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에 어느 시인의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시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 시인과는 다른 차원으로 인생의 두 갈래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두 길 중의 한 길을 가는 자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길을 택하여 가야 할까? 물론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두 길 중 어느 하나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으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두 길 중 한 길을 택하는 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의지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성경 속에서 혹은 인간의 삶 가운데서 두 길을 가는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께서 죄인처럼 붙잡혀 심문을 받을 때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받고 복음 전도자가 되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이 충만하여 관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고위공직자들이 금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라고 응수하였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의 모습을 생각하노라면 모골이 쭈뼛해진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작정한 나의 삶 앞에도 두 갈래의 길이 놓여 있음을 항상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극한 상황에 처한다면 과연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담대하게 죽음을 무릅쓰면서 복음을 외칠 수 있을까 의구심은 있지만, 어쨌든 지금의 삶 속에서 두 갈래의 길 중에서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택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벌써 30여 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나는 결혼을 앞두고 같은 대학을 나온 수학교사와 결혼을 할 것인가,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농부와 결혼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한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어느 시골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즈음하여 발표회가 있다고 초청을 받아 갔는데, 그곳에서 사회자가 나를 자기들 선생님이랍시고 무대에 세우고 많은 학생들이 모인 곳에서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으시냐고 질문을 했다. 엉겁결에 나는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 하고 싶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에서 발한 것을 이루신다고 했던가? 결국 나는 교사를 버리고 오늘날 나의 남편이요, 목사가 된 농부와 결혼했다. 그는 그 때는 농부였었다. 그 후에 목수가 되었다가 지금은 목사가 되었지만.
우리가 가는 인생의 여정 속에서 늘 우리 앞에는 두 갈래의 선택의 길이 놓여 있다. 며칠 전에 <파리 대왕>이라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윌리엄 골딩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영화를 보았다. 육군사관학교 소년 생도 25명을 태운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한다. 랄프는 부상당한 조종사를 구하고, 잭은 구명보트를 챙겨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무인도에 갇힌 이들은 랄프와 피기의 지휘로 먹을 것과 지낼 곳을 마련하고, 조종사를 보살피고, 구조 신호 불을 피우는 등 질서 유지를 위해 규칙을 만들어 무인도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다른 잭과 로저가 따로 갱단을 만들어 일행으로부터 이탈하고 아이들 사이에 섬에 괴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아이들은 안전을 위해 잭의 갱단에 하나, 둘씩 들어가고, 마침내 랄프와 피기만 남게 된다. 광기에 찬 잭과 로저는 더욱 포악해지고 피기마저 죽음을 당하자 랄프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조용한 낙원은 생존을 위한 잔인한 투쟁의 섬으로 변하게 된다.
인간사회의 단면을 반영하는 이 이야기는 어느 곳에나 어느 시대에나 두 진영이 대립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 삶의 외적인 면의 두진영의 대립보다도 더욱 더 확연하게 대립하는 두 진영은 바로 영적인 두 진영이다. 이것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더 중요한 관건이다. 한 사람의 삶 속에서도 내면에서는 항상 두 진영이 싸우고 있다. 그것은 바로 육과 영이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 속에서는 육과 영의 생각이 늘 싸우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영생이니라(롬 8:6)”고 성경은 말한다.
<파리 대왕>에서 육신을 나타내는 잭은 오로지 먹는 일로 세력을 획득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랄프와 피기만 제외하고 모든 아이들이 결국은 잭의 편으로 간다. 오늘날 너도 나도 육신을 따라 편안한 삶을 살아가듯이. 어느 목사님이 쓴 책의 제목은 <편안하더니 평안하더냐> 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성경 속에는 두 갈래의 길을 대비시키는 이야기들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두 진영의 삶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시고자 하셨다. 창세기 4장에서는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길이 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고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는데, 그들이 장성하여 각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가인은 자기가 농사한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자기가 키우는 양의 첫 새끼 중에서 흠 없는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과 가인의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아벨과 아벨의 제물은 기뻐 받으시므로 가인은 크게 화를 내며 분을 품어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돌로 쳐 죽이는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하여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라고 하였다.
창세기 25장, 27장에서는 야곱과 에서의 삶이 대비되어 나온다. 리브가의 태속에서부터 대립한 두 형제는 자라면서 확연히 다른 삶을 산다. 야곱은 장자권을 차지하려고 전 생애를 걸고 투쟁을 하지만, 에서는 배고플 때 한 그릇의 팥죽과 장자권을 맞바꿀 만큼 장자권을 경홀히 여겨 결국은 장자권을 야곱에게 넘겨주고 만다. 물론 태속에서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버리고 야곱을 택하셨지만, 에서는 자기의 칼을 의지하고 자신만만한 삶을 살므로 그다지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힘도 없고 유약하며 집안에서만 살던 야곱은 에서에게 쫓겨 도망가는 그의 인생이 질곡의 삶이었으므로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힘이 세고 칼을 잘 쓰며 육신적으로 부족함이 없던 에서는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사는 육신의 사람이 되었다.
사무엘상에서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과 두 번째 왕 다윗의 생애가 대비되어 나타나있다. 육신의 사람을 대표하는 사울은 육신의 지위인 왕좌를 지키려고 평생을 다윗을 추격하며 산다. 그가 왕이 되기 전에는 수줍고 소심하고 착한 시골 청년이었으나 왕이 된 후로는 하나님 보다 왕좌를 더 소중히 여겨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모든 수단을 다 이용하여 보았으나 2대까지도 못가고 왕좌는 다윗에게로 가고 만다. 그러나 다윗은 평생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22)“ 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예레미야 17장 1~11절에도 두 길이 제시되어 있다. 곧 복과 저주의 길이다. 이 두 길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다. 모든 사람은 두 길 중 어느 한 길을 가고 있다. 예레미야 17장 1~11절에서는 두 길과 결부하여 '마음'이 강조되어 있다. 육신의 길을 가는 자들은 행위 이전에 먼저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것이다. “죄가 마음 판에 새겨졌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났으며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한다.
영의 사람은 여호와를 의지하고 의뢰한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아세라를 섬기고 온갖 우상을 음란하게 숭배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내가 네게 준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너로 알지 못하는 땅(바벨론)에서 네 대적을 섬기게 하리니”라고 하셨으며,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났다는 것이 비극이다. 이사야서 29:13에서는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났나니”라고 한탄하신다. 오늘날도 기독교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많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자들이 복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복은 육신적인 복,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저주의 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디모데후서 1:13에서도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뢰하고 의탁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의탁하는 자들은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자들이요, 무릇 주를 버리는 자들은 다 수치를 당할 것인데 그들의 이름은 흙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름이 흙에 기록된 자들은 땅에 속한 자들이요, 하늘에 기록된 자들은 하늘에 속한 자들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가는 길은 두 길이 있다. 모든 사람이 두 길 중 어느 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인간은 길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길을 발견하지 못했다. 왜일까?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 스스로는 바른 길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느 목사님이 30여 년 동안 도를 닦고 있는 스님에게 물었다고 한다. “스님은 30년이 넘도록 도를 닦고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이제 길을 찾으셨습니까?” “길을 찾다니요? 아직도 찾고 있는 중이지요.” 그러더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느 곳에서도 인생이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바른 길을 계시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이를 수 없다(요14:6)”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 영생의 길, 복된 길을 가는 복된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