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식이 상해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박찬익이었다. 박찬익은 관립공업전습소 출신의 엔지니어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일찍이 상공학교 재학 시에 독립운동을 모의하다 퇴학 처분을 받았고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한 사람이다. 그는 국권 피탈 후 간도에 망명해서 교육 운동을 하기도 했다. 물론 국내에서는 신규식과 가깝게 지내던 의기투합의 동지이기도 했다. 그는 신규식의 노선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박찬익은 신규식을 동지 겸 형님으로 예우했다.
“예관 형님, 하루 정도는 쉬면서 하셔야지요.”
어언 상해 정착 후 3년째였다. 쉬지 않고 일만 하는 신규식에게, 박찬익이 어디 바람이나 쏘이러 가자며 한 말이었다. 신규식은 중국 혁명 인사들과 이미 두터운 교분을 쌓아 놓고 있었다. 그리고 벌써 10여 명의 한국인 독립지사가 신규식을 찾아와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 신규식은 임시정부의 모태가 될 조직을 구상해 놓고 있었다. 또한 그는 최근 상해 아래 항주에다 비밀 정보기관을 개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규식에게는 모든 일이 더디게 진행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하루도 제대로 여유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신규식에게는 내세울 만한 취미가 없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한시를 짓는 일이었는데, 그것도 남이 보기에는 열심히 공부하는 일로 비쳐지기 십상이었다. 그는 종교인은 아니었지만 생활은 매우 금욕적이었다.
“남파, 어디 갈 만한 데가 있으면 안내해 봐.”
“황포강에 가서 농어를 한 번 드셔 보시지요. 마침 농어 철이기도 합니다.”
상해의 날씨는 아직 5월인데도 벌써 더위가 느껴졌다. 특히 오늘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서 더 무더운 것 같았다. 신규식은 고향에서 먹었던 하얀 농어회를 생각하니 갑자기 입맛이 당겼다. 그는 고향에서 생선회를 먹을 때 꼭 조선 된장을 묻혀서 먹고는 했다. 그게 육질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된장은 없겠지만 그래도 마호타이 술과 함께 취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아내와 딸이 몹시도 보고 싶던 차였다.
두 사람은 인력거를 타고 황포강으로 갔다.
“이렇게 좋은 데를 안내해 주어 고맙네.”
신규식은 탁 트인 강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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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강은 상해 시내까지 들어와 흐르는 양자강 하류의 한 지류였다. 황포강은 제국주의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중국 강남의 수로였다. 이따금씩 대규모의 준설 작업을 해야 하는 강이기도 했다. 강변에 준설선 대여섯 척이 미동도 없이 머물러 있었다. 황포강은 상해가 개항된 이후 오송에서 상해까지 50리 물길에 기선이 오가는 강이기도 했다. 마침 강 한가운데에서 움직이는 기선에서 길게 뱃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그들은 농어를 주문했다. 고향의 농어와 색과 맛이 다르지 않았다.
“형님 다음 기회에는 쏘가리를 한 번 드십시다.”
“쏘가리도 있단 말인가?”
“예. 정산호수에 가면 있답니다.”
모두가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정겨운 이름들이었다.
“자네 처자는 어디에 계신가?”
“자식은 없고 처만 고향에 있습니다.”
“경기 파주였던가?”
“기억하시고 있군요.”
“내 처도 고향이 경기라네.”
그들은 아직 30 전후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고달픈 여정과 낯선 객지 생활에 와락 회의감이 들 때가 없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물안개가 강 수면에 뽀얗게 올라와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꽤 많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박찬익이 어두워지고 있는 강의 먼 곳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형님, 혁명의 길은 까마득한데 고향 생각은 하루가 다르게 깊어지는군요.”
“나도 그렇다네.”
“아내의 둥근 얼굴이 밤마다 떠오릅니다.”
“자네도 그런가?”
“형님도 그런가 보지요?”
“둘 다 그런 모양이군.”
“형님 저는 아내만 떠오르는 게 아닙니다.”
“나도 그렇다네. 딸애 얼굴도 떠올라.”
“저는 연애하던 처녀가 떠오릅니다.”
“아내보다 예뻤겠구만.”
“아내는 모릅니다.”
“예쁘다는 걸 모른다는 건가?”
“그 여자가 있는 걸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 걸 알게 하는 바보도 있나?”
“형님은 없습니까?”
신규식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조금 사이를 두고 말했다.
“내 아내에게 얘기 안 할 거지?”
“그런 걸 묻는 바보도 있습니까?”
두 사람은 큰 소리로 함께 웃었다. 그들은 강가로 걸어 나갔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서로의 술 냄새를 맡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강 안개가 두꺼워져 있었다.
손탁호텔에 나타난 선글라스 여인, 백주원
정동에 손탁 호텔이 있었다. 이 호텔은 고종이 아관파천 때 시중을 들었던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처형 손탁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호텔은 벽돌로 지은 2층 신식 건물이었다. 2층은 귀빈실, 아래층에는 일반실과 커피숍이 있었다. 김태수는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일로 심경이 복잡한 데다 오윤정에 대한 마음까지 겹쳐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잡지를 뒤적이다가 커피가 머리를 맑게 하는 서양 기호음료라는 글을 읽고는 일부러 나와 본 것이었다.
그는 조선 건축을 비롯한 전통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예정대로라면 그는 지금쯤 호남 지방을 여행하고 있어야 했다. 그는 그곳에 가서 조선의 풍류 시인들이 노닐던 정자들을 찾아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남도 판소리에도 식견이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명창 한 사람을 찾아 마주 앉아 그의 표정을 보며 소리를 감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오윤정 때문에 당최 서울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녀를 만나 자기의 마음을 전하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성싶었다. 그런데 딱하게도 그에게는 타고 갈 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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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 호텔은 구한말 외국인들이 애용하던 곳이었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종군 기자로 왔다가 머문 적도 있었고, 무슨 목적으로 온지는 몰라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엘리스가 투숙한 적도 있다고 했다. 죽은 이토 히로부미도 이 호텔에 가끔 들락거렸다고 했다. 손탁호텔은 훗날 이화학당에 팔릴 때까지 저명인사들의 만남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다.
김태수는 커피에 입을 대 보았다. 난생 처음 맛 본 커피였지만 그는 금세 맛을 알아차렸다. 그는 예민한 미각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였다. 커피는 잘 그을려진 숭늉과 비슷한 것 같았다. 묽게 만들어 마시면 영락없이 서양 숭늉일 터였다. 그러나 숭늉에는 없는 특이한 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농도를 진하게 해서 마실 경우 각성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맑아진다는 것은 각성 효과 때문에 생긴 말일 것이었다. 그는 반쯤 남은 커피에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설탕과 크림을 넣어 마셔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마실 바에야 조선 식혜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모아 잡은 두 손등에 턱을 받친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정동 거리에는 서양식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유달리 많은 것 같았다. 그때 일본군 자동차가 속도를 늦추더니 호텔 앞에 멎는 게 보였다. 잇따라 또 한대의 차가 멎었다. 앞 차에서 운전병이 내려 부리나케 반대쪽으로 가 문을 열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군인 복장의 일본인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운전병은 한 발을 힘차게 들었다가 땅에 붙이며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했다. 김태수는 아주 높은 직급이라고 생각했다. 뒤차에서도 군인 둘이 내렸다. 먼저 내린 고관의 참모거나 부관인 듯싶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내리고 있었다. 그는 여자였다. 검은 선글라스를 쓴 그녀는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양장과 하이힐 구두를 신고 있었다. 김태수는 내면으로 깊이 놀라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어 가방을 쥔 손으로 옮겨 잡기 전부터, 그는 이미 여자가 오윤정임을 알아보았던 것이었다.
호텔 측에서 두 사람이 화급히 나와 일본 고관을 영접했다. 아마도 호텔 사장과 지배인일 거라고 김태수는 생각했다. 고관은 뒤차에서 내린 세 사람과 함께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 고관은 차를 주문한 후 눈을 들어 커피숍 내부를 둘러보았다. 오윤정도 고관을 따라 실내를 둘러보다가 김태수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번지는 미세한 당혹감을 김태수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두 사람은 각기 시선을 거둬들였다.
일본 고관이 반쯤 마신 찻잔을 놓으며 손가락을 들어 보이자 오윤정이 가방에서 서류 같은 것을 내어 고관 앞으로 펼쳤다. 두 남자 군인은 긴장한 채로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데 반해, 오윤정의 태도는 조금도 스스럼이 없고 자연스러웠다. 서류를 검토한 일본 고관은 오윤정에게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눈을 한 번 올려 뜨는 것으로 사의를 표하는 것 같았다.
김태수는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가슴이 요동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혼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 고관과 같은 차를 타고 와서 스스럼없이 합석하고 있는 저 여자는 대관절 무어란 말인가? 그는 슬그머니 눈을 돌려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 일본 고관이 뭐라고 하자, 같이 있던 두 군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상관에게 경례를 붙이더니 커피숍에서 나갔다.
그러자 오윤정과 고관은 머리를 가까이 하고 함께 서류를 검토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찻잔에 입을 대면서 눈을 들어 흘깃 김태수 쪽을 보았다. 다시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김태수는 목례를 보냈다. 그녀는 다소곳이 눈길을 내리깔았다.
얼마 후 일본 고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윤정도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출구로 나가고 있었다. 오윤정이 일본 고관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자 고관이 먼저 호텔 밖 쪽으로 나갔다. 그녀는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김태수에게 걸어왔다. 김태수는 고개를 숙였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선글라스와 가방이 태수의 눈 옆에서 출렁거렸다.
“이 달 말일 오후에 오윤정으로 나오세요.”
그녀는 이 말만을 남기고 기민한 동작으로 커피숍에서 나갔다. 김태수는 바로 눈을 들어 달력 날짜를 확인해 보았다. 오늘은 분명히 5월 초하루, 1일이었다. 그는 지배인을 불렀다.
“방금 왔다 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카시이 경무총장 각하이십니다.”
경무총장이라면 헌병사령관을 겸하는 총독부 제2 실권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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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1,2는 옛날의 상해의 황토강 모습이고요,
사진3은 손탁호텔에서 내려다 보는 서울 그리고
사진4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정동에 손탁이라는 러시아여인이 구축한 손탁호텔 모습입니다.
손탁호텔은 익히 들었어요
오윤정이 애국 스파이? 이 시대가 ,,참으로 ,소설이나 영화론 매력있는 시대인 것같아요.
농어, 그 전에 졸여 먹어봤어요. 모든 생선이 회가 가능한가 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