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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0IKRcOZy74o?si=BLQGTkyUehqj4xNY
수로보니게 여인 7: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에바다 이적 7:31~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 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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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한 이방 여인이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달라며 예수님 발아래 엎드립니다. 예수님이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주지 않는다 하시자, 여인은 개들이 먹는 부스러기라도 구합니다. 이에 그 딸이 고침을 받습니다. 주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시며 그 일의 발설을 금하시지만, 무리가 널리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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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 7:24~30
두로는 바알을 숭배하는 이방 지역입니다. 두로에 가신 예수님께 수로보니게 여인이 찾아옵니다. 유대인에게 이 여인은 가까이할 대상이 아닙니다. 두로(이방 지역)에 거주하는 헬라인(이방 문화)이요, 귀신 들린 딸(제의적 문제)의 모친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딸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 발아래에 엎드려 자비를 구합니다(25절). 예수님은 ‘자녀의 떡’(유대인의 몫)을 ‘개’(이방인)에게 줄 수 없다며 거절하시는 듯합니다(27절). 여인은 굽히지 않고 개들도 상 아래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호소합니다(28절). 식사 전 빵을 조금 떼서 손을 닦을 때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는 개 몫이 아니냐는 논리입니다. 여인의 믿음에 감탄하신 예수님이 딸을 치유해 주십니다. 겸손과 끈질긴 믿음에 베푸신 이적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의 냉대에도 수로보니게 여인이 보인 태도는 어떠했나요?
내가 주님 앞에 겸손한 믿음으로 끝까지 간구할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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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 이적 7:31~37
예수님이 갈릴리로 오시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려와 예수님께 안수를 부탁합니다(32절). 청각과 언어의 장애는 타인과의 소통이 끊긴 삶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나가 그의 귀에 손을 넣으시고, 침을 바른 손을 그의 혀에 대십니다(33절). 이는 단절의 삶을 살아왔던 그와 소통하시려는 예수님의 특별한 행동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탄식하시며 “에바다”(“열리라.”라는 뜻)라고 외치시니 그의 귀와 혀가 치유됩니다(34~35절). 치유받은 사람은 ‘열린 귀’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풀린 혀’로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에바다’는 말씀을 듣는 귀와 기도하는 혀가 굳은 성도에게 여전히 필요한 은혜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치유할 때 취하신 행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내게도 필요한 ‘에바다’의 은혜는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주님, 은혜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제게도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겸손함으로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전능하신 주님을 신뢰하며, 제 삶에 있는 작은 고민과 걱정까지 주님께 맡기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523 어둔 죄악 길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24,31절 유대를 넘어 온 세상의 주님이십니다. 유대인을 중심으로 사역하셨지만(27절), 이방인을 향한 관심도 그에 못지않으셨습니다. 전에 거라사를 찾아가신 것처럼, 두로와 시돈으로, 또 데가볼리로, 다시 갈릴리의 이방 지역으로 찾아가십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부정하게 여기고 멀리했지만, 주님은 외적인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는 가르침대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훗날 제자들에게도 유대를 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당부하심으로 예수님의 복음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차별 없는 사랑으로 찾아가 사랑과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시는 이 시대의 ‘이방인’은 누구입니까?
32-37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자를 치유하십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쪽 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어 혀에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후에 ‘에바다’(열리라) 하고 외치십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모든 것을 잘 하였다’며 감탄합니다. 이는 마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31) 하신 하나님의 선언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신 피조물의 회복, 곧 새 창조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사 35:5,6). 예수님의 치유를 통해 육체의 귀와 입이 열리듯이 영적인 귀와 눈이 열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25-30절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님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물러서지 않고 은혜를 구합니다. ‘자녀에게 줄 떡을 개들에게 줄 수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 사역의 우선순위를 뜻하는 것인 동시에,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를 반영합니다. 그럼에도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런 냉대에 굴하지 않고 ‘상 아래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다’고 끈질기게 간청하여 예수님의 인정과 치유를 받습니다. 부스러기라도 구한 이방 여인의 믿음은, 자녀를 위해 준비하신 만찬을 거절한 유대인들의 불신을 더욱 부끄럽게 만듭니다. 겸손하면서도 기지가 넘치는 믿음, 끈질기게 간청하는 담대한 믿음이 우리 안에도 있습니까?
기도
자격 없는 저에게도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과 구원을 널리 전하며 살게 하소서.
1월19일 동인천지하상가에서 전도
오늘의 말씀요약
이방 여인이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달라며 예수님께 엎드립니다.
예수님이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하시자 여인은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귀신이 나갔다고 하십니다. 갈릴리 호수에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십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주님에 대한 믿음은 사랑하는 이를 새로운 삶으로 이끕니다. 두로 지방에서 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 여자가 나아옵니다. 유대인이 상종하지 않는 족속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의 표현을 빌려 그녀를
개에 빗대면서 거절하시는 듯합니다. 이때 그녀는 개처럼 비천한 자신에게 주 되신 예수님이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주시길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십니다. 사람들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
나아온 ‘귀먹고 말 더듬는 자’도 치유받습니다.
진실한 사랑을 품고 주님께 간구하면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 묵상 질문: 왜 예수님은 이방인을 차별하는 듯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 적용 질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천대할지라도
예수님은 나를 박대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나요?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신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두로에서 고쳐주시고 시돈 지방을 거쳐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치유해주신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하시지만 개들이 먹는 부스러기라도 여인이 구하자, 그 딸이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고쳐주시며 발설을 금하지만 무리가 널리 전파합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 예수님의 비유, 여인의 딸의 치유, 에바다 기적 등입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 베니게 태생의 그리스 여인이 자기 딸에게 들린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다는 말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마태복음에 따르면 가나안 여인입니다 .‘수로보니게’는 팔레스타인의 북쪽을 차지하고 있는 지중해 연안 쪽에 있는 베니게 곧 페니키아를 말합니다. 그 지역은 두로와 시돈같은 도시도 있고 좋은 항구가 있어 통상과 무역이 성행한 곳입니다. 하지만 옛날 이스라엘과는 적대국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가 그녀를 부각시킨 의도는 이스라엘 옛 원수의 자손에게도 예수님이 메시야로 왔다는 복음을 알리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세기말 콜레멘트에 따르면 그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요,그의 딸은 '베레니케'였다고 합니다. ‘그 발아래 엎드리니’에서 ‘엎드린다’는 동사는 완료형이 아닌 미 완료형으로, 계속 주님 발 앞에서 엎드려 도움을 청했다는 뜻입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그런 여인에게 응대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말씀입니다. 곧 구원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그 우선권이 있지 이방인에게 있지 않음을 상징한 말입니다.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자신이 이방인으로서 선택되지 못한 족속 즉, 개들임을 여인이 스스로 인정한 말입니다. 이는 굉장히 겸손한 말입니다. 성경에서 그런 말은 가장 큰 겸손의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가 사울 왕의 땅을 상속받을 때,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경우입니다. 그는 자신을 죽은 개라고 극도로 비하시켜 다윗으로부터 할아버지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 그러자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냉정하게 그녀를 시험하였지만 믿음과 인내로 극복한 여인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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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고 또 손가락에 침을 뱉어 그의 혀를 만지시며 “에바다”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예수님이 두 손을 쓰셔 환자의 두 귀에 넣으시고는 그 후 한 손의 손가락에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에바다’는 아람어로, 갈릴리를 비롯한 고대 서남아시아에서 통용되던 언어로 ‘열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환자는 듣지 못한 사람으로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두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또한 혀에 손을 대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려 깊은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보다는, 신체적 접촉이 한층 더 적절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유대 및 그리스, 로마세계에서는 침이 치유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답니다. 마치 몸에 작은 상처라도 생기면 응급조치로 우리도 침을 바르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그 당시 문화를 사용해 소통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째 건 아주 특이한 치료법입니다. 요한복음에서도 그와 비슷한 사건이 나오지만 이처럼 구체적이고 특별한 것은 오직 이곳에만 있습니다. 그냥 말씀만 해도 될 것입니다. 죽은 사람도 일어나라고 하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독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이고자 함입니다. 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나기를 원해서이지요.
이는 듣지 못한 자를 듣게 하시고, 말하지 못하는 자를 말하게 하는 치유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은 이러한 치유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면, 정말로 들어야 할 말을 듣지 못하고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이나 언어장애인 이상의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같은 설교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지만, 어떤 사람은 더욱더 냉랭해집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말로 인해 교회 공동체가 더 단합되는가 하면, 그 사람의 말로 인하여 분열되기도 합니다. 이는 매우 심각한 현상으로 어떤 말을 듣고 어떤 말을 하는 것에 따라 개인은 물론 단체, 조직, 공동체에 선하거나 혹은 악하거나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좋지 않은 말, 세상의 소리, 사람들의 악한 말은 우리 영혼을 더럽힐 수 있습니다. 그 얘가 ‘YouTube’ 라고 할 수 있으니, 거기에는 불신앙적인 채널과 영상들이 너무나 많아 그나마 갖고 있는 믿음을 손상시킬 여지가 많기 때문이지요. 언어도 그렇습니다. 은혜의 말을 해야 합니다. 덕스러운 말, 유익한 말, 그리고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말을 해야 하지요. 상스러운 말, 남을 해치는 말, 낙심케 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들을 세우기는커녕 넘어뜨리고 좌절케 만드는 사악한 세력의 도구들입니다. 말이라고 같은 말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라고 다 들어서도, 다 해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들을 수 있는 말만 듣고, 꼭 해야 할 말만 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귀에는 절제, 입에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에바다’의 은혜가 임해, 말할 것을 말하고 들을 것을 듣는 그런 귀한 귀와 입을 갖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때론 선하고 꼭 해야 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분위기와 시대의 조류를 핑계 삼아 회피하거나 미룰 수밖에 없다고 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손을 들고 의견을 밝힐 때나, 잘못된 것이라고 피켓을 드는 일들도 시선의 두려움과 손가락질 받을 창피함 때문에 당당하지 못했던 것을 돌이켜 봅니다. 이제 ‘헤롯’왕도 예수님을 주목하고 있고 온 세상의 종교지도자과 권세자들이 일거수일투족 주님을 추적하며 그 정죄의 칼날을 세우고 있는 상황 가운데에서 그 십자가의 구원의 사건을 이루시기 위한 그 여정은 매우 험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혼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는 그 한없는 사랑은 어느 곳에든지 멈춰질 수 없었습니다. 말 못 하고 듣지도 못하는 그 사람의 데려온 갈릴리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사야 35장의 예언처럼 주님께서는 그를 회복시키시고 갇혔던 영혼이 열리는 경험을 허락하십니다.
주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또 한 명의 증인이 되었고 감춰질 수 없는 그분의 빛은 이 땅을 계속 밝히게 됩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담대한 주님의 증인으로 세워져가는 오늘 하루의 시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월18일 동인천지하상가 전도
✔ 영적으로 성공한 인생은 어떤 삶입니까?
➲ 바라는 은혜의 삶입니다(24, 31절).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24절). 두로는 종종 시돈과 함께 언급되는 이방인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도시인 두로 땅으로 가셔서 한 집으로 들어가신 것은 무리를 피해 은밀한 장소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체는 숨기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로 지방을 떠나 시돈에 가셨다가, 데가볼리 지방을 거쳐 갈릴리 호수로 돌아오셨습니다(31절).
빛이 어두움에 묻힐 수 없고, 누구에게나 비추어 지는 것처럼 예수님 역시도 감추려야 감출 수 없었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까지 그 빛이 비추어졌습니다.
어느 누구나 주님의 은혜의 빛 아래 거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시선은 유대인에게만 멈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방인들에게 까지 가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 까지 주님의 시선은 가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차별 없이 주님의 은혜를 누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유대라는 제한 된 공간을 넘어 땅 끝까지 당신의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날마다 더욱 충만한 은혜를 바라고, 어느 누구에게나 편견을 버리고 다가가 주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도록 전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바라는 삶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셔서 결국 영적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 끈질긴 기도의 삶입니다(25~30절).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립니다. 그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이었습니다(25~26절). 그녀는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명성을 알았고, 예수님이시라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에게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십니다. ‘.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절). 예수님의 이 반응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속내는 예수님이 정말로 이방인을 멸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도 때가 이르면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는지는 모르지만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절)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비록 자신이 개와 같은 이방인이지만 넘쳐 나는 구원의 잔을 맛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딸의 치유를 선포하셨습니다(29~30절).
나의 삶에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보고, 이해할 수 있는 신앙의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의 통찰력이 있어야 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리며,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러한 믿음의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굳건한 믿음과 신뢰는 주님으로 하여금 나의 삶에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끈질기게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내 자신을 보면 이러한 끈질긴 기도가 참으로 약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계획했던 일들이 진행되지 않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삶이 무기력해지고, 약해졌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스스로 합리화 하면서 내 뜻대로 결정하고 행동했던 것이 바로 그 원인이었습니다. 여인처럼 다시 한 번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간절히 은혜를 구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셔서 결국 영적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열리는 기적의 삶입니다(31~37절).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을 때, 사람들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따로 그를 데리고 무리를 떠나셔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33~34절)하셨습니다. ‘에바다’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맺혔던 그의 혀가 곧 풀렸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그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이는 곧 사탄의 세력에서 놓임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경고하셨지만, 그럴수록 더욱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심히 놀라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37절)라고 말합니다.
능력의 주님은 내 자신의 수준과 처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래서 내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매일의 삶 가운데 개입하셔서 선하고 거룩한 길로 인도하시고, 나의 삶 가운데 놀랍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닫혀 있는 나의 영적 귀와 영적 눈이 열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마음 가운데 평강과 담대함과 하늘의 지혜와 능력을 경험하여 주께서 맡기신 사역들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비주의나 은사 주의가 아닌 주님을 향한 절대 믿음, 절대 순종을 통해 경험하는 기적의 삶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셔서 결국 영적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나아감은 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기도의 삶을 통해 막혀있던 삶의 문제가 열리는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막 7:24~37절)... 빛이 있으라...
1.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24-30절)
당시 이방인으로 취급당하던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딸에게 귀신이 들린 것을 고쳐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 여인에게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하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방인을 위하여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그 여인을 아주 상스럽게 취급하는 말씀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고 이 여인은 오히려 예수님 앞에 더욱 더 겸손함 마음으로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 달라고 간구하게 됩니다. 그러한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 주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여인이 가진 진정한 관심과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딸의 회복을 원하였는지와 예수님을 얼마나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가 가진 이 믿음은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고 예수님의 칭찬과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2.응답하시는 예수님(31-35절)
예수님께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에게서 손을 얹어 달라고 사람들이 요구합니다. 이들의 요구에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청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고 그들의 소원에 응답하여 주신 것입니다. 에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데리고 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에바다라고 외치시니 그 사람의 눈은 보게 되었고 혀가 풀려서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간구가 응답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와서 그분께 간청하면 주님은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시고 해결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묵상하기
나는 응답하시는 주님앞에 나의 문제를 가지고 나가는가?
3.알리지 말라(36-37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 사람을 고친 사실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소문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겸손하심은 오늘날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영적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하는 모습입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한 일들을 마치 자신들의 능력으로 행한것 처럼 과정하여 광고하고 그것을 수단삼아서 인기를 구하는 그릇된 신앙모습을 우리는 경계하여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나는 십자가 뒤에 숨기는 참된 영적지도가가 이 땅에 많아 지기를 우리는 늘 기도하여야 합니다.
묵상하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겸손함을 갖고 있는가?
이방 땅에 가신 예수님(24-26)
"이 지방 사람들은 고대 가나안 족속에 속하였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므로 유대인들의 경멸과 증오를 받았다. 지금 예수께 나온 여인도 이런 부류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 여인은 이방인이었으므로 유대인이 날마다 누리는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그 곳에는 베니게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많아서 그리스도의 하시는 사업에 대한 소식이 이 지방에도 퍼졌다.
사람들 중에 더러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놀라운 이적을 목격하였다. 이 여인은 온갖 질병을 고친다는 선지자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분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여인의 마음속에는 희망이 용솟음쳤다. 지극한 모성애는 그 여인으로 하여금 딸의 사정을 그분께 고할 결심하게 했다. 자기의 어려운 사정을 예수께 고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분은 틀림없이 자신의 아이를 치유하실 것이다. 그 여인은 이방 신들에게서 도움을 구하였으나 아무런 차도도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이 유대인 교사가 나를 위하여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여러 번 품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께 도움을 청하러 오는 자들의 빈부를 막론하고 온갖 질병을 고쳐 주신다는 말씀이 그 여자에게 이르렀다. 그 여인은 유일한 소망을 놓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여인의 사정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그 여인이 당신을 보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고 그 여자가 있는 길로 오셨다. 그분께서는 그 여인의 슬픔을 덜어 주심으로써 당신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교훈을 실제로 보이실 수 있을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이런 목적으로 제자들을 이 지방에 데려오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이스라엘 땅과 인접한 동네와 마을에 존재하는 무지를 보기 원하셨다.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온갖 기회를 얻었던 사람들이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흑암 중에 있는 영혼들을 구하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기울여지지 않았다. 유대인의 교만이 세워 놓은 분리의 담은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이방 세상을 동정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장벽은 무너져야 할 것이었다"
칭찬받은 이방여인의 믿음((27-30)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감화에 즉시 굴복하고 자기가 구하는 바 은총을 주실 그분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었다. 그 여인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원하였다. 그 여자는 만일 한 마리의 개가 되는 특권을 얻을 수 있다면 개로서 취급되는 것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그 여자는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민족적, 신앙적 편견이나 교만이 없었으므로 즉시 예수님을 구주로, 그리고 자기가 구하는 것을 모두 하실 수 있는 분으로 시인하였다.
구주께서는 만족해하신다. 그분은 당신에 대한 그 여인의 신앙을 시험하셨다. 그 여인을 취급하신 일을 통해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버림을 받은 자로 여겼던 그 여인이 더 이상 외인이 아니요 하나님 집의 자녀가 됨을 보이셨다. 자녀로서 하늘 아버지의 선물을 받는 것은 그 여인의 특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인의 요구를 들어주고 제자들을 위한 교훈을 마치신다. 긍휼과 사랑의 표정으로 여인을 돌아보면서 예수께서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 시각부터 그 여인의 딸은 완쾌되었다. 사귀가 다시는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 여인은 자신의 구주를 시인하면서 떠나갔으며 자신의 기도가 가납되었음을 기뻐하였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여행 중에 행하신 유일한 이적이었다. 그분께서 두로와 시돈의 변경에 가신 것은 이 이적을 행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분께서는 괴로워하는 여인을 구하는 동시에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제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멸시받는 백성 중 하나에게 자비의 사업을 행하시는 모본을 남기기 원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유대인적 배타성을 버리고 본국 백성들 외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기를 원하셨다.
예수께서는 여러 세기 동안 숨겨져 왔던 진리, 곧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더불어 동료 후사가 되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엡 3:6)가 될 것이라는 진리에 대한 깊은 오묘를 공개하기를 원하셨다. 제자들은 이 진리를 더디 배웠다.
그래서 하늘의 교사께서는 그들에게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주신 것이다.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믿음에 보답하고
수가의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분은 유대인의 편협적인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를 이미 보여 주셨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얼마만큼 있었으며 백부장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한 이방인과 접촉하게 하셨는데 그들은 이 여자가 그의 백성 중 어느 누구와도 달리 그분에게서 은총을 고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자로 생각하였다.
그분께서는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취급되어야 하는지 모본을 보여 주고자 하셨다.
제자들은 그분께서 당신의 은혜의 선물을 너무나 값싸게 주신다고 생각하였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랑이 민족이나 국가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셨다"
▧ 적용
1. 나는 어떤 기도의 제목으로 주님께 나아가 간절히 간구하고 있는가?
2. 이방 여인처럼 응답받을 때까지 겸손히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 기도
나의 삶에 필요한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어떠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을 전적 신뢰하며 그분만을 원하고 있는가?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생사화복과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라보며 날마다 맡겨주신 증인 된 사명 감당하도록 성령 충만함을 부어 주시옵소서. 때론 분주하고 지친 일상 가운데 낙심될지라도 분초를 다투어 사랑하시고 십자가의 고통과 치욕으로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복된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저 북녘땅의 백성들에게도 치유와 회복의 손길이 끊어지지 않게 하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분쟁과 분노를 버리고 거룩과 순결로 하나 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