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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VgXDvc6eWMo?si=uSGtkZn0JJemZgjb
예수님의 경고 8:14~21
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벳새다 맹인을 치유하심 8:22~26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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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떡이 없어서 그러신 것이라고 수군거리자, 예수님은 그들 마음의 둔함을 책망하시며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이적을 상기시키십니다. 벳새다에서는 한 맹인을 두 번에 걸쳐 안수해 고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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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경고 8:14~21
누룩은 천국 비유에 나오기도 하지만(마 13:33), 대부분 부패와 변질의 특성과 연결해 죄 또는 잘못된 교훈에 대한 비유로 사용됩니다(고전 5:6~8).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5절)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계명에 더 집중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완악함, 그리고 권력과 물질을 추구하는 헤롯의 탐욕을 누룩으로 비유해 그들의 잘못된 삶의 방식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은 양식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으로 여깁니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이적을 경험했음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합니다. 둔한 마음으로는 예수님 말씀을 바르게 깨우칠 수 없습니다.
● 더 깊은 묵상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위선과 탐욕에 물들지 않도록 내가 주의할 대상은 누구(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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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새다 맹인을 치유하심 8:22~26
예수님이 벳새다에 도착하시자 사람들이 시각 장애인 한 명의 치유를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데가볼리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치유하실 때와 유사한 방법으로 벳새다 맹인을 치유하십니다(23절; 7:32~33). 그런데 데가볼리에서와 달리 벳새다에서는 두 번에 걸쳐 치유를 온전히 이루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맹인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안수를 받고도 시력이 불완전한 맹인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수많은 이적을 체험하고도 여전히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영적 상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으로 봅니다. 또한 신앙은 ‘점진적으로’ 성장한다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으로 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벳새다 맹인을 두 번 안수로 치유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은 믿음이 부족한 나를 어떤 방법으로 가르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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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고백을 위해
한때 한국 교회를 뜨겁게 달궜던 구호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면 다다!”라는 문구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의 허망한 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선언이지요. 이는 예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신자의 삶에 출발점이 될 수 없다는 뜻이요, 예수님 외에 그 무엇도 그리스도인의 인생에 결승점이 되지 못한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잘 표현한 말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이 구호가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분명 맞는 말이고 매우 중요한 말이지만, “예수면 다다!”라는 외침이 나오기까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이 과정 없이 그저 예수님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미지를 두루뭉술하게 내 마음대로 만들어 놓고, 뜨겁지만 모호한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그분을 무시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을 깊이 만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자칫 잘못된 가르침에 경도되거나, 스스로 혼란스러움을 느껴 건강한 신앙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고백이 ‘거짓 복음’과 ‘사이비 복음’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예수님 알아 가기에 더욱 힘쓰고 늘 그분과 동행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읽는 이유 / 김관성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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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마가복음 8장 23, 25절
사람의 변화는 한 번의 가르침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즉 두 번 안수해 벳새다 맹인을 고치신 것은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들었지만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자신하며 따르던 베드로도(마 26:33, 35),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야 진정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신앙 성숙과 삶의 변화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반복적인 가르침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단지 선생으로만 알지 말고 구세주로서 영접하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 - 오즈월드 체임버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영적 위선과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는 영적 게으름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안목과 깨닫는 지혜를 주소서. 약함을 강함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어둠을 빛으로 바꾸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29 주 날 불러 이르소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4-26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십니다. 벳새다 맹인은 여러 이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경계하라는 말씀에 빵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염려할 만큼 깨달음이 더디었습니다. 그러나 뱃새다 사람이 서서히 눈을 뜨듯이, 제자들의 믿음의 눈도 점점 밝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의 길도 마다하지 않는 영적 거인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16절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십니다. 여기서 ‘누룩’은 순식간에 확장되는 악한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그들의 지적 교만과 종교적 위선을 가리키고, ‘헤롯의 누룩’은 권력에 의지하여 제 이익을 추구하려는 정치적 욕망을 가리킬 것입니다. 요즘 내게 강력하게 다가오는 ‘누룩’은 무엇입니까?
영생과 복음을 확신하는 삶입니다(14~26절).
떡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 배 안에 한 개의 떡밖에 없다며 여전히 먹을 걱정만 하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5절). 영적으로 여전히 둔한(17절) 제자들은 ‘...우리에게 빵이 없어서 그러시는가 보다...’(16절)..라고 수군거렸습니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 대해 질문하십니다(18~21절)..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양식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제자들은 한 마디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 영적으로 둔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벳새다에 이르렀을 때, 맹인 한 사람을 만나 눈을 뜨게 하십니다. 이 맹인에게는 특이하게도 두 번 안수하셨습니다. 첫 번째 안수하고 ‘무엇이 보이느냐..’는 질문에 희미하게 보인다 했고, 두 번째 안수 하실 때, 비로소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밝히 보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찾고 의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세상의 것 의지할 수 없으니 감사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기쁨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찬양)이 찬양 가사가 계속해서 제 입에 맴돌 있는 지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의지할 때 비로소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평안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이란 복음과 영생을 확신하는 삶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대한 소망을 품고 찬양하며 전파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복음 하나만으로 만족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긍정의 마음을 품어 십자가의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막 8:1~26절)...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내용과 벳새다라는 동네에서 맹인의 눈을 고쳐주시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은 떡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수군거리자, 주님은 그들 마음의 둔함을 책망하시며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상기시킵니다. 벳새다에서는 한 맹인을 두 번에 걸쳐 안수해 고치십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수군거리는 제자들, 예수님의 경고, 뱃새다 맹인의 1차 치료, 2차 완치 등입니다.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 예수님은 누룩을 의미하셨지만 제자들은 떡으로 안, 마치 난센스퀴즈 같은 상황의 대화입니다. 즉,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율배반적인 의식과 유전, 그리고 헤롯의 세속적인 악한 영향력을 주의하라고 하신 것에 비해 제자들은 물리적인 떡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남은 떡 바구니와 광주리의 숫자를 물으십니다. 제자들의 깨닫지 못함과 바른 가르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일곱 광주리, 열 둘 바구니는 주님은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바, 한 낱 먹을거리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실 리 없다는 책망입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 다른 복음서에서는 기록되지 않고 오직 마가복음에만 있는 특별한 기사입니다. 가장 특이한 점은 두 번에 나누어 고치셨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시니, 주님의 의도적인 질문입니다. 한 번에 치료하셨다면 그런 질문을 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다시 그 눈에 안수하십니다. 그러자 맹인은 눈을 떠 완전하게 보기 시작합니다. 단 번에 고치시지 않은 숨은 교훈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깨달음과 영적인 안목도 비록 더디기는 하지만 장차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함이지요. 곧이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이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나이다’ 시간이 간 뒤 결국 베드로는 그 고백을 깨닫고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문맥적인 것으로 본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맹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견해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께서 능력이 없어 두 차례 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보호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지낸 사람이 갑자기 밝은 빛을 보면 얼마나 놀랄까요? 그 놀라운 빛으로 인해 충격은 엄청 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계적으로 치료하셨다고 봅니다. 그 맹인의 심정을 헤아려 준 것으로, 어디까지나 배려의 차원이지 능력의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아마 이 기사가 누가복음에도 있다면 저자 누가는 의사인 관계로 분명히 그런 암시의 말을 했을 것 같습니다. 남의 심정을 헤아려 주기를 바랍니다. 타인의 처지와 상황을 존중해 주기를 원합니다. 배려하는 마음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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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 예수님의 당부의 말씀으로,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악한 가르침을 철저히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누룩은 밀가루를 부풀게 하여 빵이 되게 하는 발효제입니다. 이 용어는 성경에서 좋은 뜻으로도 혹은 나쁜 뜻으로도 쓰입니다. 예를 들어 ‘천국은 누룩과 같아서’ 할 경우에는 ‘부풀게 하는’ 것을 강조하여 좋은 뜻으로, 오늘 본문처럼 ‘바리새인의 누룩’ 이라고 할 경우에는 ‘변절하게 하는 것’을 강조하여 나쁜 뜻으로 사용됩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규율화 시키고, 그것이 지나쳐 극단적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그들도 지키지 못할뿐더러 백성들도 못 지키게 만들어 버립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막아 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깨달은 척, 아는 척, 그리고 잘 지키는 척합니다. 위선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들에게 쌓이는 것은 영적 무지입니다. 모르는 진리를 아는 체하고 넘어 가기 때문입니다. 변절은 위선을 불러 왔고, 위선이 점점 쌓여 영적 무지의 벽을 더 높이 그리고 더 두껍게 만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도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들의 헛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덩달아 백성들도 영적 무지자로. 그리고 겉만 번지러운 위선자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삽니다. 사회적인 존재로 서로 관계를 맺고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 사람의 현재 모습은 일평생 영향을 받은 것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어떤 가르침을 받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까지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분석해 보면 어째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했는지 동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어릴 때에는 부모님의 교훈이 있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가르침, 더 나아가 직장 상사나 선배에게서 세상사는 요령과 처세를 익힐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이냐, 선한 것이냐 더 나아가 성경적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심각한 점은 그것들이 이미 나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들로 구성된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수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나’ 라는 존재의 대변혁이 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원하든 원치 않던 이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비 성경적인 영향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화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격과 영혼에 물갈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더러운 물을 빼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깨끗한 물을 보충 하듯이, 우리 몸과 영혼의 정화를 위하여 가장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세상과 사람들의 좋지 않은 것들을 가려서 받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격과 영혼에 누룩이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아주 적은 양의 누룩이라도 한 덩어리 빵을 부풀려 올리듯이, 그것들로 인하여 우리들이 오염될 수 있습니다. 빛나는 예수님의 통찰력과 날카로운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그런 각오와 마음가짐이 보다 성경적인 사람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막8:15)
그러자 제자들은 떡이 없어서 하시는 말씀으로 오해했습니다 분명 누룩과 떡은 다른 것인데, 마음이 둔하여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룩은 뭘까요? 교훈입니다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16:11~12)
그렇다면 왜 떡 이후에 누룩 곧 교훈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육신에 힘을 주는 떡도 중요하게 여기셨지만, 영혼에 힘을 주는 교훈을 더욱 더 중요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떡이 없으면 사람의 몸이 죽는 것처럼, 교훈이 없으면 사람의 영혼이 죽는 것입니다 더러운 떡을 먹으면 사람의 몸이 병드는 것처럼, 더러운 교훈을 취하면 사람의 영혼이 병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떡이 몇 개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막8:14)
누룩 곧 교훈의 현황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교훈을 따르면 그의 예배도 헛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9)
그러나 지금도 세상 철학에서 조금,
종교인에게서 조금, 정치인에게서 조금,
짜깁기한 사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많습니다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사28:10)
그들이 분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 행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교훈의 현황을 바로 알고 사람의 교훈 버리고 주의 교훈만 따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교훈이 생명샘이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13:14)
큰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사54:13)
큰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시94:12~13)
오늘의 말씀요약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떡이 없기 때문에
하신 말씀인 줄 압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둔함을 책망하십니다.
벳새다에서 사람들이 맹인을 데려오니 예수님은 그의 눈에 침을 뱉고 두 번 안수함으로 고치십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제자들의 무지(8:14~21)
떡 가져오기를 잊은 제자들은 누룩을 주의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에 떡이
한 개밖에 없다며 걱정합니다. 앞서 오병이어 기적과 칠병이어 기적을 경험했으니 그만하면
떡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도, 여전히 제자들의 관심은 먹는 일에 매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부패와 영적 무지를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떡이 없는 것을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줄로 오해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아둔함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많은 무리를 먹이신 사건을 경험했으면서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해
실패를 반복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떡을 먹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기만 하지 말고, 깨달아야 합니다.
- 묵상 질문: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떡 없음을 걱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잘못 알아 쓸데없는 걱정을 한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분명해지는 과정(8:22~26)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사람들이 데려온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시되, 그가 밝히 보기까지 두 번에 걸쳐
치료하십니다. 예수님이 두 단계를 거쳐 병자를 치유하신 것으로는 이 경우가 유일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직도 정확히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말해 주는 일종의 상징성을 갖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이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아직 제자들의 영적 눈은 다 떠지지 않은 듯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마침내 영안이 열려 모든 것을 밝히 보고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이 눈먼 사람을 두 번에 걸쳐 고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 적용 질문: 요즘 내 영적 상태는 어떠한가요? 영적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이 항상 선하게 인도하심을 경험하면서도 걱정과 염려로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자꾸만 넘어졌던 저는 영적 맹인이었습니다.
제 미련하고 어두운 마음을 만져 주셔서 주님을 바로 알고 깨달아 믿음의 밝은 길을 가게 하소서.
제자와 바리새인(14∼21절)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4 절 이하에 제자들과 관련된 사건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바로 전에 등장한 바리새인과 제자들은 서로 대조된다. 앞서 제자들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언급이 있었던 점(4절)을 상기하자. 그러나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분명 많이 다르다. 바리새인은 주님을 믿지 않았고 거절했으나 제자들은 주님을 믿었고 그래서 그를 전적으로 따라다닌 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에게도 부족한 면이 있었다. 어쩌면 바리새인의 문제가 그들에게도 작게나마 있었든지, 혹은 바리새인의 나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 그것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경계하시는 부분(15절)에서 드러난다.
제자들이 그때까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충분히 깨닫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분의 사역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사건은 같은 장(8장) 후반부(29절, 마 16:16 참고)에 등장한다. 이때까지는 주님을 제대로 고백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주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아직은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세주, 모든 문제의 진정한 해결자, 그 어떤 문제도 그분 앞에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 없는 분, 나를 위해 오신 능력의 그리스도이심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동안 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았고 체험했으면서도 또 새로운 문제가 나오면 여전히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족함을 제자들은 보였다(4절 참조).6
몇 절 지나면,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는 길에서 주님은 그들 제자들로부터 신앙고백을 들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셔서 받아내신 것이라 볼 수 있다. 주님이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절). 제자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이 고백을 얻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제 자들이 제대로 알지 못했던 두 번째 사실은 주님의 사역, 즉 사람을 살리는 사역과 관련이 있다. 칠병이삼어로 사천 명을 먹이실 때,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무리들에 대한 연민, 즉 사랑 때문이었다. 주님은 그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인해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제자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이 사랑의 마음과 열심이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이신 예수님과 대비 되는 캐릭터가 된다.
물론 바리새인과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부류다. 다만, 바리새인의 나쁜 점을 조심해야 한다. 영향을 받아선 안된다. 이 두 그룹은 대조되면서 완전히 차별화돼야 했다. 반면 주님과 제자들은 대비적 관계(또한 수여자-수혜자 관계)가 형성된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뭔가 배워야 하고 좋은 영향을 받아야 한다.
소경 치유 사건
(22∼26절, 7:31∼37)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본 문의 칠병이삼어 사건 바로 앞 7장 31~37절에는 청각장애인을 고쳐주신 일이 있었다. 주님께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에바다’ 하셨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해졌다고 마가는 기록했다.
본문의 칠병이삼어 사건 직후인 22절 이하를 보면 주님께서 벳새다에 이르셨을 때 시각장애인 한 사람을 사람들이 데리고 왔다. 주님께서 그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는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다. 그리고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어보신 후, 두 번째 안수하시자 장애인인 그 눈앞에 만물이 밝히 보였다고 했다.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의 귀와 입과 눈을 고치신 이 두 사건은 칠병이삼어의 사건과 그 이후의 장면들과 함께 어우러질 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8 귀의 이상을 고치자 듣기 시작했고 혀의 이상을 고치자 혀가 풀려 말하기 시작했다. 눈의 이상을 고치자 보이기 시작했다.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어떤 지식을 얻고 또한 나누는 가장 중요한 지각 및 의사전달 수단이다. 이 육체적인 문제를 고치신 사건은 본문과 관련해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주 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셨던 것은 그들의 진정한 눈이 뜨이고 귀가 들리게 되는 것이었다. 주님이 가르쳤던 말씀과 행하셨던 표적들을 통해 그들이 보고 듣고 그래서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9 바로 예수께서 누구신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입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었다. 보고 듣고 이해하고 말하고 행하는 일이 그들에게 필요했다.
어쩌면 이 장애인들을 고치실 때, 주님은 사실 육체적인 질병과 장애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일 뿐 아니라, 참으로 진리를 보고 듣게 하시며 고백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인지 모른다. 제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해와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아예 듣고자 하지 않았으며 보고자 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들의 혀가 굳어 있었다고 한다면,
제자들은 그 눈이 뜨여야 했고 귀가 들려야 했으며 그들의 혀가 풀어져야 했다.
그래서 주님을 바로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 러므로 칠병이삼어의 사건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육 목적의 사건이기도 했다.
적어도 두 가지를 가르치신 사건이다.
하나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려주는 사건이다.
그분 앞에 풀지 못할 그 어떤 문제라도 있는가.
그분은 또 어떻게 사람과 다른가.
그분은 어떤 능력을 가지셨는가.
대체 그분은 과연 누구이신가.
두 번째로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을 알려주는 사건이라 말할 수 있다.
주님이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어떠했는지,
그분이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그분의 사역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제자들의 고백
결 국 제자들은 주님을 알게 됐고 그래서 고백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10 언제 그들의 눈과 귀가 열렸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눈이 이제 열려 있고 그들이 진리를 귀로 들었으며 이제 혀로 그것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눈과 귀는 주님을 보고 듣기 위해 존재했고, 그들의 혀는 주님을 고백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11본문의 핵심과 적용 포인트
본 문의 초점은 먼저 예수께서 누구이신가,
그리고 그분은 어떤 일을 하셨고 또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에 맞춰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과 대조되는 사람들로서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제자들이 어떻게 이들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게 되는지 보여준다.
주님은 칠병이삼어 사건을 통해 그분의 신적인 능력을 제자들에게 보이셨고 바리새인과의 논쟁과 그들에 대한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경계의 말씀을 주셨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시각 장애인을 고치신 사건은 7장의 청각 장애인을 고치신 사건과 더불어 앞의 두 초점(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과 바리새인의 문제)을 제자들과 독자들에게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크게 세 개로 나뉠 수 있다.
(1) 칠병이삼어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관심과 제자들의 부족한 신앙, 그리고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능력이 강조되는 부분(1~10절)이다.
(2) 그리고 그리스도와 바리새인, 그리스도와 제자의 대화를 통해 바리새인의 정체를 드러내고 제자들의 그릇된 것에 대해 경계하게 하는 부분(11~21절)이다.
(3) 마지막으로 시각 장애인을 고치신 사건으로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그분의 사랑, 그리고 예수님만이 육적-영적 눈을 참으로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과 사실상 눈이 먼 바리새인들12을 간접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는 부분(22~26절)이다.
이 세 부분은 이런 점들이 핵심 포인트가 된다. 설교나 성경연구를 통해 바로 그런 점들이 드러나야 한다.
만일 1~26절의 전체적인 의미를 살피려 한다면,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신앙이 점차 깨어가는 과정과 바리새인들의 문제에 경계 말씀이 주 포인트가 될 것이다.
특히 그 후의 본문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헌신 부분(사실상의 8장의 클라이맥스)을 연계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적용할 부분을 굳이 따로 강조한다면, 그것은
(1)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는가,
(2)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심이 있는가,
(3) 바리새인과 같은 그릇된 태도는 없는가,
(4)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듣고, 말할 것을 말하는가 등이 될 것이다.
주님의 존재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 헤매고 있는 제자들을 비유하듯
마가는 벳세다에서 보지 못하는 이에 대한 치유의 사건을 대비시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차근차근 성장시키듯
보지 못하는 이를 데리고 마을 밖을로 데리고 나가 그에게 두 번씩이나 안수하며
단계적인 치유의 역사를 행하십니다.
한 번만이라도, 아니 말씀만이라고 그는 치유받을 수 있었고
주님은 ‘시간’을 아낄 수도 있었겠지만 그분은 “뭐가 좀 보이느냐?"라고 다정하게 물으시고는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눈을 다시 한번 완전한 치유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또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온전한 주님의 제자로 성장할 때까지 도우시고 우리에게 풍성히 공급하십니다.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배려에 합당한 삶으로 나아가는 주님의 제자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세상 가운데서 어리석고 허탄한 것들을 구하며 살았던
저희들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게 하시고
또 체험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모습으로 변화되고 성화되어
그 뜻에 합당한 맡겨진 사명을 이루어 내는
주님의 제자 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신음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덮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에 백성들에게도 예배의 기쁨과 회복을 허락하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전심으로 맡겨주신
은혜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선하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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