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붓글씨 서체 「한글재민체」가 아주 반듯한 모습으로 새롭게 돌아왔습니다. 박재갑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김민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장이 이끌던 프로젝트에 이호영(53회)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교수, 김미애 수원여자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가 합류하여 만든 「한글재민체5.0」입니다. 그리고 윤디자인그룹 역시 입력 시스템을 개발하며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이 폰트, 조금, 아니 꽤 많이 다릅니다. 기존의 한글재민체와도 우리가 늘 쓰던 한글과도요. 「한글재민체5.0 풀어쓰기 정음체」라는 이름을 보면 어떤 서체인지, 어떤 폰트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풀어쓰기일까요? 시옷인 듯 시옷 아닌 세모, 작은 동그라미가 달린 기역, 쌍리을과 쌍히읗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글재민체5.0의 풀어쓰기 체계와 문자를 연구·개발한 이호영 교수에게 들어봅니다.
Q. 한글재민체 프로젝트는 박재갑 교수님과 김민 교수님께서 이끌어 오셨잖아요. 그러다 이번 한글재민체5.0 개발에 이호영 교수님께서 큰 역할을 해주셨는데, 어떻게 합류하시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작년 6월 비가 아주 많이 내리던 날이었어요. 박재갑 교수님과 김민 교수님께서 서예가들을 초청하여 한글재민체 전시회를 여셨는데, 저도 초대를 받아 가게 됐지요. 예전에 찌아찌아족에 한글을 보급했던 일을 박재갑 교수님께서 기억하시고 연락을 해오셨거든요. 한글재민체에 대해 설명하며 안내해 주셨는데, 저는 좀 충격을 받았어요. 우선 글씨체 자체가 굉장히 독특하면서 아름답고, 그러면서 힘이 느껴지잖아요. 서체로서 아주 훌륭하다고 느꼈고, 또 황실의 사자관이 쓴 글씨라는 점에서 정통성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한글은 모아쓰기를 원칙으로 만들어졌지만, 사실 제대로 세계화가 되려면 풀어쓰기가 필수라고 평소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기존 서체는 아무래도 모아쓰기를 기준으로 만들어져서 그냥 풀어쓰기를 해버리면 삐뚤빼뚤하게 보이죠. 문자라는 것이 조형미도 있어야 사람들이 애정을 가지고 쓰는데, 낯선 문자가 모양까지 이상하면 꺼려질 게 분명해요. 그래서 한글 풀어쓰기 서체는 정말 훌륭한 디자이너가 디자인해야 잘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김민 교수님께서 만드신 한글재민체를 보고 풀어쓰기 서체로 만드셔도 작품이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회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면서 풀어쓰기 폰트를 만드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봤어요. 김민 교수님께서도 풀어쓰기는 글자가 단순해서 더 다양한 작업이 가능하고 디자인 관점에서 훨씬 유리하다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풀어쓰기 폰트를 만드는 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선뜻 답을 하진 못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날 밤 박재갑 교수님께 제안 메일을 보냈어요. 전시회에서 한글재민체를 세계에 널리 보급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려면 풀어쓰기 폰트도 만들어서 같이 보급하면 한글과 한글재민체의 세계화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의견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두 분께서 연락하셔서 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쉬운 일은 아니라 고민하셨지만, 결국 해보기로 결정을 내려주셨습니다.
Q. 그리고 저희 윤디자인그룹도 합류했잖아요.
작년 8월 8일, 서울대학교 암연구소에서 한글재민체연구회 출범 회의를 하고 윤디자인그룹 사옥으로 자리를 옮겨 또 함께 회의했어요. 이후에 입력기 개발을 담당하신 윤디자인그룹의 한도희 전무님께서 가이드라인을 주시고 서로 논의하며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Q. 모아쓰기 체계의 일반적인 한글 폰트와는 입력하는 방식이나 시스템이 달라 이 부분도 중요했겠지만, 무엇보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연구와 고민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없던 문자를 새롭게 만든 것은 아니에요.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존재했던 문자들을 최대한 살려서 만들었습니다. 반치음, 옛이응, 여린히읗, 아래아 등은 지금은 쓰지 않아서 사라졌는데, 이걸 다시 살린 것이죠. 한글은 확장성이 뛰어난 문자입니다. 아설순치후 다섯 개의 기본 자음(ㄱ, ㄴ, ㅁ, ㅅ, ㅇ)에서 가획의 원칙으로 확장되고, 모음도 천지인 세 자가 서로 결합되어 만들어져요. 한글의 창제 원리를 활용하면 세계 어떤 언어라도 그 발음을 정확히 표기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문자들을 총동원하고, 훈민정음에서 사용한 가획과 ‘ㅸ’과 같은 병서 표기에 사용한 기호들을 활용하여 한글재민체5.0 풀어쓰기 정음체 폰트를 만들었습니다.
Q.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있었던 문자들이라고 해도 요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생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게다가 풀어쓰기도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잖아요. 이걸 어떻게 잘 쓸 수 있을까요?
그래서 국내에서는 한글재민체5.0 풀어쓰기 정음체를 보조 문자로 활용하자는 것이 제 의견이에요. 영어 사전을 보면 로마자로 발음을 표기하고 있는데, 한글로도 발음을 표기하면 학습자들이 영어 발음을 배우는 데 더 유리하거든요. 이번 한글재민체5.0을 국제음성기호(IPA) 대신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어 발음을 배울 때도 좋고, 장애인을 위한 발음을 적을 때도 도움이 될 겁니다.
또 모자나 티셔츠, 가방이나 여러 디자인 분야에서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전에 김민 교수님께서 어느 회사의 브랜드 로고를 만드실 때 한글 풀어쓰기로 디자인하셨는데, 회사 경영진이 반대해 결국 모아쓰기 디자인의 로고로 결정되었다고 하셨어요. 한글이 사실 조형적으로도 너무 훌륭하거든요. 동그라미, 네모, 세모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글자 하나하나가 굉장히 조형적이고 아름답습니다. 풀어쓰기를 하면 이 조형미가 더 살아나죠. 그리고 한글 풀어쓰기를 하면 130여 자의 문자만 디자인하면 돼서 쉽게 폰트를 제작할 수 있어요. 그러면 한글 디자인도 훨씬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Q. 문자가 없는 민족이나 나라에도 보급할 수 있지 않을까요? 찌아찌아족처럼요.
맞아요. 어떤 언어든지 표기할 수 있기 때문에 문자 체계를 만들고 싶은 민족이나 나라에 보급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찌아찌아어는 한국어와 음운구조가 비슷해서 모아쓰기로 문자 체계를 만들어 보급했어요. 처음 해외에 한글을 보급하는 일이라 모아쓰기로 표기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민족을 찾았고, 그게 찌아찌아족이었던 거죠. 이번에 개발한 한글재민체5.0은 모아쓰기로 표기하기 어려운 언어를 가진 민족들에게 보급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문화 역량이 지속해서 향상되고 있고, 우리나라에 대한 호감도도 계속 올라가고 있어서 길게 보면 잘될 거라고 생각해요.
Q. 저희 윤디자인그룹이 아무래도 폰트 회사고, 또 직접 한글재민체5.0 풀어쓰기 정음체 폰트와 입력기를 배포하고 있으니까요. 더 많이 쓰이고 더 널리 확산될 수 있게 여러 방안을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교수님께서 계획하고 계신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낯선 문자나 풀어쓰기 방식이 사람들이 쓰기에 처음엔 좀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학습도 필요하고, 뭐든지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법이잖아요. 그래서 윤디자인그룹에서 일단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고민해주시고 실행해주신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사용 매뉴얼 등 요구가 생길 텐데, 그러면 매뉴얼을 만들어야 하겠지요. 김민 교수님하고 김미애 교수님은 풀어쓰기 정음체 라이트 버전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다른 글꼴 형태도 고민하고 계십니다. 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문자 없는 민족에게 한글재민체 5.0을 이용해 문자 체계와 교과서를 만들어 보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글재민체5.0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 가장 처음 만든 글꼴을 기반으로 해서 디자인했기 때문에 ‘풀어쓰기 정음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글재민체5.0은 풀어쓰기를 통해 세상의 모든 소리를 가장 바르게 표기할 수 있습니다. 그 바른 폰트가 더 널리 퍼져나갈 수 있도록 윤디자인그룹은 한글재민체5.0 폰트와 풀어쓰기용 입력기를 폰코(font.co.kr) 사이트를 통해 제공합니다. 우리의 아름답고 뛰어난 한글 그리고 한글폰트, 한글재민체가 세계인의 언어생활을 더욱 이롭게 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