같이, 믿음은 마치 우리 인생에 소중한 밑그림을 그리는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믿음의 선포를 강조합니다. 이사야 55장 1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입술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선포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풍랑이 일어나는 바다도 꾸짖으셨고, 귀신도 떠나가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병마로 고통 가운데 있는 자에게 찾아가셔서 그 병마를 꾸짖어 고쳐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자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선포하자 그가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선포에 권세를 주셨고, 엘리야는 그 권세를 잘 알고 사용했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삶을 억누르고 고통을 주는 어둠의 권세가 있습니까? 입술의 권세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떠나가라!”라고 믿음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겸손의 원리’를 통해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믿음으로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는 아합 왕이 먹고 마시러 간 사이에 갈멜산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엘리야가 기도할 때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왜 엘리야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을까요? 좀 더 편한 기도의 자세는 없었겠습니까? 이러한 엘리야의 기도 자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응답의 방법이 없다는 겸손을 표시한 자세였습니다. 그는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선교사로서 3년 동안 사역하다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선교사입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분은 기도의 사람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이 분은 언젠가 말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기도할 생각이 나자 바로 말에서 내려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게 “말까지 타고 거의 다 도착했는데, 방에 들어가 기도하든지 아니면, 조용한 바위 위에 앉아 기도할 것이지 굳이 길바닥에서 기도할 것이 있는가?”라고 편의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에는 기도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고, 그는 육신의 연약함에 지지 않고자 그 순간에도 깨어 기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출처: 이재훈, 「영적 전쟁」(두란노, 2019);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5월호), 153에서 재인용.
오늘날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간혹 우리 중에 어떤 분은 믿음의 은사를 받거나 병 고침의 은사를 받은 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사용해서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고, 병든 자를 고쳐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든든히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능력과 치유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은사는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의 은사를 주셨다면 더욱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서 큰비가 내릴 것이라고 믿음으로 선포했지만, 실제로 큰 비가 내릴 때까지 산꼭대기에 올라가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겸손히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올바른 모습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인내의 원리’를 통해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믿음으로 선포했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인내로써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사환을 불러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43절)”라고 말했습니다. 사환이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았지만, 사환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사환에게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라고 명령했습니다.
드디어 일곱 번째, 사환의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에 엘리야는 사환을 시켜 아합 왕에게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도록 전달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내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엘리야가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고 사환에게 명령한 것은 그의 인내를 가리킵니다. 또한, 엘리야는 바다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을 보고 하나님의 큰비를 보았습니다.
드넓은 바다 위에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인내로 기다렸던 엘리야는 비록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일지라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사인(sign)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what’s then?
알코올 중독자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이 친구의 어머니는 매주 주일마다 아들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알코올 중독자 친구가 다른 술친구 한 명과 함께 새벽 3시까지 술집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날은 지독히 춥고 비도 오는 날이어서 길이 미끄러운 빙판길로 변해 있었습니다. 두 술꾼은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가파른 언덕 위까지 간신히 걸어갔습니다. 길은 온통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술친구가 알코올 중독자 친구에게 농담을 건넸습니다. “너희 엄마가 오늘은 이 언덕을 올라오시지 않겠지? 오늘 같은 날은 기도하러 나오실 리가 없어.” 그러자 알코올 중독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당연하지.”
알코올 중독자 아들이 맞장구를 치자마자 저 멀리서 미끄럽기 짝이 없는 빙판길을 손과 무릎으로 기어 올라오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이럴 수가, 바로 알코올 중독자 아들의 어머니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믿는 어머니는 누구도 못 말립니다. 그들은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족 구원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머지않아 그날이 올 것입니다.
-출처: 토니 캠폴로, 「토니 캠폴로의 회복」, 150.
선포의 원리, 겸손의 원리, 인내의 원리로 무장했던 엘리야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큰 역사는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당연히 “큰비”였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큰 장맛비가 필요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던 메마른 대지 위에 하나님의 큰 은총의 비가 내렸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자 엘리야는 허리를 동이고 아합 왕 앞에서 달렸습니다. 저는 마차를 타고 가는 아합 왕보다 더 빨리 달려가는 엘리야를 보면서, 한 사람의 영적인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영적 거장을 통해 무너졌던 한 나라가 회복되고, 한 시대를 새롭게 이끌어가는 영적 지도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엘리야처럼 “허리를 동인다.”라는 말은 “행동을 하기 위해 자신을 긴장시킨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엘리야처럼 영적 거장이 되어 이 사회를 건강하게 이끄는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고, 자신을 새롭게 긴장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나태했던 영적인 허리띠를 졸라매고, 혹시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우상은 없는지를 되돌아봅시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엘리야처럼 선포의 원리, 겸손의 원리, 인내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분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Drawing by Hak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