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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경연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저도 좋아했던 프로입니다.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 히든 싱어, 복면 가왕, 팬텀 싱어’와 같은 프로입니다. 가창력은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드러나지 않았던 숨어 있는 실력자들의 노래를 듣는 프로입니다. 오직 실력만으로 평가받는 프로입니다. 기존의 방식으로 가수가 되지 못했던 사람들의 수준 높은 노래를 듣는 것은 즐거움이고, 신선함이었습니다. ‘나는 가수다’는 기존의 가수들이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가창력을 인정받는 프로였습니다. 노래 경연 프로그램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습니다. ‘불후의 명곡’은 드러나지 않았던 실력자들이 기존의 노래를 재해석해서 불렀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던 프로입니다. ‘히든 싱어’는 말 그대로 숨겨진 보물 같은 가수를 찾아내는 프로입니다. ‘복면 가왕’은 시청자들이 오직 가수의 노래만 듣고 평가했던 프로입니다. ‘팬텀 싱어’는 평소에 잘 들을 수 없었던 뮤지컬 배우들의 수준 높은 노래를 들었던 프로입니다.
본당에는 공적인 조직이 있습니다. 사목협의회를 중심으로 여러 분과가 있습니다. 분과에는 분과의 성격에 맞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전례, 구역, 교육, 사회사목, 선교, 청소년에 소속된 단체들이 많습니다. 본당의 사목은 전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례분과에 속한 단체들이 많습니다. 직원회의를 통해서 수도자와 사무실과 소통하기도 합니다. 사목회의를 통해서 사목을 기획하고 조정합니다. 요즘은 코로나19의 상황이라 모임과 소통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선행을 베풀거나, 도움을 주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대부분 말씀이 별로 없고, 행동도 요란하지 않습니다. 소년가장에게 장학금을 주던 분도 있었고, 독거노인에게 추석이나 설날이면 떡을 나눠주던 분도 있었습니다. 본당의 행사에 특히 청소년들의 행사에 남모르게 후원금을 주시던 분도 있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분들의 치아를 무료로 치료해 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마을의 정자에 있던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말은 없지만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을 알아보고, 이런 분들과 함께하는 것은 사제의 기쁨이며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신문사에도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함께 하시지 못하지만 오랫동안 구독료 봉투에 우표를 붙여 주시는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단순한 일이지만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어르신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코로나19가 지나가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고 싶습니다. 연말이면 신문사를 위해서 연금을 보내주시는 어르신도 있습니다. 신문에 좋은 글도 보내주시는 어르신입니다. 신문사의 크고 작은 일에 맥가이버처럼 도와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창틀도 고쳐 주시고, 지붕도 고쳐 주시고, 화장실도 고쳐 주시고, 냉장고에 얼음도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매주 본당 미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고, 어려운 일은 해결해 주시는 본당 신부님도 있습니다. 규모가 크지 않은 한인 공동체에도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사제들 도와주시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같은 분입니다. 예수님의 곁에서 도움을 주던 마리아, 수산나, 막달레나와 같은 분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교회는 제도(Institution)와 선포(Kerygma)가 같이 있어야 하느님백성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제도만 있고 선포가 없으면 빈 그릇이 될 것입니다. 선포만 있고 제도가 없으면 분열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율법이라는 ‘틀’에 갇혀있는 율법학자들에게 ‘선포’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조재형신부)
2020년 가해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바리사이의 초대>
복음: 루카 11,37-4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일종의 관습법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지목하는 이들이 바로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우리 안에 초대합니다. 말씀과 성체로 우리는 예수님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고도 바리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하나의 인격체로 초대한 것이 아니라 지식이나 율법으로 초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지식이나 율법은 인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 집에 초대해야 구원을 받는데 우리는 성체를 영하면서도 머리로만 초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리사이의 초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개신교 목사님 중의 한 분인 유기성 목사가 있습니다. 그분은 현재 ‘영성일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녁에 하루를 돌아보며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하지 못했던 때를 되돌아보고 뉘우치는 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운동을 펼치게 된 이유는 대부분 신도가 예수님을 바리사이처럼 초대하기에 삶의 변화가 없음을 본인 스스로 체험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기성 목사는 목사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목사가 되는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물론 교회 내에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렇게 목사가 되었고 군목으로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훈련 도중 다리에 중상을 입고 의사는 다리 절단 소견을 내렸습니다. 이때 그가 찾은 것은 하느님 아버지가 아닌 육체의 아버지였습니다. 수원에서 사목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좀 해달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매달렸습니다. 다리 절단 수술은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야 비로소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다리를 고쳐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하던 중 지난날의 죄를 깨닫고 눈물로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군 선교를 위해 군목으로 간다는 마음보다 마음속 진정한 동기는 사병보다 장교가 편하다는 마음에서였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군목의 특권으로 목사안수도 일찍 받고 유학도 다녀와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리를 고쳐달라는 기도가 점점 “이 오른쪽 다리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라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또 “이제 진짜 주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이 가라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그분은 ‘내가 바뀌고 있구나!’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두 번의 수술을 더 거쳐 다리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사람의 변화는 아는 것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십계명만으로 모두가 구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으로만 이뤄집니다. 우리에게 이 시간이 성찬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인격적으로 그분을 우리 집에 초대합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이웃의 잘못을 심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초대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초대했다면 나의 죄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남의 죄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처럼 머리로만 초대했다면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고 그 율법으로 이웃을 심판합니다.
‘자비의 예수님’을 환시로 보고 그림도 그렸던 성녀 파우스티나는 처음 수녀원에 들어가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녔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곳에서도 그녀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비의 성모 수녀회’에 갔을 때 원장 수녀님만은 달랐습니다.
“이 집의 주인님께 가서 자매님을 받아들이시겠느냐고 여쭈어보십시오.”
그녀는 곧바로 성당으로 가서 기도하였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받아들인다. 너는 내 마음 안에 있다.”
원장 수녀님은 “주님께서 당신을 받아주셨나요?”라고 물었고 그녀가 “예”라고 대답하자, 곧 “주님께서 받아주신다면 나 역시 받아들입니다” 하며 그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성녀가 되었습니다. 다른 수도회 원장 수녀들은 파우스티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수녀원에 예수님을 실제적으로는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초대했나요, 아니면 바리사이처럼 초대했나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삶의 변화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구원도 불가능합니다. 나를 바꾸는 것은 마음이지 머리가 아닙니다. 머리로 초대하지 말고 마음으로 초대합시다. 그러면 우리 마음 안에서 ‘탐욕과 악의’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웃을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자신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전삼용신부)
youtu.be/9lMko1FcER4
유튜브 묵상 동영상
2020년 10월 13일 화요일
[녹]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입당송
시편 130(129),3-4 참조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본기도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셨으니,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할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5,1-6
형제 여러분,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2 자, 나 바오로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3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다시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5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9(118),41.43.44.45.47.48(◎ 41 참조)
◎ 주님, 당신 자애가 저에게 이르게 하소서.
○ 주님, 당신 자애, 당신 구원이,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르게 하소서. ◎
○ 당신 법규에 희망을 두오니, 진리의 말씀을 제 입에서 결코 거두지 마소서. ◎
○ 저는 언제나 당신의 가르침을, 길이길이 지키오리다. ◎
○ 당신 규정을 따르기에, 저는 넓은 곳을 걸으오리다. ◎
○ 저는 당신 계명으로 기꺼워하고, 그 계명을 사랑하나이다. ◎
○ 사랑하는 당신 계명을 향해 두 손 쳐들고, 저는 당신 법령을 묵상하오리다. ◎
복음 환호송
히브 4,12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 알렐루야.
복음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37-41
그때에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와 예물을 받아들이시고
이 정성된 제사로 저희가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4(33),11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또는>
1요한 3,2 참조
주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노란 색안경을 끼면 세상이 다 노랗게 보이고, 파란 색안경을 끼면 세상이 다 파랗게 보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마음의 색안경을 하나씩 끼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성악을 하는 제 친구는 음악 이야기 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성악과 관련된 것에 무척 예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목소리, 가수들의 노랫소리 등에 다른 사람보다 더욱 관심을 두고 듣습니다. ‘음악’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는 바리사이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이는 바리사이가 낀 색안경과 예수님께서 끼신 색안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이라는 색안경을 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선이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악입니다. 그리하여 식사 자리에서 율법에 따라 손을 씻느냐의 여부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색안경을 끼셨습니다. 식탁에 그릇과 음식이 놓일 때 그분께서는 그 음식들을 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떠올리십니다. 마치 자식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볼 때마다 자식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음식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우리는 어떤 색안경을 끼고 살고 있습니까? 성찬의 식탁에 올려진 성체와 성혈을 사랑이라는 색안경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제사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