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변영희 | 날짜 : 10-07-10 00:47 조회 : 1836 |
| | | 외출준비를 서두르다 주저앉은 날 나는 모처럼 감자를 삶았다. 늘 먹는 밥대신 오늘 저녁은 감자를 먹으리라. 감자도 지겨워지면 며늘아기네서 보내온 쑥떡을 먹든지, 대부분 무슨 일감에 매달려 골몰하다 보면 밥을 먹었는지 긂었는지 생각조차 안날 때가 있다.
밤이 깊어 자리에 들라 할 때 갑자기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서 아차! 하고 냉장고를 열어보는데 그래 봐야 먹을 게 신통치 않다. 돈과 시간, 노력을 웬만큼은 기우려야 수시로 먹을 게 남아 있지 배고프다고 불쑥 뒤져봐야 내 입에 맞는 음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엄마! 피자 시킬까?" "치킨?" "나는 짬뽕 먹고 싶은데"
번번이 이렇게 되면 가계부에 빨간 줄이 올라갈 확률도 높아질 수 밖에. 빨간 줄 보다도 그게 입맛을 오히려 버려 놓는다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게 감자였다.
감자 하면 그리워지는 친구가 있다. 엊그제도 긴 외출에서 돌아오니 그 친구의 전화번호가 두어 번 찍혀 있었다. 수다 떨 상황이 아니어서 전화 하기를 포기했지만 유독 그 친구를 생각하면 언제나 씁쓸한 감회와 함께 찐감자가 따라붙는다.
친구도 나도 딸부자집의 둘째 딸로서의 비감한 정서,이를테면 모친으로부터의 차별대우와 집안 대소사의 요긴한 도우미 역할에 대한 억울함, 쓰라림을 동일하게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서 귀가하여 대청마루에 책가방 내던지기 바쁘게 빨랫감을 한대야 이고서 무심천으로 직행하는 것은 매일 반복되는 일이었다.물론 무심천 나들이가 무조건 힘겹고 따분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맑은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머리를 감아 빗거나 교복이며 작은 빨랫감을 빨아 행구는 일은 일종의 청량한 놀이였으리라. 게다가 무심천 뚝방 너머로 빛을 뿜는 저녁 노을의 휘황한 모습은 여고 1년생 소녀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도 남았다. 서럽도록 아름다운 빛깔이 점점 스러져 가는 것이 아쉬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친구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신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창공에 빛난 별 물위에 어리면 바람은 고요히 불어 오누나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산타루치아 산타루치아
물 흘러가면서 고운 모래가 발을 간지르고 서산에 지는 해는 각가지 오묘한 색깔로 하늘을 장식하는데 두 소녀는 숙제는 커녕 배고픈 것도 망각하고 하이 소프라노의 주인공이 되었다.
야아! 감자다. 돌아가는 길에 친구네 집에서 맛보는 들기름 슬적 둘러 가마솥에 구운 찐감자 맛이라니. 커단 양푼에 퍼다놓고 빨래 대야를 내려놓은 채 허겁지겁 먹던 친구네집 찐감자 맛. 적어도 감자를 먹는 순간 만큼은 차별받는 둘째 딸의 처지와 고민이 저 멀리로 사라져 갔다. 두 소녀의 상처받기 쉬운 예민한 감성이 감자 내음에 섞여 휘발한 것인가. 한참 동안 찐감자의 구수한 맛에 훔씬 취해 있곤 하였다
요즘 감자는 그 맛이 안나고 감자를 쪄낼 가마솥도 찾아보기 힘든다. 감자 맛이 변했 듯 우리의 식습관과 요리방법, 식문화가 변한 것이다.
종일 작업을 하고 나서 허기를 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는 감자가 불현듯 내 고향 무심천과 친구를 한데 묶어 생각나게 한다. 내일은 친구에게 전화를 해볼까. 밤이 깊었으니 감자 먹기는 이제 그만두어야 하겠다. |
| 박원명화 | 10-07-10 09:52 | | 맛난 감자! 선생님 글 읽다보니 포근포근한 감자맛에 군침이 돕니다. 무심천을 떠올리며 고향의 향수도 젖어 보구요. 옛날에는 감자가 한끼 식사로 때우기도 했지만 요즘은 먹는것이 남아도는 세상이라, 감자의 진짜 맛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추억을 담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 | 변영희 | 10-07-11 08:45 | | 무심천 뚝방길 친구들 무심천 뚝방길 걸으며 연애한 이야기. 벚꽃 흐드러지게 핀 봄 날의 밤 데이트. 이 몸은 열아홉살에 고향을 떠난 사연. 친구들 추억담 들을 때면 사무치는 그리움. 박원명화님. 고맙습니다. | |
| | 최복희 | 10-07-11 06:10 | | 향수를 느끼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짧은 글 속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유추하게 하는 군요. 경제는 어려웠지만 마음은 부자였고 가진 게 없지만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던 그 시절이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아프지 마시고 좋은 글 많이 남기세요. | |
| | 변영희 | 10-07-11 08:50 | | 나는 보배를 만난 것 같아. 나는 포근한 햇살 한 줌 보듬은 것 같아. 나는 눈부신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아. 2010년의 慶事에 감사하고 좋은 분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합니다. 최복희기자님. 창작도 열심히 하시기를. | |
| | 임재문 | 10-07-11 12:21 | | 전라남도 지방에서 감자는 고구마를 일컫는 말이고, 감자는 북감자라고 따로 불렀습니다. 감자떡을 해서 먹어보기도 하고 감자는 쪄서 먹기도 하지만, 된장국을 끓여먹으면 그맛도 또한 일품이었습니다. 감자가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합니다. 변영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 |
| | 변영희 | 10-07-11 16:30 | | 속초에 간 그 해 여름, 낙산해수욕장 비치파라솔로 찾아온 감자떡 장수. 그곳 찰옥수수는 왜 그리 찰지던지. 바닷바람에 그을리고 햇볕에 탄 몸에서 열이 확확 나는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7월의 둘째 일요일. 임재문 선생님의 방문이 반갑습니다. 왕송호수의 밤도 이리 더울까? | |
| | 김자인 | 10-07-13 17:45 | | 맛있는 글을 읽다가 보니 저절로 감자 생각이 납니다. 쪄서 먹고 볶아서 먹고 갈아서 부침으로 먹고, 조림을 해도 반찬으로 제격이지요. 초여름의 감자는 식사 대용으로도 먹지만 간식으로 쪄서 야외 나갈 때 은박지에 싸면 식지 않아서 좋던대요. 그 어려운 공부하시며 바쁘신 와중에도 글 쓰시는 걸 보면 놀랍기만 합니다. 그래도 매끼 잘 챙겨서 드세요. 변영희 선생님, 맛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 |
| | 변영희 | 10-07-13 20:25 | | 나는 오늘 옥천암에 갔었네요. 올해도 절을 잘 할 수 있을까. 근력이 부치는데 과연! 백중기도도 물론 해야했지만 요즘 초경 겪는 어린 소녀처럼 마음이 파르르 떨려. 이런 생각, 참아두었는데 김자인선생님의 글 읽으니 여린 감성이 동요. 고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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