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방의 붉은 석류
함태숙
꿈에서 석류알이 짓눌리는 일이 있었다 팔꿈치에 밀려 투명한 즙을 내듯 으깨지는 붉고 반짝이는 그 어떤 오만한 여성성을
귀비의 긴 손가락이 천 년을 뻗어 간밤에 내 창에 매달고 있던 석류 한 알. 오, 나의 실수 네 것을 다시 가져주겠다 하고
여산 그 아래 화청지 해당탕 네 귀퉁이 머리카락처럼 날아 올라가는 누각과 미래의 변고가 총탄처럼 박혀 있는 전각 떠오르네
세계가 우수수 무너질 때 버들 아래 물그림자 태양을 못 속에 처박고 머리통처럼 굴리며 놀았지 미끌거리는 비늘 같은 몸을 섞는 일이 정사를 돌보는 일에 갈급해 물에 불을 때고 동포의 손발은 땔감이 되고
연리지 비익조 사랑은 천 년의 공연 주제 실상을 장막으로 가리고 권력과 성애가 아크로바틱을 즐기는 물침대를 관람해
저 붉은 건 피가 아닌가 하는데
그게 피인 거냐고 여전히 비웃고
155센티 70킬로 암내가 토할 듯했다던
반은 자본 반은 창기인 귀비의 편에서
너는 허튼 문장으로 이름을 파는 궁 안의 환관
백거이는 심중의 사랑을 원문에 묻었지만
너는 본심이 긴 가지 끝에 가짜 열매를 달고
귀비의 걸음으로
내 창을 두드리고
나는 환관의 머리를 부수듯 으깨어 보는 것 한 알의 석류
—시집 『나비 증상』 2025.3
------------------------
함태숙 / 1969년 강릉 출생. 중앙대 심리학과 및 대학원 임상심리 전공. 2002년 《현대시》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가장 작은 신』 『토성에서 생각하기』 『새들은 창천에서 죽다』 『그대는 한 사람의 인류』 『나비 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