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선택했던 사람과만 사랑을 했던 황진이
“세속에 이런 말이 있다. ”창녀가 늙은 후에는 세 가지 텅 빈 것과 한 가지 남는 것이 있다. 몸이 텅 비고, 명성이 텅 빈다. 한 가지 남는 것은 무엇인가? 달콤한 말이 남는다.“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 제 1권에 실린 글이다.
유몽인이 말한 것처럼 조선시대 대부분의 기녀妓女들이 그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 그러나 가뭄에 콩 나듯 몇몇 기생들이 그 이름을 남겼다. 이 매창. 홍랑, 소춘풍등이 그들인데, 후세의 난다, 긴다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의 기녀를 위하여 이런 저런 글을 많이 남겼다. 그가 곧 송도기생인 황진이이다. 그 중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임제는 죽은 황진이로 인하여 애써 얻은 벼슬에서 파직되기도 하였다.
백호 임제가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지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 듯 누웠는 듯 /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남았느냐 /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이러한 시를 남긴 임제는 그 무렵부터 심해진 동서붕당東西朋黨에 환멸을 느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황진이의 무덤 앞에서 그런 시를 쓸 수 있었던 것도 관직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의 심경의 일부분이었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의 벼슬아치가 체통을 지키지 않고 일개 기녀의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며 파면을 시키라고 상소를 올렸고 결국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조선시대의 시인 겸 명기(名妓)인 황진이(黃眞伊, ?~?)는 본명은 진眞이고 일명 진랑(眞娘)으로 불렸으며, 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다. 개성 출신으로 시(詩)와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어느 때 태어났고 어느 때 세상을 떠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고증을 참고로 하여 추정해보면 연산군 말년에 태어나서 중종 17년이나 18년경 한참 꽃다운 나이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으로 보이며, 중종 35년 경, 그의 나이 40세 이쪽저쪽의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짐작된다.
출생에 관해서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하지만 훗날의 기록들을 보면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들이 숫자적으로 우세하다. 하지만 기생이라는 신분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맹인의 따로 태어났을 것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황진사의 딸이었던 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가 이능화가 지은 <조선해어화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황진이는 한 때 이름이 있었다. 종실宗室인 벽계수가 스스로 지조와 행실이 있다하여 항상 말하기를, “사람들이 합번 황진이를 보면 모두 현혹된다. 내가 만일 당하게 된다면 현혹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쫓아버릴 것이다.” 하였다. 진이가 이 말을 뜨고 사람을 시켜 유인해왔다. 때는 늦가을이었다. 달밤에 만월대滿月臺에 오르니 흥이 도도滔滔하게 일어났다. 진이가 문득 소복 담장 으로 나와 맞이하여 나귀의 고삐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명월明月은 자신의 자를 인용한 것이며, 수守는 수水로 대신했으니, 즉경卽景을 그대로 노래로 옮긴 것이다. 벽계수가 달 아래 한 송이 요염한 꽃을 대하고, 또 그 목소리는 마치 꾀꼬리가 봄 수풀에서 지저귀고 봉황이 구소九霄에서 우는 것 같음을 들으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심취心醉해서 나귀 등에서 내렸다. 진이가 말하기를, “왜 나를 쫓아내지 않으세요.” 하니 벽계수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그 노래는 이러하였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히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백호白湖 임재의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의 치제설致祭設이 있으나 그는 훨씬 후세의 사람이다.
여러 사람이 황진이에 대한 글을 남겼는데, 그 중의 하나가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이자 한음으로 알려진 이덕형李德泂이 지은〈송도기이松都奇異〉이다. 그의 호는 죽천竹泉으로, 선조 23년에 진사를 하고 27년에 문과를 거쳐 37년에는 개성에 임하여 진복이라는 아전의 노부 진리에게서 황진이의 이야기를 듣고 지은 글이다.
“진이는 송도의 이름난 창기娼妓이다. 그 어머니 현금玄琴이 꽤 얼굴이 아름다웠다. 나이 18세에 병부교兵部橋 밑에서 빨래를 하는데 다리 위에 형용이 단아하고 의관이 화려한 사람 하나가 현금을 눈여겨보면서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가리키기도 하므로 현금도 또한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날이 이미 저녁때가 되어 빨래하던 여자들이 모두 흩어지니, 그 사람이 갑자기 다리 위에 와서 기둥을 의지하고 길게 노래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물을 요구하므로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주었다.
그 사람은 반쯤 마시더니 웃고 돌려주면서 말하기를, “너도 또 시험 삼아 마셔 보아라.” 하였다. 마시고 보니 그것이 술이었다. 현금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와 함께 좋아해서 드디어 진이를 낳았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한 때에 뛰어나고 노래도 또한 절창絶唱이었다. 사림들은 그를 선녀仙女라고 불렀다. 개성유수 송공(宋公. 송염宋磏이라고도 하고, 송순宋純이라도 한다.)이 처음 부임했을 때에 마침 절일節日을 당했다. 낭료郎僚들이 부아府衙에 조그만 잔치를 베풀었는데, 진랑이 와서 뵈었다. 그는 태도가 가냘프고 행동이 단아하였다. 송공은 풍류風流를 아는 사람으로서 풍류장에서 늙은 사람이었다. 한 번 그를 보자 범상치 않은 여자임을 알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름을 헛되이 얻지 않은 것이로군!” 하고 기꺼이 관대하였다.
(...)
다산초당 간, <똑바로 살아라> 황진이 편에서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들에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이어드란 굽이굽이 펴리라
이런 시를 남긴 황진이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리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거절하고,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과만 사랑을 나누었던 그 당시나 지금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진솔하고도 혁신적인 여성이었다.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사람보다.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사람과의 교류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남긴 데카르트의 말과 같은 삶을 살다간
황진이가 떠난 지 어언 몇 백년, 허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그를 그리워 하고 있으니,
그 황진이를 비롯한 조선 기생들(이매창, 홍랑, 김만덕)의 삶과 풍류 강연을 9월 15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전주 <신정일의 서가>에서 진행합니다.
2026년 9월 2일
첫댓글 창기지만 풍류와 삶의 서사에 우아한 로멘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