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성풍속 답사여행[1]
지은이: 황가성 출판사: 좋은글 조선 백성의 삶과 성, 그리고 인생과 해학
이 책은 단순한 우스갯소리를 모아 놓은 해학책이 아니다. 자신의 본분을 알고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이 땅의 소시민들에게 바치는 편안하고도 신명나는 정신적인 휴식의 공간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사람 사는 곳이면 삶의 애환이 있기 마련이다. 생로병사의 우주법칙에 의한 인생유한의 사이클이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 부딪치며 살아가는 인생의 바닥에는 으레 궂은 일 좋은 일이 필유곡절 반복되기 다반사이다. 사회 제도상 신분의 높고 낮음이 아무리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대 자연의 철칙 앞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할 수 밖에 없다.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듯이 유한한 인생의 도정에서 수시로 만나게 되는 고통과 번민은 인간을 더욱 인간적이게 하는 것일까?
한 시대를 도려내어 그 풍정을 살았던 선인들의 삶의 방법을 진단하고 살아가는 지혜를 더듬어 보는 것이야말로 오늘을 보다 현명하고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본 제목이 시사해 주고 있듯이 삼종지도를 최상의 덕목으로 알았던 조선조, 그 과부 보쌈 시대의 치맛속에 감추어진 자유분방한 삶에 대한 뜨거운 심리(본능)를 한국인 특유의 절묘한 해학으로 풀어헤친 금세기 최대의 민간 성풍속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우리 사회의 도덕과 윤리의 기본 정신을 해치는 난잡한 내용이나 독자로 하여금 성적 충동을 유발케 하는 음란한 성격의 내용으로 이루어진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적 장면에 대한 묘사를 가급적 절제하고 해학과 재치라는 치마와 저고리 속에 묻어 둠으로써 이 책의 내용의 질을 한결 높이고자 하였다. 날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자유부인과 하루 세 끼의 밥보다 수염 석 자를 더 귀하게 여겼던 유교적 양반 시대의 샌님 플레이보이들이 벌이는 한 판 인생의 해학 마당을 통해서 우리는 웃음 속의 참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한바탕 웃음 뒤에 다가오는 그 후련함, 그리고 지들대로 찌든 생활 속에서도 멋지고 아름답게 살아보고 싶은 소박한 욕망, 이런 것들은 곧 우리에게 새로운 의욕과 용기를 준다. 선인들의 재치있는 해학의 한마당에서 만나게 되는 신선한 여감이야말로 이 책을 선택한 독자에게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아울러 이 한권의 책이 각박한 생활에 쫓기는 독자 여러분의 삶에 만복의 근원인 웃음을 보태어 주고 나아가 삶에 대한 경건한 의욕과 미래에 대한 굳은 희망을 갖게 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 김삿갓 조선팔도 풍류답사여행
풍류시인 김삿갓, 지금 뭘하고 계실까? 꽃본 나비는 밤을 희롱하고 여기저기 시정을 찾아 떠돌던 김삿갓은 안변을 향해 줄곧 걸었다. 바다는 멀리 떨어져 가는 길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짭짤한 바람결에서 저쪽 산너머로 바다가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다리가 아프면 쉬면 되었고 배고프면 아무 집이나 들어설 셈으로 저 멀리 보이는 조그마한 마을로 들어갔다. 첫눈에 가난한 마을이라 생각되었다. 소슬대문에 하인까지 두고 거드름을 피운며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 찌그러져 가는 집에서 겨우겨우 연명을 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김삿갓이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으로 보건대 잘사는 사람보다 못사는 사람이 더 많은것 같았고, 잘사는 사람보다는 못사는 사람들의 인심이 더 좋았다.
김삿갓은 마음 내키는대로 어느 집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오막살이였다. 호롱불의 가느다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불빛을 보니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주인장 계십니까? "
김삿갓은 목청을 가다듬어 주인을 불렀다. "뉘시오?" 방안에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뒤이어 방문이 열리더니 오심여 세즘 되어 보이는 사내가 목을빼고 쳐다보았다.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어둠을 만났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하룻밤 신세를 지었으면 합니다."
"허어, 우리 집에도 손님이 오실 때가 있구려. 어서 들어 오시오."
주인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김삿갓은 다시 일례를 보낸뒤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시는 손님이시오?" 사람좋게 생긴 주인이 삿갓더러 물었다.
"안변까지 가는 길입니다." "먼 길을 가시는 구려.
참 저녁은 아직 자시지 않았을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 주인은 방 한쪽 구석에서 실타래를 감고 있던 마누라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누라는 그림자처럼 소리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두 양주분만 계시오?" "아니, 아들놈 하나하고 며느리가 있습지요.
여긴 어촌도 아니고 그렇다고 농사를 지을만한 농토도 없어 살기가 참 곤란합니다. " 김삿갓은 묵묵히 등잔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서는 우지끈 우지끈 마치 짚단을 풀어 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에 밥상이 들어왔다.
간단한 저녁상이었다. 조밥이 한 그릇, 된장찌개에 김치 한 보시기가 전부였다.
김삿갓은 몇 번식이나 치하를 한 다음 숟가락을 들었다. 언젠가처럼 이 집에서도 주인 내외와 함께 잘 수 밖에 없었다. 불을 끄고 누웠으나 잠은 쉽게 들지 않았다. 아랫목 쪽에서 주인 내외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손님이 자고 있는 줄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보, 손님이 오셨는데 저녁은 그렇게 대접했다손치고 아침은 어떡하지요 " 부인의 말이었다. "글쎄, 우리 같은 집에 손님이 찾아주신 것만도 고마운 일이. . 아침에야 조밥을 드릴 수 있나. 박 초시네 집에 뭐 좀 맡기고 쌀 되박이라도 얻어 올 수 없을까?" "뭐가 있어야지요.
두루마기 하나 변변한 것이 있었는데 며느리가 입고 가고 없으니 그것도 안되겠구요." "음, 정 선달네 집에 날이 새거든 가봐요. 손님이 왔다고 사정 이야기를 하고 쌀 한 되박만 꾸어와요.
" 이들의 이야기를 어두운 방에서 듣고 있던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애처로울 정도로 그들의 인정이 따스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김삿갓은 소변을 보러가는 척하고 주인 내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밖으로 나왔다.
어젯밤 그들의 이야기를 못들었으면 모르지만 들어서 알고 있는 이상 밥을 얻어 먹을 수가 없었다.
초겨울, 차가운 새벽 바람을 쏘이며 정처없이 발길을 옮겨 놓고 있는 김삿갓은 저절로 싯귀가 읊조려졌다.
般中無肉權歸采 廚中乏新禍及離 반중무육권귀채 주중핍신화급리 婦姑食時同器食 出所父子易衣行 부고식시동기식 출소부자역의행
밥상에는 고기가 없으면 채소가 뽐을 내고부엌에는 땔감이 없으매 화가 울타리에 미치도다 시어머니, 며느리가 한 그릇에 밥을 먹고 출타할 때는 부자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도다.
사실 이런 형편의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볼 수 있었다 일 년에 살밥 구경은 명절날에나 하는 사람들을 아침도 굶은 채 김삿갓은 한나절을 꼬박 걸었다.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 길가에는 인가가 없었고 멀리 산 아래로 집들이 드문드문 보이는데 거기까지 가자면 극히 이십여 리는 걸어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였다. 걸으면서도 날짜를 꼽아 보니 시월하고도 그믐이었다. "허, 내일이 동짓달이구나." 날짜를 꼽아서 뭣할까마는 그래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스러웠다. 동짓달, 이제 평지에도 눈발이 날릴 것이다. 살을 에이는 듯한 바람이 몰아칠 것이다.
김삿갓은 허무한 마음으로 산천을 휘둘러 보았다. 산도 들도 텅 비어 있었다. 언제 내렸는지 먼 산봉우리에는 하얗게 눈이 내려 있었다. 다정 다감한 시인의 가슴에는 시심이 가을 하늘처럼 파랗게 고이고 있었다. 엽락척용설만두 산여천탱홀연부 여령나립아해사
혹자중간선학유잎은 져서 앙상하고 눈은 봉우리에 가득한데 산은 마치 하늘을 열어보는 듯 우뚝 솟아 있네 그 아래로 봉우리들은 아이들인 양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 어떤 봉우리에는 학이 놀고 있도다.
이런 시라도 지어 읊어야만 그의 마음이 후련했다. 때문에 그의 시는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배설이었다. 아침을 굶은 채 나선 길이라 오정이 기우니 몹시 시장기가 들었다. 거기에 날씨마저 춥고 보니 따뜻한 불기운이 몹시도 그리웠다.
하늘을 보며 땅을 보며 시름없이 걷고 있는데 삼거리가 나타났다. 바른쪽으로 뻗어가는 길가에 주막집이 보였다. 행길 쪽으로는 주막이었고 그 안으로는 살림집인 듯 기와집이 제법 돈푼께나 있어 보였다. 김삿갓은 우선 그 주막집으로 향했다. 보통때 같으면 주막 안에 술잔이나 하는 주객들이 보일터인데 웬일인지 쓸쓸해 보인다. 그는 반쯤 열려진 문으로 성큼 들어섰다. 마당도 넓고 마루도 넓었다.
그런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거 아무도 없소?" 비록 가진 돈은 없었지만 우선 호기롭게 주모를 찾았다. 대답이 없다. 그는 다시 한번 주모를 불렀다.
잠시 후에 안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여인이 하나 나타났다. 삼십이 좀 넘었을까, 아니면 못되었을까? 첫눈에 드물게 보는 미인이었다.
"어찌 오셨어요?" 여인은 반갑지 않다는 듯이 물어왔다. "주막에 나그네가 찾아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 김삿갓은 다짜고짜 마루에 척 걸터앉으면서 여유있게 수작을 부렸다. "미안합니다만 요즘은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장사를 안하신단 말씀이오? 외상술이라도 먹어대는 건달이 많습니까?" "그런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장사를 하지 않으니 다른 집으로 가세요. 여기서 한 마장쯤 더 가시면 좋은 주막이 있습니다" 여인은 이렇게 말한 뒤 들어가려 하였다. "주막이 있든 없든 상관할 바 없소이다. 댁이 주막이 아니더라도 나는 왔을 터이니까요" 주인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지 돌리려던 몸을 멈추고 김삿갓을 내려다 본다. "그렇게 사나운 눈초리로 보시지는 마십시오. 불량배는 아니니까요.
난 문전걸식을 하면서 떠돌아 다니고 있는 사람이오. 어차피 주막에 들렸댔자 돈주고 술마실 형편은 못되는 몸, 찬술 한 사발이라도 얻어 마시면 그뿐 아니겠습니까? " 이 말을 들은 젊은 부인은 기가 막히는 모양이었다. 척 늘어붙는 꼴이 쉽사리 떨어질 기색이 아니었다.
"보셔요 손님, 우리 집에는 지금 일이있어 손님을 대접할 형편이 못되니, 훗날 다시 오시면 오늘 빚까지 갚아드리겠습니다. " 부인은 말씨는 차분하면서도 위엄까지 있어 보였다. 주막이라면 응당 주모가 있는 법,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주인 여자다.
그러나 위엄있는 행동거지로 보나 뭘로 보나 뭇 사내들에게 술이나 팔고 있을 여인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김삿갓은 더욱 흥미를 느꼈다.
"빚이라니요, 나는 떠돌아 다니기는 합니다만 한 번지나친 곳은 다시 들르지 않습니다. 그야 내가 한 백 년이나 산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 빚을 갚으려 해도 갚을 수가 없을 겁니다. 술이나 한 잔 주시면 떠나가겠습니다.
"부인은 이렇게 말하는 김삿갓을 요모조모로 뜯어보고 있었다. 차림새는 그렇다손치더라도 생김새나 말씨가 그냥 떠돌아 다니며 걸식을 하고있는 낭인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암행어사? " 부인의 상상은 이렇게 비약되었다. 새가만 눈썹 아래 자리잡은 두 눈엔 범인과는 달리 총명한 정기가 서려 있어서 이런 상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세상이 너무나도 흉흉하니 암행어사가 출두했는지도 모르지...... "한번 상상이 비약되면 비약은 비약을 낳는 법이다. 그러나 부인은 내색을 하지 않고 퉁겨 보았다. "미안합니다만, 지금 머슴녀석들도 없고 주모도 없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어서 떠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 김삿갓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과연 생각대로 주모가 아니었구나 하고 자기의 추측이 적중되었음을 확인했다.
"아니, 주막에 주모가 없다니 그건 또 무슨 말슴이오? " 김삿갓은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야기를 끌고 나가야만 무슨 수가 날 것 같아서였다.
"아마 저를 주모로 알고 계시는 모양인데 이 주막을 맡아 장사를 하고있는 분은 다로 있어요. 그러니 전들 어떡하겠어요?" "허, 참 딱하게 되었소이다. 실인 즉, 이 사람이 아침도 거른터라 이제는 발길을 옮길 기력도 없소이다. 따뜻한 숭늉이라도 한 대접 마셨으면 합니다만.......... " 김삿갓은 여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그러자 여인의 표정에는 어느틈엔지 싫어하는 기색이 싹 가셔버렸다. 그리고 온화한 호감의 빛이 감도는 것이었다.
그걸 본 김삿갓은 옳지 이제 되었구나 하고 여인은 갑자기 수심어린 얼굴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뭐, 대접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쪽 방으로 드십시오. 시장기나 면하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김삿갓은 일이 잘되어 간다고 내심 기뻐하면서 마루를 사이에 둔 방으로 성큼 들어갔다. 어젯밤에는 사람이 머물렀는지 아랫목이 뜨뜻하기만 했다. 그는 바람벽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쭉 폈다. 그동안 부인은 안채로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무슨 곡절이 있는 집인 것 같았다. 우선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한참 후에 여인이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김삿갓은 저으기 놀랐다. 차림새로 보아 주인 마님인 듯한데 손수 밥상을 들어 주다니 말이다.
"차린 것은 별로 없습니다만 시장하실터이니 어서 드시지요. " 김삿갓은 공연히 가슴이 띄었다. 집을 더나온 이래로 아내 말고 이토록 젊고 예쁜 여인과 마주 대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고맙소이다. " 김삿갓은 정중히 예의를 차린 뒤 숟가락을 들었다. 차린것이 없다는 말과는 달리 김이 무럭무럭나는 쌀밥에 동태국까지 놓여 있었다. 밥을 드니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음식 맛이 꼭 마나님의 성품을 닮은 것 같습니다. " 김삿갓은 이렇게 수작을 걸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청결하고 감칠맛이 있어서 해본 소립니다
"여인은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신가요?. "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문쪽으로 옷깃을 여미고 앉으며 여인은 물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마님은 아십니까? 소생도 바람과 같은 몸이올시다.
"여인은 그의 말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풍류께나 좋아하는 선비와도 같았다. "바람도 일어나는 곳이 있는 법인데 항차 사람의 몸으로 출발점이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 김삿갓은 눈을 번쩍 떴다. 이것봐라 제법인데,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바람의 근원지를 모르는 일이 아니니까?."
"농담도 잘 하시네요." 여인의 얼굴에 짙은 웃음이 번졌다.
이윽고 김삿갓은 정색을 한 채 물었다. "주막에 주모도 없고 심부름하는 머슴도 없는 모양인데 무슨 곡절이라도 있습니까?.
"곡절은 무슨 곡절이 있겠습니까? 세상만사가 모두 귀찮아서 잠시 문을 닫은 것 뿐입니다."
"그래요?." 그러나 김삿갓은 어딘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묵묵히 밥을 다 먹어 치웠다. "잘 먹었습니다."
여인은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단념한 듯 상을 들고 그냥 나가려 한다. 사실 외간 남자가 밥을 먹고 있는데 같은 방에 머물러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잠깐만.........." 김삿갓은 여인을 불러 세웠다. "제가 보기에 부인에게는 필시 절박한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말씀 좀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여인은 상을 다시 방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부인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제 얼굴에요?."
"그렇습니다. 바깥 어른도 안 계신 모양인데 소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밥값으로 도와드리고 떠나겠습니다. 뭐 바쁜몸도 아니니까요." 여인은 김삿갓의 이 말에 깜짝 놀라는 눈빛이었다.
"아니, 관상을 보실 줄 아세요?."
"허허, 관상쟁이가 따로 있습니까?
어려서 부모님 덕에 글줄이나 읽은 소이로 그저 좀 알지요. " 김삿갓은 여인이 흥미를 느끼는 것을 보고 일이 잘 되어 간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맞았어요. 저는 이 년 전에 혼자가 되었어요. 실은 집안 식구들은 제사가 있어 모두 큰 댁에 가 있어요. 그리고.........
" 여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끝을 흐렸다.
"뭐 복잡한 일이 있으신 모양인데 말씀을 해주십시오. 필히 어려운 일이 있으실 겁니다."
"그것도 제 얼굴에 씌어 있나요?."
"예 씌어 있습니다."
"호호, 역서에 통달하셨나 봐요?.
글 좀 읽었느냐는 암암리의 물음이었다. 어찌 김삿갓이 이 말 뜻을 모르랴? "주역을 통달하지는 못했습니다만 대강은 읽었습지요."
여인은 김삿갓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사실은 처럼부터 예삿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였지요. 그렇지 않으면 아낙네가 어찌 외간 남자와 수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복잡한 일이란 다름이 아니옵고 산송이 있습니다."
"네? 산송이라니요? 묘자리로 인하여 누구와 송사가 있습니까?."
"예 말씀을 드리자면 이러합니다.
이년 전 춘삼월에 어느 고명한 지관 한 분이 저희 집에서 묵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남편은 병석에 누워 있어 오늘만 내일만 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을 때였지요. 그래서 저는 남편을 위해 명당자리를 하나 보아 달라고 그 지관에 청을 하였습니다. 지관은 우리 집에서 열흘을 묵으면서 이 근방의 산을 두루 살펴 보고 나서는 마침내 한 자리를 택해 주더군요. 여기서 이십 리쯤 북쪽으로 가면 갈매봉이라는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 중턱의 남향 자리였지요. 지관에게는 쌀 열 섬을 사례로 주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 한 달 후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어요. 물론 그 명당에 묘자리를 잡았지요."
"일은 잘 된 것이 아닙니까?."
김삿갓은 흥미를 느끼면서 은근히 다음말을 재촉했다.
"거기까지는 일이 잘 되었지요. 정말 명당 바람이 일어났는지 이 주막 장사가 부쩍 잘 되지 않겠어요? 장사 잘되는 재미로 남편이 죽은 시름도 잊고 살았어요. 애초부터 주모를 따로 두고 하는 장사였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난 해 가을부터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거예요. 대신 저윗 주막이 잘 된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허허, 거 참, 이상한 일이군요."
"하지만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장사란 잘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지난여름 어느 날 밤 꿈에 남편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여보 내 집 울타리를 침범한 놈이 있어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소'라고 말예요. 그 꿈에서 깨어나고서 하도 이상하여 그 길로 곧장 남편의 묘소를 찾아가 보았지요. 아. 글쎄 가보았더니 이게 웬일이에요!?"
여인은 말을 하다 말고 그치고는 한숨을 후욱 내쉬었다.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김삿갓은 몸을 고추세우기까지하며 말했다. 그리고 김삿갓은 왠지 으시시한 기분이 들었다. 여인이 다시 말을이었다.
"분명히 남편 묘소인데 봉분이 있는 오른쪽 그러니까 우청룡쪽으로 웬 묘 하나가 생겼지 않겠습니까? 너무도 기가 막혀 처음에는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도 했어요. 하지만 분명히 묘가 한 기 더 씌워 있는 것이었어요.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 묘는 건넛 마을 안진사네 집 아버지 묘였어요. 그래서 가서 따졌지요."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집 말이 지관에게 후히 돈을 주고 자기네 묘자리를 하나 부탁했더니 그 곳으로 모시라 하기에 거기에다 묘를 썼노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장을 하랬더니 오히려 비용을 물겠다면서 우리더러 이장을 하라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무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 관가에 송사를 내었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해결을 해주지 않고 있어요."
"말하자면 지관이라는 놈이 양쪽 집에다 똑같이 묘소를 팔아 먹었군요?" "그러나 묘수를 이쪽에서 먼저 썼으니 안진사네가 마땅히 파가야지요." "그래, 안진사네는 지금 어떻게 나오고 있소이까?
"우리가 송사까지 내고 하니까 파가겠다고는 하는데 어디 실천에 옮겨져야지요. 분명히 관가에 있는 놈들에게 뇌물을 먹이고 엄청 미루려는 것 같아요."
"음, 그럼 원님에게 직접 송사를 올려야겠군."
"그렇게 할 수가 잇을까요? "여인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이쪽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내가송사를 하겠습니다."
"선비께서요? 이거 사람 한 번 잘 만난 것 같군요."
"지필묵을 준비해 주십시오." 여인은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더니 종이와 먹과 벼루와 붓을 가지고 들어왔다.
김삿갓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붓을 들었다.
굴거굴거피 변지항언 착래착래 본수지례제 금일명일 건곤불로월장재 차일피경 적막강산금백년
파간다 파간다 함은 저쪽이 늘 하는 말이옵고 잡아오라 잡아오라 함은 이고을 군수님이 겉으로 하는 이야기온데 이토록 오늘 내일 하고 미루기만 하오나 천지는 늙지 않고 그대로 있으되 세월만 흐르오며 이 핑계 저 핑계 하는 사이에 쓸쓸한 강산은 어느 덧 백 년이 되고 말 것이오니다.
김삿갓이 이렇게 쓰고 붓을 놓으니 여인의 얼굴은 경탄으로 가득찼다.
"제가 처음에 느낀대로 선비께서는 명문장가시군요.
"이 말에 김삿갓도 놀랐다. 여인이 문장을 감상할 줄 알기 때문이었다. "내일 사또가 이 글을 보시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자기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잘 될 터이니 안심하십시오."
"그렇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비님."
"그런데 실례의 말씀 같소이다만 주막이나 하고 사시던 집안 같지가 않는데요, 어떻습니까?"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뭐 자랑할 것은 없지만 원래 시댁은 대대로 벼슬을 하던 집안이었어요. 그런데 바로 윗대에 와서 뭐가 잘못되어 삭탈관직 당하여 불운 속에 빠졌답니다. 원래 황해도가 고향이예요. 우리집 양반은 고향에서 살 수 없다 하여 이곳으로 이사왔지요. 이 곳은 함경도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길목일 뿐만 아니라 봄, 가을에는 금강산유람을 떠나는 길손들로 무척 붐비기도 합니다. 주모를 두고 심부름하는 머슴을 서너 명이나 둘 정도로 장사는 잘 되었지요. 그런데 안진사네 집에서 그 일을 저지르고 난 뒤부터는 거짓말처럼 장사가 안되잖겠어요!
" 여인의 말씨는 무척 차분했다. 그러나 벼슬은 어떤 벼슬을 하여 왔고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 밝히려 하지 않았다. "
내 처음부터 내력이 있는 집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맞았소이다. 그럼 먹을 것은 다 먹었으니 이만 떠나겠소이다." 이윽고 김삿갓은 삿갓을 찾아썼다. 그저자 여인은 황망히 그를 만류했다.
"바쁘신 길이 아니라면 며칠 쉬었다 가셔요. 내일 써주신 글을 관가에 낼 터인 즉 그 결과를 보시고 가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김삿갓도 휭하니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모처럼 꽃을 본 나비였다. 단꿀도 맛보지 않고 어찌 나비가 떠나가겠는가? 더구나 향기가 그윽한 꽃을 보고 말이다. 그는 못이기는 체하고 주저앉았다. "그렇지만 부인 혼자 계시니 어딘지 거북하군요...... 아무튼 바쁘지 않으니 결례가 안된다면 좀 쉬어가도록 하지요."
"결례라니요? 그런 거 괘념치 마시고 편히 쉬셔요. 선비님이 아니셨던들 내일 사또님께 청원서를 낼 수 있겠습니까?"
김삿갓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이윽고 여인이 다시 말했다. "이곳은 길가라 유하시기 불편하실 터이니 안채로 드시지요. 주인께서 쓰시던 사랑방이 있습니다."
김삿갓은 일이 참 묘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여인을 다라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무척 청결했다.
기름을 잔뜩 머금은 장판은 길이 나서 거울처럼 반들거렸다.
"잠시 기다리셔요. 목욕물 데워 놓을 테니 우선 목욕을 하시지요."
김삿갓은 그저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과부라고는 하지만 여염집 아낙네가 외간 남자에게 목욕물을 데워 준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일이 되어가는 대로 내맡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혼자 따뜻한 방에 앉아 있으려닌 사르르 졸음이 찾아왔다. 김삿갓은 이내 벽에 등을 대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방문 열리는 소리에 김삿갓은 눈을 떴다. 여인이 밖에 서 있었다.
"주무셨나봐요!" 여인이 바시시 웃으며 말했다.
"깜빡 졸음이 왔었던 모양입니다."
"졸리시면 편히 주무실 것이지 그러셨어요? 물이 데워졌으니 욕간으로 오세요. 저 아래 뜰에 있어요."
김삿갓은 실로 집에서 나온 지 몇 개월만에 목욕을 해보는 것이었다. 몸에서 때가 국수가닥처럼 나온다더니 김삿갓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었다. 목욕물이 마치 재를 풀어 놓은 듯 잿빛으로 변했다. "뜻하지 않게 호강 한번 잘 하는구나." 김삿갓은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목욕이 끝나자 바로 저녁상이 들어왔다.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어떻게 닭을 잡았는지 닭찜이 올라와 있었고 쇠고기 국도 있었다. 김삿갓은 마치 집에 돌아와서 아내로부터 저녁상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맛있는 반찬에 반주까지 곁들여 저녁을 먹고나니 세상이 온통 자기 것 같았다. '세상살이는 참 단순한 것이야. 배불리 먹으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을....'
김삿갓은 담배를 피워물며 지긋이 소리없이 타고 있는 촛불을 바라본다. 그런가 하더니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아련히 스쳐 지나간다. 어린시절 아버지 앞에서 명심보감을 외우던 일, 그러나 아버지의 얼굴은 뚜렷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큰 집에서 돌연히 산골로 이사왔던 일이며 그곳에서 서당에 다녔던 일, 거기에 찌든 살림살이...... 김삿갓은 백일장의 일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조용한 밤, 그 일을 생각하면 당장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일을 잊기 위해서 방랑의 길을 나선 것이 아니던가?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주인 여자는 깨끗한 금침을 들여 놓고 자리까지 갖다 놓은 후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누운 김삿갓은 갑자기 여인이 그리워졌다. 굳이 안주인 여자가 아니더라도 이제 스물 한 살인 그의 청춘은 본능적으로 이성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몸을 이리저리 뒤채었다. 자연히 그의 관심은 안방에 있을 그 집 주인 여인에게로 쏠렸다. '까짓거 사내 녀석이 과부 하나쯤 꺽지 못한대서야 어디 사내라 할 수 있겠는가?' 김삿갓은 엉뚱하게도 이젠 그 주인 여자에게 음심을 품으며 이렇게 자기의 생각을 합리화시켰다. '흥 배불리 먹고 목욕까지 하고서 금침을 깔아놓고 누우니, 엉뚱한 생각이 드는구나.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더니만......'
자신을 꾸짖듯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려 보았으나 그의 본능은 자꾸만 안방으로 쏠리는 것이었다. "허 참!" 그는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을 휘둘러 보니 문갑 위에 연적과 지필묵이 보였다. 그는 벼루를 꺼내어 천천히 먹을 갈았다. 먹물이 짙어지지 전에 이미 시는 머리 속에서 정리가 다 되어 있었다.
객수변조몽불인 만천상월조오린 죽창송천고절 도백이편시춘 소군옥골호지토 귀비화용마외진 세간물리개여차 막석금소해여신
쓸쓸한 나그네 베갯가에 꿈은 더욱 산란한데 하늘 가득 서리찬 저 달빛은 왜 이리도 외로운가 푸른 대나무와 푸른 소나무는 영원 불변의 절개를 자랑하지만 홍도와 백리는 봄에만 피고 지지 않던가 왕소군의 옥골도 오랑케 땅의 한 줌 흙이 되었고 꽃같던 양귀비의 얼굴도 마외피 아래 티끌이 되었네 무릇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다 이러할진대 오늘밤 그대 몸풀기를 너무 아까워하지 마소서
김삿갓은 이렇게 써놓고 몇 번씩이나 읽어 보았다. 복숭아꽃이나 오얏꽃같이 화려한 꽃일수록 봄에만 피고지고 라는 귀절은 청춘도 한 때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거기에 천하의 미녀 왕소군도 호왕에게 끌려가 임을 그리다 죽으니 흙으로 돌아갔고 당 명황을 사로잡았던 양귀비도 몰려 죽게 된 즉 한 줌 티끌이 되었으니 무릇 인생이란 이렇게 허무한 일이 아니냐는 충동이 그 다음을 잇고 있었다. 김삿갓은 자기가 지은 시를 보고는 빙그레 혼자 웃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떡 헌다?' 김삿갓은 써놓기는 하였으나 어떻게 할 바를 몰라 부질없는 궁리를 거듭했다. '에라 사내 대장부가 한번 썼으면 그대로 실행을 해야지 뭣을 머뭇거리고 있단 말이냐?' 김삿갓은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나무랬다. 이윽고 그는 종이를 들고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안방을 살펴보니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살금살금 안방 쪽으롤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살며시 장지문을 여는 손끝이 떨렸다. 장지문이 스르르 열려도 여인은 아는지모르는지 기척이 없다. 김삿갓은 마침내 종이를 방안으로 들이밀었다.
"어머나!"
비로소 여인의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삿갓은 아무말 없이 방문을 다시 닫았다. 종이를 펼쳐보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뛰쳐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겁탈이 되는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그런데 글을 다 읽었을 법도 한데 아무 소식이 없다.
소식은 커녕 숫제 쥐죽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젠장, 글 뜻이 뭣인지 못알아보는게 아닐까?' 김삿갓은 자기가 너무 여인의 교양을 높게 평가하였음이 아닐가 하고 가만히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어차피 내친걸음이니 여인이 까막눈이든 가막눈이 아니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에헴!"
김삿갓은 잔기침을 하였다. 자기가 아직도 방문 앞에 서 있음을 알리자는 행동이었다. 아니, 눈치가 있는 여자라면 사나이가 방문 앞에 서 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세요?" 하며 여인은 딴청을 부렸다.
"사랑채 선비 말고 또 누가 올 사람이 있겠소이까?" 김삿갓은 웬지 약이 올라 퉁명스런 목소리로 내질렀다.
"어찌 거기서 계세요? 추우실 텐데........."
"답장을 주어야 서 있든 내려가든 아니면 올라가든 할 게 아니오?" 그제서야 방문이 열렸다.
"내외가 유별하긴 하지만 밤중에 은밀히 찾아오신 손님을 내쫓을 수야 있나요? 들어오세요."
김삿갓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른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 춥다!"
비단 이불을 다짜고짜로 집어 올리며 김삿갓은 능청을 떨었다.
"어머, 너무 무례하세요." 여인은 나즈막하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원래 나비는 꽃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앉는 법인데 공연히 밖에서 떨고 서 있었던 것 같소이다 그려"
"꽃도 향기가 있어야 나비가 앉지를 않습니까?"
"모란은 향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꽃을 찾아 날아가던 나비가 모란을 보고 비켜가지는 않습니다. 이내 날아가기는 합니다만"
"호호호,
그럼 제가 모란이란 말씀이신가요?"
"향기가 있는 모란이지요." 여인은 어느 새 본능적으로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김삿갓은 살그머니 여인의 허리를 감았다.
"이러시면 안돼요."
여인은 몸을 배암처럼 비비 꼬았다. 그러나 완강한 저항을 아니었다.
"아까 내뜻은 글로 전해 드렸지 않았소이까? 더구나 큰 집에는 지금 부인과 나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피가 끓고 있는 나마녀가 하룻밤 회포를 푼대서 죄될 게 있겠습니까? 부인, 모처럼의 기회를 헛되이 보내지 마시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여인의 허리를 힘껏 껴안은 채 요위에 천천히 뉘었다. 이년동안의 수절 과부와 칠팔 개월 여인을 잊고 있던 사나이의 춘정은 그야말로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격렬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튿날 김삿갓은 사랑방에서 느즈막하게 일어났다.
밖에서는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온 모양이었다. 여인이 뭐라고 분부를 내리는 음성도 들렸다. '식구들이 왔나 보구나.' 김삿갓은 이런 생각을 하며 느긋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지 주모가 돌아왔고, 머슴놈도 돌아와 있었다.
안방 여인은, 사랑방에 묵고 계시는 선비는 천하에 명문장으로 사또에게 보낼 청원서를 써주셨으니 아침이 끝나는대로 관아에 가지고 가야 한다고 설쳤다. 여자란 낮과 밤의 두 얼굴을 지녔다더니 그 말이 옳다고 김삿갓은 생각했다. 왜냐하면 낮에 보는 안방 여인의 모습의 그 어디에도 어젯밤에 보았던 풍염한 그런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이윽고 아침상이 들어왔다. 역시 상다리가 휘어졌다. 김삿갓이 막 몇 숟갈 뜨려는데 안방 여인이 찾아와서,
"저는 우리 마당쇠 녀석을 데리고 관아에 들어가 어제 써주신 글을 직접 사또께전하고 오겠습니다. 떠나지 마시고 사또가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셔요."
이렇게 말하며 김삿갓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임도 보고 뽕도 따는 판에 어지 김삿갓이 싫다 하겠는가? 그는 다만 빙그레 웃음으로서 자기의 의사를 표시했다. 이윽고 관가로 떠난 여인은 점심 나절이 되자 만면에 희색을 머금고 돌아왔다. 앞으로 열흘 안으로 안진사네를 족쳐 이장을 하도록 약속을 하였다는 것이다."청원서를 써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기에 삿갓을 쓰신 과객이라고 하였더니 낯빛이 변하더군요. 암행어사라도 되는 줄 알았던가 봐요.
"여인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은근한 추파를 던져 왔다.다박솔밭 옹달샘에 청춘을 담그고 동짓달도 중순으로 접어들자 날씨가 매섭게 차가웠고 또 눈까지 내렸다. 겨울이 깊어진 것이다. 눈이 하얗게 내린 어느 날이었다. 관노 한놈이 무슨쪽지를 들고 김삿갓을 찾아왔다. 통인, 이방, 사령, 포졸 할 것 없이 김삿갓을 깎듯이 모시었다.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첫째는 자기네의 상전인 사또가 그를 칙사 대접을 하고 있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사또의 자제를 훈도하고 있는 스승이기 때문이었다.
"훈장님, 소인입니다." 관노는 김삿갓의 방문 앞에서 그를 이렇게 찾았다. 김삿갓은 방문을 열었다. "자네가 웬일인가?" "예, 어느 총각 녀석이 훈장님께 드리라고 이 쪽지를 주고 갔습니다요." "쪽지를?" "예, 여기 있습니다요."
김삿갓은 쪽지를 받았다. 관노가 물러가자 그는 방문을 닫고 쪽지를 펴서 읽었다. 쪽지에는 언문으로 또박또박 이렇게 적혀 있었다. 김선생님 전상서 소녀가 이렇게 외라마되이 글월을 올리게 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은 천지가 온통 은백색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런 때 선생님의 시를 경청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즐거움이 없겠나이다. 원컨대 금일 저녁 소녀의 누옥으로 납시어주소서. 지필묵 준비하고 기다리겠나이다. 가련 올림.
내용은 평범함 초청장이었다. 김삿갓은 가련이의 글씨가 달필인데 저으기 놀랐다. 그는 웬지 가슴이 뛰었다.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들가지인 양 교태가 자르르 흐르면서도 가을 하늘 아래 피어 있는 국화인 양 청초하기 그지없는 가련이의 자태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가야지. 암, 가고 말고."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김삿갓은 저녁 공부가 끝나기가 바쁘게 관아를 빠져나왔다. 출입할 때는 협문을 사용하였다. 협문에도 물론 문지기는 있었다.
"내 오늘밤은 늦을걸세." "훈장님, 어디를 가시는뎁쇼?" "뽕따러 가네." "뽕을요? 겨울에도 뽕이 있습니까?"
우직한 문지기 녀석은 호롱불을 든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겨울에도 따는 뽕이 있지. 혹시 사또께서 찾으신다는 전갈이 있으면 그림 말하게." 김삿갓은 이렇게 이르고 나서 잽싼 걸음으로 가련이의 집을 향해 걸었다. 처음 길이었지만 통인한테 자세히 물어서 오는 터라 찾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그는 대문간에서 목청을 돋구었다. 이내 대문이 열리더니 계집아이가 나타났다. "뉘시오니까?" "삿갓이 왔다고 가련아씨에게 일러라." "어머, 훈장님이시군요. 어서 드셔요. 벌써부터 우리 아씨께서 기다리고 계셔요." 계집애는 호들갑이 보통이 아니었다. 김삿갓은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셔요."
가련이는 섬돌 아래까지 내려와 김삿갓을 맞이했다. "그간 잘 있었는가?"
"예, 쇤네는 무고하였사옵니다." 가련의 김삿갓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웬일인가? 나같은 훈장을 다 초청하고."
김삿갓의 이 말에 가련은 눈을 곱게 흘기었다. 분홍빛 호박단 치마 저고리를 입고 있는 가련이의 모습은 마치 갓 피어난 월계화 같았다.
"전 혹시 안 오시면 어떡하나 하고 가슴 조이고 있었어요."
"허허, 내가 무슨 뚝심으로 안 올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감지덕지하고 달려왔네. 한데 내 두 다리가 성할지 그게 염려스럽군."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련이는 두 눈을 살포시 치켜 뜨고 김삿갓을 요염하게 바라본다.
"자네 눈치가 그렇게도 없는가? 서진사가 내 이꼴을 본다면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곧 달겨들게 아닌가?"
"아이, 훈장님도 서진사와 제가 어쨌다고 그런말씀을 하셔요?"
"내가 보기에는 서진사가 자네 꽁무니를 꼭 붙잡고 따라 다니는 것 같던데, 안 그런가?"
"하긴 절 좋아는 해요. 별의별 소리를 다 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기생의 몸으로 부르면 아니갈 수도 없는 일이라서 상대는 하고 있습니다만 별 깊은 관계는 없는 걸요."
"알았네. 내 별 뜻이있어 한 말이 아닐세." 이야기가 계속 진전되었다가는 공연히 서진사와 가련이와의 관계를 캐묻는 것 같아서 김삿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윽고 술상이 들어왔다. 가련이와 단 둘이서 술상을 놓고 앉아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훈장님, 처음 뵈올 때부터 아무래도 보통 분이 아니실거라고 생각했어요. 무언가 숨기고 계시는 일이 있을 것 같아요."
술이 몇 잔 기울어지자 가련은 말문을 열었다. "그건 어째서인가?" 김삿갓은 이미 취기가 거나한 눈으로 가련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글쎄요, 삿갓을 쓰고 계셔서 그런가요?" 호호호, 아니예요. 훈장님의 시를 읽고 나서부터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거 훈장님 훈장님 하지 말아라. 네가 자꾸 훈장님이라고 부르니 저절로 시가 떠오르는구나."
"어머, 그렇잖아도 한 수 청할까 하였는데 잘 되었어요. 자 들려 주세요."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나서 가련이 내미는 붓을 받아 들었다.
세상수운훈장호 무연심화자연생 왈천왈지청춘거 운부운시백발성 수성난청칭도어 잠이이득시비성 장중보옥천금자 청촉달형시정상
세상에 어느 누가 훈장 노릇이 좋다고 하였는가. 연기도 없이 속은 타서 심화는 저절로 나는구나. 하늘천 따지 하는 사이에 어느 덧 청춘은 지나가고 부가 어떻고 시가 어떻고 하는 동안에 백발이 되겠네. 비록 지성으로 가르쳐도 좋은 소리 듣기는 어렵고 잠시만 자리를 떠도 궂은 소리 듣기는 십상이네. 손아귀의 천금 보석과 같은 자식을 맡기면서 때려서라도 가르쳐 달라는 청이 딱하기도 하여라. "호호호.........."
시를 읽고 난 가련이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무렸다. 감탄을 했다 는 표시였다. '하늘천 따지 하는 사이에 어느 덧 청춘은 지나가고....' 하는 귀절이 이상스럽게도 가련이의 심금을 찔러다.
그녀는 이 귀절이 어쩌면 자기의 처지를 비유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야금, 장고 소리에 어느 덧 청춘은 지나가네.' 이렇게 바꾸어 놓는다면 틀림없는 자기 신세였다. "어떤가?" 김삿갓은 술 한 잔을 기울이고 나서 물었다. "훈장 노릇이 그렇게도 괴로운 것인가요?" 가련이의 눈에는 눈물이 촉촉히 어려 있었다. "그야 해 본 사람이 아니면 모르지. 그러니 훈장님 훈장님 하고 부르지 말게나." "그럼 뭐라 부르지요?" "자네 마음대로." "서방님이라 부르면 안 될까요?" "그거 좋군." 두 사람은 여기에서 말이 멈춰졌다. 밖에서는 눈이 내리는지 사그락거리는 엷은 음향이 고즈넉하게 들려왔다. 김삿갓은 갑자기 가련을 안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때 가련이 말했다.
"서방님, 서방님께서 지으신 시가 왠지 소첩의 신세만 같아 눈물이 나는군요.
" 서방님이니 소첩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니 김삿갓은 감정이 미묘해졌다. "아니, 그건 내 신세타령을 한 것인데 자네 처지와 같다니 무슨 말인가?" "권주가를 부르고 장고를 두드리고 하는 사이에 이윽고 꽃다운 청춘은 지나가니 말이에요." "허허, 그럴 법도 하군.
하지만 세상살이란 다 그렇고 그런 것이야." "그럴까요?" "그렇다니까. 그러니 자기 생각대로 뜻있게 살아가면 되는 걸세. " "서방님, 소첩도 부모 덕분으로 시문을 좀 배워 알고는 있습니다만, 서방님과 같은 시재는 아직 만나뵙지 못했습니다. 서방님, 소첩에게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이 있사온데 들어주시겠어요?" "뭔가?"
김삿갓은 가련이 기생의 몸이고 보니 말을 함에 있어 해라를 해야 마땅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혀가 돌아가지를 않았다. 따라서 엉거주춤한 반말이 되었다. 하긴 나이를 따진다면 불과 서너 살 위밖에 안되겠지만. "서방님을 곁에 모시고 시문이나 배웠으면 해요." "이번에는 가련이 훈장 노릇인가? 하하하, 오늘밤, 알고보니 다 뜻이 있어서 날 불렀군 그래." "달리 생각지는 마세요. 첫째로는 서방님이 좋으니까 곁에 모시려는 것이고 둘째로는 시가 좋아 배우려는 거예요. 들어 주시겠어요?" 가련이는 엉덩이를 방바닥에 붙인 채 밀듯 하면서 삿갓 곁으로 다가 앉는다. "그러다가는 이 안변 땅에서 쫓겨나기 십상이지." "그건 또 왜요?"
"사또 자제분 훈장 노릇하는 것도 시기가 나서 나를 몰아 내려는 무리들이 있는데 한 발 더 내밀어 가련이와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나 보게. 나는 기둥서방이라는 점이 찍힐 테고 배아파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닐걸세." "아이, 서방님도, 제가 누구에게 매인 몸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서진사가요? 호호호호......." 가련이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 영감이 제게 침을 흘리고는 있지요. 하지만 그 뿐이에요. 지난 봄에는 제 머리를 얹어 주겠노라고 참 무척도 치근덕거렸지요. 소실로 들어오면 2천냥을 내놓겠다고 하기까지 하였어요. " "그래 거절했단 말인가?" "거절했지요.
누가 그런 영감쟁이에게 순결을 바치겠어요?" 김삿갓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기생이 순결이라는 말을 쓰니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잖은가? "서방님은 기생에게는 순결이 없는 줄 아세요?" "글쎄,
정절이란 말은 들었어도 순결이란 말은 아직 못들어 봤네.
" 김삿갓의 이 말에 가련이는 갑자기 샐쭉해지더니 한숨을 후욱 내쉬었다. "천한 기생의 몸으로 순결을 말하다니 어떻게 생각하면 참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요. 하지만 소첩은 아직 동기예요. 여자는 첫정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법이에요. 우리 같은 기생들은 더욱 그렇죠. 하긴 머리 얹어 주겠다는 사내들은 많았지만 어차피 사내들 틈에서 시들어 갈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첫 정만은 제 마음에 드는 분에게 바치고 싶었어요.
" 김삿갓은 듣고 나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럼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평생 처녀의 몸으로 늙어 가겠군." "호호호, 그건 염려 안 하셔도 돼요. 가련이의 처녀성도 이제 경각에 달렸으니까요." "경각이라니?" "서방님도 어쩜 그리 둔감하세요? 제 머리는 오늘밤 서방님의 손으로 정히 올려질 거예요." 이 말에 김삿갓은 가슴이 화끈했다. "일이 그렇게 됐나. 핫하하......"
김삿갓은 가련이의 손을 덥썩 잡았다. 부드러운 손이었다. 꼭 쥐면 으깨어질 것만 같았다.
"서방님, 부디 제 곁에 오래 있어 주세요. 저 서방님 편히 모실 수 있어요. 뭣하면 기생질 안해도 좋아요
." 김삿갓은 정이 깊이 든다 할지라도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하룻밤의 불장난이라면 모르지만. 밤은 소리없이 깊어만 갔다. 김삿갓은 연거푸 마신 술기운이 차츰 농도 짙게 몸을 휩싸기 시작했다.
"서방님, 옷을 벗으세요." 가련이는 김삿갓의 옷을 몸소 벗겼다. 그는 가련이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다만 훈훈한 봄바람이 코끝에 다달아 싱그러운 그러 감촉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촛대에서는 굵은 황촛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취하셨어요?" 가련이는 김삿갓을 요 위에 누이며 물었다. "글쎄, 그런 것 같군. 아니야. 가련이의 향기에 취한 것 같아. " "호호, 그렇담 이제 더 취하실 거예요." 가련이는 불을 껐다. 그리고 사그락 소리를 내면서 옷을 벗더니 김삿갓 곁으로 파고들었다. 팔팔한 젊은 남녀가 호흡을 같이 하니 그정열은 일순간에 일어났다. 김삿갓은 가련이의 보드라운 몸을 애무하였다. 마치 비단 잉어를 만지듯 가련이의 몸은 매끄럽기 그지 없었다. 그는 가련이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내 언문 시조 한 수 읊을까?" "그러세요"
가련이의 입에서는 더운 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큰 솔밭 밑에 작은 솔밭, 작은 솔밭 아래 옹달샘, 옹달생을 돌아가니 여우굴이 나오도다.
이게 뭣인지 알겠는가? " "얼굴이지요. 큰 솔밭은 머리털이고 작은 솔밭은 눈썹일테고 여우굴은 콧구멍이 아니겠어요."
"맞았다." 김삿갓은 가련이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던 손길이 살금살금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삿갓은 또 말했다. "내 또 한 수 읊으랴?" "농담하시면 싫어요." "농담이라니, 사실을 읊는 것 뿐인데 농담이겠는가?" 김삿갓은 가련이의 몸 깊숙이 손을 벋어 가면서 흥얼거리듯 읊조리었다.
창 밖에는 동짓달 찬눈이 내리는데 금침속에는 춘풍을 맞아 복숭아 두 개가 익었도다.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언덕 아래 옹달샘은 달나라 항아님이 목욕하고 간 자린가 다박솔 울울하여 갈 길이 막혔는데 차라리 붉은 벼랑 아래로 굴러나 볼까
김삿갓의 읊조림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손길은 가련이의 깊은 곳을 더듬고 있었다.
"아이....."
가련이는 몸을 비틀었다. 쌍심지에 불이 돋은 듯 김삿갓은 춘정을 더 이상 이기지 못해 가련이를 덥썩 껴안고 품 안으로 당겼다. 그리고 숨가쁘게 흐느적거리는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다. 이튿날 김삿갓은 느즈막하게 눈을떴다. 어느 결에 일어났는지 가련이는 벌써 단장을 곱게 한뒤였다. "퍽 잘도 주무시데요." "자네 탓일세." 김삿갓은 자리에 누운채 능청을 떨었다. 누워서 올려다보노라니 가련이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뒷동산의 익은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봄날은 하루가 다르게 따뜻해 가고 복숭아 꽃이 곱게 피는 사월이었다. 김삿갓은 이렇게 꽃피는 사월이 되니 한결 가련이가 보고팠고, 인생에 있어서 산다는 목적은 의식주만이 전부가 아니요, 역시 자기의 짝을 찾아 동고동락하는 것이 필부필녀의 생활 철학임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런 생각 속에서 며칠을 걷고 걸어 길주 땅에 당도하게 되었다.
어느 곳이라고 걸인 행색이나 다름없는 이 삿갓 시인을 반겨줄 데가 있으련만 그는 멋도 모르고 이름만 좋은 길주 땅을 찾아든 것이었다. 길주는 옛날부터 나그네를 절대로 잠재워 주지 않기로 유명한 고을이었다.
봄은 북상할수록 무릉도원처럼 아름다웠지만 인심은 북상하는 만큼 북풍한설처럼 살쌀하기 이를데 없고 어느 집을 찾아가도 문을 닫은 채 내다보지도 않는 데는 기가 막혔다. 마침 김삿갓은 허씨만이 모여 사는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기어코 날이 저물어 하룻밤의 유숙을 원했지만 말짱 헛수고였다. 아무리 나그네를 꺼리는 인심이라 해도 열 집에 한 집쯤은 마지 못해서 재워주는 수도 있는데 그처럼 철저하게 박대하는 지방은 김삿갓으로서는 처음이었다. '과연 나그네의 지옥이로구나.' 김삿갓은 워낙 야박스러운 인심이 미워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화풀이를 했다.
길주길주불길주 허가허가불허가 이름만 길주 길주 하나 길한 고을은 못되며 성만 허가 허가 했지 나그네는 허가하지 않는구나
시만 지어 화풀이만 하면 무엇할랴? 그는 꼭 사흘밤을 남의 집 처마 밑이나 빈 헛간에서 새우고 지긋지긋한 고생을 하였다. 길주에서 고생한 삿갓은 또 북쪽으로 가서 이번에는 설마하고 명천땅을 찾아들었다. 그러나 이 지방 역시 이름만 명천이지 인심 사납기는 길주에 못지 않았다. 원래 명천은 명태의 원고장이었다. 명태란 이름도 명천에 사는 태서방이 잡은 고기라고 하여 명태가 아닌가? 이 북어인 명태가 썩어 버릴 정도로 많이 잡힌다는 명천 땅이지만 삿갓은 그 북어 꽁지 하나 얻어 먹어 보지 못하고 고생만 했다.
"허허, 이놈의 곳도 길주땅 뺨치는 곳이로구나." 김삿갓은 두만강까지 찾아가 보려던 애초의 결심을 버리고 다음과 같이 명천땅을 비웃는 시를 한 수 읊은 뒤에 부지런히 다시 남하의 길을 걸었다. 명천명천인불명 어전어전식무전 명천 명천 부르지만 사람들은 현명치 못하고 어전 어전 자랑하지만 밥상에는 북어꽁댕이 하나 없구나 다시 길주를 거쳐 단천 땅을 향하니 봄도 벌써 지나가고 여름이 다가왔다.
단천은 그래도 비교적 인심이 후한 고장이었다. 서당도 그랬고 민가도 그랬고 웬 만하면 술도 한 잔 대접할 줄 아는 고을이었다. 그는 어느 날 단천의 유명한 남대천 물가를 찾아 갔다. 옥같이 맑은 물이 돌 위를 흐르며 오랜 동안 목욕도 하지 않은 삿갓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래, 내 저 시원한 물 속에서 목욕이나 한번 하자.' 김삿갓은 나무숲이 우거진 곳에 가서 옷을 훨훨 벗고 목욕도 하고 땀에 찬 속옷도 대충 빨아서 바위 위에 널고 마르기를 기다렸다. 옷을 말리고 있는 동안 김삿갓은 모처럼 흥이 돋았다. 몸도 마음도 다 개운하다. 머리를 드니 여기저기 높이 솟은 봉우리 위에는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정말 모두가 아름답게만 보였다. 백사장의 나체 시인 김삿갓은 구름에 가렸던 봉우리가 다시 나오고, 나온 봉우리가 다시 가려지고, 그러다가 나온 봉우리가 또다시 가려지고 다시 또 모든 구름이 흘러간 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나는 여러 산봉우리를 보니 지난 가을 금강산을 보던 감회가 다시 살아났다.
춘수만사택 하운다기봉 봄물은 사방의 연못에 가득하고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가 많기도 하구나.
한 경개가 새삼 떠랐다.
일봉이봉삼사봉 오봉육봉칠팔봉 수아갱작천만봉 구만장천도시봉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봉우리 잠깐 사이에 또 천만 봉우리 구만장천 모두 봉우리로다 봉우리는 산봉우리 뿐만이 아니요, 그 산 위의 구름도 모두 봉우리 형상이 아닌가?
참 하늘엔 구름산도 많구나.' 이렇게 모래사장에 드러누워, "일봉, 이봉, 삼사봉......."
하고 흥얼거리고 있는 숲속에서 웬 중년 선비 하나가 부채질을 하며 나오더니, "허, 나그네 양반 실례하오. 혹시 댁이 김삿갓이라는 분 아니시오?" 하고 묻는다.
물론 김삿갓도 옷을 벗어 놓고 누워있는지라 청명한 날 그걸 보고 그러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함경도 땅에 퍼진 자신의 이름을 벌써 알아듣고 하는 소리 같아서,
"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제 이름까지...."
"하하,역시 그분이셨군요. 어제 우리 마을 어 서당에 들르신 적이 있지요? 그 서당에 갔더니 삿갓 쓰신 시객 한 분이 다녀가셨다고 해서...." "그래 일부러 절 만나러 나오셨소?"
"아, 그야 아니지만 나도 등물이나 할까 하고 강가에 왔더니 마침 어디서 글을 읊는 소리가 나기에 눈여겨 보았죠. 그랬더니 마침 저 삿갓이 있지 않소?" 이 선비는 마치 십년지기나 만난 듯이 반기며 잠뱅이 하나만 차고 있는 삿갓에게, "나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최백담이오. 선생의 성가는 익히 들었습니다."
"네, 제가 바로 김삿갓입니다만 어찌 그리 저를 잘 아시는지?"
"허허, 제가 얼마 전에 함흥땅에 외가가 있어서 들렸더니 시를 지어 억울한 과부의 산송을 이기게 했다는 소문이파다합디다. 사또께서 무척 놀라워하셨다고 하던데요." "참말이지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별것두 아닌 일이 우습게 퍼졌군요." "하, 이거 대시인 선생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과분한 말씀 송구합니다." 이렇게 하여 삿갓과 백담은 강가에서 서로 알게 되었고 백담의 인품이나 학문이 선비 그대로여서 삿갓도 오랫만에 선비다운 선비를 대하는 기쁨과 예의로 그를 대하게 되었다. 둘은 다같은 풍류객끼리인지라 서로 글 얘기가 없을 수 없었다. "최선생, 한 수 들려 주시오." 삿갓이 백담의 시를 한 수 듣고 싶어 먼저 청하니까, "저보다도 김선생이 시인이시니 먼저 좀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그 다음에 제가 하리다." "그럼 운은 선생이 부르시오." 삿갓은 사양하지 않았다. "흐를 유!" " 허허, 강가니까 그 운자 좋군요." "하하, 선생은 제 마음에 드는 말씀만 하십니다."
산여검기충천립 수학병성동지류
산은 칼의 기상으로 하늘을 칠 듯 서 있고 물은 병정의 소리를 배워 땅을 울리고 흐르는구나
"흠, 과연 삿갓 선생의 시풍이십니다." 최백담은 진정으로 감탄하였다. 그러나 남의 시만 듣고 만족할 선비가 아닌 것 같아서 "이번엔 백담 선생 차례요." "운은?" "돌아올 회!" 백담도 잠깐 시상에 잠기더니 드디어 아까 삿갓이 지은 것과 비슷한 대귀를 하나 읊었다. "허허, 내 시보다 더욱 좋습니다." 삿갓은 정말 감탄을 했다. "웬걸요. 아무래도 시원치 않습니다." 백담은 겸손하기도 했다. "헌데 선생, 실례지만 그 욕자를 불로 갈고 장자를 난자로 바꾸면 어떨까요? 그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 그럽니다." "그러면 이렇게?"
산불도강강구립 수난천석석두회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하여 강 어구에 서 있고 물은 돌을 뚫기가 어려워 돌머리를 돌아가네
"그것 참 훨씬 더 운치가 나아졌습니다. 역시 대가다운 시인이시구려." "원 별말씀을, 죄송합니다. 함부로 선생의 시를 왈가왈부해서....." 삿갓은 자기의 시를 고쳐 주어도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고맙게 여기는 이 선비가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헌데, 김선생, 내가 듣기보다는 굉장히 젊은데 그래 성혼은 했겠죠?" 백담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렇게 물었다. 아닌게 아니라 백담은 삿갓보다 근 십 년이나 연치가 높게 보여, "예, 성혼이야 했습니다만 선생께서는 말씀을 낮추어 주시지요." 하고 겸손히 말하니 "허 천만에요. 내 나이도 아직 사십이 못되었는데 더구나 선생같은 시객에게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하고 역시 겸손한 말을 한다. 삿갓은 이래저래 백담이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겸허하고 박식한 선비도 있는데 그 되지 못한 훈장들, 아이들에게만 큰 소리치는 그들에게 도무지 신물이 난 그에게는 여간 반가운 지기가 아니다. 그들은 잠시 세상을 잊고 이 아름다운 산수간에 앉아서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선생, 다 있는데 술이 없구려." "허허, 없는 술보다는 있는 물이 더욱 좋지 않습니까?" "아 그 좋은 말씀이오." "선생은 그래 이 마을에서 무얼로 소일을 하시오?" "하하, 나야 감농이나 하고 이렇게 가끔 산수간에 나와 풍월이나 하는게 지락입니다." "역시 고매하신 분이십니다." "김선생, 오늘은 그래 어디로 가실 작정입니까?" 백담은 삿갓이 여전히 궁금한 모양이었다. "저야 뭐 일정한 여로가 없습니다. 그저 오늘은 이 강물이나 다라서 내려가 볼까 합니다." "정말 풍류객다운 말씀이시군요. 그러나 이 강물을 따라 가시면 바다밖에 없습니다."
"허, 글쎄올시다."
"김선생, 딴생각 마시고 오늘부터 우리 사랑에서 며칠이든 묵으시지요. 내 꽤 광작하니 의식주는 걱정이 없소이다. 찬없는 밥이나마 나눠 먹으면서 가끔 서로 풍월이나 하십시다." 삿갓은 이 겸손한 선비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삿갓을 쓴 채 강마을로 들어갔다. 최백담의 집은 과연 선비의 집이요, 풍류객의 집이었다.
깨끗한 기와집의 네 귀에는 풍경을 달았고 아름드리 기둥마다엔 좋은글씨의 주련이 격조를 높였다. 사랑채에 안내된 그는 서늘한 대청에서 고금의 진서가 즐비한데 놀랐고 이어 나온 주안상의 솜씨가 정갈하면서도 아담해서 과연 안목이 있는 집안임을 한 눈에 알 수가 있었다. "자, 우선 한 잔 합시다." "네, 잘 먹겠습니다."
먼 강은 소리없이 흐르고 뒷산은 깎아지른 듯 높은 남향 집에서 두 선비는 주거니 받거니 주홍도 흥겨웠다. 이렇게 최백담과 단천땅에서 벌써 열흘이 가깝도록 시문을 나누며 시름을 잊고 기거하게 되자 삿갓이라는 이름이 이 강마을의 온 동리를 휩쓸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 강마을에는 과년한 규수 시인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이름은 단향이었다.
그 어머니는 옛날 함흥의 관기로 있다가 마치 춘향전에 나오는 퇴기 월매 마냥 김진사의 소실로 땅을 얻어 단천에 왔는데 김진사도 죽고 지금은 단 모녀가 바느질에 마음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었다. 단향은 그런 김진사의 씨앗이라 그런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어여뻤으나 이상스럽게도 혼삿말만 나오면 그것이 성사가 되지 않고 해서 벌써 스물이 넘도록 출가를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튼 진사의 딸이라 아주 상인하고는 혼인을 하고 싶지 않은 데다가 막상 내노라 하는 양반집에서 퇴기의 딸을 뭐 그리 좋게 볼 리도 없고 하여 피차 일이 성숙할만 하면 꼭 누가 이간질을 해서든지 파혼이 되곤 하였다. 단향은 거의 시집갈 것을 포기한 정도이었으나 해마다 봄이 오면 동리 사람들은 올봄도 그대로 넘기는 단향이가 아깝기만 하다고 우물가에선 늘 말이 많았다. 그런 봄이 가고 여름이 왔는데 이 동리에는 웬 김삿갓이란 방랑객 하나가 마을에서도 가장 신망이 두터운 최백담의 집 사랑에 들어서 시를 하며 소일한다니 글줄이나 읽고 지을 줄 아는 이 단향이에게도 그 소문이 전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 백담 선생댁에는 웬 풍월하는 손이 들었다면서요?" "글쎄 말이야. 나이도 스물 다섯밖에 안되었는데 그렇게 글을 잘 한다는구나." "어머나....어쩜......"
단향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그 어머니는 보았다. 한편 최백담의 사랑에는 이웃 마을 훈장들까지 밤마다 몰려 들어 그 소문난 김삿갓을 보고 가려고 붐볐다. 짓구은 어느 선비는 "아, 그 삿갓 선생, 우리 마을 처녀 문장인 단향이하고 시 좀 같이 지어보게들 하지." 하고 악의없이 웃으며 말하자 "그 일이야 단향이 어머니 하고도 자별하신 백담 선생이 다리를 놔야지 누가 그러겠소?" 하고 제안을 했다. 그때야, "참, 단향이가 올봄도그냥 넘겼으니 이제 스물 하난가? 너무 과년해서 .... 그런데 요즘도 글을 읽나?" 백담도 뭔가 생각한 바가 있다는 듯이 젊은 선비에게 웃으며 물으니, "아, 글이야 문장이지요. 요즘도 저 혼자 풍월도 한다는데요?"
"그래? 내 그러면 단향이에게 한 상차리라고 이르고 우리 삿갓 선생 한 번 모시고 가지!" "허허, 그것 참 천생연분일 겝니다." "아, 알 수 있어? 노처녀 혹시 머리까지 얹어 주실지." 삿갓은 아무 대꾸도 없이 앉아만 있는데 사랑의 손님들은 자기들 끼리 말이 많았다. 그런 어느날 백담은 정중하게 삿갓에게 묘한 의향 하나를 물었다. "아, 저녁마다 마을 선생들도 더러 권하기도 했지만 내 혹시 선생에게 무례가 될까봐 아직 함구해 왔는데 마침 우리 내자가 단향이 집에 볼 일이 있어 들르니 그 어머니가 반색을 하며 선생의 일을 낱낱이 묻기로 왜 의향이 있느냐고 반문하니 퍽 그럴 듯이 말을하더랍니다. 물론 이미 조강지처가 계신 줄 아옵니다만 대장부가 객지에서 노처녀의 원한 좀 풀어 주기로 뭐 어떻겠습니까?" 최백담은 차근차근 말했다.
"글쎄올시다. 나야 뭐 객창에서 무관하옵니다만 어찌 규중의 동정녀를 머리까지 얹어줄 자격이 있다 하겠습니까? 아무래도 수분이 아닌 줄 압니다." "허허 김선생, 그렇게라도 해서 처녀 귀신 소리 듣는 원한이나 덜어준다면 그 또한 적선이 아니겠소? " "허허....., 과분하옵니다."
마음이 없는 삿갓은 아니었지만 가련이처럼 기녀는 아니고 요조한 규수라는 데는 마음이 찔렸다. "더구나 시서에 능하여 그 어머니의 소원대로 데릴사위로나 들어가시면 단 둘이 풍월이나 즐기고 이런 호강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아따, 덕분에 백담도 술 한상 얻어 먹읍시다."
백담의 집념은 무척 강했다. 이튿날이 되어서였다. 백담은 자기 부인에게 미리 통첩을 보내고 삿갓에게는 새옷을 한 벌 갈아 입혀 가지고 그를 데리고 재넘어 단향이의 집에 찾아갔다. 단향이의 집은 재넘어 남향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와가로 마당 아파엔 한참 목련이 피고 있었고 손님이 온다는 기별이 있어서 그랬는지 집안은 그 어디에도 티끌하나 없이 깨끗하고 아담하기만 했다.
"이리 오너라!"
안마당을 지나 대청 앞에 가서 백담이 크게 부르니 부엌에서 한창 음식 준비에 바쁘던 단향의 어머니가 앞치마 바람으로 뛰어나와, "어머나! 백담 어른, 이렇게 와 주셔서........" 하고 부리나케 사랑으로 두손님을 모셔 들였다. 사랑에 나란히 앉은 두 선비, 서로 무언 중에 희색이 만면한데 오늘따라 김삿갓 시인이 자기 집에까지 찾아온 지금의 단향이는 뒷결 소나무 아래 장광에서 가슴을 조이며 무슨 일인가 하는 척하다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는 등 괜히 몸도 마음도 분주하기만 하였다. 삿갓은 그 처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일부러 앳돼 보이게 힙은 짧은 분홍 치마 아래의 하얀 종아리를 언뜻언뜻 볼 수 있었다. 상이 들어오기까지 좀 무료했던 백다미은 "아, 김선생, 먼 빛으로나마 단향이를 보았으니 이따가 보여주게 글 한 수 지어 보시지요?" 하고 웃으며 말했다. "허허, 글쎄요. 뭐 갑자기 생각이 나겠습니까만 한 수 지어 볼까요?" 하고 단향이가 쓰는 듯한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우선 한수 적었다.
규중처자대여양 완착분홍단포상 적각랑창수과객 송이심원농화향
규중 처녀가 다 커서 어른같은데 분홍빛 짧은 치마를 느슨하게 입었도다. 붉은 다리가 드러나서 과객을 부끄러워 하는 듯 소나무 울타리에 숨어 꽃 향기를 희롱하누나
단향의 마음을 꿰뚫어 본 그의 시심이었다. "허허 단향이가 정말 좋아하겠습니다." "원 별말씀을...." 잠시 후 주안상이 떡 벌어지게 나왔고 이어 곱게 단장한 단향이가 들어왔다. "자, 뭐 딴 뜻은 아니고 서로 글줄이나 하는 문장이니까 이런 자리를 마련하여 담론도 할 겸....
" 백담은 처음부터 혼담을 내놓을 수도 없고 하여 이렇게 얼버무리자, "암, 그렇구 말구요. 선비님이 워낙 문장이사라니까 글도 좀 가르쳐 주실 겸 자주 놀러 오세요." 단향의 어머니도 마음은 딴 데 있으면서 그럴 듯하게 말을 둘러댔다. "허허, 이거 과객에게 너무나 과분하신 배려를하셔서 무어라 들릴 말씀이 없군요." 삿갓도 남자답게 사례를 했다. 단향은 아무리 마음 속으로는 기뻐도 말 한마디 못하고 앉아만 있는데
"얘야, 선생님들이신데 어떠냐? 술도 좀 딸아 올리고 얘기도 하려므나." 단향의 어머니는 너그럽기가 바다같이 말한다. "어머나, 어머니도 어떻게.......?" 상냥하게 미소짓는 단향이가 삿갓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고 단향이도 어딘가 모르게 서글서글한 김삿갓시인이 영 싫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백담이 감빡 잊고 있었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참 지금 막 이 분이 단향이에게 주려고 쓰신 시인데 어디 단향이 한 번 읽어 보지." 하자 단향이 붓글시를 쓴 백지를 펴서 읽어 보고는
"어머나! 오시자마자 어쩌면...." 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날은 초면이라 더 이상 얘기하기도 쑥스럽고 하여 간단히 끝내고 다음 날부터는 삿갓이 혼자서 단향이의 집에 찾아가니 그 어머니도 은근히 반겨했고 노처녀인 단향은 밤이 이슥토록 시서를 놓고삿갓 선생과 즐기기를 마지 않았다. 이렇게 단향이를 알게 된 삿갓은 백담에게는 다소 미안했지만 영 단천땅을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보름이 한 달이 되고, 또 한 달이 보름이 되도록 묵었다. 그러니 그 마을에서는 두 사람을 두고 말이 많았다. "그래, 단향이가 그 삿갓 선생에게 단단히 반했다더군" "아니, 그 삿갓쟁이두 단향이가 삿갓쟁이를 좋아하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던데......?" "참, 연분은 다 따로 있군. 영 넘고 처져 시집 못갈 줄 알았던 단향이가......." "글쎄 말이우.
벌서 단향이의 몸에 그 삿갓쟁이의 애가 들어섰다는데" "아이구 망칙두 해라. 늙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벌써 그렇게 꿀맛을 봤나?" 이렇게 있는 말, 없는 말이 파다하게 나돌자 누구보다도 난처한 것은 단향의 어머니였다. "얘, 요즘 마을에 너하고 그 분하고의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데 이제 그 삿갓 선생을 우리 집에 오시지 못하게 할까?" 하고 의중을 떠보았다.
"어머? 어머니두? 그 선생하고 저하고 무슨 나쁜 일이 있다고 소문이 그렇게 나며, 내내 오시던 분을갑자기 못오시게 하다니 그게 웬말이세요?" '음, 네가 단단히 좋아하긴 하는구나' 단향의 어머니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아주 결판을 낼 셈으로 "글쎄 무슨 소문이 나든 네 몸만 깨끗하면 그만이다만 기왕 너도 혼기를 놓친 몸, 더 이상 말썽이 많기 전에 아주 그분하고 성혼을 하든가 해라. 보아하니 고향에도 냉큼 갈 사람은 아니고 데릴사위감으로 그만하면 무던하겠더구나. " 하고 말하니 단향이도 이내 모든 것을 각오한 듯 얼굴을 붉히며 "어머니만 좋으시다면 맘대루 하세요" 하고 못이기는 체 승낙을 한다. 단향의 어머니는 차라리 마음이 가뿐했다.자식도 없는 처지에 사위 겸 아들로 문장 시객인 김삿갓 선생을 데리고 함께 살 작정을 하고 이내 백담 선생에게 그 뜻을 전했다. 삿갓도 각오한 일이라 응낙을 하자 유월 어느날 드디어 단향이네 마당에서는 조촐한 혼인 잔치가 벌어졌다.
"허허, 내가 그렇게 될 줄 알았지" "암, 노처녀가 그런 선비를 마다할 리가 있겠나?"
"흥, 걸인 시인이 새처녀 얻고 땡 잡았지 뭐" 잔칫날 여기저기에서 마을 사람들의 말도 많았다. 삿갓은 까다로눈 절차와 인사,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끌려서 시도 짓고 하는 혼인날의 지루할 정도의 모든 일을 끝내고 밤이 이슥해서야 단향이와의 오붓한 신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가물거리는 호롱불 밑에서 신부는 단정하게 앉아 신랑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술이 거나해서 들어서는 신랑을 맞이하게 되었다. 삿갓은 그 순간, 고향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고생하고 있을 아내를 생각했다. 그런데 자기는 이렇게 객지에 나와서 또 신방을 차리게된 것도 죄스러웠지만 대장부가 객지에서소실 하나 얻는 것쯤 어떠랴 하고 자위해 보려고 애도 써 보았다. 생각하면 그때는 너무 어려서 제대로 자신이 신랑 노릇도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오늘밤은 멋있는 신랑이 되어 보자!
그는 아랫목에 앉아 여러가지 감회를 억누르며 윗목에 다소곳이 앉아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단향이를 정겹게 응시해 보았다. 무던히 더운 여름 밤이었다. 남들의 눈도 있고 해서 앞 뒷문까지 꼭꼭 닫아 건 신방에서 그들은 송송 땀을 흘렸다. "그래 단향이, 더 곱구나." 삿갓이 웃으며 이렇게 입을 열자,
"고단하실텐데 그만 주무시죠" 단향은 신부답게 이렇게 말하며 자리를 보아준다. "과연 색시 도둑도 어렵군." 삿갓은 이렇게 농담을 하고는 옷을 벗은 뒤에 먼저 자리에 들려 하니까, "제 옷도 벗겨 주셔야지요." 단향은 이렇게 밉지 않게 항의하듯 한 마디 했다. "참 그걸 잊었구나" 삿갓은 이내 단향이에게로 다가와 저고리 고름을 풀어 주고는, "이제 됐나?" 했다. 그러자 단향은 좋아하며 "호호, 이제 먼저 자리에 드세요" 이렇게 말했다. 얼마 후였다. 사방에는 드디어 불이 꺼지고 그들은 심연과 같은 분홍빛 사랑의 흥분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신랑은 먼저 신부의 몸을 매만지며 마지막 걸친 속옷을 헤치기 시작했다. 신부는 몸을 뒤채며 흥분에 떨었다. 신부의 부푼 젖가슴을 삿갓의 손은 끊임없이 애무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손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아유, 자꾸 이러시면... 단향은 몸을 배암처럼 비틀었다. "허허, 참 곱구나. 가만 있거라."
삿갓은 숨이 턱에까지 달아오른 신부의 몸을 한동안 매만지고는 드디어 맨 마지막 남은 절차를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최후의 산정에 깃발을 꽂았다. 그러나 그 순간 삿갓의 실망은 너무나도 컸다. "아니 처녀가 이럴 수가....?" 그는 뭄을 고추세우고 일어나 앉아 바닷물 같이 몰려오는 실망의 여울을 가눌 수가 없어서 담배만 뻐금 뻐금 피우고 있었다.
'아, 역시 노처녀란 그렇구나.' 혼자 이렇게 후회하고 있으니, "왜 그러세요, 갑자기?" "아니다. 어서 자거라." 그리고 나서 삿갓은 불을 켜고 머리맡의 분갑에서 붓을 찾아든 다음 백지위에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모심내활 필과타인
털이 깊고 속이 넓으니 반드시 딴 사람이 지난 자취로다
어깨너머로 신랑이 써 놓은 글귀를 본 단향은 그제서야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이 수치심과 분노의 얼굴빛을 감추지 못하더니 신랑을 쓰고 던진 붓을 다시 주어 들고는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다.
후원황율불봉렬 계변양유불우장
뒷동산의 익은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시냇가의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잘 자라도다
이렇게 써 놓고는 신부는 그만 북받치는 설움에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삿갓은 그 시귀를 보고서야 자신의 경솔했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음 그렇겠지. 이거 내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속으로 이렇게 뉘우치고는 "단향이 알겠네. 그만 눈물을 멈추지!" 하며 다시 신부의 손을 이끌었다. 삿갓은 다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단향이와의 신혼 생활은 그런대로 지난해 가련이와의 사랑보다도 더 자유스럽고 즐거웠다. 노처녀를 시집보내지 못할 줄 알았던 단향의 어머니는 가히 사위가 자랑스러웠고 천하의 시객으로 이름난 삿갓 선생을 남편으로 얻은 단향은 온갖 정성을 다해 남편을 섬기고 사랑했다. 어느 덧 신혼 생활을 시작한 지 일 년이 넘었고 뜰앞의 오동나무가 또 가을 소리를 내고 있었다.
미각지당춘초몽 계전오엽기추성
연못가에 피어나는 봄풀의 꿈도 깨닫지 못했는데 뜰앞의 오동잎이 벌써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삿갓은 옛시인의 이런 시를 다시 음미하면서 쓸쓸한 생각에 잠겼다. 인생의부귀영화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한편 떨어지는 오동잎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내가 또 이렇게 안일한 생활만 해서는 아니 될텐데....'
그는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묘한 자책이 또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조상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세속의 허무를 잊어보기 위하여 삿갓을 쓰고 떠난지가 벌써 3년이 되도록 고향에도 가지 않고 떠돌아 다녔던 결과가 겨우 이렇게 안일한 생활이어야 한단 말인가? 늙으신 어머님은 지금도 살아계신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떠날 대 거의 산월이 가까웠던 아내는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드디어 가을 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삿갓의 마음은 향수에 사로잡혀 들뜨기 시작했다. 더구나 단향은 태기가 있는지 배가 불룩해오는 걸 보니 갑절은 더 고향의 아내 생각이 간절했다. '내가 고향에 다니러 간다면 단향이가 펄적이나 뛸텐데 이를 어떡허나?' 삿갓은 그런 어느날 꿈을 꾸었다. 분명히 그것은 고향집이었다. 머리에 수건까지 두른 어머니가 머리맡에는 약사발을 놔둔 채 모두들 모였는데 "우리 병연(김삿갓의 본명)이만 오지 않는구나" 하시며 눈물을 흘리는 그런 장면이었다.
삿갓이 안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내가 먼저 "아이구, 여보. 진작 좀 오시지!" 하며 울고 아우는 형님, 형하고 목이 메었고 숨을 몰아 쉬는 어머니는 "병연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네가 이제 오다니?" 하며 눈을 부릅떴다가 그만 운명하시는 그런 장면의 연속이었다. "아이구 어머니!" 하고 그는 꿈결에 그만 울부짖으니 옆에서 곤하게 자던 단향이가 깨어서는 "여보! 당신 웬꿈을 꾸시는구려!" 하고 팔을 흔들어 주었다. "음, 그랬나?" 삿갓은 그때야 일어나 앉아서 지금 막 깬 꿈을 돌이켜 보니 더욱 고향이 그리워지고 집에 두고 온 식구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선연히 흘러 갔다. "다 큰 양반이 젖이 먹고 싶어서 어머니를 찾는 거예요?"
단향은 모로 누우며 이렇게 빈정거렸지만 삿갓의 마음은 단향이가 한 말에는 아랑곳없이 벌써 단천을 떠나 고향에 한 번 가야 할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 가서 한 번 고향 식구들을 직접 내눈으로 보고 또 방랑을 하든 단천에 와서 단향이와 살든 그것은 차후의 일이니 가기는 가야겠구나!' 그는 담배까지 피어 물고서 이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이러고만 있다면 또 한 번 조상에 대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어찌 할아버지만 조상이고 날 낳아주신 어머니는 조상이 아니란 말이냐?'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였다. 김삿갓은 단향이가 없는 틈을 타서 행장을 차려 입고 먼저 장모를 찾았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우? 우리 딸이 뭐 칠거지악이라두 있나?" "아녜요, 제가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함흥 사또가 퍽 저를 사랑해 주었는데 어젯밤 꿈에 보이기에 무슨 변고라도 있는 것 같아 한 번 바람도 쏘일 겸 다녀오려고 그럽니다." 가까운 함흥엘 간다니까 다소 안심이 되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글쎄, 집에만 있으려니 가깝도 하겠지만 단향이가 바늘질 심부름 갔는데 오거든 보고 가지, 갑자기 이렇게......" 장모는 딸이 없어 마음이 불안했다. "허허 빙모님두, 한 사나흘이면 다녀올 것을 뭐 꼭 만나고 가야 하나요? 혹 나가다가 오는 길에 만나면 더욱 좋구요." "글쎄, 그도 그렇네만......"
삿갓은 이렇게 말하고 인사를 한 다음 성큼성큼 걸어나와 재를 넘었다. '혹시 가다가 단향이를 만나게 되면 어쩌나?' 하긴 반지 그릇에 간단하게 못보고 가서 미안하다는 얘기를 써 놓고 나오긴 했지만 거리에서 만나면 다시 붙들려 돌아오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 괜히 불안했다. 삿갓은 다행히 단향이를 만나지 않은 채 마을을 벗어날 수 있었다.
모처럼 다시 방랑의 길에 나서니 온몸이 날아가는 듯이 가뿐했다. 길을 떠난지 사흘만에 삿갓은 다시 안변땅을 밟았다. 벌써 일년이 넘었지만 거리는 그 때나 다름이 없었고 그래서 그에겐 고향을 찾아온 듯 반갑기만한 안변의 산천이었다. 삿갓이 안변에 오니 누구보다도 가련이가 보고 싶었다. "음, 하루밤만 가서 회포를 풀고 가자." 이렇게 다짐한 그는 가련이의 집문간에 가서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이리 오너라!" 하고 점잖게 불렀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고 인기척도 없었다.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힌 삿갓은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이리 오너라." 그때야 한 사나이가 엉큼엉큼 동저고리 바람으로 나오더니 "누굴 찾으시오?" 하고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 혹 가련이란 기생이 지금도.....?" "댁은 가련이와 어떻게 되시오?"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되려 이렇게 반문해 왔다. 삿갓은 그 사나이가 묻는 품이 아니꼬울 정도로 싫었으나 그래도 꾹 참고 "이렇게 찾아온 것은 다 그만한연유가 있어서 왔을 거 아니오?" 하고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허, 늦었수다. 가련인 죽었어요." "예? 가련이가 죽었다구요?" "허, 이 양반, 그것도 모르고.... 지난 해 봄에 목매달아 자결했다오." "원, 자결을...."
삿갓은 온 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뒷통수를 덛어 맞은 듯 아찔하기도 했다. 역시 가련이의 자살은 다름아닌 자기와의 이별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하니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기만 하던 삿갓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까와는 달리풀이 죽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혹 죽기 전에 남긴 말이라두 있었는지....?" "허, 그 양반, 내사 이 집을 사서 이사온 사람이 그럴 어떻게 알겠소?" 하고는 시원치 못한 손도 다 보았다는 듯 안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허, 이런 변이 있나?"
삿갓은 혼자 탄식을 하며 되돌아 나오다가 하두 마음이 울적해서 우선 가까운 주막에 들러 술을 청했다. 주모가 날라온 술을 마시며 삿갓은 "혹시 저 안 마을에 가련이가 왜 죽었는지 아오?" 하고 주모에게 물으니, "아, 그 왜 기생 노릇하던 가련이 말예요?" "암, 그 가련이 말이오." "글쎄, 아마 잘은 모르지만 낭군인가 서방인가를 이별하고 상사병이 들어 앓다가 목매달았지요." "........."
더물을 필요도 없었다. 삿갓은 몇 사발 더 꿀꺽꿀꺽 술만 마시고는 "본관 사또님은 안녕하신지요?" 하고 또 물었다. "호호, 손님은 자꾸 없는 사람만 찾으시는데, 사또님도 갈리셨죠." "녜에? 어디로 가셨소?" "모르죠. 그만 두시고 고향에 가셨다나요?
지금은 서울서 딴 사또가 부임해 왔습죠." 이번엔 주막집의 남자 주인이 나서서 말을 거들었다. 그는 씁쓰레한 느낌을 안은 채 혼자 고개만 죽억거리며 주막을 나왔다. 벌써 땅거미가 몰려오는 안변 거리를 걸으면서 그는 쓸쓸한 마음을 달갤길 없었다. '아, 인생은 가히 덧없고 허무한 것이로다 다. 2편에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