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남긴 흔적
김민자
새하얀 눈송이가 꽃잎처럼 흩어져 내리던 날, 망연히 창밖을 내다보
다가 알 수 없는 상념에 이끌리어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차창너머로 바라보이는 들판에는 빈 볏짚단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나
뒹굴고, 철 지난 여름 옷차림의 허수아비는 내습하는 동장군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다.
얼마쯤 지났을까? 고은 삼거리에 버스를 내려 눈쌓인 논두렁길을
걸었다. 내리는 눈을 그래도 받아 녹이고 있는 도랑물은 전에 없이
정겨운 속삭임으로 다가온다.
분이 언니도 이 도랑물같이 맑은 미소를 간직한 순수한 시인이었는
데, 그만 사랑하는 가족들과 정다운 이웃들을 뒤로한 채 황급하게 이
승을 떠났다. 오늘따라 그 언니가 그리워 먼 허공을 바라보지만 하늘
거리다 스러져 버리는 눈송이처럼 안타깝고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윤동주 시인도 이십 칠 세에 요절을 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구 년
동안 폐암으로 투병하면서도 비록 윤시인처럼 유명한 문인은 아니었지
만, 여백회 회원으로서 시를 쓰며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다가, 끝내
암 덩어리를 이겨내지 못한 채 사십 세 에 사랑했던 남편과 어린 두
남매를 남겨 놓고 떠나갔다.
발길은 어느새 분이 언니의 산소를 향하고 있었다. 그새 흩뿌리던
눈도 멎고, 묘지에 이르는 언덕길에는 누군가가 지나간 발자국이 선명
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 눈 오는 날 누가 이 한적한 곳을 지나갔을까?
발자국을 살피는 내 눈가엔 어느새 뜨거운 이슬이 맺혀 있다. 작은
발자국은 내 작은 녀석의 친구인 민경이 발자국인 것 같고, 조금 더
큰 운동화 자국은 내 큰 아들의 친구인 성훈이의 발자국임이 틀림없
다. 저만치 앞서간 커다란 구두 발자국은 그녀의 남편것이라고 생각
하니 갑자기 목에 메어 온다. 생전에 유난히 부부금실이 좋아 이웃들
로부터 마음껏 부러움을 샀던 비둘기 가족이었는데...
뒤에 남은 가족들은 하늘 가득이 내리는 눈을 보며, 아내와 어머니
의 품을 그리워 했을테고, 그 마음을 달래려 이곳을 찾았으리라. 어
머니의 자리와 아내의 자리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따뜻하고 아늑
한 자리가 아니던가.
그 누구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랑의 자리를 떠올리니, 나도 어린 시
절,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산소를 찾았던 기억이 새로워진다.
그렇게 흘려 보낸 시간들이 아련한 그리움이 되어, 이제는 내 가슴
속에 영원한 외로움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 아이들도 그러하리라.
어머니의 정이 그리울 때마다 이곳을 찾아 그 허전함을 채우려 할 것
이다.
자식이 부모를 그리워하면 할수록, 더욱더 커져만 가는 마음속의 공
헌은 쉽게 메꾸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세월이라는 묘약에 의지하다
보면 차츰 몸도 마음도 성숙해지면서 의연하고 당당하게 홀로서기도
할 수 있겠지.
끝없이 꼬리를 무는 상념속에 내 마음은 자꾸만 시려 온다. 저녁
하늘에 노을이 번지고 있다. 눈발을 밀어낸 늦겨울의 석양이 유난히
도 애상(哀傷)을 몰고 온다. 분이 언니가 내게서 멀어져 가듯 오늘
하루도 이렇게 내 생에서 지워지려 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왜 호수처럼 오래오래 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
을까... 그녀가 꽃상여에 누워 떠나던 날, 눈물이 앞을 가려 걸을 수
조차 없었는데, 오랜만에 묘소를 찾아와 보니 어느새 담담해진 자신이
얄밉게만 느껴진다.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내 가슴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그리
움으로 남아 있다. 깊어만 가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녀를 위해 문
우들과 함께 갔던 다래나무 아래의 주막집, 그곳에서 동동주를 마시며
“산중행복”에 취해 웃음의 메아리를 뿌리던 일들을 그녀는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또 우암산 자락에서 펼쳤던 자연과 문학의 향연은 어떠했던가. 그
녀가 그렇게도 열정을 쏟았던 문학론으로, 밤이 지새는 줄도 모르던
그 시절. 그 밤은 왜 그리도 짧게 느껴졌던지...
나와 손을 잡고 내려오면서 그녀는 한편의 즉흥시를 읊기도 했다.
숲이 나를 오라하여 그리고 갔다. / 다래나무 숲아래 가을은 걸쳐져
있었다. / 황혼의 붉은 빛이 나의 등을 밀어내듯이 / 가을은 그렇게
여름을 밀어내고 있었다. / 허기진 외로움을 / 한잔의 동동주로 달랠
수야 없겠지만 / 날다람쥐 벗을 삼아 한줄의 시를 읊어나 볼까.
그녀가 떠난 지금 이 시를 반추해보니, 그녀의 웃음 뒤에 감추어졌
던 아픔과 고뇌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 황혼의 붉은 빛이
나의 등을 밀어낸다는 구절은 세상을 떠날 때를 미리 알기라도 하듯
외로움에 많은 가슴앓이를 한 것 같다.
육신은 떠났지만 마음의 흔적은 시가 되어 남아있는 사람들의 가슴
을 촉촉히 적셔 준다. 인생의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것이
시라고 한다면, 흔적으로 남겨진 그녀의 마음들은 우리들 가슴속에 영
원한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시인이었기에 이미 세상을 떠
났어도 분이 언니는 시가 되어 우리 곁에서 그 향기를 풍기고 있는 것
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듯이, 문학인은 그 작품을 통
해 죽음이라는 망각의 지대에서도 영원히 살아남는 존재들인 것이다.
겨울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녀. 오늘처럼 눈오는 날이면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눈속을 걸었던 추억들이 스친다. 눈오는 날엔 영낙없이 나
를 불러내어 함께 걷기를 청하던 그녀, 머리에 소복히 쌓여가는 눈을
털어내기 조차 아까워하던 그녀는, 그대로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봉분위에 쌓인 눈을 한웅큼 쥐어 본다. 그녀의 머리에 쌓인 눈을
만지듯이... 이윽고 집에서 가지고 온 포도주를 가득 따라 그녀의 봉
분위에 부어주고 나도 한잔 마셨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어느새
술병은 비었고, 벌써 해는 서산을 넘는다. 눈 그친 西에는 제법 보
라빛 노을이 짙게 깔려있다.
사람은 짧은 인생을 살아도 천년을 사는 삶이 있는가 하면, 오래 산
다해도 가족이나 이웃에게 짐이 되는 삶도 있는 것이다. 그녀는 세상
을 떠나던 날까지도 주변 사람들에게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무던히
도 애를 썼다.
하얗게 눈 덮힌 분이 언니의 산소에서 그녀의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
며, 앞으로 내가 살아야 할 그림을 그려본다.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
인 인생사를 쓸쓸한 마음으로 다독이며, 터덜터덜 내려오는 등 뒤로
내 발자국이 하나 둘 나의 흔적이 되어 따라온다.
첫댓글 봉분위에 쌓인 눈을 한웅큼 쥐어 본다. 그녀의 머리에 쌓인 눈을 만지듯이... 이윽고 집에서 가지고 온 포도주를 가득 따라 그녀의 봉분위에 부어주고 나도 한잔 마셨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어느새 술병은 비었고, 벌써 해는 서산을 넘는다. 눈 그친 西에는 제법 보라빛 노을이 짙게 깔려있다.
내 동생이 떠난지도 25년이 되어 가는데 유고시집에 실렸던 글을 푸른솔 카페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김홍은 교수님께서
다시 올러주시니 감흡할 따름입니다 😍