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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래인궁은 생년 천간이 좌하는 궁을 의미한다. 래인궁은 인생의 중심도로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된다. 래인궁을 좀더 쉽게 설명을 하면, 마을의 중심도로가 된다. 도시라면 시가지가 되고, 시골이라면 장이 서는 장터쯤으로 사람들 왕래가 많은 곳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곳에서 일이 발생한다면 그 여파가 클 것은 자명하다. 좁은 골목길에서 일어난 일은 소문이 안나거나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가 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의 사건 사고는 만인이 알게 된다. 래인궁은 그런 의미로 이해를 해야 자미두수 명반을 좀 더 빠른 시간에 이해하게 될 것이다.
◆ 태세궁은 대문이다. 내가 살아가는 길로 나가는 문이 된다. 태세궁은 래인궁은 반드시 6내궁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중심도로로 향해 나가는 대문이 태세궁이 된다. 태세궁은 래인궁과 함께 인생에 중요한 의미가 되는 이유는 태세궁은 반드시 지살그룹(지살 - 장성살 - 화개살)에 坐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명에 주도적인 일을 발생시키는 신살이 지살그룹이기 때문에 자미두수 상 명궁이 어디에 위치했든지 간에 지살그룹의 유년에는 내가 부각이 되고 주도적인 역할이 주어진다. 태세궁은 한 칸 건너 양 옆으로 상문 조객이 坐하게 되어 있다. 즉 사망과 관련되어 있는 상문 조객은 래인궁과도 연관이 된다는 의미이다. 누군가의 사망이나 후퇴가 나의 인생을 吉하거나 凶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래인궁선에 대한이나 유년이 坐하거나 래인궁선에 化祿이나 化忌가 坐해 있거나 入하여 궁선을 인동시킬 때 이슈가 되는 일들이 잘 발생한다. 유년 명궁이 래인궁선에 속한다는 것은 내가 그 해 동안 중심도로에 노출이 되어 이슈메이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작용은 대한에서 래인궁선에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경우에 속한다.
원세개는 중국어로는 '위안스카이' 이다.
중국의 군인 ·정치가이며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조선에 부임하여 국정을 간섭하고 일본, 러시아를 견제했다. 청일전쟁에 패한 뒤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켜 북양군벌의 기초를 마련하고 탄쓰퉁 등 개혁파를 배반하고 변법운동을 좌절시켰다. 이후 의화단의 난을 진압했으며 신해혁명 때 청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임시총통이 되었고, 이어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다.
위안스카이의 명반을 통해서 래인궁의 의미를 살펴보겠다.
위안스카이가 정권을 잡는 과정에 중요한 사건이 2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1898년 광서제가 주도하는 무술변법에 협조하는 듯 하다가 서태후에게 밀고하여 광서제의 뒤통수를 날리고 정권을 서태후에게 넘기는 공을 세워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두고 위안 스카이를 한간(漢奸 중국에서 적(敵)과 내통(內通)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 하고 그의 경력 가운데 가장 극적이면서 유명한 사건이다.
두번째는 초대 황제로 오르는 과정에서 장남 위안커딩은 황태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가 순천시보를 보고 칭제를 포기할까 우려하여 위안스카이를 위한 순천시보를 따로 조작하여 군주제 찬성 여론을 싣게 했다. 이른바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신문 사건'이다. 이것에 충격을 받아서 결국 황제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건강 악화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이 부분을 자미두수 명반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 래인궁 : 기사궁 (전택궁, 무곡生祿·自祿 파군, 천마 타라(절족사), 영성 조객 絶 坐)
▶ 래인궁선에 천상 좌보 문창生忌 천곡 임관 관부 지배 천무 坐
▶ 영창타무격은 사고조합으로 좌절, 수액, 자충수를 만든다.
祿忌沖 조합 - 흉의를 키워서 작사전도가 되게 함
▶ 자전선은 주거환경이 되고,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각종 변동 및 운이 막히고 트이는 상황을 관찰할 수 있다. 소인(小人 나에게 해를 가하려는 사람)의 궁선이기도 하다.
※ 자미두수 사화를 묶어서 보기만 하면 절대로 문제의 결과를 올바르게 예측할 수 없다. 이 명반은 래인궁에 무곡官權이 入하여 무곡生祿·官權으로 그가 무관武官인 군인으로 명예를 얻고, 세력확장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창타무격이라는 것에만 의미부여를 해서는 절대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다.
◆ 태세궁 : 신미궁 (노복궁, 천부 경양 화개 天月 天傷 死 관부 坐)
인생의 중심도로에 격국이 만들어지니 그의 성공에도 뒤통수가 있게 되고, 그의 멸망에도 뒤통수가 발생하게 된다.
35 을해대한은 래인궁선에 坐하는 대한이다.
▶ 運에서 오는 천상은 전권을 위임받는 자리가 된다. 누군가의 일의 진행을 위해 나의 노고를 바치는 運이다.
▶ 임관운에 들어서면 나의 운기가 향상되어가는 시기라 성공을 얻게 된다.
▶ 지배는 배후에서 다른 사람이 이런저런 비방이나 시비나 뒷말을 한다는 뜻이다. 지배와 과문제성(화과 문창 문곡 용지 봉각 등)이 동궁하면 이름이 높아 훼방을 초래하거나 재주가 높아 질투를 초래하는 등의 일이 있게 된다.
지배는 지살의 다른 이름이다. 내가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에 시비나 뒷말이 생기는 이치가 이런 것이다.
▶ 문곡生忌 용지 지배 좌보가 좌하니 서태후 측근인 영록대부에게 밀고하여 광서제의 뒤통수를 쳐서 광서제는 유폐를 당하게 되고 위안스카이는 서태후의 총애를 얻게 되었다.
1] 을해대한 사화의 작용
(1) 천기大祿과 태음大忌는 선천 명천선 / 대한 자전선에 入 기월조합은 록기충은 데미지적인 면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강하지 않다. 태음이 장(藏 감춤 저장)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천기화록은 기회와 계획에 영리함을 가져다 주고 태음화기의 숨어버리는 특성으로 인해서 오히려 뭔가 있는데 뭐라 말하기 애매하다... 라고 하는 일이 외부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되는 것이다. (선천 천이궁에 坐하였으므로)
(2) 천량大權은 선천 부관선 / 대한 부질선에 入하여 천량生科와 權科 조합을 이루면서 임명장의 권위가 높아지니 승급함이 이루어진다.
(3) 자미大科는 선천 부질선 / 대한 부관선에 入
승진과 관련된 부관선과 부질선에 모두 權과 科가 붙으니 이 대한에 권력 향상이 있게 된다.
2] 대한 5년차 39세 1898년 무술년, 소한 무술
▶ 유년과 소한이 동궁하면서 천간 戊土로 간여지동이 된다. 사건을 일으키기에는 강력한 파워가 몰려있는 유년이다.
▶ 거문궁에 入하면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暗적으로 진행하는 일을 하게 된다. 거문은 승부수를 뜨우는 星이다.
초선종악으로 흐르게 하는 星이므로 무술년에 본인이 저지른 행위를 만회하기 위한 의화단 진압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이 운이 길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태양官祿과 천량生科·大權의 길함이 거문의 흉한 면을 덮을 수 있게 된다.
▶ 제왕지에 있으면 돌발을 주하고 사건 사고를 만들기 쉽다.
▶ 선천 명궁과 녹존이 회조하는 명반이다. 생각보다 조심성과 진행 계획성이 꼼꼼한 사람이다.
▶ 탐랑年祿과 무곡生祿의 삼합으로 형노선(父의 부관선)이 인동되는데 살파랑 조합의 움직임이므로 거대한 변화가 윗사람의 관적인 부분에서 발생하게 되는데, 천기大祿·年忌 태음大忌·年祿으로 본인은 '밀고자'라는 역할로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다.
※ 실제 일어난 상황
1898년 광서제와 캉유웨이(강유위)가 주도하는 무술변법에 협조하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대부에게 이를 밀고하면서 뒤통수를 날려 변법개혁을 박살내고 수구파에게 정권을 넘기는데 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배신' 이것이 위안스카이가 한간(漢奸 중국(中國)에서 적(敵)과 내통(內通)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소리를 듣게 되는 시발점이자 경력 가운데 가장 극적이면서 유명한 사건이다. 이 결과 광서제는 유폐당하였고 나중에 서태후가 죽기 전날에 갑자기 죽었는데 2008년 광서제의 머리카락을 조사한 결과 다량의 비소가 발견되면서 독살로 밝혀졌다.
이후 서태후의 총애를 얻게 되었고, 1899년~1901년 의화단 사건 기간에는 의화단을 강력하게 진압하고 '동남자보'에 가담하여 세력을 거의 잃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리훙장의 뒤를 이어 더욱 출세를 타게 된다. 의화단 사건 당시 열강에 맞서 싸웠던 청군 장수들 대부분이 중앙정부에 있언 인물들이었고, 이들은 결국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때문에 이를 계기로 위안스카이는 권력에 한층 더 다가갔다. 한때 관도라 불리던 대쪽대신 천춘쉬안의 탄핵으로 날아갈 뻔 했으나 여론 조작과 사진 합성(!)을 통한 정적 모함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56 계유대한은 선천 부질선 / 子의 부관선
◆ 탐랑生권·自忌 자미子科 = 子의 부관선
▶ 탐랑은 야욕과 욕망의 별이니 權이 붙으면 욕망에 대한 강박이 심해진다. 자화기는 그런 욕망을 부추기기 위한 욕구를 이상하게 펼치게 되는 것이다. 權忌조합의 亡함이 이렇게 발동하게 된다.
▶ 대한의 시간적 공간에서 나의 야망이 자미성과 함께 최고가 되고자 하는 속셈이 드러나게 되고, 그것을 잘못된 방향으로 부추긴 아들로 인해서 패망하게 되었다.
1] 56 계유대한 자미子科 탐랑生權·大忌 상문 재살 衰 절공 궁에서
▶ 파군大祿은 래인궁에 入하여 자녀궁 문곡生忌 지배를 인동시킨다. 쇠지라는 빛바랜 무대에서 무곡生祿·官權으로 황제의 자리로 가기 위한 노력이 자녀궁의 '문곡生忌 지배'적 행위로 뒤에서 뒤통수 치는 일이 되는데 장남이 단 한 사람을 위한 신문을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 재살은 지살그룹의 반대그룹에 속하기 때문에 내가 주도권을 쥐기 쉽지 않은 운이며, 타인의 영향력에 의해서 발생한 일이 나의 일에 큰 영향력으로 오게 되어 있다.
▶ 절공은 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상당히 중요한 凶星이다. 자신이 가야할 길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절대로 바르게 걷질 못하고 '之' 갈지 자로 걷게 만드는 요상한 凶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 사망과 관련된 백호 상문살이 相對坐하니 충격을 받아 기력이 衰지면 질병이 악화되어 질 수 있는데 선천 질액궁에 속하므로 자신이 사망에 이를 수 있다.
2] 대한 3년차 58세 병진년, 소한 병진
▶ 유년과 소한이 동궁하면서 천간 丙火로 간여지동이 된다. 사건이 일어나기에 강력한 파워가 몰려있는 유년이다.
▶ 염정年忌와 탐랑大忌가 삼합으로 자전선 파군大祿 무곡生祿 문창生忌, 忌忌祿 / 忌忌忌 삼합사화로 아들의 신문사건이라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서, 身宮 천동官忌·年祿이 선천 재복선(身) / 대한 부질선 / 유년 명천선을 발동시키니 홧병이 되어 건강악화로 이어져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 실제 일어난 상황
모든 정적들을 물리치자, 위안스카이는 모든 중국 권력가들의 영원한 꿈인 황제가 되고 싶어 한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1일(음11.5 무자월 병자일) 국체를 논한다는 이유로 참정원을 소집하여 황제로 추대되었고 12월 12일에 이를 받아들이면서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측근들을 귀족으로 책봉하였으며 12월 31일에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정해서 초대 황제에 오르게 된다. 이를 홍헌제제라고 한다. 당시 어용 지식인들, 언론들 총동원해가면서 '제정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엄청나게 선전했다. 그러나 여러 강대국들, 주위 인물, 혁명파 학생들과 관리들, 민중들이 모두 위안스카이에게 등을 돌린다.
황제 등극 과정에서 엽기적인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른바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신문 사건이다.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 걱정한 부류가 둘 있었다. 하나는 황제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일반 사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측근들과 가족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차기 황제를 노리던 큰아들 위안커딩(袁克定)이 있었다. 큰 아들 위안커딩은 황태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가 순천시보를 보고 칭제를 포기할까 우려하여 위안스카이를 위한 순천시보를 따로 조작하여 군주제 찬성 여론을 싣게 했다. 이리하여 위안스카이 한 명만을 위해서 위조된 '위안커딩 특제 순천시보'가 위안스카이에게 계속 전해지게 되었고 위안스카이는 모든 여론이 자신의 즉위를 찬성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위안스카이의 딸 숙정이 자신이 좋아하던 잠두콩을 사오라고 여종에게 시켰다. 여종은 잠두콩을 순천시보에 싸서 왔는데 숙정은 아버지가 평소에 읽던 순천시보와 잠두콩을 포장할 때 쓴 순천시보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숙정은 위안스카이에게 이 사실을 고해 바쳤고 격노한 위안스카이가 다음날 위안커딩을 불러서 사실을 추궁했다. 위안커딩은 겁에 질려 사실을 털어놓으며 용서를 빌었고 위안스카이는 그 자리에서 위안커딩을 채찍으로 후려갈기고 아버지를 속이고 나라를 망친 놈이라고 크게 꾸짖었다. 당시의 위안스카이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무엇보다도 '단 한 명을 위해서 신문을 찍는다'라는 발상의 전환(!)이 정말 대단(대범?)했던 사건이다.
위안커딩은 끝까지 정신을 못차리고 제재를 취소해서는 안 된다고 상소를 올리며 징징댔으나 믿고 있던 안휘, 강소, 절강 지역의 장군들도 제재 취소를 요구하자 1916년 3월 22일에 위안스카이는 홍헌제제를 취소하고, 3월 23일에는 중화민국 대총통 자리로 복귀한다. 이는 군주가 '자의'로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한 유일무이한 사례였다. 허나 이미 민심은 위안스카이를 떠난 뒤였다.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을 시켜 난징회의를 개최, 중국의 안정을 명분으로 위안스카이가 총통 자리에 임시로라도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했으나 각성 대표들이 모두 위안스카이 하야를 요구하면서 개판이 되고 말았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실망 속에서 분노와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리위안훙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주라고 유언한 후 1916년 6월 6일에 요독증이 악화되어 급사하면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공화국 대통령과 제국 황제를 전부 경험한 지배자의 장례식답게 1916년 6월 28일의 장례식만큼은 황제의 예우를 받으며 성대하게 치러졌고 북양정부의 실력자들이 모두 참석했다. 아버지를 부추겼던 위안커딩은 장례 기간 내내 위안스카이의 시신 앞에서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 혜안's 자미두수의 통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