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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병이어 이적 8:1~10
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 8:11~13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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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나누어 주게 하십니다. 약 4천 명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일곱 광주리에 거둡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며 표적을 구하자, 예수님은 탄식하시며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않겠다 하시고 그들을 떠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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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병이어 이적 8:1~10
유대인 지역에서 오병이어 이적을 베푸셨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이방인 지역(데가볼리)에서 칠병이어 이적을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무리가 광야에서 3일간 지내며 기진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제자들은 이곳이 ‘광야’라 떡을 구할 수 없다고 합니다(4절). 얼마 전 비슷한 조건에서 5,000명에게 양식을 주신 예수님의 능력을 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를 축사하신 후 4,000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가 남는 식탁을 베푸십니다(5~9절). 제자들의 불신앙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이 대조됩니다(7:28). 우리의 믿음 없음보다 예수님의 긍휼하심이 더 큽니다.
● 더 깊은 묵상
오병이어 이적을 체험했음에도 유사한 상황에서 제자들 반응은 어떠했나요?
내게 믿음이 없음에도 주님은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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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 8:11~13
완악한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합니다. 많은 이적을 보고도 불신하는 이들의 완악함 때문에 예수님이 탄식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표적을 구하는 이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하시며, 요나의 표적(십자가와 부활) 외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마 16:4). 표적이 부족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수많은 이적을 체험하고도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표적이 없어도 ‘말씀’만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 더 깊은 묵상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 동기는 무엇인가요?
표적을 따르는 삶과 말씀을 따르는 삶은 후일 어떤 차이를 가져올까요?
오늘의 기도
주님, 상황과 환경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주님을 신뢰합니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살게 하시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매사에 주님을 의지하는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게 하소서.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기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일하시는 주님을 믿고 기다리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542 구주 예수 의지함이)
오늘 본문은 칠병이어의 기사와, 그런 기적에도 불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이 그것을 거부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이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나누어 주게 하십니다. 그러자 약 사 천명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일곱 광주리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하나, 주님은 탄식하시며 그 표적을 주지 않겠다고 하시며 떠납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이방인 무리의 상황, 칠병이어의 기적, 표증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들, 거절하는 예수님 등입니다.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대꾸한 말입니다. 지난 번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제자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니,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광야에서 어떻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냐고 합니다. 그 때에는 금전 문제를 거론하더니 이번엔 장소 문제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그들의 반응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칠병이어의 기적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주께서 이적을 베푸시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간주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오병이어의 기적은 갈릴리 해변 인접으로, 유대 지역입니다. 이번에도 갈릴리 해변 인접은 맞지만, 조금 떨어진 광야지대입니다. 그곳은 데가볼리 근방으로 이방인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갈릴리 바다 맞은편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사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이방인 지역에서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열 두 바구니의 음식이 남습니다. 이번에는 일곱 광주리 입니다. 얼핏 보면 지난번에 비하여 남은 음식이 적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위가 틀립니다. 지난번에는 바구니고 이번에는 광주리이기 때문입니다.
바구니는 당시 유대인들이 평소에 갖고 다니던,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일종의 휴대용 백과 같은 것입니다. 광주리는 그것보다는 엄청 큰 것입니다. 사람을 담아도 안 보일 정도이니까요. 그 예로 바울이 그 광주리를 타고 한 밤중 성을 빠져 나온 기사가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주님은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결코 부족하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난번에는 남자만 오천 명입니다. 이번에는 그런 말이 없이 사천 명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당시 남자만 세었으므로 이번에도 남자 사천 명이 맞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에는 유대인들이 오 천명이지만, 이번에는 유대인들을 포함한 이방인들이 사천 명입니다. 놀라운 계수입니다. 인간으로 보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로 세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 주님이 마음속에서 깊이 개탄하시고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표적은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증거하는 표로, 어떤 신비한 기적을 나타내보이라는 바리새인들의 도전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한탄하셨는데, 줄곧 표적을 요구하는 그들의 완악함을 통분이 여기신 까닭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는데, 이미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음에도 여전히 그들이 적대감으로 영접하기 않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주님을 시험하는 것으로 불신입니다.
해설과 묵상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 ‘저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3일이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딱하구나. ‘라는 말입니다. 지난 번 오병이어의 기적과 흡사한 상황입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나오는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번에도 주님은 무리를 측은하게 여기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무려 사흘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연속으로 ‘3박 4일 심령 대 부흥회’를 한 셈과 같습니다. 그러던 중 음식이 떨어지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 굶주린 상태로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는 당위성을 설명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두로지방에서 시돈을 지나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당도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따라 온 이방인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들은 귀가중 배고파 길에서 쓰러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대와는 달리 그 시대에는 식당이나 여관 같은 시설이 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또 이적을 일으킵니다. 한번만으로도 족한 기적을 연이어 두 번이나 베푼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배고파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가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동기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유사이래 그런 큰 기적이 두 번이나 반복된 것입니다.
사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남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런 사람은 전에 없던 돈도 만들고, 도대체 생각할 수 없던 아이디어가 떠올라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 줍니다. 그렇게 없는 가운데서도 자꾸 줄 것이 생기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일어난 것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남을 도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일평생 자신만을 위해 살수 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니니까요.
그런 마음을 사모하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병이어에 이어 칠병이어의 기사가 괜히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남에게 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주려는 마음이 있을 때 그런 기적도 일어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노래를 즐기는 사람이 더 좋은 노래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좋은 책을 발견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흔히들 있는 사람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도무지 베풀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지요. 구제도 은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는 것이, 아무리 도울 물질이 없더라도 도울 사람이 생기면 물질도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모두 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줘본 사람은 또 줄 수 있습니다. 자꾸 생기는 것이 신기합니다. 경험해 본 사람은 그것이 친숙합니다. 이제 그런 기적의 주인공으로 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먹을 것을 책임지는 것은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먹을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염려한다고 먹을 것이 구해지지도 않고, 자녀의 먹을 것이 없을 때 자녀를 먹이려고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는 것은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막8:2~3)
그래서 예수님은 떡 일곱과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시고 배불리 먹고 남은 것만도 일곱 광주리나 되게 하셨습니다 모자르게 주지 않으시고 항상 남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8:15)
주께서 우리의 선하신 목자시니 아무 부족함이 없을 줄 믿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그러므로 세상에서 겪는 모든 문제는 우리가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눅12:2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손님을 어떻게 먹게 하고 마시게 할까 염려하던 마르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10:41~42)여기서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는 무슨 뜻일까요? KJV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But one thing is needful"
즉,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니라"
결핍의 문제, 관계의 문제, 고통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 필요한 한 가지는 바로 믿음으로 모든 문제와 염려를 다 주님께 맡겨드리는 겁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그러므로 우리 모든 짐을 주께 맡기기 원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우리 길도 주께 맡기기 원합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시37:5) 우리 행사도 주께 맡기기 원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16:3)
주님은 우리를 풍성히 먹이시는 분이십니다(8절).
우리는 무지하지만 그분을 따라가는 길에 필요가 무엇인지 잘 아시고,
우리는 망각하지만 그 긍휼하심이 크고 우리를 섬세하게 돌보십니다(2절).
그분은 친히 자신의 영육을 소진시켜 우리를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빵과 물고기가 되셨고
또한 그 나누는 일에 부족한 제자들과 우리(4절)를 사용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1,5, 6~7절).
그분께 받은 사명을 가지고 세상으로 돌아갈 때(9절)
역시 주님이 채워 주시는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는 또한 위험합니다(3절).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시고 참 음료가 되심을
날마다 기억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인생으로 걸어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10절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대부분 그날 벌어 그날 먹는 가난한 이들이기에, 무리 중에 사흘 동안 먹을 양식을 갖춘 이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떡과 생선을 나눠주게 하십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작은 것이라도 우리가 기꺼이 나눌 때, 주님은 그것으로 생명을 일으키는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가난으로 굶주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가진 것을 움켜쥔 채 이들을 외면한다면, 무리를 돌보신 예수님의 행보와 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1-13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거절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하늘의 표적과 함께 임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표적을 주지 않으십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영광의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당하는 메시아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보여주실 유일한 표적은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지금도 영광의 표적을 구하는 이들이 있지만, 주님은 한결같이 이미 주신 십자가를 주목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기도
저희 어두운 눈을 밝히셔서, 주님을 바르게 알고 온전히 행하게 하소서.
✔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 긍휼과 은혜를 찬양하는 삶입니다(1~10절).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큰 무리들이 사흘 동안 먹지 못함을 보시고 ‘불쌍히’여기셨습니다. 이는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강한 마음의 표현으로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적인 곤경에 처한 무리들에 대한 책임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불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셨는데, ‘...이 빈들에서, 어느 누가, 무슨 수로, 이 모든 사람이 먹을 빵을 장만할 수 있겠습니까?’(4절,새번역)..
이미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이적을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방법을 묻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무지함을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가진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통하여 사천 명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일곱 광주리를 거두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축복하시고 명하사...’(6,7절).. 예수님의 손에 들린 떡과 생선은 예수님이 기도하심으로 주린 백성들이 ‘배불리’(8절)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제자들과 함께 ‘달마누다 지방’(10절)으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손에 들리면,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부족해 보이고, 아무 능력이 없어 보이는 인생도 주님의 손에 들리는 순간 그 인생은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그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그렇게 한 없이 부족해 보이는 내 자신을 긍휼히 여겨주시는 주님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 희생과 사랑을 전파하는 삶입니다(11~13절).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11절,새번역). 이는 예수님에게 어떤 표적이나 능력을 보여주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표적임에도 믿음의 눈을 갖지 못한 그들은 분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면서 ‘어찌 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12절) 말씀하시고, 제자들과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이 세대는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을 직접 보고, 체험하면서도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는 완악한 세대입니다. 이러한 세대에게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바로 ‘십자가’ 밖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표적은 십자가였기에 탄식하시면서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이란 강한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조롱과 채찍과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침묵하셨던 것처럼 잠잠하게 주님의 희생과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천 명을 먹이심(1-10)
"예수께서 산에 오르시자 무리가 그분에게 몰려들었다. 그들은 아픈 자와 불구자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놓았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 그들은 삼일 동안 계속 구주 곁에 모여 밤에는 노천에서 자면서까지 종일토록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하시는 일을 보고자 열망하였다. 삼일이 다하였을 때 그들의 양식은 떨어졌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배고픈 채로 보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제자들을 불러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다시 저희의 불신을 나타냈다. 그들은 벳새다에서 그들의 적은 소유가 그리스도께서 축사하심으로 무리들을 어떻게 능히 먹이실 수 있었던가를 보았으면서도 그들은 배고픈 무리를 위하여 식물을 늘이실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믿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드리지 않았다. 더구나 그분께서 벳새다에서 먹이신 무리는 유대인이었는데, 이 무리는 이방인과 이교도들이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유대인적 편견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여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그분께 가지고 나왔다. 무리들이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나 거두었다. 이와 같이 하여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사천 명이 원기를 회복하였으며 예수께서는 그들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셨다"(소망, 404-407).
1.환경만 바라본 제자들(1-4절)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무리들의 배고픔을 보시고 그들의 사정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많은 기적을 보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환경과 자신들의 능력안에서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 그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날마다 인간적인 여러 환경속에서만 모든 것을 본다면 믿음없는 제자들과 동일할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의 안목은 주님께서 보시는 것과 동일한 것을 보고 있는가?
2.너희에게 몇 개의 떡이 있느냐?(5-10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의외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떡이 몇 개나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그러하셨습니다. 어떤 기적을 이루실 때 그들이 가진것을 가지고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을 때 떡 7개와 생선 2마리는 사천명이 먹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 만으로도 어떤 일이든지 이루실 수 있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환경만을 보고 좌절하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진 그것을 통하여 기적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가진 것을 주님께 온전히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내가 가진 것으로 주님께 드리기에 힘쓰고 있는가?
오늘의 말씀요약
사흘 동안 함께했던 무리를 예수님이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먹이십니다.
약 4,000명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에 찹니다. 예수님은 달마누다로 가십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늘의 표적을 구하자, 예수님은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8:1~10)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많은 무리를 먹이는 것은 항상 큰일이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으로 사람들을 먹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사한 상황이 또 생깁니다.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광야에서 배고픈 무리를 먹이려 하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는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4,000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그러고도 일곱 광주리만큼이나 음식이 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는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올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 특이한 스승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특별하신 이유는 단지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달리 영육 간에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이 배고픈 무리를 돌려보내는 대신 직접 먹이기로 결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이번 한 주간, 그리고 바로 오늘 내가 불쌍히 여기며 챙겨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요?
표적을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8:11~13)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셔도 바리새인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은 메시아라는
증거를 뜻합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라면 그것을 증명할 표를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이미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메시아의 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메시아일 리가 없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셔도 그것을 메시아적 표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사람들에게
무슨 표적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표적을 보았다면 주님을 구원자로 깨달아, 믿고 따라야 합니다.
- 묵상 질문: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주님을 열심히 믿겠다고 기도하고서 응답받은 후 불신앙의 모습을 보인 적은 없나요?
오늘의 기도
끊임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도 여전히
제가 원하는 표적만을 구하며 불평했던 모습을 회개합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굶주려 있는 제 삶을 생명의 양식으로 풍성히 채워 주소서.
칠병이삼어와 오병이어(1∼10절)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4천 명을 먹이신 이 사건은 사실 앞의 ‘오병이어’의 사건(6:34~43), 즉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그 사건에 비하면 다소 작은 것이라 그렇게 유명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2 그렇지만 이 사건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함께 다루고 있는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 두 사건3은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약간의 차이를 가진다.
1) 우선 적은 떡과 물고기로 큰 기적, 즉 많은 이들을 먹인 것은 같다. 그런데 그 수는 차이가 있다. 오병이어로 남자 오천 명인 반면, 칠병이삼어로 사천 명이다. 재료는 다소 늘어난 반면 배불리 먹게 된 사람들은 20퍼센트 이상 줄었다. 흥미롭게도 먹다 남긴 음식도 오병이어의 때는 열두 광주리가 남았는데 이번에는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 앞의 사건과 비교해서 보면 이번은 덜 남은 것이다. 두 사건 모두 특별한 기적의 사건이긴 하지만, 칠병이삼어는 이미 오병이어에 뒤이어 일어난 사건이며 또한 그 규모가 다소 줄어든 사건인 셈이다.
2) 앞의 오병이어 사건은 날이 저물어 가자 제자들이 나서서 사람들로 나가 뭔가 사먹도록 주님께 제안함으로 시작된다(6:36). 그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하셨는데 이에 제자들이 당황하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한 소년이 가지고 있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놀라운 사건을 일으킨 바 있다.
반면에 이번 사건은 조금 다른데, 주님께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그냥 보내면 길에서 지칠 것이라 말씀하는 것으로 이 사건이 일어난다. 제자들이 앞에선 사람들을 먹일 만한 분량의 떡을 구할 돈 2백 데나리온이 없음을 말하며 어떻게 할지 몰라 당황했다면 이번에는 어디에서도 그 많은 떡을 구할 수 없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말한다.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4절). 그들의 반응이 두 번 다 부정적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특히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 사건이 앞의 오병이어 사건에 비해 그 규모가 상대적으로 조금 적어진 것임을 감안해 볼 때, 이 사건에서의 제자들의 반응은 매우 아쉬운 것이었다. 비슷한 상황, 거의 똑같은 일이 반복됐는데도(또한 이 사건 전에 예수로 인한 적지 않은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있어왔던 때였는데도), 특히 더 축소된 사건임에도 이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은 놀랍다. 마가(4절)와 마태(15:33)는 이를 기록함으로써 제자들의 우둔함과 비신앙적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바리새인(11∼13절)
“바 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 부분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들은 바리새인이다. 당시의 신앙 결사체 멤버로 가장 경건한 종교적 습관을 가진 그룹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성직자 그룹인 제사장들과는 다른 평신도 집단으로서 그릇된 것과 죄된 것으로부터 분리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신앙인 집단이었다.
그들의 내적 신앙과 바른 신앙 자세보다는 신앙의 외적 형태와 형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위선적 신앙으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지적을 받았다.
이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표적을 구했다. 여기 11절에서 ‘힐난하다’(suzhtevw)4라는 말과 ‘시험하다’(peiravzw)5는 말이 합쳐져, 이들 바리새인들은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 뭐 대단한 표적이 있겠는가’라는 식으로 의심하고 부정하는, 그리고 다투려는 왜곡된 편견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리새인들이 칠병이삼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제2의 오병이어 사건, 이 놀랍고 엄청난 사건 다음에 찾아왔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들이 그 기적의 현장에 없었다면 그들이 들은 소문을 믿지 못해 찾아온 것일 터이고, 그 자리에 일부라도 있었다면 그럴 리 없다는 불신감으로 재차 확인하려고 온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랬다.
그런 데 주님은 이들에게 또 다시 그런 기적을 보이지 않겠다고 하신다. 표적은 뭔가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보이는 표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으나 주님은 마음속 깊이 탄식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12절).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갈 길을 헤매고 세상의 갈증으로 넘어질 때에
우리의 참 양식이 되어주시고
구원의 보증이 되어 주셔서 다시 일어날
힘과 능력을 변함없이 공급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이끄신 모든 것이 은혜이고
주님의 사랑으로 가능한 것들임을 매 순간 기억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성령 충만한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덮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간과 공간을 허락하여 주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전심으로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세상 가운데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