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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이 묻힌 서울 정릉
중종의 여인들 가운데 원비(첫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씨의 양주 온릉(溫陵)
제1계비(두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禧陵). 고양 서삼릉(西三陵) 중 하나이다. 장경왕후는 효혜공주(김안로의 며느리)와 인종을 낳았다. 희릉과 태릉의 석물은 조선왕릉 중 최대를 자랑한다.
제2계비(세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의 태릉(泰陵). 문정왕후는 공주 넷과 명종을 낳았다.
SBS에서 2001~2002년 인기리에 방영한 드라마 ‘여인천하’의 윤임(이효정 분)과 김안로(김종결 분)
◇7일의 왕비를 다시 왕비로!
1515년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 신씨를 복위시키라는 몇백리 밖에서 날아든 상소 한 통 때문이었다. 조정에 커다란 미사일 한 방이 떨어져 ‘쾅’ 터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담양부사 박상(朴祥, 1474~1530), 순창군수 김정(金淨, 1486~1521), 무안현감 유옥(柳沃)이 올린 상소였다.
“전 왕후 신씨께서 억울하게 폐비되신 지 어언 10년이 되었습니다. 자식(박원종 등 공신, 신하를 지칭)으로서 어머니를 아무 죄 없이 내쫓는 일이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박원종 무리는 사사로이 자신들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 상감을 협박하여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역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하, 폐비 신씨를 도로 맞아주신다면 백성들은 물론 천지신명도 반길 것입니다.”
상소를 접한 중종은 내심 기뻤다. 1506년 반정 직후 “역적 신수근의 딸을 내치라”는 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7일 만에 왕비를 폐비시킨 것일 뿐 신씨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신씨 역시 경회루가 보이는 인왕산에 붉은 치마를 걸어놓고 중종을 그리워하며 세월을 보낼 만큼 둘은 아직 애틋했다.
하지만 비록 반정 3대장 중 박원종과 성희안 둘이 죽은 뒤였지만 조정은 여전히 반정공신의 기세가 등등했다. 단경왕후를 복위시키는 것은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후환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완강하게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단경왕후를 복위시키자는 사림, 후궁 중 한 명을 중전으로 승차시키자는 공신 간 팽팽한 기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제3의 안이 등장한다. 바로 죽은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과 김안로가 내놓은 계책이었다. 아예 새로 왕비를 들이자는 것이었다. 바로 문정왕후가 세 번째 왕비로 간택된다. 몇 달 간 벌집을 쑤신 듯 싸움 속에 휘말려 있던 복위상소 문제는 일단 이렇게 매듭을 짓는다. 공신과 신진 사림의 대결 끝에 상소를 올린 박상과 김정은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1년 만에 풀려난다.
결국 단경왕후는 복위되지 못하고 1557년(명종 12) 세상을 떠난다. 폐위된 지 233년만인 1739년(영조 15) 복위 결정이 나 단경왕후로 추존되어, 종묘 정전(正殿) 중종 신실에 부묘된다. 그녀는 13세 결혼해 반정으로 20세에 남편이 왕위에 올랐지만 왕비로 인정받지 못한 채 7일 만에 폐위되고, 51년 동안 남편을 그리워하다 71세를 일기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박상의 눌재선생집에 기록된 ‘청복고비신씨소’
단경왕후 가계도 [출처: 책읽어주는여자 책비]
중종 가계도. 후궁은 더 많지만 경빈 박씨만 표기했다. [출처: 책읽어주는여자 책비]
KBS가 2017년 방영한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 탤런트 박민영이 분장한 단경왕후. 오른쪽은 중종으로 탤런트 연우진이 연기했다.
단경왕후가 폐위된 후 중종을 그리며 치마를 내걸었다는 인왕산 치마바위. [사진 출처: 다음 블로거 마음]
전북 순창의 강천사(剛泉寺) 건너에 있는 삼인대(三印臺). 1515년(중종 10) 박상, 김정, 유옥 3명이 여기에 모여 관직을 건다는 의미에서 관인(官印)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폐비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했다. 그 절의와 기개를 기려 이곳에 세운 비가 삼인대이다. 비문은 이재(李縡, 1680~1746)가 짓고, 민우수(閔遇洙, 1694~1756)가 본문을 썼으며 유척기(兪拓基, 1691~1767)가 전액을 썼다.
영조는 이들의 기개에 대해 ‘천추숭숭 무굴불신’(天樞崇崇 無屈不伸, 하늘의 별은 높아 굽히지도 펴지도 않는다), 정조는 ‘삼인기대 만고불린’(三印其臺 萬古不磷, 삼인대는 만고에 닳지 않는다)’이라 하며 칭송했다. 삼인대에 걸려 있는 글이다.
어람용 단경왕후 복위부묘도감의궤(復位祔廟都監儀軌)의 앞뒤 표지. 조선왕조의궤는 왕이 보는 어람용과 사고(史庫) 및 관련부서에서 보관하는 일반용으로 나뉘는데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는 대부분 어람용이다. 어람용은 비단으로 장정한 뒤 놋쇠를 대고 국화 모양의 정을 박았으며 최고급 종이에 더욱 정교하게 그림을 그렸다. [출처: 프랑스국립도서관 https://www.bnf.fr/fr] 아래는 장서각 소장 일반용 의궤의 앞 뒤 표지.
단경왕후 복위 부묘도감의궤(復位祔廟都監儀軌) 중 반차도.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하던 어람용 의궤로,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약탈해서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해왔으나 2011년 ‘대여’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반환됐다.(위)아래는 일반용 의궤. 어람용 의궤가 그림 세부 표현이 더 섬세하며 색도 선명하다.
영조 15년(1739) 복위 결정을 하면서 단경왕후에게 ‘공소순열(恭昭順烈)’이라는 휘호(徽號)를 올리면서 제작한 상휘호(上徽號) 옥책(玉冊)이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세로 10cm, 가로 10.1cm의 단경왕후 상휘호 금보(金寶). ‘恭昭順烈端敬王后之寶’(공소순열 단경왕후지보)라 새겨져 있다. 옥책과 함께 종묘에 보관된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후궁의 아버지를 때려 죽이다
1506년 박상이 전라도사(全羅都使, 부지사에 해당)일 때였다. 나주에 우부리(牛夫里)라는 노비가 있었다. 그런데 우부리 딸이 연산군이 총애하는 후궁이었다. 우부리는 딸의 권세를 믿고 고을에서 이만저만한 행패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우부리는 남의 토지를 약탈하고 부녀자까지 겁탈하였으나 연산군이 두려워 모두 숨죽이고 있었다.
열혈 청년 박상은 이에 우부리를 잡아와 나주 금성관 앞 뜰에서 우부리를 장살(杖殺)해버리고 말았다. 연산군이 박상을 붙잡아 오라고 명령하였다. 박상은 화를 면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스스로 상경했다. 그가 장성 입암산 아래 갈재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박상의 바지 가랑이를 자꾸 물어챘다. 이상히 여겨 고양이를 따라가 보니 그 곳이 금강산 정양사였다.
그 사이에 나졸들과 길이 엇갈려 박상은 위기를 모면한다. 얼마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 이 사건은 무마된다. 박상은 고양이가 고마워 수십 두락의 땅을 사서 정양사에 주고 고양이를 먹여달라고 부탁했다. 이 땅을 묘전(猫田) 또는 묘답이라 불렀다고 한다. [출처: 눌재선생집 부록 권제2 서술(敍述)]
눌재집. 사진 위는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아래는 담양 한국가사문학관 소장.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정양사. 6각 약사전과 석등이 유명하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정선이 그린 보물 ‘풍악내산총람도(楓嶽內山總覽圖)’. 아래는 전체 그림 중 정양사 근처를 확대한 것이다. 중요 지형과 건물 등의 이름이 기입돼 있다.
박상과 고양이에 얽힌 설화를 그린 카툰. [출처: 네이버 블로그 반뽐 banbbom]
◇박상은 누구?… 서릿발 같은 기개 지녀
박상(朴祥, 1474~1530)의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기고박’ 즉 행주 기씨(대표인물 기대승), 제주 고씨(대표인물 고경명), 충주 박씨 등 광주광역시의 3대 명문가에 속하는 집안 출신이다.
박상은 1496년(연산군 2) 진사시, 150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한산군수, 임피현령, 담양부사, 순천부사, 상주목사, 충주목사를 역임했다. 훈구 공신들의 전횡을 지속적으로 비판해 권신들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관직 대부분을 외직으로 돌았다. 조광조는 박상의 단경왕후 신씨 복위 상소가 강상(綱常)의 법도를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칭찬하였다.
152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작은 죄목으로 나주목사로 좌천되었고, 당국자의 미움을 사서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인 광주 서창동 절골마을로 돌아왔다.
정조는 ‘조선최고의 시인은 박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박상은 무려 1,200여편에 이르는 많은 한시를 남겼다. 가족에 대한 사랑,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칭송, 세상사 등이 다양하게 담겨 있다.
선조 때 14년 동안 정승을 지낸 사암 박순(朴淳, 1523~1589)은 박순의 조카이면서 박상과 같이 서창동 절골마을 태생이다. //
◇박상의 생애
1474년(성종 5) 출생
1496년(연산군 2) 진사
1501년(연산군 7) 식년 문과 을과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박사
1506년(중종 초) 사간원헌납
1511년(중종 6) 담양부사
1515년(중종 10) 단경왕후 복위 소, 유배
1516년(중종 11) 해배, 순천부사
1521년(중종 16) 상주와 충주 목사
1526년(중종 21) 문과 중시 장원
1529년(중종 24) 관직 사직
1530년(중종 25) 사망
1688년(숙종 14) 이조판서 추증
왼쪽은 박상 초상. [출처: 원광대박물관] 오른쪽은 박순은 명종의 외삼촌이자 훈구파의 대부였던 윤원형을 축출하고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선조는 박순을 가리켜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이라 했다.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지조에 물과 달빛처럼 맑은 정신의 소유자라는 뜻이다.
눌재 박상은 ‘호남 시단의 종장’이라 일컬어지는 조선 중기의 뛰어난 시인이다. 왼쪽은 박명희씨가 박상의 시 중 142편을 편역하여 펴낸 책. 오른쪽 ‘눌재 박상 시문학 연구’는 박상의 일대기와 문학 세계 등에 대해 쓴 7편의 논문을 수록한 책이다.
광주 사직공원에 서 있는 박상 시비 [출처: 네이버 블로거 simpro해피트래블]
담양 한국가사문학관 내 박상 관련 전시물
광주시 서창동에 있는 박상의 묘
광주 서구 사동길 93 봉산재. 박상 재실이다.
광주시 광산구 광산동 452 월봉서원(月峯書院). 기대승(奇大升)을 비롯해 박상, 박순, 김장생, 김집을 배향하고 있다. 사진 위는 서원 내 빙월당, 아래는 사당이다.
기묘제현수필(위)과 기묘제현수첩(아래) 속 박상의 친필
박상이 쓴 향안서. 지방에 거주하는 재지사족(在地士族), 선비들의 명단을 수록한 데 대해 서문을 쓴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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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종의 계비와 후궁들의 암투 이야기
문정왕후의 지략이 뛰어나다는 설도 있드군요
중종도 불쌍한 왕이 였지요 ᆢ공신들
득세에 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