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0번 버스
우리집 창 너머로는 줄 지어 서 있는 아파트들이 몇겹으로 겹쳐있다. 아파트의 지붕 너머 멀리에는 옅은 색의 비슬산 자락이 희미하다. 오후 해도 서쪽으로 한껏 기울어지니 희미해진 산들이 더 정겹고, 아파트 거실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아내더러 말했다.
“우리 840번 버스를 타고, 한바퀴 돌아볼까.”
“갑자기 840번 버스는 왜? 집에 박혀 있으니 지루하구나. 바람을 쏘일려고 그래.”
“840번은 경산을 지나 하양까지 간다잖아. 달리는 길이 온통 들판이니. 시골의 맛을 즐길 수 있을거야.”
840번은 담티 고개를 넘었다. 담티 고개까지의 길가는 빌딩 숲이다. 형제봉 넘어에는 얼마 전까지도 너른 들판이 펼쳐지면서 시골 맛을 풍겼다. 몇 년 전에 야생화를 가꾼다는 분의 집을 방문했다. 마당에는 야생화들이 멋대로 자라서 온실 속의 꽃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러더니 집들이 야금야금 들녘을 갉아먹더니 지금은 시골맛까지 마셔 버렸다. 괴물같은 야구장까지 들어서서 시골의 모습을 머얼리 쫓아 버렸다.
야구장을 비켜서 얕은 언덕베기를 넘어가면 고산골이고, 매호동이고, 시지동이다. 시골 마을이 아니고 아파트 촌의 이름이다. 대구에서 경산으로 가려면 이 길을 달린다. 그리고는 시골의 정취에 흠뻑 젖곤 했다. 지금은 아니다. 대도시의 모습 그대로이다. 여러 해 전에 정월 초하룻날에 해맞이를 하려 고산골의 산등성이에 올랐다. 산 아래로는 어둠에서 벗어나는 들녘이, 아득히 반야월과 청천의 집들이 코딱지처럼 보인다. 안개를 피어올리는 금호강이 흐르고, 시야의 끝은 안개에 묻혀 하늘로 사라졌다. 지금은 아파트 숲이다. 푸른 녹음이 눈을 시원하게 해주눈 대신에 아파트에서 반사되는 햇볕이 톡톡 튀어오른다. 우리집 아파트에서 바라본 풍광 그대로이다.
버스는 경산시내로 들어가서 한 바퀴 도는가 보다. 경신시의 옛길이 나온다. 좁은 길의 가에는 낡아보이는 점포들이 줄지어 있다. 나는 이런 거리를 만나면 묘하게도 향수에 젖는다. 지금이야 점포의 유리문 위에 날렵한 글씨가 쓰여있는 산듯한 모습이다. 그래도 나는 덜컹거리던 나무 밀창문을 힘주어 열고 점포로 들어섰던 유년의 어느 날이 그리움이 되어서 떠오른다.
경산시내를 한 바퀴 돌고 나서는 다시 시골학교 운동장만큼이나 너른 길로 나왔다. 조금만 더 가면 영남대학교 정문 앞이다. 영남대 앞을 지날 때면 아내도, 나도 이야기거리가 많다. 묵묵히 창 밖을 바라보던 아내가 입을 연다. 아내는 30년 쯤 전에 박물관 대학을 다녔던 이야기를 한다. 30년 전인데도 어제의 일처럼 기억속에 생생한 모습으로 남아 있나 보다.
“저기 저 건물이 박물관이잖아. 관장이시던 ***교수님은 여전히 ------”
“무슨 소리 하노, 그 교수님이 정년퇴임 하신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살아계시는지도 모르는 일인데.”
“세월이 그렇게나 흘렀나. 그렇기도 하겠다.”
나도 생업에서 은퇴하고, 영남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였다. 벌써 15년 쯤 전이니, 아내는 30년 전의 일을, 나는 15년 전의 일을 말하고 있다. 둘의 이야기는 15년의 시간이 틈을 만든다. 과거 속으로 뭉뚱거려버리니, 시간의 틈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그때 속에서 녹아들어가 ‘지난날로’ 하나의 모습이 되어 버린다. 지난 날을 이야기 하면 모두가 내 어린 날의 모습처럼 되어서 정겹게 나타난다.
영남대를 지나니, 길가에 집들은 여전히 줄지어 있지만, 층수가 낮아지고, 형상이 초라하다. 그리고는 벼논 대신에 과일 나무가 들어서 있고, 비닐 하우스에서 반사되는 햇빛이 눈부시다.그리고는 굴뚝이 하늘로 솟아 있는 작은 공장들이 일요일 오후에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하는 모습이다. 푸른 들녘이 가물가물 멀어지던 어린 날의 정경은 아니다. 아니 아예 없다.
거리가 다시 말쑥해지더니, 길의 한쪽은 나무 숲과 잔디가 부잣집 정원처럼 다듬어져 있어 깨끗하고 조용하다. 아내가 한 번 찾아온 일이 있다면서 대구 대학교라고 아르켜 준다. 나는 처음 길이다. ‘여기가 대구대학이구나.’ 버스 창 밖의 대학모습에 눈을 떼지 않았다. 처음은 언제나 신선하게 느껴오고, 흥미를 돋운다.
버스는 대학의 정문까지 갔다가 돌아선다. 버스의 앞 창문에는 저 건너에서 아파트가 무리지어 나타났다. 하양이란다. 840번의 버스를 탈 때, 종착지로 하양을 정해두었다. 버스는 종착지로 향해서 여전히 부릉거리면서 달린다
금호강을 건널 때 바라본 물줄기가 비로서 옛 모습을 일깨워준다. 비단처럼 펼쳐있는 물길은 포근해보이고, 물가에는 물풀들이 빈틈없이 자라서 시골 정취를 마음껏 풀어낸다..
하양은 이제 지방의 작은 읍내 고을이 아니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린 시가지는 대구나 같다. 가로등에 불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점포 안도 밝은 조명등이 환해진다.
“여기서 저녁을 먹고 가자.”
두리번거리면서 식당을 찾았다
시골길을 달리고 싶은 욕망은 그냥 욕망이었다. 욕망은 이 세상에 있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라서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지 않는가. 840번 버스는 시골이 아닌 도회지로만 돌아다니는 대구의 시내버스이다. 840번 버스를 타고, 시골의 냄새를 맡으려 한 것이 우리 부부의 헛된 욕망이었다. 한 여름 날의 지루했던 오후에 꾸었던 꿈이었다.
2023.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